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년~1855년)
1. 실존주의의 선구자, 키에르케고르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ören Aabye Kierkegaard). 그는 '삶이란 돌발적인 비약과 질적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의 심연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보편성과 추상적 사유에 얽매여 있던 플라톤 철학적 전통 속에서 이러한 사유를 펼치는 그의 철학은 훗날 실존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30살에 처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시작으로 <공포의 전율>,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이러한 저서들은 당대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사회가 세상의 부조리성과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불안', '고통' 등의 개념이 주목받게 되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가 선구적으로 연구해 놓은 '불안', '고통' 등에 대한 내용들, 특히 그 중에서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사상이 세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은 좋은 친구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의 내용 일부를 아주 간략하게만 살펴 봄으로써 그의 사상의 한 단면을 맛보고자 한다.
2. 죽음에 이르는 병
"인간은 유한한 실존을 누리면서 무한한 자기 확장을 원하나 좌절에 부딪친다. 이때 인간은 절망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1부에서 실존하는 개인이 겪어야 하는 '절망'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인간의 절망은 보편성을 담지한 객관적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 내면의 심리 작용에 대한 표현인 바, 내적 진리 또는 주관적 진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의 세계가 외부 지식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을 통한 객관적 진리의 확인이라고 하는 기존의 임무를 내려 놓고 인간 내면에서 움직이는 주관적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그의 이런 주장은 플라톤 전통의 기존 서양 철학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객관적 진리에서 주관적 진리로의 이행.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가진 철학적 진리의 기본 입장이었다. 어쨌든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이 육신의 병을 품고 살 듯이 실존하는 모든 개인 역시 절망이라는 정신의 병을 품고 산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이유로 실존하는 개인에게 이러한 정신적 아픔이 있다고 본 것일까? 인간은 유한한 실존을 누리는 존재이다. 여기서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이 영원의 드라마를 꿈꿀 수는 있어도 그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은 될 수 없는 운명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신체를 가지고 살면서 무한한 자기 확장을 꿈꾼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집에 있으면서도 화와이에 있기를 꿈꾸며(공간상의 확장), 내일 세상을 떠날 상태이면서도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에 빠진다(시간상의 확장). 인간은 이처럼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의 대립 구조 속에서 갈등하며, 이 대립적 항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키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한한 가운데 무한한 자기 확장을 꿈꾸면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간에 제약되어 있는 자기, 필연성에 얽매여 있는 자기를 넘어 자유롭고 영원한 자기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존재. 그러나 그 존재는 곧 유한한 상황과 유한한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며 이때마다 유한성의 결핍에서 오는 '무한성의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다시 유한한 현실에서 사실적인 삶에 몰두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무한성의 결핍에서 오는 '유한성의 절망'에 빠진다. 따라서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절망이라는 병을 앓는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보고 있는 것이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려고 하는 절망'과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면서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은 절망의 상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을 때 일어나는 보다 더 심각한 절망의 상태에 대한 구분인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려고 하는 절망'과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이 그것이다. 앞의 것은 절망의 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창조적 주체로서의 자기를 포기하려는 절망이고, 뒤의 것은 자신의 절망을 절대화 하여 그 절망에 머무려는 절망이다. 앞의 것이 실존적 자살을 뜻한다면 뒤의 것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외적 자극, 또는 신과의 관계 등을 일체 부정하는 반항적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절망의 여러 양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죄로서의 절망'이라고 하였다. 본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죄악관을 가지고 절망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그에게 죄란 신에 의하여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절망의 상태에 있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키에르케고르에게 가장 심각한 절망, 즉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에 대한 의지인 것이다.
'절망이 의식의 차원에서 의지의 차원으로 비약할 때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순한 의미에서 '절망'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절망은 유한한 실존자에게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며, 누구나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절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 즉 절망에 빠져 있으려는 그 의지가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에 빠진 실존자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과 관계하고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의지 속에서, 자기를 설정한 힘 안에 투철하게 자기를 근거지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절망에 대한 최종 극복 방안은 유한한 자아가 가진 절망에서 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앙으로의 도약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말한다.
'신앙으로도 절망은 계속된다. 하지만 절망을 짊어지고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유한한 실존자의 무한에 대한 갈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절망. 이것은 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그 자체로 해소되는 문제는 아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실존적 절망은 실존의 구조에 있는 본질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의 힘을 빌려도 인간은 유한한 방식으로 실존하는 한 절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자기를 신의 무한한 가능성 안에 설정하고 근거 지우는 자는 자기의 절망을 짊어지고 견딜 수 있는 희망과 용기,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신앙의 힘을 빌려 유한한 실존자의 절망을 이겨내려는 키에르케고르의 전략. 그의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절망이라는 것을 인간이 신앙을 만나게 하는 계기로 만든다. 만약 인간이 무한하며 자기 확장이 영원히 가능하다면 절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까? 그리고 인간에게 신은 과연 필요한 존재였을까? 결국 절망을 느끼는 실존자가 이를 이겨 내기 위해 신의 무한성 안에서 자신을 설정하고 근거 지울 때 유한한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한한 자아로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대결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 시킨다. 절망과의 올바른 대결 방법. 키에르케고르는 이 방법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교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전략은 성공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당시에는 데카르트 이래 정립된 합리주의 사상과, 종교와 예술 및 국가를 융합 시킨 헤겔 철학이 큰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기독교 역시도 거시적 논리에 매몰되어 원시 신앙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이러한 기독교는 너무나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거시 논리 보다는 '개인'이라는 표현으로 이해되는 실존자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봄으로써 사람에게 필요한 참된 논리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도 개인 각자가 '자기의 원시성'에 눈을 뜨고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의 이러한 요구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홀로 서 있는 외톨이가 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신 앞에 홀로 선 존재. 그 존재가 자신의 절망과 올바르게 맞서기 위해 신의 무한성을 의식하려는 결단을 하는 것. 이 신앙적 결단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라고 말했던 그의 실존주의적 전략은 오늘날 성공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글을 읽는 각자가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