|
작가란 누구이며 문학이란 무엇인가?
1. 모든 공부의 근본
손자(BC535년)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한다고 했습니다. 그 보다 60여년 뒤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대 스승이나 병법의 대가나 모두 “자신을 아는 일”을 공부의 근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문학공부도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란 누구인지, 자신을 아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00회는 수필작가들의 모임입니다. 작가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 입니까?
수필가로 등단하고 나면 동료문우들이 “선생”이란 호칭을 붙여 주는데 자신을 아는 공부를 비로소 시작한 학인(學人)이라 해야 바른 호칭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오늘 작가인 나 자신을 아는 공부를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작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2. 작가의 두 부류
1) 첫 번째 부류는 깨우친 선각자로서의 작가입니다.
작가란 자기가 깨우친 것을 문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깨우친 어떤 사람이 있어 다른 누군가에게 그걸 그대로 직설적으로 전하면 백이면 백 모두가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너무 친숙한 사이라서, 또 너무나 자신과 흡사하여서 경외심이나 흠모함이 아닌 반발심이 생기는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가 깨우침을 얻은 후 자기 고향에서 가르치실 제 “목수아들 주제에…"라며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례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런 거부감을 중화시켜서 수용자에게 소리 소문 없이 깨우침이 스며들도록 하려면 방편을 써야 합니다. 종교가는 방편으로 이적을 보여 줍니다. 이적의 신비함이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서 저절로 믿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문학가는 방편으로 문학적인 기법(스토리와 구성, 문체와 수사법)을 구사합니다. 문학적인 기법을 쓰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감동 감화되어 깨우침에 젖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세계 명작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게 바로 문학의 힘이자 사명이기도 합니다.
2) 다른 한 부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입니다.
이는 창작의 목적을 깨우침이 아니라 이야기를 생산하는데 두는 부류이지요. 사랑이야기, 전쟁이야기, 영웅이나 해적이야기 같은-. 이러한 이야기는 심심풀이 재미 위주로 창작해 내는 것이라서 그 속에는 진리나 깨우침 보다는 호기심이 담겨 있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아라비안나이트입니다. 심심한 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일 밤마다 다른 한편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어 들려주는 왕비처럼 인간의 무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스토리 생산에 주목적을 두는 것이지요. 다른 동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인간만이 지닌 이 상상력 때문에 사람은 이야기 속으로 끝임 없이 몰입하게 되지요. 물론 심심풀이용 이야기 속에도 깨우침이 완전 배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그 지향하는 바가 진리를 전하는 데 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3. 수필가는 어느 부류에 가까운가?
수필가는 자신과 자기 주변의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형상화 시키는 작가입니다. 한 사람의 생에서 감동적인 스토리가 흔치 않을뿐더러 그나마도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야하니 허구의 세계에서 무한 상상력을 휘둘러대는 이야기꾼류의 작가처럼 글을 쓰는 것은 예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첫 번째 수필집 정도는, 살아온 생의 의미 있는 반추를 통해 그런류의 작품을 발표할 수가 있겠지만 그 다음 부터는 이야기꺼리가 고갈되고 없으니 깨우침의 세계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글쓰기가 어려워집니다. 당연히 선각자류의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러려면 작가 자신이 먼저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깨우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의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에 관심조차도 갖지 않습니다.
4. 깨우침에 이르는 길
깨우침이란 우리의 의식이 몽매에서 밝음으로 터져 나와 감추어진 세계를 보는 능력입니다. 수필에서는 깨우침을 관조라고 합니다. 관조는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예술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깨우침에 이르는 방법은 자기마음을 궁구(사유)하는 길 뿐입니다. 일찍이 달마조사는 깨우침에 대해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짧지만 명료하게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심(人心)은 타인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고(거짓마음을 타파하고) 솔직하게 살펴서 그걸 통하여 타인의 마음, 곧 실연당한 이들의 마음, 가난한 이들의 마음, 상처받은 영혼들의 마음, 교만한 이들의 마음, 부자들의 마음, 권세가의 마음, 거래처와 고객의 마음, 자식의 마음, 아내의 마음, 부모의 마음, 부처의 마음, 예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인간의 오욕칠정은 물론 삼라만상 모든 생명, 무생명들의 행태와 존재 이유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참마음을 이해하면 모든 물성(物性)이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의미 곧 확철대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올바른 관조법입니다.
<물성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쓴 예시>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5. 문학적인 표현이란?
우리는 천지만물에서 누구도 듣지 못한 소리를 찾아내어서 글로 남기는 작가로서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글을 쓰기 이전에 먼저 깨우쳐야 하고, 깨우친 그것을 전하려는 열망이 있어야 하고, 전하는 방법도, 설교나 강의나 싸움의 방식이 아닌 문학적 표현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학적 표현"이란 언어의 함정에 빠질까 염려되어 문학적인 표현에 대해서 한 말씀 더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크게 감성과 이성으로 구별 됩니다. 감성은 휘발성이 강한 기름과 같아서 업(up) 다운(down)이 아주 심합니다. 감성에 치우치는 삶을 살면 마음에 바람이 들어서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 팔 할은 바람이었다.”고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걸 좋아라고 본받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그분의 참회이자 반성의 표현입니다. 반면에 이성은 냉정하여서 아주 논리적이고 분별적이고 차갑습니다. 이성만을 따라 살면 생명을 지닌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생의 환희와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성이 열고자 하는 세계는 깨우침(覺性)의 세계라서 아무나 쉽게 다다를 수가 없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각들은 후인들을 위하여 열심히 깨우침의 세계를 전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깨우침의 문이 열리면 열(悅)을 체험 합니다).
꽉 막힌 사람을 상대로 깨우침의 세계를 전하면서 사실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전하는 사람이 만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위대한 어른이거나 듣는 자가 깨우침에 간절히 목말라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아예 관심자체도 유도하지 못합니다.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흠 많은 작가가 오랜 고민과 사유 끝에 찾아낸 어떤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려면 거기에다 감성적인 테크닉을 입혀야 독자들이 따라오되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이끌려오는 것입니다. 깨우친 바가 잘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 “이성(깨우침)에다 감성의 옷을 입히는 테크닉” 이걸 우리는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는 기교이자 방편입니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앉혀두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손자에게 깨우침을 전하는 구비문학의 실 예입니다.
깨우침이 없이 오직 인간의 감정을 흔드는 기술과 기교만을 익혀서 사람의 영혼을 호리려는 자들을 역사와 현실에서 많이 봅니다. 선전선동을 일삼는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그러하고 사이비 종교가들이 그러하고 <봉구황(鳳求凰)>을 쓴 부(賦)의 천재작가 사마상여가 그런 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탁왕손의 딸인 탁문군이 한방에 뿅 가서 둘이 야반도주해버렸습니다. 후에 사마상여가 첩을 거느리자 그녀는《백두음, 白頭吟》이란 시를 지어 사마상여에게 주게 됩니다. 별첨). 또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권총자살을 하였다 합니다.
6. 수필작가가 나아 갈 방향
사마상여나 괴테처럼 되고 싶어 하는 작가들이 많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건 문학적인 기교를 그릇되게 사용하는 “영적인 사기꾼”이라고 해야 합니다. 참 작가(참 사람)는 인간의 영성을 고양하되 그가 더욱 잘되도록 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시냇가에 심은 버드나무가 푸르되 더욱 푸르게 자라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성이 감성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아서 이끌고 가야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이나 영원히 읽혀질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다면 깨우침의 경지를 전하는 선각자 유의 글(예: 부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토지 같은 글)을 써야 할 것이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이야기꾼 유(類)의 글(예: 해리포터, 삼국지, 수호지, 금병매, 슈퍼맨 같은 이야기)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수필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태생적으로 후자의 길을 걷기가 어렵습니다. 또 생업에 종사하는 필남필녀에 불과한 우리가 너무 선각자적인 글에 골몰하는 것도 비웃음을 살 공산이 큽니다. 때문에 구도자가 아닌 일반의 사람이 좋은 수필가가 되는 길은 일상의 삶에서 깨우침을 얻은 후 삶의 경륜에서 묻어나는 깨우침을 전하는 글(감춰진 진리, 가치 있는 인생관, 인간의 정서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서정이나 서사 같은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되 만인이 깊이 공감하도록(가볍게 가 아닙니다) 쓰는 길 뿐입니다. 이건 생활인 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수필작가들의 운명입니다.
7. 맺는 말
이상의 제 발표를 다시 요약하면 작가에게 문학이란, 철학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깨우침(관조를 통해 찾아낸 새로운 세계)이 본질이며, 그 깨우친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거부반응 없이 자기 것으로 수용하게 하는 수단이 곧 문학이란 것입니다. 결국 작가란 "자기가 본 깨우침의 세계를 문학적인 기교를 써서 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이 사람의 발표가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란 누구인지, 또 수필은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하는지를 공부하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길 바라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별첨>(문학적인 기법을 써서 상대방의 영혼을 호리는 시)
鳳求凰(봉구황)/사마상여
鳳兮鳳兮歸故鄕 (봉혜봉혜귀고향) 봉(鳳)아, 봉아, 고향에 돌아왔구나!
翺遊四海求其凰 (고유사해구기황) 사해에서 황을 찾으려 떠돌았건만
時未遇兮無所將 (시미우혜무소장) 이제까지 그 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何悟今夕升斯堂 (하오금석승사당) 오늘밤에 이 마루에 올라 만나게 되었네.
有艶淑女在閨房 (유염숙녀재규방) 아리따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
室邇人遐毒我腸 (실이인하독아장) 방은 지척인데 당신은 멀리 있는 듯하니 독배를 마신 듯 애 간장이 다 녹네
何緣交頸爲鴛鴦 (하연교경위원앙) 어찌해야 원앙처럼 목을 서로 비빌꼬.
胡頡頏兮共翺翔 (호힐항혜공고상) 함께 하늘 저 높이 날고 싶으니
鳳兮鳳兮從我棲 (봉혜봉혜종아서) 봉(鳳)아, 봉아, 나를 따르렴.
得托孳尾永爲妃 (득탁자미영위비) 오래오래 왕비처럼 사랑해 줄 터이니
交情通體心和諧 (교정통체심화해) 정을 나누고 몸을 통하여 마음을 화합하자
中夜相從知者誰 (중야상종지자수) 깊은 밤 서로 따르며 알아줄 이 누구던가
雙翼俱起飜高飛 (쌍익구기번고비) 우리 둘이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오르면
無感我思使於悲 (무감아사사어비) 나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네.
*줄친 부분은 직접적인 성행위에 가까운 묘사임.
(문학적인 기법으로 상대방에게 깨우침을 주는 시)
白頭吟 (백두음)/탁문군
皚如山上雪 (애여산상설) 내 마음이 희기는 산 위의 눈과 같고
皎若雲間月 (교약운간월) 내 마음의 밝기는 구름 사이의 달과 같네.
聞君有兩意 (문군유량의) 듣자니, 그대 두 맘이 있다 하여
故來相訣絶 (고래상결절) 일부러 와서 이별을 고하려 하오.
今日斗酒會 (금일두주회) 오늘은 말술을 마시며 모였지만
明旦溝水頭 (명단구수두) 내일 아침엔 해자에서 헤어지오
涉蹀御溝上 (섭접어구상) 해자 다리를 건너 나아가면
溝水東西流 (구수동서류) 도랑물은 동과 서로 나뉘어 흐르고
凄凄復凄凄 (처처복처처) 내 신세 또한 처량하고 또 처량하겠지만
嫁娶不須啼 (가취불수제) 내가 좋아 시집을 왔으니 울지 않으리라.
願得一心人 (원득일심인) 원하여 한사람의 마음을 얻었으면
白頭不相離 (백두불상리) 백발이 되도록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竹竿何嫋嫋 (죽간하뇨뇨) 낚싯대는 어찌 그리 하늘하늘 하고
魚尾何娑娑 (어미하사사) 물고기 꼬리는 어찌 그리 간들간들 거리는가.
男兒重意氣 (남아중의기) 남자는 의기가 중한데
何用錢刀爲 (하용전도위) 어째서 돈에 팔리어 가는가.
* 밑줄 친 부분은 순 사기꾼 난봉쟁이라며 비판하는 것임.
# 위 두 시는 인터넷에서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