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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맺은 언약을 이루어주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십이 될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던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여호와께서 인간의 방법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태를 막아 놓으셨던 사라를 권고하셨습니다. “권고פָּקַד(파카드)”는 “(숫자를) 세어 계수하다, 방문하다, 시찰하다, 보살피다, 감독하다.” 등의 뜻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 가운데 친히 임마누엘하십니다. 함께 동행 하십니다.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모든 일을 권고하십니다. 날을 정확하게 계수 하십니다. 계수가 끝나는 날 친히 역사하십니다.
의인에게는 여호와의 언약이나 작정이 성취는 복된 날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상급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악인에게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저주의 날입니다. 영원한 사망과 징계가 쏟아집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고했음에도 시도하는 일마다 되지 않고 막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떠날 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디서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릴 때도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고질적痼疾的인 문제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고하고 계시기 때문일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권고하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를 위한 당신의 거룩한 작정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여 (결국에는) 선을 이루는 데 쓰인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롬8:28)라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게 만드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들이 결국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선을 이루기 위해서 예비 된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입니다.
비록 낙심되고 절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작정하신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직접 목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자 사라를 돌아보셨습니다.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다.”(히11:11)라는 증거대로, 사라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믿음을 붙잡고 있는 사라에게 불가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호의好意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는 당신의 절대적이고 또 탁월한 주권主權을 행사해주셨습니다. 마침내 약속했던 씨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이 백세가 다 되어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고, 이제는 사라를 통해서도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굳게 믿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이르러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케 해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언약을 믿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난 지 무려 이십 오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너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에는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완벽하게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상이 끊임없이 이어져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은 저와 여러분 안에 인내를 싹틔워줍니다. 인내를 길러줍니다. 인내는 마치 쇠를 연마하듯 저와 여러분의 연약하기만 한 인격을 강하게 단련시켜줍니다.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어주실 위대한 작정을 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깨어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기도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과 시험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기대 속에 늘 깨어 있는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니 실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놀라운 작정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선물로 받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수태 고지를 듣고 웃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려왔던 가족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계승자인 동시에 성민 이스라엘 전체에게까지 미칠 언약의 상속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탄생은 구속사적인 의미에서도 크게 웃을 수 있는 경사慶事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와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릴 가능성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 값없이 선물로 받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삭의 탄생을 통해서 가능성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창17:17b)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의 수태고지를 듣고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웃을 수는 없어서 속으로만 웃었던 아브라함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뻤습니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뻤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이미 증조와 고조를 넘어 오대조五代祖인 현조玄祖라고 소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아들 이상이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섬겨야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몸을 구푸려서 어색한 자세로 이삭의 작은 몸을 처음 팔에 안아보던 순간,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충성스러운 종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종이 되었습니다. 백일 된 손자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간 날이었습니다. 손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손자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들에게 푹 빠져버린 그의 마음에서 우선순위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셨던 여호와는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훔쳐간 이삭을 비난할 수도 없으셨습니다. 사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거듭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언약의 아들이었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인류에게 소망이 되는 아들이었습니다.
곧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실 메시아를 계시해 주는 너무나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거기다 독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를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삭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았습니다. 잠시도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밀접한 관계로 성장했습니다.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극히 좋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나 다 간절히 바라고 있는 더 없이 이상적인 관계였습니다.
오늘 날이라고 한다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관계였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 불러내신 여호와를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이삭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칫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이 중단되는 위험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었습니다. 둘 다 믿음에서 아주 벗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지나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두 명의 주인을 위해서 (똑같은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종은 없다.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하거나, 하나는 떠받들고 하나는 얕보게 된다.”(눅16:13a)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두 주인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삭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고, 원하면 언제든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거기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까지 맛보고 있는 이삭에게 마음을 빼앗길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예를 찾기 위해 굳이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선지자입니다. 종입니다. 종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매여 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전심全心을 다해서 순종해야합니다. 또 절대로 두 주인을 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주인에게만 변함없이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게 되어 있습니다. 혹 두 주인을 똑같은 마음으로 동시에 섬기는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개하기 어려운 어떤 은밀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주인을 자신의 유익과 목적 달성을 위한 무엇보다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상황에 빠졌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둘 다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은 강조를 위한 수사법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여호와께서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아들입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아들입니다. 이십 오년을 기다려서 얻은 언약의 아들입니다. 있는 애정, 없는 애정 다 동원해서 쏟아 부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아들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만 있어도 심장이 심하게 떨리면서 맥이 쫙 풀리는 아들입니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성경은 그날 밤,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b),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b),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b)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흐르는 땀이 마치 핏방울 같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그야말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아브라함이 당한 고통이 이 정도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버금간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비교하는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앞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상 어떤 아버지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했다는 것쯤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이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라면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이라도 하면서 따져보기라도 했을 텐데, 그는 그렇게도 하지 못한 채 극심한 마음의 싸움을 하며 끙끙 앓고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브라함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투쟁하게 될 그 날까지, 그보다 치명적인 고통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도록 허락만 되었더라면, 그것이 몇 천배는 더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는 이미 늙었습니다. 눈은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혈통을 잇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이삭은 건장했습니다.
이삭을 통해 달콤한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속도하지, 하나님께서는 다 늙어버린 자신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새파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만 네 씨라고 부르겠다.”(창21:12b)라는 약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삭이 죽으면 더 이상 씨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정말 짐승처럼 죽여서 불에 태워 번제로 바치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얼룩졌습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길고 또 길었던 밤이 하얗게 새도록 고민했습니다. 갈등했습니다. 번민했습니다.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별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는 동안 곧 어스레한 새벽이 동쪽에서 밝아오기 훨씬 전에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약속으로 받은 아들을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을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전부인 아들을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제물 되는 삶을 살기로 뜻을 정하지 않고는, 아들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철저히 지우지 않고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사람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제물로 바친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시도록 그야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했습니다.
우왕좌왕하며 갈등하던 밤의 한 경점更點에 찾은 그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마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일어났습니다. 아들과 함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길을 떠났습니다. 거침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삭을 결박했습니다.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만큼이나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그런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이제 내려치는 일 하나만 남았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완벽하게 헌신된 자가 되었습니다. 완벽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는 결단코 쉽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까지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격려나 약속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끝까지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당신이 원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그때까지는 마치 없는 분처럼 지켜보기만 하십니다. 드디어 당신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반응하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들어서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자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즉시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이삭의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셨던 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자 상당히 당황해 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그만 됐다. 나는 너를 통해서 이삭을 죽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단지 그를. 나의 성전인 너의 마음으로부터 제거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도전과 방해도 없이 나 혼자 너를 온전히 통치하고 싶었다. 나만 향했었던 너의 사랑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고 싶었다. 이제 이삭을 건장한 모습 그대로 데려가도 좋다. 그를 데리고 장막으로 돌아가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 여호와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서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22:16-18)라는 약속이 또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자신을 사랑해주시는 여호와께 특별대우를 받는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소중한 친구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삭이 아니더라도, 굳이 무엇인가를 소유하지 않아도, 모든 순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자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집중시켰습니다.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로부터 이삭을 빼앗듯 취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비참하고 가슴 아팠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행하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가슴 아프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비참하고 가장 가슴 아프게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던 저와 여러분을 살려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유 전부 아니 저와 여러분 자체를 주고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마음에는 저와 여러분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마음은 당신으로만 채워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고 오히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비웠는데 순식간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하나님의 역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삭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임하실 수 있는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마땅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방치하는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나의, 나의 것, 내 생각”이라는 단어들을 하나의 습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겨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반드시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뿌리를 통째로 뽑아 버려야할 원수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원수들이 저와 여러분 안에 살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결국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잃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원수를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잃지 않는 길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 나의 것, 내 생각,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등을 흔적도 없이 철저히 비워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비울 때 비로소 풍성하게 채워지는 하나님의 역설을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