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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선생의 후손 국회의장 정의화 (鄭義和)
* 포은 정몽주선생은 충절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신 어른이기도하나 보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열고자 올바른 인간정신을 영도하여 주신 어른이시라는 점까지 아시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는 퇴계 율곡 등 같은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기틀을 닦아 우리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일께우신 이 나라 최초의 도학이존(道學至尊)이신 때문이다.
이는 조선 500년동안 박제(剝製)시킨 충신으로서만 묶어 겨우 고려충신의 본보기에 그친 지난 역사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날이 밝은지 백년이 넘습니다. 이제 포은의 후손 중에서 선생이 못다 푼 의로운 정신과 화합의 도학(義和)을 실천 하게 될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름은 정의화입니다.
소년시절
앞으로는 호수처럼 잔잔한 진해만의 쪽빛 바다가 넘실대고, 뒤로는 우뚝 솟은 천자봉이 당당하게 그 위용을 뽐내는 반농반어의 작은 시골 마을인 경남 창원군 웅동면 소사리(현재 진해시 편입), 1948년 쥐띠 해 동짓(쥐)달,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쥐시)에 웅동중학교 교장 사택에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밤을 깨우고 있었다. 정의화의원은 당시 웅동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고 계시던 정윤호 선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탯줄은 아버님이 끊는 물에 소독한 가위로 손수 끊으 셨다고 한다.
의로울 의(義)와 화목할 화(和)라는 이름은 할아버님 초산(樵山) 정순용 옹이 올곧고 화합하여 살라는 뜻에서 주셨다.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18대손인 정순용 옹은 약관의 나이인 16세에 영남의 고시에 장원을 한 한학자이며, 스무 살 때 경남 양산군수로 제수되었으나 일제의 단발령을 거부하고 오지인 영산(靈山)으로 피신한 선비였다고 한다. 정순용 옹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서당을 열어 후학 을 가르쳤고, 한편으로 한의학을 익혀 널리 인술을 펴기도 한 분이다.
부산 건국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아버님을 따라 처음 부산 땅을 밟은 게 1955년 여름이었다. 1학년 첫학기를 웅동초 등학교에서 보낸 후 바로 부산 중앙초등학교에 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이사하고 첫 둥지를 튼 보금자리는 부산 동구 수정동이었다.
3.15부정선거에서도 불 수 있듯이 당시 제1공화국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교육계의 부조리에 참다 못한 정윤호 선생은 6년간의 건국중학교 교장직을 그만 두고 59년부터 선친의 뜻을 이어 한약방을 열게 된다.
청년시절
입이 약간 삐뚤어져 친구들로부터 입비뚜루미라고 놀림도 받곤 한 그는 머슴애들 하고 진탕 뛰어놀기는 잘했어도 수줍음이 많아 여자 앞에 서기만 해도 두근거려서 대책이 없었다고 하는데, 김남희 여사를 만나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내가 한술 더 뜬 숙맥이었다고 얘기한다.
정의원이 첫 아이를 가진 것은 1979년 선진의료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있을 때였다. 뉴욕대학병원 의사 시절, 워낙 약한 체질이었던 김남희 여사가 3번의 유산 끝에 그것도 6년만에 팔삭둥이로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다.
속지주의에 의해 미국 시민권자가 된 아들 연학군은 중학교2학년때 청운의 꿈을 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의 브랜다이즈 대학을 졸업했다. 장남의 병역문제로 선거 때마다 흑색선전으로 곤욕을 당한 정의원은 아들이 귀국하면 학업으로 연기해둔 병역의 의무를 마치겠다고 하였는데 현재 연학군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공익요원으로 2년 2개월동안 근무했다. 둘째 아들 연화군은 형이 디스크 판정을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데다 본인마저 같은 사유로 공익판정이 나오자 ‘몸에 이상이 생겨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쓰고 현역입대를 강행, 육군 9사단 백마부대 에서 현역 복무를 마쳤다.
가정과 자녀
입이 약간 삐뚤어져 친구들로부터 입비뚜루미라고 놀림도 받곤 한 그는 머슴애들 하고 진탕 뛰어놀기는 잘했어도 수줍음이 많아 여자 앞에 서기만 해도 두근거려서 대책이 없었다고 하는데, 김남희 여사를 만나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내가 한술 더 뜬 숙맥이었다고 얘기한다.
정의원이 첫 아이를 가진 것은 1979년 선진의료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있을 때였다. 뉴욕대학병원 의사 시절, 워낙 약한 체질이었던 김남희 여사가 3번의 유산 끝에 그것도 6년만에 팔삭둥이로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다.
속지주의에 의해 미국 시민권자가 된 아들 연학군은 중학교2학년때 청운의 꿈을 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의 브랜다이즈 대학을 졸업했다. 장남의 병역문제로 선거 때마다 흑색선전으로 곤욕을 당한 정의원은 아들이 귀국하면 학업으로 연기해둔 병역의 의무를 마치겠다고 하였는데 현재 연학군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공익요원으로 2년 2개월동안 근무했다. 둘째 아들 연화군은 형이 디스크 판정을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된데다 본인마저 같은 사유로 공익판정이 나오자 ‘몸에 이상이 생겨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쓰고 현역입대를 강행, 육군 9사단 백마부대 에서 현역 복무를 마쳤다.
의사로서 직업인 정의화
1981년 3년만에 귀국하여 1985년 봉생 신경외과를 종합병원으로 확장하고, 1990년에는 종합병원 동래봉생병원을 개원하기까 지 직원 60여명 80병상에 불과했던 봉생병원을 직원 900명 800병상의 2개 종합병원으로 키워나간 것은 CEO로서 정의원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일이었다.
미세 뇌혈관수술의 대가(大家)로 대한 신경외과학계에서 첨단 수술의 하나인 안면경련증, 뇌동맥류 수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74년 전주 예수병원에서 전공의 근무를 계기로 개신교 세례를 받았는데, 집도 직전에는 항상 ‘이 수술이 끝날 때까지 제가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환자로부터 생긴 이익은 환자와 사회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정의원은 여유가 있을 때마다 병원을 증축하였고 한편으로는 1989년 봉생문화회(현재 사단법인인화)를 설립하여 4년간 종합교양지인 <월간 현장>을 발간하는 등 문화의 불모지인 부산에 문화예술의 텃밭을 일구는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시민들의 공론의 장인 <포럼 신사고>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초대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고, 당시 극도로 악화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영호남민간인협의회를 만드는 등 NGO 활동에도 적극 나서게 된다.
정치에 입문하기 훨씬 전인 1991년부터 영호남문화교류, 청소년교류, 학술교류를 주도적으로 추진해 온 정의원이 2004년 5월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 권한대행으로서 박근혜 당대표에게 지역화합발전특별위원회 구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현재 이 특위가 지역화합특구 및 남해안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등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호남지역에서 정의원의 지역화합을 위한 진정성을 인정해 주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이름이 말하는 정의화
NGO 활동만으로 자신의 꿈이자 비전인 ‘건강사회 만들기’에 한계를 느낀 정의화 의원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입문도 고려하고 있었다. 마침 15대 총선을 앞둔 1996년 초 당시 신한국당이 깨끗하고 능력 있는 전문가 출신으로 공천혁명을 하면서 발탁돼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15대 총선에서 5, 6공화국의 실세 허삼수씨와 거물 정치인 김정길씨를 누르고 여의도에 입성한 정 의원은 지역민의 압도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 2000년에는 박찬종 후보, 2004년에는 청와대 홍보수석 출신 이해성 후보를 각각 큰 표 차이로 물리쳤으며, 2008년 4.9총선에선 부산 최다득표율로 중량감 있는 4선의 중진의원이 되었다.
정 의원은 초선시절부터 8년 연속 국감 베스트 의원에 선정될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자신의 정치철학과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탓에 계파간 줄서기 풍토를 외면, 당내 비주류로 적잖은 설움을 겪기도 했으나 지난 17대 대선에선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직능정책본부장으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당내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초선 땐 운전기사 없이 자가운전을 고집했던 열정과, 국회차원의 의원외교를 나갈 때 남은 여비를 국회사무처에 반납하는 양심, 그늘진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따뜻함, 선거 때마다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를 해 온 올곧음, 늘 서민과 약자의 편에서 일해 온 의로움은 정 의원을 대변하는 단어들이다.
정 의원은 17대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으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유류세 인하, 재래시장 지원정책, 저소득층을 위한 근로 장려세제(EITC, Earned Income Tax Credit)지원사업 등 민생경제 살리기에도 전력을 기울여 왔다.
2009년 12월 한나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선진 대한민국은 건강한 서민과 중산층이 튼실한 가운데 이뤄져야한다”면서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8:2식의 발전에 의해서 이뤄져서는 안된다”며 서민과 중산층의 병원문턱을 높이는 ‘의료영립법인 도입반대’라는 소신을 밝혔다.
또한 이웃끼리 서로 배려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아파트 복도, 공공장소 및 어린이 보호구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는 ‘국민건강증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정의화 의원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 국민들이 서로 배려하고 신뢰가 충만한 사회, 부정부패가 없는 맑은 사회인 ‘건강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지역화합, 남북통일, 국민통합을 위한 한길을 걸어왔다.
지역감정 해소와 영호남 화합을 위해 1991년부터 헌신해온 정 의원은 2004년부터 한나라당 내 ‘지역화합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호남 예산확보, 현안과제 해결 등 당내 ‘호남창구’ 역할을 해왔다.
정 의원은 여수세계박람회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여수엑스포 유치성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1월 여수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이어 2008년 11월엔 진정성을 갖고 영호남 화합과 교류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한나라당 의원 최초로 광주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또, 2009년 2월엔 ‘영남 출신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호남 지역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공적’으로 조선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2015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장으로 2009년 5월에 광주의 성공적 유치를 이뤄냈으며,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 낸 그의 노력이 유치성공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았다. 또, 2010년 1월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2015광주하계U대회 성공개최를 위해 적극 앞장서고 있다.
진작부터 남해안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 “남해안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고 역설해온 정 의원은 18대 국회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연구모임’의 대표를 맡아 ‘수도권의 대칭축인 남해안 시대의 새로운 도약과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정 의원의 ‘남해안 3개 거점권역에 대한 집중적 투자’구상은 이명박 정부 선벨트(Sun Belt)사업의 토대가 되었으며, 정부는 2010년 5월 18일 ‘남해안권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정 의원은 “통일은 대결이 아니라 신뢰하고 화합할 때 가능하다”는 철학으로 2006년에 남북의료협력재단을 설립해 대북 의료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이탈주민 정책수립, 남북관계 신뢰회복에 앞장서고 있다. 또, ‘통일에 따른 남북한 경제적 충격 완화와 남북사회의 성공적 통합을 위해 통일비용을 준비해야 한다’며 통일시대를 대비한 ‘남북협력기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 통일대한민국을 위한 주춧돌을 놓고 있다.
국회에서의 정의화
정치권 입문 이후 지역화합, 남북통일 등에 앞장서며 국민대통합의 정치를 실천해온 정의화 의원은 한나라당내 대표적인 화합형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제헌 헌법이 제정된 해인 1948년에 태어난 정의화 의원은 대한민국 국회와 함께 환갑을 맞으며 건국동이 4선 중진의원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18대 국회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의화 의원은 2007 대선이후 깊어진 당내 갈등을 해결하고, 당의 변화와 화합을 위해 2009년 5월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비록 우리 정치의 뿌리 깊은 병폐인 ‘계파정치’에 밀려 패배했지만 예상밖의 선전을 함으로써 ‘의미있는 선전’ 이라는 당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이후 정운찬 국무총리 국회 인사청문회 특별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중립적인 의사진행과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주목을 받았다. 야당의원을 비롯한 청문회 관계자들도 정 의원의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 청문위원과 후보자간의 원만한 대립 조율에 박수를 보냈다. 또, 정의원은 국가최대현안으로 급부상한 세종시문제해결을 위해 한나라당 세종시특위 위원장 임무를 부여받아 일관성·공정성·투명성이라는 3대 원칙을 바탕으로 특위를 가치중립적으로 운영했다. 전국을 다니며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 국민적 논의의 장을 제공하는 등 갈등과 대립의 현장에서 정의화의 합리적 태도와 화합의 리더십은 힘을 발휘했다.
정 의원은 2009년 11월, 한나라당 제8차 전국위원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며 당내 지도부로 입성했다. 대다수 언론은 ‘한나라당이 정의화 최고위원을 선출함으로써 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고 평했으며, ‘당내 화합과 소통을 통한 계파갈등 해결사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의화 의원은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을 책임지는 집권여당 한나라당이 능력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했으며, 최고위원회의에서 오직 국가발전과 민생의 잣대만으로 소신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창해온 정의화 의원은 2010년 6월, 한나라당내 국회부의장 경선에서 압도적 표차이로 부의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다음날인 6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참석의원 238명중 231명의 지지로 국회부의장에 당선됐다.
정치 14년 만에 국회 2인자의 자리에 선 정의화 부의장은 “18대 국회는 정쟁의 구조를 정책과 상생의 국회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뒤 “헌정 60년이 넘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회상을 정립할 때가 왔다”면서 “최소한 여야간 상호 호혜의 원칙을 지키고, 국회의원간 상호 존중의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불문율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국회가 국민에게 좀 더 사랑받고 신뢰받는데 공헌한 부의장으로 남고싶다’는 정 부의장은 무엇보다 대화와 통합, 상생의 정치를 통해 국회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건강사회’ 구현만이 우리나라 선진화를 위한 진정한 성장동력이라 믿는 정 부의장은 ‘국민들이 서로 신뢰하고 정직한 사람이 인정받고 보상받는 대한민국의 건강사회’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뛰고 있다.
저서 비전서 “이름값 정치”
자서전 “쉼 없는 항해 그리고 새로운 꿈”
칼럼집 “나누는 사랑과 흐르는 정”, “건강한 사회 어디 없나요?”
제2의 도시를 거부한다.
의학논문 “뇌졸중에 관한 연구” 외 다수
이름값 정치 에서의 비전 (법륜의 서평에서) 먼저 국회 부의장님의 “이름값정치”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중략)
이 내용이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서 즉 보수적 관점에서 서 있지만 복지를 얘기하고, 남한의 정치지도자로서 북한을 껴안자고 얘기하고, 영남의 정치지도자서 호남과 함께하자 이 참 굉장히 중요한 얘긴데 현실 속에서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이런 소중한 정치인이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느냐, 근데 오늘날 우리 현실 정치가 포퓰리즘이라 그래서 너무 극단적이고 투쟁적이고, 인기 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에 큰 빛을 못 보는데,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 이런 소중한 정치적 자산을 갖고 계시는 분을 알아보고, 알아보는 데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계속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부탁드리고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그의 생각 단편 (정의화 의장 백범 김구선생 66주기 추모사 全文)
존경하는 백범 선생님,
우리가 겨레의 스승이신 선생님을 떠나보낸 지 66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한 시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바쳐 민족의 광복을 마침내 이루어내셨지만, 그토록 소원하신 통일조국의 모습은 끝내 보시지 못하셨습니다.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진 않겠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장중한 음성이 아직 우리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의 현실은 여전합니다. 오직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생님 영전에서, 우리 후손들은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존경하는 백범 선생님,
올해는 우리 민족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기쁜 해이자,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져 분단 70년을 맞는 가슴 아픈 해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미완의 광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통일은 남북한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한 번에 풀어줄 열쇠입니다.한반도의 통일은 동북아 안정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여 인류사의 진보에도 크게 공헌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영전에서, 저희들은 다시 다짐합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이 기필코 가야 할 길입니다.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민족 최고의 과업인 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저부터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남북관계의 앞날이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있지만, 남북국회수장회담과 남북국회회담을 성사시켜 꽉 막힌 남북의 물꼬를 트고 남북대화의 길을 열 것입니다.
아직도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은 채 우경화와 군사대국화의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도 선생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한 모두가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그 날, 일본이 자신들의 침탈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는 그 날, 눈부신 광복의 아침은 마침내 밝아올 것입니다.
백범 선생님,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문화의 힘을 통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는 나라가 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연이어 일어나는 우리 사회 내부의 고난과 불행을 지켜보며, 그 말씀의 참다운 뜻을 깨닫게 됩니다. 지나치게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 우리사회에는 이기주의와 물질중심주의가 만연해 있고 급기야 생명까지 경시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왜 부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더 소원하셨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불행은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하셨던 그 뜻을 받들어, 인간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忠孝와 仁義禮智로 대표되는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정신을 되살리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우리의 건국이념을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정치인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존경하는 백범 선생님 영전에 국회의장 정의화, 삼가 분향합니다. 고이 잠드소서.
2015. 6. 26 대한민국 국회의장 정의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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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홈페이지에서 취재한 일부분입니다
李 觀 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