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죽어 있었다.
고무보트가 선체에 닿는 순간, 강준혁은 그것을 느꼈다. 진동이 없었다. 엔진 소리도, 발전기 소음도, 사람의 발소리도. 180만 배럴을 실을 수 있는 강철 구조물이 — 길이 330미터, 무게 30만 톤이 넘는 — 완전한 침묵 속에 떠 있었다.
현문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 그는 손전등 하나만 들고 있었다. 권총은 없었다. IMO 조사관에게 무기 휴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규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규정이 누군가의 계산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갑판에 올라섰다.
손전등 빛이 좌현을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현을 훑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선수 쪽 방향, 갑판 중앙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서류 가방.
잠금장치도 없이, 반쯤 열린 채로.
강준혁은 천천히 다가갔다. 무릎을 꿇었다. 손전등을 들이댔다.
가방 안에는 서류 묶음 하나와 USB 드라이브 하나. 그리고 명함 한 장.
명함에는 이름이 없었다. 직함만 있었다.
*세계의 관리자 (The Custodian of the World)*
그 아래, 손으로 쓴 한 줄.
*1층 화물창 C-7. 혼자 오시오.*
화물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열두 개였다. 강준혁은 하나씩 세며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숫자를 세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공포를 억누르는 방식. 국정원 교육 시절 배운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정전이 잦던 부산의 골목에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다.
열두 번째 계단.
C-7 화물창의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손잡이를 당겼다.
냄새가 먼저였다. 원유가 아니었다. 금속과 전자장비 특유의 서늘한 냄새. 그리고 빛. 화물창 안에 발전기가 돌고 있었다. 독립 전원. 배 전체의 전력과 분리된 별도 시스템.
빛 아래,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60대 중반. 흰 머리. 양복은 구겨졌지만 넥타이는 단정하게 매여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다가 강준혁이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왔군요." 그가 한국어로 말했다.
강준혁은 멈췄다.
"누구십니까."
"앉으시죠." 남자는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동이 트기 전에 끝내야 해요."
"대답하지 않으면 앉지 않습니다."
남자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박성태입니다. 전직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현재는—" 그가 손전등 빛을 피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강준혁은 앉았다.
박성태는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줬다. 스프레드시트였다. 숫자들이 빼곡했다. 계좌번호, 날짜, 금액, 그리고 수신자 코드명.
"오릭스 캐피탈을 추적했군요." 박성태가 말했다.
"그리고 코사르 펀드까지."
"코사르 펀드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했다. "이 돈의 흐름을 보십시오. 이란에서 시작해서 케이맨을 거쳐 싱가포르로 갑니다. 싱가포르에서 다시 두바이. 두바이에서 런던. 그리고 런던에서—"
그가 멈췄다.
"어디입니까." 강준혁이 물었다.
"워싱턴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화물창 안 발전기 소리만 낮게 울렸다.
"루비오 장관의 발언이 나오기 72시간 전." 박성태가 계속했다. "이 계좌에서 마지막 송금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신자는 미국 내 특정 싱크탱크. 그 싱크탱크는 지난 두 달간 논문 세 편을 발표했습니다. 주제는 모두 같아요."
"호르무즈에서 미국의 역할 축소."
박성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을 물러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에 이 배를 세워두는 것이 두 번째."
강준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누가 설계했습니까."
박성태는 대답하는 대신 USB 드라이브를 내밀었다.
"이 안에 있습니다. 14개국, 37명. 이란인도 있고 미국인도 있고—" 그가 잠깐 멈췄다. "한국인도 있습니다."
강준혁은 USB를 받지 않았다.
"왜 나입니까." 그가 물었다. "IMO 조사관에게 이것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박성태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자료를 갖고 있던 사람이 저 포함 네 명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두 명은 이미 사고로 죽었고, 한 명은 사흘 전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는 창 없는 화물창 벽을 바라봤다. "저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 온 겁니다."
"국가정보원에 넘기지 않은 이유는요."
"이미 시도했습니다." 그가 짧게 웃었다. "37명 중에 한국인이 있다고 했죠. 그 한국인이 어느 조직 소속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강준혁은 USB를 바라봤다. 작고 검은 물체. 그 안에 14개국의 비밀이 들어있다면, 그것을 받는 순간 그는 표적이 된다. IMO 조사관 신분은 아무런 방어막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내밀었다.
받았다.
"이 배에서 나가는 방법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박성태가 일어섰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이 배에 남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자료를 세상에 꺼내는 순간, 저는 IMO와 UN 해사위원회에 자수합니다. 공개 증언을 하겠습니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강준혁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대신 제 가족을 지켜주십시오."
강준혁이 고무보트로 돌아왔을 때,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만 경비정에 올라서자 무선기가 즉시 울렸다. 미국 제5함대 연락장교였다.
"상황을 보고하시오."
강준혁은 잠시 멈췄다. USB가 주머니 안에 있었다. 37명의 이름. 14개국의 계좌. 그리고 루비오의 발언을 설계한 자들의 흔적.
그는 무선기를 들었다.
"배 안에 사람 한 명이 있습니다. 자수 의사가 있습니다. IMO 규정에 따라 신변 보호를 요청합니다."
"배 안의 화물은요."
"원유입니다." 강준혁이 말했다. "원유뿐입니다."
무선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확인했습니다."
강준혁은 무선기를 내려놓았다. 경비정 선수에 서서 다시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르테미스 선*이 이른 아침 빛 속에 거대한 실루엣으로 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 USB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세계의 비밀은 이렇게 생겼다. 작고, 차갑고, 아무 무게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그것을 쥔 손은 무거웠다. 이것을 어디에 가져가야 하는가. 누구에게 건네야 하는가. 세상에 꺼내놓는다면 무엇이 바뀌고, 무엇은 바뀌지 않는가.
루비오는 "각국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강준혁이 지금 손에 쥔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 자들의 기록이었다.
호르무즈의 새벽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폭풍 직전의 수면이었다. 세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해협 한복판의 배 안에서, 누군가 37명의 이름을 한 조사관의 손에 쥐여줬다는 것을.
강준혁은 위성전화를 꺼냈다.
전화를 걸었다. 런던. IMO 본부. 사무총장 직통 번호.
신호가 갔다. 연결이 됐다.
"저입니다." 그가 말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길고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호르무즈의 해수면이 붉게 물들었다. 세계 원유의 5분의 1이 흐르는 해협이, 이 아침만큼은 핏빛으로 빛났다.
USB의 내용은 결국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왔지만 들리지 않았다.
강준혁은 IMO 보고서를 제출했다. UN 해사위원회는 비공개 청문회를 열었다. 박성태는 공개 증언을 했다.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사흘 후, 더 큰 뉴스가 터졌다. 다른 나라의, 다른 위기가. 세계의 시선은 이동했다.
37명 중 기소된 사람은 셋이었다. 모두 이름 없는 중간 브로커들이었다.
강준혁은 런던 사무실 창가에 앉아 템스강을 내려다봤다. 손에는 역시 식은 커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의 무게는 예전과 달랐다.
그의 책상 위에 새 봉투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발신자 없음. 내용물은 위성사진 한 장.
이번에는 호르무즈가 아니었다.
말라카 해협이었다.
그리고 메모 한 줄.
*세계의 다음 목줄을 보라.*
강준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었다. 그러나 내려놓지 않았다.
창밖으로 런던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