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꽃
장미숙
바람이 푸른색 붓질을 하는 저수지 둑 위를 걷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파릇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여린 풀들이 낯선 이의 방문에 깜짝 놀랐는지, 키를 낮추고 귀를 쫑긋 세운다.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빛, 그 가운데서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낀다. 탐욕과 조급한 삶에 찌들어 있던 마음을 새뜻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속이 환해진다.
가까운 듯, 먼 듯 다가오는 마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의 방향은 한결같다. 마을 뒷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동그란 마을을 겨르로이 돌고 도는 바람결에는 수많은 소리가 섞여 있다. 그 소리를 따라 내 마음은 바람의 뒤꽁무니를 쫓아간다.
마을을 품고 있던 바람은 곡식보다 산야초를 먼저 살찌웠다. 보릿고개를 피해갈 수 없었던 애옥한 살림은 굴뚝의 연기마저 마르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봄이 한없이 길었고, 여름은 더디 왔다. 환한 봄날, 부드러운 햇살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야 할 아이들은 비쓸했고, 살갗에는 마른버짐이 곰팡이처럼 번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에 입속이 까끌까끌해지고, 뒤가 찢겨도 곡식은 여물 줄 모르고, 논둑에는 풀들만 무성했다.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논둑 밭둑에 쑥이 오보록 돋아나면 삐비의 새순이 고개를 쏙 내밀고 세상 구경을 했다. 사람도 골골한 계절에 여린 잎은 어디서 힘이 나는지 짙은 향을 머금고 자기들끼리 찬란했다. 장소가 어디든 흙이 있고, 햇살 드리운 곳이라면 뿌리 내리는 걸 마다치 않았다. 흙 속에 묻힌 뿌리는 뿌리대로,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천진난만 쑥쑥 자라났다.
뽑히고, 뜯겨나갈 아픔에 대한 걱정은 사람의 것이었다. 이해타산과 기회주의에 젖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웃듯,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군락지(群落地)를 넓혀갔다. 오염되지 않은 산야라면 어느 곳이든 줄기를 뻗었다. 땅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다른 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작은 몸으로 세상에 아낌없이 푸른빛을 보탰다.
빈 쌀독 긁는 소리 요란할수록 아이들의 배곯는 소리도 요란했다. 하지만 채 펴지도 않은 보리는 빳빳한 줄기에 힘만 들어가 어른들의 탄식을 부채질했다. 뒤주에 남아 있던 비틀어진 고구마도 바닥이면, 어른들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종자(種子)로 쓰려던 씬나락(볍씨)까지 손대야 할 때 봄은 한없이 긴 계절이었다.
삐비는 속살을 안으로 키우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바람결을 품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노래를 불렀다. 삐비의 노래는 배고픔에 축 처져 있던 아이들의 엉덩이를 가뿐히 올려 주었다. 아이들은 논틀밭틀, 저수지 둑으로 달음질을 쳤다.
삐비가 제대로 여문 날, 마을은 향기로 가득 찼다. 와글와글, 시끌벅적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기다란 이파리 속에 숨은 새순을 쏙 뽑아 올리면 “삐비비!” 새 울음 같은 청량한 소리가 났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반짝 붉은 기가 돌았고, 입속에서는 단내가 났다. 웃음소리로 마을이 떠들썩했다. 언니, 누나, 오빠, 동생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많고 많은 풀 중에 삐비는 특별히 정이 많은 풀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제 몸을 보시(布施)하는 삐비의 거룩한 희생으로 봄철 아이들은 외롭지 않았다. 배가 고팠을지언정 마음은 고프지 않았다. 야윈 엉덩이를 곧추세우며 삐비를 뽑던 날, 아이들은 꿈을 꾸었다. 하얗게 피어난 삐비꽃이 되어 온 들판을 빙빙 돌며 춤을 추는 꿈속에서 아이들은 행복했다. 무엇이 그토록 아이들을 흥그럽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삐비를 뽑는 건 일종의 놀이였고 자연과의 상생(相生)이었다. 아니, 상생이 아닌, 자연의 미덕(美德)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삐비는 스스로 번식해 스스로 자라며 인간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애순을 잃어버려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과의 놀이에 푹 빠져 생의 노래를 부르니, 단연코 들녘의 낭만초(草)로는 으뜸이었다.
삐비가 가진 미덕의 온전함은 메마른 감성을 일깨워주는 데 있었다.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추는 것이 세상에 있던가. 혼자 자라고 혼자 익어가는 것이 세상에 있던가. 바람이 꽃잎을 흔들고, 나무를 흔들고, 온기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듯, 세상 이치의 본질은 조화로움에 있다는 것을 삐비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꽃이 될 순(筍)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삐비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질긴 생명력은 뿌리로 이어졌다. 가을이면 어른들은 산야에 지천이던 삐비 뿌리를 캐서 약으로 사용했다. 양약보다 민간요법에 의지하며 살던 시대여서 자연으로부터 치료법을 구하기에 힘썼다.
애순을 간직한 채 온전히 자란 삐비는 때가 되면 송이송이 깃털 같은 하얀 꽃을 피워냈다. 무리지어 피어난 삐비꽃은 바람원고지에 온몸으로 시를 썼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을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던 꽃이었다. 소박하고 순수했던 날들을 채색해준 삐비는 아이들이 크고 고향을 떠나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목마른 갈증으로 도시를 꿈꿀 때는 동경하던 세상이 가까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갈증은 또 다른 갈증을 부르고 욕심은 또 다른 욕심으로 채워지는 사이, 어느덧 인생의 봄과 여름은 지나버렸다. 언제 푸른 잎이 찬란했는지 언제 꽃이 피었는지도 모르니 야무진 열매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허무함은 수시로 찾아오는 마음의 병이 되었다.
후회와 원망의 뿌리가 깊어 여유를 잃어버린 팍팍한 삶은 이제라도 자신을 찾으라고 부추기건만, 도대체 잃어버린 삶의 한쪽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인생 퍼즐을 꿰맞춰 봐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은 내가 누군지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지게 한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건, 삶의 원형(原形)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 그 시절로 마음을 돌려 찌들어버린 삶을 설거지하고 싶었다. 그곳에 삐비꽃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저수지 둑에, 오로지 오염되지 않은 그 땅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삐비꽃,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를…. 더 늦기 전에 남아있는 감성을 흔들어 깨워 인생의 쭉정이나마 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삐비꽃을 가만가만 불러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