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정부에서 “사회 4대악 척결”을 정하고,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그리고, 불량식품”입니다. 불량식품은, 식품의 생산, 제조, 유통, 판매 등, 어느 단계에서든, 법을 위반한 것으로, 원료가 잘못되거나 생산시설의 위생이 안 좋음으로, 그것을 먹는 자의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식품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는 왜 그리도, 이러한 불량식품이 좋던지, 지금도 맛과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아폴로와 쫀드기”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만화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만화껌을 사서 껌을 씹으며, 만화를 보려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껌도 빼앗기고, 늘씬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만화 껌에는 색소를 넣어 만들었기에, 껌을 씹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건강을 위해, 경계하는 불량식품이,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말라기는, 사람이 하나님께 불량식품을 드린 것에서 비롯됩니다. 말 1: 2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의 서언과도 같습니다. 여기에는, 말라기 전체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랑과 정성을 모두 쏟았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정성을 다해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도, 흠 없는 것으로, 최고의 것으로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읽어드린 2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해, 눈가림만 할 뿐이었고, 엉터리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차라리,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너희가 영광돌리지 않으면, 이방이 영광돌릴 것이다는 말씀을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이단을 따르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열심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보다 훨씬적으로,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나라의 우상숭배자들만큼만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 땅에 교회로 인한 문제들이 사라지고, 민족 복음화가 이루어 질거야”라고 하셨던,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기복신앙으로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과 살아계시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는 신앙의 열정이 다릅니다. 인터넷을 보니, 한 익명자가, “교회마다 성도가 아닌, 예수계의 계원들로 넘친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이, 과연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시대가 성도된 우리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성도로서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니, 요식적으로 교회는 나가지만, 자신들이 듣는 것에 대해, 믿을려고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발에 걸림돌이 되어, 삶에 있어서, 거추장스럽다라고 느끼는 성도는 없는지, 이 또한 염려됩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짐짝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찾아오는 현상이, 예배의 무너짐입니다. 예배가 형식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하지만, 예배자들은, 언제나 형식으로 또는 마지못해서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무너지며,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 속에서, 생명을 되찾는 겁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7절을 보시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여기서, “멸시하다”는 말은, 일시적으로 멸시한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행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속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였던 겁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이 말은, 6, 8, 9, 10, 11, 13, 14절에 걸쳐, 무려 7번이나 나옵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이 때도, 제사장이 있었고, 선지자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어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바르게 증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이들부터가 하나님을 경멸했기에, 백성들을 바르게 가르칠 자가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자식이 부모를, 종이 주인을 공경하는 데, 하물며, 천지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다고 합니다. 또, 8절을 보시면, “눈 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백성의 이러한 잘못에 대해, 제사장은, 거부하고, 막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인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벧전 2: 9을 보시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선택했을까요?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우리로 하여금 선포하게 하려하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본문 속의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듯, 우리는 세상에 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성도들의 제사장 직무 수행”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눈 먼 것”을 드렸습니다. 레 1: 3을 보시면,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백성에게서 아무런 제물이나 다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둘다 공범입니다. 또, 출 25: 30을 보시면,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진설병”이란, 삼상 21: 6을 보시면, “거룩한 떡”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어떤 떡이라고 합니까? “더러운 떡”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8절을 보시면, 그들을 다스리는 총독에게는, 내밀지도 못할 것으로, 사람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는 하는 말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형식적이고, 마지못해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 혹시라도, 이런 모습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늘 상, “우리가 주께 드리는 예배를, 주께서는 기쁘게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심으로, 친히,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럽히는 처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1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으로부터, 영광받겠다고 합니다.
사 43: 7을 보시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보시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받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은, 레드카펫을 깔고,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나누는 것에서도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삶의 희노애락을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가족과 함께 하고, 친구와 함께 하고, 동료들과 함께 하십니까? 이제는, 그것을, 하나님과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출 19: 4을 보시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출 14장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애굽이 가까이 오자, 그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어지럽게 했다고 합니다. 또,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는, 새로운 소산물로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만나를 주셨습니다. 또, 사 49: 15을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과 이 긍휼이,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그리스도로 보내신 겁니다. 또, 성자께서는, 그 사랑으로, 친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은 신이라서, 십자가에 못 박혀도 아프지 않고, 창에 찔려도 고통도 없을 거야”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십자가에서의 그 처절한 절규가 연기였단 말입니까? 또, 눅 23: 44을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실 때,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라고 합니다. 이때의 어둠은, 우연의 일치로, 일식현상이 일어났던 겁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찬양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제사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시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배 목사님 가운데, 별난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어렵게 개척을 하셨는데, 성도들이 따라주지 않자, 예배당 문에 손수 못질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붙은 사택에서, 마음 맞는 교우들과 예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분의 생각이 성공했을까요? 성공했으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죠? 주일 전날인, 토요일 저녁에, 사택에 불이 났습니다. 얼마나 큰 불이 났던지, 사택에 있던 세간이 모두 타고, 녹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주일에, 목사님이 입고, 예배를 인도할 양복까지도 모두 탔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못질 한 것을, 본인이 제거하고, 근처 세탁소에 가서, 양복을 빌려입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아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당은, 우리의 공간이 아닙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이스라엘의 제사를 받지 않는 하나님, 이스라엘로부터 영광받기를 거절하신 하나님이, 어디서 영광받습니까?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내가 아니면, 우리가 아니면”이라는 생각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능력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두 펼쳐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이에게서 영광받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워,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기를 원하셨지만, 사울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무엘을 이새의 집에 보냈습니다. 삼상 16장을 보시면, 엘리압을 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가 여기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교만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이미, 다윗을 지목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언제나 우리에게 향하여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빼앗기거나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 - 14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입니다.
본문에서, “번거로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테라아”입니다. 이는, “무엇, 어떻게”라는 의미를 가진, 의문사 “마”와 “피로, 고통”이라는 뜻을 지닌, “틀라야”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 또는, 아무리 수고해도 전혀 소용없는 일로 말미암아, 지칠대로 지쳐있는 마음의 상태”를 강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화자가 제사장입니다. 이를 보면, 당시의 제사장들에게서, 자신의 직무에 대한, 사명의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코웃음을 치며, 레 22: 18 - 20에서 말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쓰레기같이 취급되는 것을, 제물로 받친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형식적이었고,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이를,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에 생명력이 없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가져온 제물입니까?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분노하신 겁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신앙적 자세입니다. 예배의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란, 몽골에서 소를 몰던 “벌러르”라는 소녀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벌러르”는 주일아침에, 소를 몰고 나갔다가 소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소를 찾아 헤메던 중, 예배시간이 되자, 포기하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 예배당 마당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삼상 6장에서, 벧세메스로 간 암소 사건이, 몽골에서도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몽골에서 선교하시던 이용규 선교사님의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미 6: 8을 보시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신분, 그 사람이 가진 스펙에 따라, 대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내 마음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이처럼, 진실한 사랑의 예배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