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지나다니고,
임금의 전화는 큰절을 한 후에야 받을 수 있고,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라디오 소리가 한없이 신기했던 때가 있었다.
신문물이 전해져 들썩들썩 설레었던 그 시절,
맘껏 즐거워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아픈 역사가
라디오를 타고 희망의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 줄거리
이야기하는 재주를 타고난 호아는 청계천변 책방 앞에서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고아인 호아는 외국인 선교사 메리 할머니와 살고 있다. 행랑채에는 동갑내기 경수네도 함께 산다.
호아네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전화가 있다. 이웃들은 급한 용건이 있으면 호아네 집에서 전화를 빌려 쓰곤 한다. 호아에게도 걸려오는 전화가 있다. 다리를 절뚝거리고 전국을 떠도는 동동 구리무 장수 아저씨에게서다. 아저씨는 자주 전화를 걸어 호아의 생활과 안부를 묻는다.
어느 날 호아는 우연히 종로 우미관에서 열리는 라디오 시험방송을 듣게 된다. 선 없이 멀리 있는 소리를 전해 주는 라디오, 호아는 신기해하며 감탄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동짓날, 동동 구리무 장수 아저씨가 호아네 집에 오기로 한 날이다. 호아는 선물을 장만하고, 하루 종일 아저씨를 기다린다. 하지만 늦도록 아저씨는 오지 않고, 웬일인지 순사가 들이닥쳐 메리 할머니를 잡아 간다. 호아는 이때 순사 몰래 할머니의 비망록을 숨기는데, 거기서 구리무 장수 아저씨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 후 경찰서에서 풀려난 메리 할머니는 미국으로 추방된다.
열네 살이 된 호아는 목소리로 아빠를 찾기 위해 전화 교환수가 된다. 하지만 아빠를 찾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말하는 기계로, 일하는 노예로 취급당한다. 호아는 사람답게 대해 달라는 요구를 하다 교환수에서 쫓겨난다.
이후 호아는 전화국에서 만난 기자의 도움으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다. 목소리를 듣고 아빠가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뒤이어 조선의 자체 방송국을 세우려고 계획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된다.
얼마 후 순종의 국상날,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경수를 비롯한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며 만세 운동을 벌이는 사이, 누군가 종로경찰서를 폭파시킨다. 자전거를 타고 수리공으로 변신해 경찰서로 들어간 그 폭파범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호아는 그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린다는 증언을 듣고 서둘러 교회당으로 향한다. 예상대로 그 사람은 호아가 애타게 찾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잡으려는 일본 순사도 함께 들이닥친다. 호아는 교회 종탑을 울려 아버지를 피신시키고,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 순사의 칼에 맞으려는 위기의 순간, 아버지에게 구출된다.
다시 봄, 만세 운동으로 정학 처분을 받은 경수는 학교로 돌아온다. 반면 호아는 만세 운동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경수는 우연히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다가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호아의 목소리를 듣는다. 라디오에서 울리는 호아의 목소리는 민족의 봄, 독립의 희망을 전하고 있었다.
▣ 작품 소개
1920년대 일제 문화통치의 아픈 역사가 이야기로 되살아나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서 신음했던 1920년대 조선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작가는 1924년 조선일보의 우미관 라디오 시험 방송이라든지, 1926년 순종 황제 인산일의 6.10 만세 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을 줄기로 삼아 이야기를 엮어 간다. 더불어 작품 곳곳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삼엄함을 사실적으로 그려 민족의 아픔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우리말조차 ‘국어’라고 할 수 없었던 식민지 현실이 담담하지만 실감나게 담겼다.
일본 순사들은 조선 사람이 한데 무리 지어 있으면 의심의 눈길부터 보냈다. 몇 해 전 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로 더 그러는 것 같다. --- 본문 11쪽에서
언젠가 호아는 경수가 학교에서 배운다던 국어책을 본 적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어가 줄줄 쓰여 있었다. …… 호아는 그때 우리말, 즉 조선말이 국어가 아니라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또 국어인 일본말을 학교에서 제일 많이 배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본문 18쪽에서
호아는 길가에 늘어선 흰색 물결 사이사이에 시커먼 제목 차림의 순사들이 버티고 서 있는 걸 보았다. 호아의 앞쪽에는 기마경찰이 말 위에 올라탄 채 긴 칼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호아는 괜스레 등골이 서늘해졌다. --- 본문 136쪽에서
일제는 1919년 삼일 운동을 계기로 문화 정치로 식민지 지배 전략을 바꾼다. 그 결과 이전에 비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조금은 허용되었고, 그 동안 전래되었던 근대 문물 역시 더욱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종로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 교환원을 통해 연결되었던 전화, 그리고 선 없이 멀리 있는 소리를 전해 주던 라디오까지…… 식민지라는 삼엄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신기한 근대 문물에 설레고 흥분되었다. 때론 낯선 근대 문물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생길 정도였다.
“…… 전화가 울리자 곁에 있던 신하가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연거푸 하더구나. 그런 다음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수화기를 귀에 댔단다. 임금의 전화를 받기 위해 신하들은 그런 예절을 갖추어야 했던 게지.” --- 본문 58쪽에서
근대 문물은 사람들의 생활을 무척이나 편리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에서 우리 민족은 이 문물의 진정한 주인이자 수혜자는 아니었다. 근대 문물은 일제의 지배 수단으로, 수탈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래도 더 나은 길, 옳은 길을 꿈꾼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화를 독립 운동의 연락망으로, 라디오를 민족 단결의 외침으로 활용하여 근대 문물을 독립의 수단으로 쓰고자 했다. 더 나아가 새로운 문화의 종이 아닌 주인으로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일제 강점기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호아를 둘러싼 인물들의 다채로운 사건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그려 내고 있다. ‘그때 누군가 보고 겪은 이야기’로 그 시절의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다.
독립의 희망은 라디오를 타고…….
호아와 경수는 종로를 조금 지난 동네 북촌에 산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에 속하는 북촌은 조선 사람들의 뿌리 깊은 지역이다. 반면 일본인이 주로 사는 청계천 남쪽 남촌은 최신식 건물과 으리으리한 상점이 늘어서 있다. ‘북촌의 하늘은 어둡고 남촌의 하늘은 밝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조선인의 마을 북촌은 일본인의 마을 남촌에 뒤쳐져 있다. 서양에서 온 선교사 메리 할머니는 호화로운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을 내려놓고, 조선 사람들 속에서 조선 사람처럼 살기 위해 북촌에 터를 잡는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을 구제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북촌에서 메리 할머니는 호아의 부모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에 강제로 토지를 뺏긴 호아의 부모는 상경하여 호아를 낳는다. 몸이 약한 엄마는 호아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마저 야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순사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호아를 떠나간다. 메리 할머니는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호아를 살뜰히 보살피며 키운다. 할머니는 독립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엔, 미국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하고 조선에 대한 책도 펴낸다. 외국인이지만, 저널과 출판이라는 근대 문물을 조선 독립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모습은 조선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메리 할머니뿐 아니라 일제의 토지개혁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호아네 부모, 일제의 핍박에 내몰려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호아의 아버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늦도록 토론하는 경수를 비롯한 학생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아픈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호아는 맘속 깊이 외로움과 아픔을 갖고 있지만, 언제나 밝고 당당하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도 잘하고, 고아라고 놀리는 친구와 맞붙어 싸우기도 한다. 전화국 감독에게 사람다운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일본 순사에 맞서기도 한다. 이런 호아의 모습은 마치 암울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일제에 맞서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과 닮아 있다.
호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근대 문물인 라디오를 통해 조선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는 민족 독립을 꿈꾸는 우리는 하나임을, 우리가 하나인 이상 우리의 봄은 멀리 있지 않다고 알려 준다. 그리고 봄이 오는 순간까지 의지를 꺾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는다. 라디오를 타고 독립을 염원하는 호아의 목소리가 끝까지 여운을 남긴다.
“…… 우리의 봄은 멀리 있지 않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빼앗긴 봄을 되찾는 그날까지 이 방송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조선의 동포 여러분, 지금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고, 당신과 내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면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지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니까요.” --- 본문 154쪽에서
▣ 차례
1 소리를 그리는 아이 ······ 7
2 전화가 있는 집 ······ 15
3 아저씨의 선물 ······ 25
4 신기한 무선전화 ······ 41
5 기억을 담은 책 ······ 51
6 밤이 가장 긴 날 ······ 63
7 아무리 무서운 곳이라 해도 ······ 75
8 할머니의 비밀 ······ 83
9 조선 호랑이처럼 ······ 99
10 말하는 기계 ······ 109
11 아버지를 찾는 길 ······ 119
12 다시 울려 퍼지는 만세 ······ 127
13 지금은 라디오 시대 ······ 145
작가의 말 ······ 156
▣ 작가 소개
경기도 부천에서 나고 자랐다. 연세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어린이책 작가 교실에서 동화를 공부했으며, 다양한 글감으로 술술 읽히면서도 곱씹을 만한 책을 쓰고자 힘쓰고 있다. 담백한 문체로 풀어낸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지은이의 첫 번째 이야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