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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이집트 시민혁명은 21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랍 근대사는 물론 세계사에도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집트의 후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이 발표된 3월 12일 존스홉킨스 대학 중동학과 푸아드 아자미 교수는 CNN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레바논 출신 미국인으로 서방의 중동학을 이끌고 있는 아자미 교수는 또 “이번 아랍 민주화열풍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랍권 22개국 모두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실제로 민주화 시민혁명의 물결은 황량한 사막을 넘어 많은 아랍 국가로 밀려가고 있다. 32년 예멘을 통치한 알리 살리흐 대통령은 2013년으로 끝나는 자신의 현 임기를 연장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세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입헌군주국 요르단도 내각을 해산하고 정치개혁 작업에 나섰다. 알제리도 19년 간 이어진 비상계엄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2000년 부자세습에 성공한 시리아도 정치개혁을 공언했다. 바레인에서도 국왕이 나서 식량 보조금과 사회보장비의 증액을 정부에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은 물론 팔레스타인, 수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타 아랍국가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간헐적이지만 이어지고 있다.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가 시민 봉기로 사실상 정권교체가 결정됐다. 그러나 상황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시민혁명은 아랍권 전체의 정치적 근간을 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랍 국가들이 앞 다퉈 민주적 조치의 이행 공약을 내거는 등 자구책을 내놓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3대 종파가 존재하는 레바논을 제외하고 아랍권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민혁명이 발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본 글은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권 시민혁명의 배경과 향후 민주화 전망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금번 사태를 튀니지와 이집트에 국한시키기보다는 보다 큰 틀에서 향후 아랍권 정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튀니지, 이집트의 시민혁명은 아랍권의 ‘남성주도 가부장적 인식체계’를 바꾸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가설이다.
1. 현상적 원인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래 중동 내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평가되는 튀니지 사태의 영향이 아랍권 시민혁명의 물꼬를 텄다. 이어 이집트도 붕괴하면서 튀니지발 시민혁명의 물결이 아랍권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튀니지와 거의 동시에 발생한 알제리의 시위사태도 눈여겨봐야 한다. 수도 알제에서는 1월 5일 저녁 기도가 끝나고 거리로 몰려나온 청년들이 물가상승과 만연한 실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며 건물에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했다. 시위대는 다음날인 6일에도 상점과 거리 신호등을 부수고 타이어를 불태운 채 경찰과 대치했다. 현지 언론은 오랑과 블리다 등 다른 지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알제리의 밀가루와 샐러드유 가격은 지난 몇 달 사이 배로 뛰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며 ㎏당 설탕값도 몇 달 전 70디나르에서 150디나르까지 올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역할
권위주의에 맞선 시위대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라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활용해 강력한 힘을 갖게 됐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시작된 정보 혁명은 군부.경찰과 결탁해 공포정치를 일삼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주요 매개체로 작용했다. 튀니지 혁명의 경우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전문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튀니지 주재 미 대사관은 2008년 6월 본국에 보낸 전문을 통해 "벤 알리 대통령 일가가 돈, 서비스, 토지, 자산, 아니면 당신의 요트까지 탐내며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있다"고 보고했다. 벤 알리 대통령의 조카 두 명이 2006년 한 프랑스 기업인으로부터 요트를 빼앗은 사실, 대통령 사위 모하메드 사헤르 엘-마테리가 집에 온갖 고대 유물과 최고급 음식, 심지어 애완용 호랑이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 등이 드러나면서 공분을 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서비스는 독재 정권의 정보 통제력을 무색하게 했다. 과거엔 신문과 방송 등 전통 매체만 통제하면 됐지만 이제는 SNS를 통해 시위 정보가 전달되고 있어 일일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튀니지와 이집트 등 아랍권 전역에서 진행된 시위에서 젊은이들은 SNS를 통해 시위 현장의 사진과 소식 등을 전하거나 진압 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의 사진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있다.
근본적 원인
장기 독재와 부패, 빈곤과 생활고가 각국의 주민들의 불만이 최근 식량, 에너지 가격의 폭등과 각국 정부의 긴축 정책을 계기로 폭발했으며 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생활고는 최근 곡물 및 연료 가격 상승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것에 기인한다. 더딘 경제발전과 불공정한 분배 그리고 실업률에 대한 수십 년간 누적된 불만이 내재돼 있었다. 알제리 실업률의 경우 정부 공식 통계상으로는 10% 선이나 독립조사기관들은 실제 실업률을 25% 가까운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다. 이집트의 실업률은 2010년 기준 12%에 이른다.
정치적으로는 장기간 독재와 억압이 국민들을 자극했다. 아랍권은 ‘죽어야 바뀌는 정권’이라 불릴 정도로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왕정은 차치하고 공화정에서도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자가 수십 년간 집권해 왔다. 그러나 주민들의 가장 큰 분노를 사는 부분은 정권세습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왕정국가에서는 당연하듯 아들이나 형제가 왕위를 물려받고 있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정임에 불구하고 시리아에서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이미 아들이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집트, 예멘, 리비아 등에서도 권력세습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2004년 차남 가말에게 권력이양설이 제기되면서, 키파야(Kifaya, 이제 그만 충분해!) 세습반대운동이 이미 거세게 일었었다.
대통령 일가는 물론 기득권층의 부패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이집트는 전 세계 178개국 중 98위에 이르는 부패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2월 4일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700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무바라크 일가가 영국과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 예금,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부동산, 홍해 해안의 고가 지역 등에 투자해 거대한 부를 쌓았다고 전했다. 무바라크는 30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군 고위 관리로 일하면서 수억 파운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 협상에 관여했고 이 과정에서 얻은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외국으로 보내거나 은행 비밀 계좌에 입금했으며 고급 주택, 호텔에 투자했다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이와 관련, 아랍계 신문 알 카바르도 무바라크 대통령이 뉴욕 맨해튼과 베벌리 힐스 로데오거리의 부동산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들 가말과 알라 역시 억만장자로 알려졌다. 런던 벨그라비아에 있는 가말의 호화 저택은 서구의 전형적인 ‘트로피 어셋(trophy asset:기념비적 자산)’에 대한 무바라크 일가의 탐욕을 보여주고 있다.
2. 성격: 아랍판 프랑스 혁명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은 아랍인의 심리구조(mentality)를 바꾸어 놓았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리겠지만 아랍 내 민주화의 봇물이 터진 것만은 틀림없다.” 미 해군대학원 중동학과 로버트 스프링보그 교수는 이번 민주화혁명의 성격과 파장을 이렇게 규정했다. 상황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번 시민혁명이 아랍권 전체의 정치적 근간을 흔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른 아랍 국가들이 앞 다퉈 민주적 조치의 이행 공약을 내거는 등 자구책을 내놓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미노처럼 확산하는 아랍의 시민혁명은 독재의 두려움이라는 족쇄를 부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튀니지의 사례로 정권 무너뜨리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라는 인식 확산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 사태에서 시위대가 군 장갑차와 탱크에 올라 깃발을 흔드는 장면은 중동지역에 새로운 도전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이번 아랍권 민주화 시민혁명에 대해 언론과 전문가들은, 즉 예를 들어 워싱턴포스트(WP)는 2월 5일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이란 혁명 등의 성격을 언급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23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을 단 며칠 만에 축출시키고 시민 봉기의 불길이 이집트도 즉각 옮겨 붙으면서 아랍권 소요 사태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동유럽 민주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반정부 시위대와 각국 취재진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탄압 등 과정을 보면 이집트 사태가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와 유사한 형태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일부 언론은 1979년 이란 혁명처럼 이슬람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외면상으로 최근 아랍 민주화 열풍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권 몰락과 유사하다. 아랍권도 수십 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의 압정을 시민의 힘으로 떨쳐내고 민주화시대를 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아랍의 현 시민혁명은 18세기말 프랑스 혁명에 더 가깝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단순한 서민혁명이 아니었다. 신권왕정의 절대주의체제에 반기를 들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확립한 ‘사상혁명’이었다. 혁명의 이념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계몽사상가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됐다. 한 나라 내의 계급혁명이 아니라 사상혁명이었기에 유럽을 거쳐 전 인류의 가치관과 인식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랍권의 시민혁명도 단순한 독재타도 혁명이 아니다. 보다 큰 틀에서 보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체계는 우리의 유교전통을 포함해 여러 문명, 그리고 상당수 제3세계에 뿌리내린 인류의 가치관이다. 아랍권에서는 이 인식체계가 특히 강했다. 유목생활 때문이다. 정착문명과는 달리 생사를 결정하는 우물 혹은 오아시스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해야 했다. 외부의 적과 항상 싸우기 위해 강력한 유대가 필요했다. 생존을 위한 전투는 남자들 몫이었다. 가장 강력한 가문 혹은 집안의 남자 어른에게 모든 지도력과 권력이 주어졌다. 부족원은 부족장의 명령과 권위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이 전통의 바탕 위에 이슬람 종교가 시작되고, 종교적 해석이 모두 남자에 의해 이뤄지면서 남성중심의 사회는 더욱 강화됐다.
3. 전망 및 파급효과
혁명의 맛을 본 민중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다. 일정 한계에서 스스로 멈추지 않고 계속 끝까지 가려 할 것이다. 결국 1980년 말 동구 공산권이 무너진 것과 같은 도미노현상은 아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대부분 아랍 정권이 이번 사태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다. 오일머니가 민주화 요구를 늦출 수는 있지만 막을 수는 없다. 특히 국민의 가장 큰 분노를 사는 부분은 정권세습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왕정국가에서는 당연하듯 아들이나 형제가 왕위를 물려받고 있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정임에 불구하고 시리아에서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이미 아들이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집트, 예멘, 리비아 등에서도 권력세습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2004년 차남 가말에게 권력이양설이 제기되면서, 키파야(Kifaya, 이제 그만 충분해!) 세습반대운동이 이미 거세게 일었었다. 최소한 공화정 국가들에 있어 권력세습의 시도가 이제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걸프 산유국들의 경후 그 변화의 속도는 다소 느릴 것이다. GCC 국가들의 경우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대국민 복지 제공, 지방 족장들과의 긴밀한 대화 채널 유지 등으로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한다. 공화정 군부 독재 국가들보다는 군사력이나 경찰력이 미약해 한편에서는 더 쉽게 정권붕괴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예측할 수도 있지만, 현재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국가들에 비해 요르단, 모로코, 바레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왕정 걸프국가들은 시민들의 큰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 걸프 왕정이 가진 특징, 증 ‘귀 기울이는 권위주의(Listening Authoritarian)를 무시할 수 없다. 걸프국가의 군주들은 지방 부족이나 관련 세력과 정기적으로 미팅(Diwan)을 가지며 그들의 불만을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충족시켜왔다는 점에서 다른 면에서 보면 공화정 군부독재보다는 더욱 확고한 정통성과 지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리트머스 테스트 이집트
혁명의 전파 속도와 민주화 작업의 향방을 판단하는 근거로 이집트가 자주 언급된다. 이집트 소재 수니파 이슬람학의 본산 알-아즈하르 대학 법학과 후삼 이사 교수는 “향후 아랍권의 민주화 여정에 있어 현재 이집트의 상황이 리트머스(Litmus Test)”라고 언급했다. 이집트는 아랍의 정치대국으로 의회정치, 언론, 학문 등에 있어 중동 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다. 특히 아랍권 내 영화와 드라마 생산을 주도하면서 중동 최대 문화강국의 자리를 60년 이상 유지하고 있다. 또 아랍권 이슬람운동의 모체인 무슬림형제단의 창설지이기도 하다.
“이집트에서의 시민혁명은 성공했지만, 민주화 여정은 이제 시작”이라고 이사 교수는 강조했다. 이사 교수를 포함해 대부분 학자들은 이집트 정국의 최대 변수는 군부라고 지적하고 있다. 18일간의 반정부 시위 기간 중 군은 중립을 지켰다. 총알 한 발을 쏘지 않았다. 시위대를 공격한 것은 내무부 소속 치안대였다. 때문에 국민의 신망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무바라크 정권보다 더 오래 이집트의 권력과 경제이권을 차지한 집단이 바로 군부다. 1952년 군사혁명 당시에도 사람들은 민주적인 정부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세속주의, 권위주의 독재정부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번 사태에서 시민의 힘을 목격한 군이 과거와 같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군 최고위원회는 이미 의회를 해산했고, 구헌법을 중지시켰고, 비상계엄법의 철폐를 약속했다. 그러나 앞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준비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포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야권세력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것이다. 전면적이고 완벽한 민주개혁은 군의 기득권 상당부분을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현재로서는 군부 출신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군 최고위원회가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한다고 언급했지만, 퇴역장성도 분명히 민간인이다. 현재 실세는 오마르 술래이만 부통령과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이다.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군부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그러나 두 사람모두 무바라크의 최측근이다. 그가 집권하면 부패한 무바라크 정권을 청산하지 못할 것이라는 국민의 불신이 가장 큰 약점이다.
따라서 민간인 출신으로 가장 유력한 대권후보는 아무르 무사 아랍연맹사무총장이다. 직업 외교관으로서 유화한 인상과 말솜씨로 이집트 국민과 국제사회의 호감을 얻어 왔다. 국정운영능력도 있다. 1991년부터 10년 간 외무장관을 지냈었다. 지나치게 인기가 높아지자, 무바라크 대통령은 2001년 그를 내쳤다. 이 점이 최근 반무바라크 정서를 가진 국민들에 호소력을 가진다. 반면 세계 언론이 주목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이미 뒤로 쳐지고 있다. 지나치게 오랜 해외생활, 이중국적 소지 등으로 국내기반이 약하고 민족주의 성향의 이집트인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을 받고 있다.
5. 대책: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변화에 대한 대비 필요
리트머스 테스트 이집트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중동의 정세는 장기적으로 요동칠 것이다. 중단기적으로는 아랍의 최대 정치 강국 이집트의 공백이 아랍정세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이-팔 분쟁의 가장 중요한 중재자인 이집트의 역할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 주도 테러와의 전쟁에 전면에 나섰던 무바라크의 모습도 한동안 볼 수 없다. 사우디와 더불어 수니파 이슬람의 주축인 이집트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이라크 전쟁 이후 확대되고 있는 시아파 초승달의 주축 국가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이다. 이란을 축으로 서쪽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남쪽으로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까지 연결되는 초승달 모양의 시아파 블록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특히 이란에 대적할 수니파 이슬람정권이 아랍권에 들어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방이 우려하는 무슬림형제단의 집권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민주화혁명이 이슬람혁명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지나치게 확대과장된 것이다. 현재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 시위는 민족적 그리고 세속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무슬림형제단은 현재의 시위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진다면 무슬림형제단의 후보 혹은 이 단체가 지지하는 후보가 적지 않은 표를 얻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는 1,400여년 역사에서 단 한 차례도 이슬람이 권력을 차지한 적이 없다. 시아파와 달리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물론 서방 그리고 한국도 위와 같은 지나친 우려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아랍권에 들어설 새로운 정치역학의 틀에 대비하고 준비해야 한다. 과거처럼 민주화나 인권보다는 자신들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안정에 초점을 맞추는 자세는 이제 버려야 한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랍권도 과거의 친미 혹은 반미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앞으로 정당정치에 기반을 둔 다원화 사회로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는 다원화를 의미한다. 현재 아랍권은 대부분 일당 독재다. 사우디아라비아, UAE, 오만, 카타르 등 걸프 산유국은 정당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머지 공화정 국가들로 무늬만 정당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를 시작으로 이제 복수정당정치가 시작될 것이다. 다양한 이념과 성향을 가진 정당이 등장하고 집권당을 견제할 것이다. 특히 이번 민주화 시위 사태에서 주로 등장했던 구호인 부패척결이 향후 아랍권 여론에 중요한 잣대로 부상할 것이다.
장기집권의 한 병폐인 부패는 상당히 심각했다. 무바라크 전대통령 일가가 적게는 5조 많게는 70조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재산축적 혹은 형성 과정은 더욱 가관이다. 무바라크의 장남 알라와 차남 가말은 대부분 굵직한 이권에는 관여해 왔다. 이집트 최대 투자 은행인 EFG-헤르메스와 손잡고 석유, 철강, 시멘트, 곡물, 육우 등의 거래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떼돈을 벌었다. 1990년대에 무바라크가 추진한 주요 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서도 국유재산을 헐값에 불하받았다. 싼 이자로 은행 융자를 받아 고수익의 사업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공공 자산을 개인화하는 수법도 동원됐다. 외국 투자기업은 지사 지분의 49% 이하만을 보유할 수 있다라는 규정을 이용해 유망한 외국기업의 지분 중 상당부분을 두 아들이 차지했다.
부당한 방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사례도 이제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왕족, 독재 군부의 최고 권력자가 발주와 낙찰을 결정하던 관행에 벗어나 보다 투명한 의사결정과정을 마련할 것이다. 더불어 아랍권은 이제 석유 중심의 기존 산업구조를 다각화하는데 전력할 것이다. 또한 일자리를 비교적 많이 창출할 수 있는 제조업 육성에 나설 것이다. 매년 수천억 달러에 달했던 대외 투자보다는 국내투자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무역을 통해 외국의 상품을 수입하는 것보다는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에 나설 것이다.
이번 아랍권 시민 혁명은 빠른 속도는 아니겠지만 분명히 중장기적으로 왕정 산유국들로 확산할 것이다. 석유 수입, 상품 및 플랜트 수주 등에 집중해 온 한국과 서방 기업의 진출 방안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단순한 상품수출 혹은 플랜트 수주의 틀에서 벗어나 조인트벤처를 통한 제조업 분야 진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로비와 인맥에 의존한 수주방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경쟁력을 갖춘 플랜트 수주 방안도 수립해야 한다. 보다 동반자적 협력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따른 새로운 중장기 진출 전략이 마련된다면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집트 제2혁명 더큰 놈이 오고있다 | |||||||||||||||||||||||||||||||||||||||||||||||||||||||||||||||||||||||||||||||||||||||||||||||||||||||||||||||||||||
[Global Insight] 노동자파업 주목해야…종교 넘어 민중 결집 | |||||||||||||||||||||||||||||||||||||||||||||||||||||||||||||||||||||||||||||||||||||||||||||||||||||||||||||||||||||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후 이집트에서는 소위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가 출현하였다. 이 체제의 핵심적인 역할은 현재 군부가 맡고 있는데, 이들은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후 이집트 통치치제에 나타난 공백을 잠시 메우고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개혁' 일정을 제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 현상황의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다.
군부의 설익은 정치 개혁
군부가 제시한 다양한 '개혁' 일정 가운데는 다음 선거 실시와 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 구체제의 주요 인사 재산 몰수와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시위자에 대한 발포 책임자 수사 등이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집트 군부는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부들 가운데 일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여 이들을 자신이 제시하는 '반쯤 설익은' 정치 개혁 일정에 동참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반면에 현재 이집트 전역을 휩쓸고 있는 파업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감을 표시하면서 엄포성 경고를 하고 있다. 이런 군부의 입장은 현재 이집트 상층 정치 체제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이집트 군부가 놓인 미묘한 세혁균형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일찍이 이집트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대중적인 시위의 물결이 체제의 밑바닥까지 끓어올랐다는 점인데, 과거 1952년의 나세르의 쿠데타 당시에도 이렇게 군부를 압박하는 대중적인 시위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집트 군부도 전무후무한 경험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이상 현 체제의 어느 부분도 지금의 분노와 시위의 확산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집트 정부 여당은 무기력해졌으며 보안경찰은 민중들에 의해 거리에서 퇴출당했다. 심지어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시위대와 합류하기도 했다.
이런 일촉즉발의 불안정한 균형 관계 때문에 이집트 군부는 일정하게 구체제 가운데 민중의 지탄을 받는 상징적인 인사를 제한적으로 단속하는 것을 통해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외양을 갖추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일정하게 확보하려는 것이다.
'민생 시위' 아니다
하지만, 무바라크 체제의 핵심적인 수혜 집단이자 수호 세력이라는 약점 때문에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 퇴진을 통해 드러난 민심을 전부 수용할 수 없는 처지다. 이 때문에 시위대에게는 '자제'를 요구하면서 파업 사태에 대해서는 단속 의지를 내보이는 것이다.
현재 이집트 국영 TV에서는 이번에 무바라크를 퇴진시킨 시위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찬사 일색인 반면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마치 이기적이며 국가 경제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인듯이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위 과정을 통해 거리에서 가장 많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보안경찰과 친무바라크 깡패들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이들 노동자들이었다.
현재 국내 언론들도 이들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이들의 시위를 '민생 시위'라며 의미를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접근은 이번 이집트 혁명과 이집트 노동자들간의 관계에 대한 무지일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곡해의 소지도 있다.
첫 번째, 이번에 무바라크를 퇴진시킨 것은 지난 18일간 이어져 온, 연속적이면서 거대한 대중시위였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실상 2월 초부터 무바라크가 퇴진한 2월 11일 사이의 팽팽한 대립 관계를 시위대측에 유리하게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파업 동참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 이번 이집트 혁명은 지난 몇 년 전부터 이집트 내에서 가열되기 사작한 좀 더 긴 과정의 클라이맥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200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이집트 노동자들의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혁명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수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거대한 산업 단지인 마할라(El-Mahalla el-Kubra)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많은 노동자들은 이곳을 이집트의 시디 부지드(Sidi Bouzid)라고 부르는데, 시디 부지드란 지난해 튀니지에서 한 청년 노점상이 정부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한 곳이다.
이번에 무바라크를 몰락시킨 중요한 씨앗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한 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풀뿌리 운동에서 뿌려졌기 때문에 이렇게들 부르는 것이다. 지난 2006년 이곳에서는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둘러싸고 일련의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그동안 파업은커녕, 정부로부터 독립한 노조조차도 존재하기 힘들었던 이집트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영기업과 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약 2만4천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여 6일 동안 공장을 점거한 결과로 이들은 임금 인상과 약간의 보건상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비슷한 행동이 다음 해인 2007년에도 잇따랐고, 지난 2008년 4월 6일에도 또다시 파업이 발생하였다. 파업이 발생하고나서 수시간만에 파업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파업 참여자들은 무바라크의 포스터를 끌어내리고 이를 짓밟았는데, 급기야 파업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는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면은 무바라크가 통치한 지난 30여년 동안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으로 이집트 정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파업으로 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또다시 보너스와 임금 인상 등의 양보를 획득했고, 이 파업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청년운동인 '4월 6일 운동'이 탄생했다.
청년운동 '4월 6일 운동' 주목해야
이들은 이후 2년간의 각종 파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번의 반무바라크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2008년 4월 6일의 파업이 무바라크 체제의 약점이 첫번째로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한다. 이 파업의 성공으로 인해 이집트는 그 이전의 이집트와 똑같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연장선에서 지난 2월 9일,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이틀 전 마할라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총파업에 참가했고, 이러한 파업 발생이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결정적인 우위를 안기면서 무바라크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과정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탓에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가능하다. 지난 1987년 민주화 시위로 군부 독재정권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기 이전에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 파업(구로 동맹 파업, 86년 5.3 인천 시위 등)과 이를 이끌려는 사람들의 노력들이 존재했었다.
이들의 노력과 이어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더라면, 1987년의 민주화 시위도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 파업의 파급력 두려워 한 군부
두 번째, 현재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의 정체 상태를 깨트리고 군부가 정치 개혁 약속을 뒤집지 못하게 할 쐐기 역할을 하는 것도 노동부문의 사회적 진출이다. 이미 군부가 무바라크의 퇴진을 강제시킨 것도 대중 시위에 뒤이은 노동자들의 파업 동참이 가져올 사회적 파급력을 두려워해서였다.
따라서, 이집트 군부에게 가장 결정적인 압력이었던 '정치적 스팀'(파업과 이에 결합한 대중 시위)이 증발한다면, 이집트 군부는 숨 쉴 여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집트 군부는 기존의 약속들을 하나 둘씩 회수하거나 시위대 쪽에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하도록 강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대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군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현재 일정 부분 그렇게 되고 있는데- 확산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러한 파업이 가져다 줄 사회 통치체제 전체의 해체 상황 때문에라도 군부가 제시할 양보의 폭과 구체성은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파업이 지속되자 이집트 군부는 애초의 모호함에서 반 발짝쯤 앞으로 나와 정치범 석방 일정과 계엄령 해제 시점까지 공포하겠다고 밝혔다.
세번째, 무바라크가 퇴진했다고 해서 무바라크가 추진했던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된 것은 아니다. 엄연한 현실은 이집트 혁명 뒤에도 수많은 '미니' 무바라크들이 중앙 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적 수준에서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노동자, 농민, 시민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 도시, 마을의 '미니' 무바라크들을 그냥 용인할 것이라고 보는 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수퍼' 무바라크도 몰아낸 이집트 노동자과 농민, 시민들이 '미니' 무바라크들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수퍼' 무바라크와 '미니' 무바라크
어찌보면, 자기가 사는 공간에서 가장 밀접하게 자신을 억압하던 당사자들은 바로 이들 '미니' 무바라크들인데, 지금 이집트 카이로을 벗어나 이집트의 지방 도시와 농촌으로 파업과 농민 투쟁이 확산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 때문이다.
이집트가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로 유지되기를 원치 않고, 무바라크 체제를 근본에서 일소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과정을 밟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일본 총독부의 총독이 일본으로 도망갔다 해도 여전히 내가 사는 마을의 경찰서장이 바로 그 총독이 임명한 친일 서장이라면 도대체 식민지 체제가 청산되었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과 분노가 바로 해방 뒤에 한반도 남단을 휩쓸었던 저항의 주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과정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2011년 2월 11일 이전에 벌어진 다양한 공간과 시간대의 투쟁들이 무바라크의 퇴진을 기점으로 다시금 타흐리르 광장에서 전국으로 분기, 지방적 수준으로 한층 더 심화되는 사회혁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이집트 혁명에 동참하는 사회세력들의 저변을 새로이 넓히는 과정으로, 현재의 군부를 정치투쟁의 전면에서 밀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 변화의 정도는 이런 종류의 순환적인 힘에 의해 원기를 회복한 저항운동의 규모와 강도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심화될 경우 전국적인 수준의 더 심도 깊은 저항에 군대가 출동하여 진압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여의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과정에서 안그래도 동요하고 있는 군대의 사병들 사이에서의 분열이 더욱 더 가중될 가능성이 많다.
이집트 노동자투쟁 의미의 보편성
네 번째, 이번의 이집트 노동자들의 파업은 단순히 '이기적'이거나 무바라크를 몰아낸 대중 시위에 비해 주변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파업은 또다른 의미에서 전세계적 차원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띄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마할라 산업단지는 한 때 이집트의 경제적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그 이유는 마할라가 지난 1930년대에 이집트인이 최초로 온전히 소유권을 획득한 기업이 세워진 곳인데다가, 1960년대에는 중동에서 가장 거대한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바라크가 집권한 이후, 다수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었는데 여기에는 마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정에 시달려야했고, 보조금들도 가차없이 삭감되었다. 식료품에 대한 정부 보조금만 해도 무바라크 통치 기간 무려 반 이상이 삭감될 정도였다.
이런 추세는 지난 2004년 이후 기업가들로 구성된 소위 '개혁 내각'이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한 개혁 노선을 밀어붙이면서 더욱 더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들 사이에 부패가 만연했고, 인플레이션과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인해 이집트 서민들의 생활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곤궁해졌다.
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마할라 노동자들의 평균 기본 봉급이 한 달에 약 100달러였는데, 그나마 이것도 일련의 파업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올라서 그런 것이다. 어떤 곳은 한 달에 50달러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관리도 긴장 속에 주목
이런 이집트 민중의 고통의 정도가 어찌나 심각했던지 지난 2008년에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위키 리크스 공개)을 쓴 한 미국 관리도 극도의 우려를 나타낼 정도였다. 이 같은 경제적 곤궁 때문에 현재 이집트 각지에서는 파업이 발생했고, 이러한 파업은 무바라크가 퇴진한 이후에는 더욱 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더구나 현 이집트 군부는 이런 이집트 노동자들의 필요에 전혀 부응을 하고 있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이고 있다)
예컨데, 이집트에서 유명한 타우피크 알 누르(Tawfiq al-Nour) 백화점 체인의 경우, 전국에서 약 5천 명의 관련 노동자들이 카이로로 집결하여 백화점측에 노동시간 단축과 각종 혜택을 요구하며 싸웠다. 그 결과로 이들은 노동시간을 기존의 16시간(!)에서 12시간으로 줄이고 상당한 수준의 임금인상이라는 양보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많은 파업들이 국영기업이나 공기업들에서도 발생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공장이 민영화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민영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임시직으로 전락하거나 언제든지 해고될 처지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최근의 이집트 파업은 그동안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으로 피폐한 생활로 내몰렸던 전세계(선진국 포함)의 수많은 민중들의 처지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집트 혁명, 그리고 이것과 겹쳐서 진행되는 파업은 단지 후진국에서 독재를 물리치고 국가를 정상화시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중해 건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진국 정부의 긴축 조치에 저항하는 노동 부문의 투쟁과 동일한 지평선에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 파업은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후진국'의 '민생' 시위 정도로 제한하는 것은 곤란하다.
파업과 이집트 혁명 분리해선 안돼
다섯 번째, 노동자들의 파업이 단순히 경제적 성격에만 제한된 것도 아닌데, 여기에는 이집트 구체제를 일소할 정치적 성격도 아울러 공유하고 있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현재 자주적인 노동조합(마할라도 마찬가지)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집트 노조가 국가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 그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은 자연스레 정치적 성격을 띄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파업들이 경제적인 요구와 함께 정치적인 요구까지 같이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다수의 회사 경영진들이 실제로 무바라크 체제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들 대다수는 여전히 경영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집트 파업은 이번 이집트 혁명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질 뿐 아니라, 정치적 부분과 경제적 부분이 섞여 있어 그 둘을 분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만약 이집트 파업을 이번 이집트 혁명과 인위적으로 분리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구체제를 일소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단절시킬 위험을 낳는다.
어찌보면, 이집트 파업과 이집트 혁명과의 관계는 성경의 솔로몬 대왕의 심판 이야기처럼,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던 갓난 아기와 같은 존재다.
종교를 넘어서 민중을 통합시킨 파업
여섯 번째, 많은 사람들은 중동 지역의 정치적 후진성을 탓하곤 했는데, 정작 그것을 근본에서 바꿀 중요한 가능성이 이번 파업에서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물론, 이번 반무바라크 투쟁 과정에서 기독교도와 이슬람이 보여준 연대나, 무슬림 형제단의 주도력 제한, 바레인 시위에서 보여준 수니파와 다수 시아파 사이의 연대 같은 사례들은 출발로서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더욱 더 공고한 지반 위에 서려면 종파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들 이집트 민중들이 공통으로 놓여있는 사회적 지반 위에 서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들의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하는 파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정치세력도 등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마할라 파업은 이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파업에서는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탄생했는데, 이들은 주되게 좌파들과 진보 성향의 변호사들, 인터넷 활동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노조 활동가들과 연계를 가지고 공장과 공장간의 연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이러한 세력의 탄생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중동의 정치 지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에 드러난 위키 리크스의 외교 전문 내용을 보면, 마할라 파업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 미 대사관측은 이 세력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다. "마할라에서 새로운 조직적인 반대 세력들이 표면에 부상했는데, 이들은 현재 이집트에 존재하는 세력에게 붙여지는 정치적 딱지를 거부하고, 명백히 무슬림 형제단과도 연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집트 정부가 정책을 바꿀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집트판 PT당의 가능성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며 그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삼은 정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집트에서(더구나 아랍 세계에 퍼진 무슬림 형제단의 본고장) 세속적이면서도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진보적인 성향의 정치세력이 성장하는 것은 이집트의 정치 풍토를 근본에서 바꾸는 '객토'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최근의 일련의 파업 과정에서 이러한 세력들이 결합하여 일정한 지지세를 형성하게 된다면, 명실상부하게 '이집트판 PT당'이 탄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이런 정치적인 결실은 이집트를 넘어 중동 전역에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혁명이 작은 호수에 작은 돌 하나를 던져 만들어낸 잔물결이라면, 노동자들의 파업과 이에 결합한 대중시위인 이집트 '제2차 혁명'은 그보다 더 큰 돌을 호수에 던져 더 큰 물결을 만들어내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영향으로 각종 반정부 시위를 이끌고 있는 중동 지역 각국에도 한층 더 심화된 자극을 줌과 동시에 그 과정 역시 압축적으로 진행토록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 물결은 현재의 중동 지역의 시위가 단순히 아랍 민족주의의 부활에만 그치지 않게 하는 또다른 요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특히, 국제 체제의 패권이 변하는 상황에서 이집트, 더 나아가 중동 지역의 진보적 세력의 안착화는 중동 지역을 두고 패권을 다투는 패권세력들 턱밑에서 이들의 전횡을 견제할 중요한 가시 역할과 국제적 연대의 안테나 역할을 할 것이다
이집트 파업으로 이집트, 더 나아가 중동 지역은 그런 방향으로 이제 막 기지개를 시작했으며,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중동 지역,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파급력의 차원에서 '1차 이집트 혁명'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
중동, 세계 차원 보편적 저항에 합류 이스라엘 향한 확산 가능성 주목해야 | ||||||||||||
[이집트 혁명] 새로운 중동 출현, 확산 & 구체제 분열, 마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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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얼 / 아이비스 에너지전략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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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파라오' 무바라크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가 축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독재자 축출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로 나선 이집트 시민들과 가슴을 졸인 채 사태 전개를 지켜보았던 전세계의 수많은 '지구촌' 시민들의 연대의 힘이다.
시민이라는 바다 위에 떠있는 선박
군부 집권이나 과도 정부, 혹은 더 다양한 정부 형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지난 보름여 넘는 시간 동안 거리의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변화한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여전히 사태를 결정짓는 주요 배역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향후 구성될 이집트 정부는 각성된 이집트 시민이라는 거대한 밀물이 갑자기 밀어닥친 항구 위에 떠있는 선박의 신세라는 제약을 받을 것이다.
어찌보면, 지난 1979년의 이란 혁명과 그 파급력이 이 지역에서 독재 체제를 유지하던 중동 국가들과 미국에겐, 알토에서 테너까지 음역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저주의 소리였다고 한다면, 이번에 성공한 이집트 혁명의 여파는 국제체제가 놓인 변화된 환경에 힘입어 그 음역을 확대하여 메조 소프라노에서 바리톤의 음역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또한, 중동지역도 과거의 퇴행적인 정치풍토와 구습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의 보편적인 저항운동에 합류했음을 나타낸다.
『세계는 평평하다』를 쓴 토마스 프리드만의 말을 돌려 사용하자면, 지구적 차원의 저항운동이라는 지각판에서 그토록 오래도록 침강 부분을 이루던 중동 지역이 마침내 융기하여 지각판 전체가 평평해질 중요한 전기를 확보한 셈이다.
세계사의 중요한 이정표
이 점에서 이번 이집트 혁명은 1979년 이란혁명과 지난 89년부터 시작된 동유럽 붕괴, 그리고 2001년의 9.11 테러에 이어 세계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쯤해서 이집트 혁명이 가져올 또다른 중요한 측면에서의 변화와 그것이 가져올 전망에 대해서 몇가지 더 짚어보자.
이제는 언론들이나 전문가들도 무바라크 퇴진 이후 사태 전개의 하나로 기타 다른 중동지역의 국가들로의 확산을 가장 먼저 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확산 전망 가운데는 중요한 나라 하나가 빠져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많은 언론들이 이집트 혁명으로 인해 점증하는 이스라엘 내의 위기감 때문에 향후 이스라엘과 미국과의 동맹은 더욱 강화되며, 심지어는 이집트 혁명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군비 증강과 함께 전쟁을 하도록 부추길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느낄 불안은 사실인데, 지난 1월 28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지는 “이집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친구 하나 없는 국가로 남게 될 것이다.”라며 극도의 불안감을 보인 바 있다.
분석 대상 밖에 있는 아스라엘 주목해야
사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덕택에 지난 30년간 이스라엘은 국가 수립 이후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인 중동 아랍 국가들과의 잦은 전쟁 상황에서 빠져나와-남부 전선에서의 평화를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이나 이란, 시리아, 레바논 등 소위 북동 지방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군비라는 면에서도 이집트 무바라크 덕을 봤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79년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이전의 이스라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를 차지할 정도로 부담이 컸지만,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이후에는 그 규모가 GDP의 7%(2008년)까지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이집트 덕택에 이스라엘은 군사비에 대한 부담을 대폭 줄이면서 국내적 안정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이집트의 무바라크 퇴진으로 인한 안보적 불안감이 이스라엘의 대폭적인 방위 예산 증강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가정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연한 한계도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지난 30여년 동안보다 더 확대된 전선에서 아랍 국가들을 상대해야한다는 점도 부담이지만, 그러한 대폭적인 군비 증강조차도 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다.(이것은 이스라엘이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다는 이점도 피해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현재의 경제위기가 이스라엘 노동 대중에게 고통을 가하여 사회적 불만을 낳고 있다. 예컨데, 지난 2월 10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생필품 가격 및 유가 상승 등 폭등한 물가를 잡기 위해 긴급 물가 안정책을 발표했다.
물가 폭등에 따른 서민층의 피해가 늘어나자 이를 줄이기 위해 최저 임금 인상(125 달러 인상)은 물론 지난 해 30%까지 상승한 수도세 인하와 대중교통비 10% 인하, 지난 1월부터 오른 가솔린 가격 동결 등의 포괄적 물가 안정 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집트 노동자 투쟁과 이스라엘 정부의 물가정책
이스라엘 정부가 이집트 혁명의 다급한 와중에도 서둘러 이런 조치를 발표한 데는, 정부가 최저 임금 인상과 물가 인하 등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지 않으면 2주 내에 총파업을 하겠다고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이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위해 예산 한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물가 안정책에 필요한 예산인 약 3억 달러 정도의 재원 마련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위해 정부 부처 예산을 2% 감축과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감세 방안을 1년 뒤로 미룰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가 국방비 비중을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이전 수준으로 대폭 올린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정부가 이런 조치를 서둘러 발표한 시기는 이집트 혁명에서 노동 부문이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들을 제시하며 대규모로 시위에 동참하던 때와 맞물려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보기에 이스라엘 노동조합들의 성격이 많은 부분 퇴행적이라 해도 이들이 자신의 경제적 곤란과 동일한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선 이집트 노동자들의 진출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이집트 혁명이 다른 아랍 국가들뿐 아니라 중동에서 핵심적인 국가인 이스라엘을 파급 범위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요구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주민 대다수인 노동 부문의 요구 역시 드러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스라엘 상층부의 분열 주목할 필요
이스라엘의 호전적인 군사정책은 어떻게 될까? 이 역시 제약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최근의 이스라엘 최상층부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서방 언론들은 주목하지 않고 있지만, 이집트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중동 지역 사태 변화에 대해 위기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정치, 군사 엘리트들내에서 심각한 분열을 겪었다.
한 이스라엘 분석가는 이를 두고 "이스라엘 국가가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다"고까지 평가할 정도였는데, 표면적인 발단은 평상시 같았으면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을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의 교체 문제였다. 현 군 참모총장은 임기가 다 되어 곧 퇴임할 가비 아슈케나지 중장인데,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은 그의 후임으로 요아브 갈란트 소장을 지명했다.
그러나 갈란트 소장은 그가 저지른 불법적인 토지 획득과 관련해 제기된 소송 등 이런저런 추문으로 인해 낙마하고 말았다. 지난 몇 년간 공들인 갈란트 소장이 낙마한 사건은 안그래도 대중적인 인기가 점점 떨어져 위기의식을 느끼던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도 참모총장은 물론 총리까지 역임했다)
여기에 아슈케나지 중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 정보 장교가 허위로 만든 문서가 유출되면서 둘 사이가 더 험악해졌다. 이 허위 문서는 바락 국방장관이 자신이 지명한 갈란트 소장을 군 참모총장에 임명하기 위해 아슈케나지 중장이 내심 밀던 다른 후보자를 공격할 방법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갈란트 소장의 낙마 뒤에는 아슈케나지 중장의 모략이 있다고 여긴 바락 국방장관은 그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바락 국방장관은 허위 문건 작성 유출에 아슈케나지 참모총장이 관련되 있다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그를 강제로 쫓아내려했다.
이스라엘 군부 분열의 배경과 의미
이에 대해 아슈케나지 중장의 지지자들과 바락 국방장관의 다른 정적들이 합세하여 낙마한 갈란트 소장을 어떻게든 참모총장에 다시 임명하려는 바락 국방장관의 시도를 저지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바락 국방장관이 차선으로 과거에 자신이 임명했던 부참모총장 야이르 나베흐 중장을 야슈케나지 참모총장을 대신할 참모총장 대행으로 만들려던 것마저 좌절시켰다.
약 1년 반 전에도 이 두 사람은 부참모총장 임명을 둘러싸고도 이견을 드러냈는데, 당시 아슈케나지 중장은 이스라엘 북부 사령관인 가디 아이젠코트 중장을 원했고, 바락 국방장관은 역시 갈란트 소장을 밀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발생한 이들 사건들은 단순히 당사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경쟁과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깊은 배경은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서 놓이게 된 정치적,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싼 것이었다. 우선, 지역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이란에 대한 대처 문제다.
현재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엘리트 내에서는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 여부를 둘러싸고 분열이 존재한다.
아슈케나지 중장과 전직 모사드 국장인 메이르 다간 같은 사람들은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군사 공격이 불러올 역효과를 염려하여 반대하는 측에 있다면, 베냐민 네타나후 총리와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은 이란 공격에 자신들의 모든 정치적 운명을 걸고 있다.
작년 봄, 이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어 아슈케나지 중장은 시몬 페레스 대통령과 기타 중요한 인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에후드 바락 국방장관과의 관계에 되돌릴 수 없는 긴장을 조성했다.
사실 앞서 바락 국방장관이 참모총장으로 밀다가 낙마한 갈란트 소장은 바로 이런 바락 국방장관과 같이 이란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내보인 사람이었다.
결국 갈란트 소장을 낙마시키고 바락 국방장관의 입지가 약화된 것은 이스라엘 정치-군사 엘리트 내부에서 이란에 대한 일방적인 군사공격을 주장하던 진영에게는 심각한 후퇴였다.
오바마 행정부와 이스라엘 강경 군부의 갈등
미국 역시 아슈케나지 중장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며 바락 국방장관을 주변화시켜왔다. 미 합참의장인 마이크 멀렌 제독은 아슈케나지 중장과는 개인적인 친구인데다가 그의 고별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이스라엘까지 날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예루살렘 포스트>는 '전례없는 행동'이라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반면에 버락 국방장관은 국방장관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에 불참하고 미국을 방문했지만, 도리어 미국은 그를 상당히 냉담하게 맞이했다.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지 1월 21일자에 따르면, 멀렌 미 합참의장이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베니 간츠 중장을 만나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고 한다.
간츠 중장은 미국에서 이스라엘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미국 군부와 깊은 관계를 형성해온 사람인데, 역시 확고하게 바락 국방장관 쪽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바락 국방장관은 미 군부가 자신을 제치고 다른 이스라엘 군 간부들과 접촉하는 것을 불쾌해 한 나머지, 몇 달 전에는 이런 이스라엘 군 간부들과 미군 간부들 사이의 접촉을 억압하려고도 했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 이스라엘 바락 국방장관과 같은 진영에 속한 사람들간의 점증하는 위기는 팔레스타인 문제도 한 몫을 했다. 현 미국의 오바마 정부와 현 이스라엘 정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범했다.
초기에는 바락 국방장관이 전적으로 미국과 대화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 미 행정부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애초에 이스라엘 정부가 약속한 양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며 바락 국방장관을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락 국방장관은 지난 달에도 연립 정부에 참여할 것을 고집하며 자신이 속한 노동당을 분열시키는 무리수를 범하기도 했는데, 당시에 노동당에서는 진전없는 평화협상과 날로 심해지는 이스라엘의 국제적 고립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바락 국방장관을 끌어내리려고도 했다.
미국-이스라엘 차이와 갈등 증대 가능성
결국 단기적으로는 주변 지역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 때문에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이 수 있지만, 그 기저에는 차이와 갈등이 점점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이스라엘 정치-군부 엘리트 내부의 분열상 확대와 이전투구, 스캔들이 가져온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현재 이스라엘 군의 사기는 엄청나게 저하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현재 이스라엘 군의 사기가 지난 2006년 레바논을 침공했다가 헤즈볼라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속절없이 후퇴한 뒤와 유사하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이집트 혁명마저 발생하여 그 대처 방법을 둘러싸고 기존의 이스라엘 상층부 집단 내의 분열과 갈등, 희생양 삼기가 더 빈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이집트 혁명이 이스라엘의 안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쟁들을 이스라엘내에서 점화시킬 가능성이다. 이것은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결렬로 초래될 군사적 긴장의 책임은 이스라엘 측에 먼저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들과 진정한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는 주변국들과의 진정한 관계 개선이 힘들다는 자각을 동반한다. 반대로 기존의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은 진정한 평화협정이기는커녕, 이스라엘을 항상적인 군사적 불안정에 빠트리는 공격적인 외교, 군사정책을 동반했다)
어쨌든 이런 분열상(중동 지역의 기타 권위주의적 국가들도)은 급기야 의도치 않은 정치적 효과를 낳는데, 그것은 상황 통제와 관련된 체제의 무능력과 마비다. 이미 이런 상황은 무바라크가 최종적으로 하야하기 전에 이집트 정부, 여당, 군 내부와 서로간에 보여준 동요와 갈등, 오락가락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러한 효과는 중동 전역에서 이집트의 사례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무대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
저항→위로부터 개혁→테러조직 약화 친미국가들 vs 미국, 갈등 증폭 가능성 | |||||||
[이집트 중간결산②] "중국 패권 실체도 드러내는 계기될 수도" | |||||||
네번째로, 중동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가 이들 국가들의 외교정책과 미국의 패권에 미칠 영향이다.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부의장인 알-바유미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1979년에 체결한 평화협정을 존중할지 여부에 대해 "그 협정은 국민의 동의 없이 체결된 것"이기에 "국민의 의견을 다시 물어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답했다.
위로부터의 개혁과 미국 헤게모니 쇠퇴
설사 향후 선거 논쟁과 향후 구성될 이집트 정부에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까지 논의가 미치진 않는다쳐도, 이집트 정치 체제가 일정한 민주화와 개혁을 겪는다면, 당장 이집트인들 상당수가 반대하는 무바라크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 공동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봉쇄 문제가 정치적 촛점으로 부상하는 것은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점진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할지도 모를 다른 중동지역 국가들 역시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랍 국가들 자체의 정치구조가 점점 대중의 압력에 반응하는 방향으로 변화되면- 물론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더딜 수도 있는데-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패권주의적인 정책을 강제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이란 봉쇄 정책과 테러와의 전쟁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과 관련해 보자면, 이집트를 기점으로 등장한 중동 지역의 새로운 민주화 운동은 애초에 이러한 운동의 결여 탓에 정치적 공백을 채울 수 있었던 각종 이슬람 근본주의적 테러 조직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아랍 각국 정부들이 이집트 혁명에 놀라 정권 안정을 중시하면서 알 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조직보다는 대중의 불만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펼치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서 이전처럼 대중의 반발을 일방적으로 거슬러 지속적인 협력을 제공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실제 미국의 대테러 관리들은 예멘의 보안당국이 예멘의 알 카에다보다는 예멘 수도 사나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위에 대비하여 정부시설 보호에 더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역 대중의 압력이 해당 지역 정부에 일정 정도 반영되는 것을 더는 피할 수 없다면, 미국은 점차 일관된 협력을 제공하지 않는 동맹국들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해야할 처지에 내몰린다.
중동 민중의 둘도 없는 기회
이것은 자칫 탈레반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파키스탄과 함께 탈레반을 공격해야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더 늘어나는 악몽같은 상황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미국이 독자적으로 '반테러 전쟁'을 수행해야 할텐데, 이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더욱 더 주변화시키고, 부시 시절에 겪었던 미국의 고립을 더욱 강화시키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중동 지역 민중들에게는 지역에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대의정부를 가질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일 수 있다.
왜냐하면 냉전 시기에는 반공산주의, 1979년 이란 혁명 이후에는 반이슬람혁명, 9.11 테러 이후에는 반테러활동이라는 미명 하에 미국과 아랍 국가들이 누려왔던 중동 지역 대중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이 일정한 이완을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동 지역에서 더 수준 높고 폭 넓은 대중 민주주의와 운동이 탄생할 비옥한 토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집트 혁명은 좋은 의미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미국과 중동 친미국가들의 갈등
다섯번째, 이집트 혁명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중동 지역 친미 국가들과 미국간의 갈등 노출이다.
사실, 이번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집트 혁명에 대해 보인 '갈지자' 행보는 이스라엘 안보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에 대한 염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무바라크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가져올 지역 권위주의 체제 당국자들에 대한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정부와 이집트 무바라크 간에 퇴진과 정치 개혁을 둘러싼 힘겨루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시피, 무바라크는 미국의 '개혁' 압력에 불편한 감정과 배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인접국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중동 지역 친미 국가들도 공유하고 있는 점인데, 미국의 무바라크의 퇴진 압력은 다른 아랍국가들의 민중들에게 의도치 않은 신호-정부에 대한 저항-를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나 다른 아랍 국가들은 무바라크를 '쉽게 버리지 말라고' 미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왔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의 개혁적인 외양 때문에 앞으로도 혹시 발생할지 모를 중동 지역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할 수도 없는 모순적인 처지다.
반면에 다른 중동 아랍국 당국자들은 미국이 무바라크에게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지 자신들도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과 경계감을 갖게 되었다.
이 점은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나 이란 문제, 아랍 구각 내부의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아랍 국가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갈등을 낳으면서 전체적으로는 미국의 중동 질서 패권에 적지 않은 곤란과 더 나아가 약화를 낳을 요인이 될 여지가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무바라크가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나 오마바의 모호한 태도에 대한 시위대의 불신에서 보는 것처럼 체면을 상당히 많이 구긴 상황이다. 이런 상황 자체가 또다른 측면에서 중동 지역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이전만큼 먹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미국 내부 분열의 가속화
여섯번째, 향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필두로 한 미국 정치의 분열 가속화다. 이미 이집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놓고 미국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은 불일치와 동요, 분열이 엿보였다.
미국 정부가 이집트 특사로 보낸 와이즈너가 무바라크 유임 지지 의사를 표시하자 백악관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놀라며 그러한 주장은 단순히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서둘러 진화했다가 결국 무바라크하의 '질서있는 이행'을 지지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당파에 따라서도 그렇지만 심지어는 무바라크를 너무 몰아붙인다고 오바마 대통령을 비판하는 공화당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월 6일 열린 독일 뮌헨 국제안보회의에 참석한 존 매케인 공화당 미국 상원의원은 다소 엉뚱하지만, "(이집트 시위가 벌어진) 지난 2주는 잠을 깨우는 소리였다."며 "민주주의는 아랍권의 안정으로 이어지며 이는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대외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같은 미국 정부의 혼란이 미국 정치 자체의 분열상 탓에 이번 이집트 사태 한 번에만 국한되지 않을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점차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를 침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인데, 최근에 레이건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추모열기가 미국 정치권에서 이는 것도 이런 상황의 반영일지 모른다.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
일곱번째, 미국을 제외한 다른 경쟁 패권 세력들이 이번 이집트 혁명에 대해 보이는 태도가 가지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들 수 있다. 중국의 <환구시보>는 한 사설에서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색깔혁명'이라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러시아의 <노보스티> 뉴스는 이번 이집트 시위의 배후에는 미국 등 외국 세력이 있다는 한 러시아 중동 전문가의 말을 보도했다.
러시아 외무장관인 라브로프 역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개혁 요구를 한 다음 날, "이집트는 중동 지역에서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핵심 국가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무관심할 수 없다.....우리는 외부에서 이집트 사태에 대한 처방을 내놓거나 최후통첩을 던지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이 베를린을 방문하면서 이집트에서의 즉각적인 "이행"과 "억압이 아니라 대담한 개혁"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유엔 주재 중국 대사인 리 바오동은 이집트 위기는 "이집트인들이 스스로 풀어야하는 내부 문제"라고 말했고, 러시아 대사인 비탈리 츄르킨 역시 "이 문제는 너무나 예민한 (이집트) 내부 문제라서 주권을 가진 해당 국가에 맡겨야할 문제다. 유엔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것들엔 정치 지도자의 눈 앞에서 삿대질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는 무바라크에게 전화까지 걸어 "(이집트) 정치 위기가 법 테두리내에서 평화적이면서 신속하게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모든 입장들은 중국과 러시아가 지정학적으로나 에너지 확보 측면에서 이집트와 협력 관계를 가지려하기 때문인데, 중동 지역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거나 시작하려는 대중들의 눈에 '중동의 새로운 친구'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은 최근에 자신과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는 아프리카 수단에서도 비슷한 곤경에 처해있다. 최근 수단에서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남부 지역은 분리 투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어 국가 수립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그동안 석유 자원이 밀집한 수단 남부에 많은 투자를 해왔던 탓에 그동안 북부 중심의 이슬람 성향의 수단 중앙 정부와 깊은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데, 수단 남부의 어퍼 나일주는 중국의 CNPC가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수단의 기업과 합작하여 원유를 생산해온 곳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수단 중앙 정부가 남부 지역에 대해 가한 억압에 중국 당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 지역 대중의 분리 열망에 대해 미국과는 다른 패권을 자임하는 중국은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어쩌면 새롭게 등장하는 패권 국가로서 중국은 과거 1,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구 영국 제국에서 패권을 이어받았던 미국과 달리 '소프트 파워'라는 면에서 훨씬 더 부정적인 측면을 노출하며 등장하는 셈이다. 결국, 이집트 혁명같은 사례는 패권 전환기에 중국 패권이 가지는 실제적 성격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예시해주는 역할도 한다.
어쩌면 미국과 중국은 둘 다 이집트 혁명 같은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저항에 대해서는 한편이라는 자각말이다. |
노동부문 동참, 독재체제 전복 가능성 종교 뛰어넘는 단결, 새로운 저항운동 | |||||||||||||
[이집트 중간결산①] 권력자 퇴진선언 이어져, 중동이 바뀐다 | |||||||||||||
이집트의 상황이 소강 국면을 지나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몇일 전 수많은 인파가 재차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는데, 경찰의 가혹행위 동영상과 이집트 보안당국에 체포됐다 풀려난 구글 임원이 TV 생중계에 나와 인터뷰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혁명 조기 '유산' 전망과 이집트 시민들의 응답
그동안 무바라크 대통령과 술레이만 부통령이 '개혁'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고 야당과의 대화를 추진하면서 일부 시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하자 보수적인 언론 매체들뿐 아니라 일부 진보적인 매체들조차 이집트 '혁명'의 조기 '유산'을 점쳤었다.(심지어 중동 문제를 진보적 시각에서 보도해오던 영국 <인디펜던트>지의 로버트 피스크 기자도 매우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시민들은 이런 논평가들의 예상에 대해 아직은 아니라고 손을 저은 셈이다. 문제는 어찌보면 단순하다. 무바라크의 독재가 너무나 길었고 시위에 나선 이집트인들이 엄청나게 변화한 데다 시위 도중에 동안 흘린 피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반면에, 이집트 현 정부 당국자들이 내놓은 소위 '개혁' 조치라는 것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도 너무 늦게 제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군대의 진압 가능성을 의심한 이집트 정부가 대신 갱단들을 동원해 시위대에 타격을 주려했던 것이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와 결기만 곧추세우는 결과만 만들었다.
사실 이런 구시대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적인 시위대에 테러를 가했다는 것 자체가 현 이집트 정부가 얼마나 상황 주도력을 상실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의 이런 '개혁' 조치가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었는데, 문제는 그 효과가 이집트 정부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더 폭넓은 부문의 사람들이 시위에 결집하기 시작했고, 시위 양상이 지방 소도시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노동 부문이 움직임 크게 주목돼
가장 중요한 점은 몇일 전부터 이집트에서는 그동안 이집트 정부의 가혹한 억압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웠던 이집트 노동 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위 대중들이 무바라크 정권에 대항해 싸운 결과, 성에 차진 않지만 연이어 정부로부터 양보들을 받아내는 것을 목도한 노동 부문이 이번엔 자신들을 규합하여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고도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 이런 장면은 어쩐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데, 바로 1987년에 우리는 유사한 패턴을 경험했다.
현재 술레이만 부통령은 시위를 해산하지 않으면 재차 경찰력을 투입하거나 쿠테타를 하겠다며 위협하고 있지만, 이조차 쉽게 이루어질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일단 미국은 이러한 조치에 당황하면서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비상조치법을 먼저 해제하라고 다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더군다나 대중 시위가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성격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군대를 성급하게 투입했다가는 자칫 군대 내의 분열만 노출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군대의 분열은 무바라크라는 '파라오' 한 명을 주되게 겨냥한 시위가 각계 각층의 참여가 확대되고, 노동 부문의 동참-특히 수에즈 운하에서의 파업-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자칫 이집트의 구 독재체제 전체라는 '피라미드'를 전복하는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파라오에서 독재체제 전체 전복 가능성
결국, 공은 다시 오바마와 무바라크, 술레이만의 코트 안으로 넘어온 셈인데, 대결 양상은 누가 먼저 벼랑 끝을 앞두고 차에서 뛰어내리느냐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이집트의 상황이 양측간의 더는 피할 수 없는 대결로 가고 있기에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상황이 어디로 갈 지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 '혁명'은 이미 사회혁명의 단계에 도달한 듯보이며, 이는 술레이만 부통령 하의 이집트 정부를 또 한차례의 양보-이번엔 무바라크의 토진-냐 아니면 파국이냐로 몰아넣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이미 이집트 혁명은 그 과정에서 이집트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지울 수 없는 흔적과 의미를 던졌다고 본다.
먼저, 이번 이집트 혁명은 굴곡 많은 중동 역사를 2011년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구분선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중동인들이 겪어온 외세의 간섭과 독재정권들의 연이은 억압 탓에 중동 지역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고사하고 그것을 구체화할 동력으로서 민주주의적 운동, 더 본질적으로 중동인들 자체가 민주적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솔직히 이런 회의적인 시선은 진보적인 진영들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번 이집트 혁명이 고비마다 정체와 소강, 위기를 겪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무심결에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생한 이집트 혁명은 이집트인들도 선진국의 저항들이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수단과 조직 방법, 보편적인 요구 조건과 영감을 바탕으로 정부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동지역의 전혀 새로운 저항운동
두 번째, 이집트 혁명은 기존에 중동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운동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비슷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에 처해있는 아랍 세계에 큰 자극이 되고 있다. 이집트가 중동지역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문화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집트는 중동 지역에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번 이집트 혁명도 그동안 중동 지역의 권위주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채 해결 방법을 모색해 온 수많은 아랍인들에게 일종의 모델과 영감의 원천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는 현대에 들어 아랍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테러주의라는 각이한 저항 방법을 겪어 온 아랍 대중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조직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나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고, 정부의 가혹한 탄압으로 세속적인 성격의 운동이 존재할 여지가 힘들었던 중동 지역에서 종교를 뛰어넘어 대중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이집트 혁명의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이 지역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알 카에다의 극단적인 테러주의나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종파간, 국가간 대립이 정치지형을 지배하면서 외세의 분열 지배와 대중들의 단결을 힘들게 한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종교적 완고함이라는 이미지를 좀처럼 벗기 힘들었는데, 그 결과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실제 이집트만 해도 시위가 벌어지기 전까지 이집트 이슬람교와 이집트 기독교도인 콥트교도간의 충돌이 종종 발생했지만, 지금은 이들 모두가 무바라크에 대항해 힘을 모으고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대중 단결시켜
이런 양상은 이집트 야권 세력의 중요한 주도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시위 과정에서 보인 태도나 입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다수의 아랍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이 단체가 처음 탄생한 곳이 바로 이집트일만큼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도 튀니지보다 이집트에서 훨씬 강하다. 그런데도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은 이번 이집트 시위 뒤따르기 바빴고, 시위에 지도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또한, 여전히 이 단체 일부에는 이슬람 전통의 사회체제를 수립하자는 소수 분파들이 존재하는게 사실인데, 이번 시위의 영향으로 무슬림 형제단 스스로가 지금보다 더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외양과 본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강한 자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하메네이조차도 지난 2월 4일 이번 이집트 혁명의 '세속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30여년 전에 발생한 위대한 이슬람 혁명이 이집트나 튀니지, 기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지난 9.11 테러 이후 중동 지역 정치의 한 변수였던 알 카에다 같은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이번 시위 과정에서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구실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향후 이집트, 더 나아가 중동 정치에 긍정적인 전망을 가져보게 한다.(주지하다시피 이집트는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가 태어나 활동한 곳으로 알 카에다의 또다른 이데올기적 본거지로 지목되는 곳이다)
이란 영향력 없었다는 점도 주목 대상
마지막으로 이란의 영향력도 거의 별볼일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 점은 중동의 친미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충돌에 대해 곧잘 이란의 개입을 운운했던 미국이나 이스라엘조차도 입을 닫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란도 진정한 승자가 될른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이란은 그동안 자신의 혁명 과정과 국가 모델이 중동에서 민중들이 선택해야할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모델이라고 선전해왔지만, 이번 이집트 혁명의 출현으로 이란 혁명 모델과는 또다른 선택지가 중동 민중들 사이에 제시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부분적으로 감퇴하는 상황을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조짐은 망명을 끝내고 튀니지에 돌아온 튀니지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인 라치드 간누치나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부의장인 알-바유미가 향후 건설될 자국의 정치적 모델을 이란에서 찾고 있지 않은데서도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터키같은 체제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고 있는데, 터키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와 함께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일단 가장 민주주의적 체제에 가까운 외양을 갖추고 있다.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퇴진 선언
세 번째, 지난 한 달 사이 4명의 아랍 정부 수반들이 자신의 임기 만료 후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1번이 튀니지에서 축출된 벤 알리 대통령이었고, 2번이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며, 3번이 지난 2월 2일 재선거 도전 포기를 선언한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다. 마지막은 미국이 점령했던 이라크 총리 누리 알 말리키다. 물론 이런 연이은 선거 도전 포기 선언 이전에 이미 레바논에서는 서방이 지지하는 사드 알 하리리 정권이 무너진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집트 혁명은, 튀니지에서는 한 달에 걸쳐 이루어낸 대통령 퇴진 국면을 보름여 만에 국제적 촛점으로 만들었다. 연이어 알제리와 수단, 요르단, 예멘, 쿠웨이트 같은 곳에서도 정부에 항의한 시위들이 발생했거나 예정 중이다.
알제리 야당과 민주화 추진 단체는 오는 12일 정부 불허방침에 불구하고 수도 알제에서 반정부 시위를 강행키로 했다. 현재로서는 이집트가 중동 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국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 때문에 진행이 매우 격렬하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 혁명의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중동지역에서의 재차 새로운 양상으로 이집트 혁명의 파급력이 다시금 속도를 탈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파급이 각 국의 구체적인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즉,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를 접한 친미 아랍 국가들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예방 혁명'적 성격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미 요르단 국왕이 발빠르게 이런 조치를 취하여 대중 시위를 잠시간 잠재웠는데, 대중들로부터 정치개혁이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총리 내각을 해산하며 일정한 정치 개혁을 약속한 것이다.
심지어 중동지역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조차도 이집트 혁명의 지진파를 감지한 상태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이자 메카 주지사인 칼리드 알-파이잘이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주에 이례적으로 5명의 사우디인들을 불러 사우디 제다시(市)에서 발생한 홍수 사태를 수습하는 정부의 노력을 설명한 일이 있었다.
홍해 연안 항구도시 제다에서는 최근 수년간 홍수로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기반 시설의 취약함이 드러나면서 시설 조성 때 광범위한 부패 개입 가능성 때문에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알-파이잘 왕자가 초청한 5명 가운데 정부의 부패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반정부 블로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왕자는 이 블로거에게 민생에 대한 사우디 왕실의 관심 등 이날 대화의 내용을 트위터로 젊은 세대들에게 잘 전달해달라는 특별한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사우디 역시 10%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과 물가상승, 빈부격차, 오랜 독재체제 등 이집트보다 정도는 덜해도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데, 이집트 사태가 아니었다면 이런 조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혁명의 변주
바레인 국왕도 식량가격 급등에 따른 시민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보조금과 사회보장비 증액 등을 지시했다. 물론 이들 정부의 이런 조치들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인 조치조차도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즉,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는 대중적 시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들이 가진 불만에 대해 정부가 취하는 다급한 개혁-물론 부분적이지만- 조치는 대중들에게는 일정한 자신감을 주는 반면, 해당 정부는 이후에도 비슷한 요구들에 지속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상황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집트의 사례가 다른 국가들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더라도, 각 국의 구체적인 상황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영향은 각기 다르게 '변주'될 수 있다. |
첫댓글 잘 퍼나르겠습니다.감사합니다.미쿡 대신 자주동맹 이집트 혁명 완전승리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