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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3월이 시작되었고 온 국민이 3일 연휴에 봄을 찾아서 서울과 경기에서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2월 28일 오후에 군산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오는데 서울로 오는 사람도 많고 내려가는 사람도 많고 서울에 오니 서울이 한적합니다. 그리고 3월 1일에 수백만의 사람이 모여서 탄핵 반대 운동을 합니다.
20 대 대학생의 외침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손자뻘 되는 학생들이 이제 막 대학의 배움을 시작한 학생들이 나름대로 논리가 있고 풋풋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어른들이 정신이 나가니 아직 속히 배워야 하는 학생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40-50의 아버지 세대의 각성이 촉구 됩니다.
오늘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벽하면 세상의 모든 국가와 사상과 조직과 그리고 사회는 이에 비해서 너무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완벽함을 모르고 이런 불완전한 사상과 그리고 가르침과 법과 조직에 빠져서 생명을 걸고 사니 이것이 무지와 혼미와 그리고 죽은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죽어 있는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60평생 그리고 70평생을 살고 그리고 죽습니다. 저는 이제 이런 과정을 다 겪었습니다. 어릴 때 반짝이는 두뇌로 저의 부러움을 사던 친구는 아직도 온 세상의 사상을 다 섭렵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듯 달관한 모습으로 사나,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가정도 없고 홀로 죽음에 대한 대책도 없으니 하루하루가 불안과 그리고 날마다 약해지는 기력과 정신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여전한 고집으로 근근이 견디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헛 웃음을 치나 그 공허함과 연극은 바닥이 났습니다. 우리는 똑똑한 우리의 결정으로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공불 잘하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을 믿고 그 머리로 공부로 일이 술술 풀리면 그냥 그대로 믿고 살다가 죽습니다. 대통령도 되고 판사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교수도 되고 살다가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죽으니 평범한 사람도 나름대로 자신이 믿는 바가 있으니 누가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저는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것입니다. 제가 살면서 배우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의 사상과 지식에 대한 분별력으로 저도 역시 그렇게 세상의 것들에 빠져서 살다가 빠져나오고 버린 것들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사람은 제가 소개할 사상과 지식과 경험과 주장과 주의에 빠져서 그것을 진리로 믿고 삽니다. 성경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를 알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면 배설물로 여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들을 심지어 나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들을 진리로 착각하면서 삽니다. 저도 온전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한 만큼 전합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하고 배우고 알고 깨달은 모든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기에 이를 전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만 조금씩 시간대는 데로 전할 것이니 자주 오셔서 참고하시고 더욱 진리로 깊이 나아가기 바랍니다.
먼저 세상의 가르침에 대해서 같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최근의 고승으론 성철과 법정 스님이 있습니다. 성철의 백일법문은 불교의 각종 교파와 고승에 대한 정리 자료로서 불교 서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서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분께서 신학에 입문하셨으면 위대한 세계적인 신학자가 분명히 되셨을 것이라 이 책을 보면 인정이 되는 책을 쓰시고 그분의 고행과 정진은 많은 분이 인정하고 본받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서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 소리, 무소유 등의 책을 저는 20대에 읽고 이분과 같이 청청하게 살고 싶어서 이 분과같이 산에서 명상하고 화두를 잡고 씨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보니 불경의 내용과 너무나 많은 닮은 점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석가는 사색의 사람으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인생의 고뇌를 보고 이를 해결하고자 출가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득도해서 불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리고 9년 면벽의 달마를 거쳐서 역시 그와 같은 해를 장좌불와한 성철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파와 고승들과 전설로 한국의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지금도 한국인의 약 30%는 스스로 불교신자로 소개합니다.
유명한 색즉시공
물아일여
자타불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고려 시대 당대의 최고의 고승은 색즉 시공 즉 색 눈이 모이는 사물이나 현상이 실상은 헛것이라는 가르침을 굳게 믿고 모든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며 생불로 불리고 있었는데 이를 하짢게 여긴 황진이가 도전을 합니다. 속이 비치는 비단옷을 입고 옷에 물을 묻히고 고승 앞에서 속살이 헌이 비치는 상태에서 하늘하늘 춤을 춥니다. 고승은 웬 헛것이 눈에 아른거리냐 하고 외면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황진이는 더욱 힘을 내어서 춤을 춥니다. 어느덧 고승의 피가 끊습니다. 이런 시험을 거친 적이 없어 처음 당하는 시련입니다. 고승도 가르침대로 헛것으로 믿고 끊는 피를 억제하고자 합니다. 육과 정신으로 형성이 된 육체를 가진 인간 남자가 여자를 보면 보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육이 이 가르침 색즉시공을 이깁니다. 헛것이면 그냥 지나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은데 이 헛것이라 믿은 형상이 아름다운 황진이 본채로 하늘거리니 이 고승의 일생의 공력이 날아가고 파계합니다. 설 씨의 조상인 일체 유심조의 창시자이며 한국 선종의 창시자이신 원효는 중국으로 불도를 배우기 위해서 가다가 동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목이 말라 어두운 가운데서 그릇으로 보이는 곳에 고인 물을 아주 달게 마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니 해골에 고인물인 것을 보고 아!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구나 하고 깨닫고 중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체 유심조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설총을 낳습니다. 그리고 설 씨는 오랫동안 혈통을 잘 유지해서 한국의 설 씨의 조상이 됩니다. 아마도 신라시대부터 약 1500년을 혈통을 이어옵니다. 이 혈통의 유지를 통해서 예수님의 혈통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그렇게 맞다라는 이해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이 아니라 색즉시존입니다. 보이는 형상, 혹은 물체가 그대로 창조주의 작품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색즉시공을 깨는 유명한 성철의 고찰이 있으니 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깨는 파격입니다
어느 날 색즉시공을 명상하고 화두로 삼고 용맹정진하던 성철에서 사물이 공이 아니라 실존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득도의 송을 남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입니다.
불교로 보면 파격이지만 성경으로 보고 일반인이 보면 그냥 보이는 것을 보이는 데로 실존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종류 대로 남녀를 따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이분께서 깨달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실상은 천지를 만드신 분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저도 산에서 명상하다가 오월의 어느 봄날 산 중턱에서 놀라운 깨달음을 보고 몇 년을 숨기며 산 적이 있습니다.
법정과 성철과 같이 되고 싶어서 산에서 수도를 하던 5월의 어느 날 장유의 산 중턱에서 바라본 신록이 파릇 파릇 돋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몰랐던 놀라운 깨달음이 왔으니 저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즉 창조된 것이다 란 깨우침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깨달음으로 왔으니 이를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성경을 예수님의 인도로 보게 되었습니다.
석가는 생로병사, 인생팔고, 백팔 번뇌를 끊고자 사유한 끝에 욕심과 집착의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를 멸하고자 8가지 올바른 방법의 정진을 하면 마침내 이 죽고 살고 늙고 병드는 인생을 해탈해서 성불하게 된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진작 인도에서 시작이 된 불교는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인도에는 힌두교와 이슬람에 더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질서를 보면서 인간의 사유로 풀고자 하니 인간의 수준에 그치고 이제는 온 지구상에 별로 믿는 사람이 희박합니다. 80억의 인구 중에서 1억 명 정도가 믿으면 약 1%가 조금 넘는 사람이 믿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행정학의 체제론과 비슷한 원칙을 가장 중심으로 삼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칩니다. 자신이 우주이고 자신이 모든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종교로서 개인의 해탈과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나 고승이 죽고 화장하고 사리도 줍고 사리탑도 세우나 그 사람은 홀로 죽고 지구에 남은 모든 만물과 사람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우리가 죽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이미 죽은 나 혼자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을 그대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먼지에서 온 내가 하나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며 나와 모든 만물은 비록 조금은 관계를 갖고 살았지만 나의 죽음과 무관하게 그대로 조금도 먼지 하나 변치 않고 그대로 존재합니다. 어느 주장이 더 맞습니까? 나를 통해서 우주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사상은 나와 함께 우주도 사라집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으로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믿는 성경의 가르침은 나와 별개의 사물을 인정하고 사람도 인정하고 나만 죽은 것으로 모든 만물과 사람은 다 그대도 존재함을 믿습니다. 내 중심의 인간의 좁은 머리로 천지 만물의 질서를 풀고자 하나 개인의 죄 문제 해결 못하고 그냥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고 다스립니다. 더운 여름날 택배를 해 보신 분은 어느 종교가 올바른지 바로 압니다. 택배는 숫자가 많고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엘레베이트가 있는 곳은 그래도 낫습니다. 그냥 5층을 계단으로 올라가면 몇 집을 못 가서 땀이 옷에 흥건하고 수십 년 배출되지 않던 묵은 것들이 밖으로 배출이 되는 느낌으로 택배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어떤 분은 차가운 물을 한 잔 내줍니다. 대부분의 분이 벨을 눌리면 나옵니다. 그런데 택배를 받으려고 걸어서 내려오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르침을 찾아서 허덕이며 산에 오니 또 3천 배가 기다립니다. 그리고 한 말씀 듣기 위해서 기다리니 삼척 동자도 아는 산은 산이라고 합니다. 물은 물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믿는 종교입니다. 나와 너를 다른 실체로 인정합니다. 고려의 황진이에 패한 고승이 예수를 알았다면 황진이가 그렇게 도발할 때 먼저 성경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어찌합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젊은 여자는 동생으로 여겨라 나이가 든 여인은 어머니와 같이 여겨라 그리고 어린 여인은 딸과 같이 여겨라 이 말씀을 보면 친 동생이 살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백주 대낮에 도발을 하니 이 미친년이 뭐 하는 짓이냐? 하고 호통을 치고 옷을 입어라 하고 그래도 멈추지 않고 덤비면 그냥 그 자리를 피하면 아무런 죄도 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타불이라 해서 내가 너고 네가 나이다 하면서 둘이 하나니 서로 사랑해라 불교는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 다르게 남과 여로 만들어서 둘이 서로 다른 객체이고 결혼을 해서 몸도 마음도 하나로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인을 순결하게 하도록 다른 사람과 서로 간음이나 간통을 하는 경우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은 한 번 왔다가 살다가 그대로 죽으면 심판이 있고 부활이 있을 뿐입니다. 윤회는 이런 인생이 계속 사람으로 동물로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개와 친구도 되고 애인도 되고 홀로 너무나 친하게 지내다 그 개가 죽었는데 교회에서 개는 영혼이 없이 육체만 있어 그대로 흙으로 가고 끝이다 하고 불교는 아니다 다시 동물이나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니 그 개를 그리워해서 잠시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온 경우가 있습니다.
성철은 죽으면서 일생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꾀어서 그 죄가 너무나 커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죽었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네
活陷阿鼻恨萬端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나니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인생의 문제가 죄냐 혹은 고통이냐를 두고 예수님과 부처는 다르게 설명합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로 본 부처는 그 고통을 해결해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고통의 바다면 모두가 그 고통을 두려워해 죽고자 할 것이나,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듯이 사는 것은 모든 늙은 사람과 병든 이의 그리고 사형을 앞둔 이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왜 사는 것에 그렇게 목을 매답니까? 사는 것에는 그만큼 즐겁고 신나고 살 만한 것들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먹는 것 3시간 행복합니다. 먹으면서 고통스러운 사람은 극히 드물니다. 하루의 1/8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잘 때 고통스러운 분도 별로 없습니다. 하루의 약 1/3입니다. 그리고 배설의 기쁨이 있고 남녀의 사랑의 나눔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취하는 기쁨이 있고 자녀를 낳고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의 우정이 있고 일하는 곳에도 기쁨이 있고 배우는 기쁨이 있고 쉬는 여가의 기쁨이 있습니다. 술 한 잔에 노고가 풀립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이 나서 죽을 때도 믿는 이는 기력이 다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잠시 육체적인 고통이 있을 수가 있으나 곧 천국입니다.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있지만 자녀가 이쁘니 곧 잊고 또 자녀를 낳습니다. 병들어도 고치면서 삽니다. 인생은 살만한 것들로 가득하지 고통은 잠시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제 자체가 틀립니다. 고통은 잠시이고 기쁨은 영원하며 그 고통도 하나님께서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이나 전제가 잘못이 있으면 그 나머지 모든 이론과 주장은 다 헛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가정부터 틀린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성철은 죽으면서 죄의 문제를 논의합니다. 죄업이 가득한데 이를 풀지 못하고 죽습니다. 죄는 수행이나 고행이나 도를 닦음을 통해서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성철이 일생의 고행을 통해서 풀지 못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난 것입니다. 이 어긋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죄이고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질서가 있고 인간과 하나님의 질서가 있고 인간과 인간의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질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이를 잊고 인간이 무언가 하고 무언가 해결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헛수고이고 죄를 더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십자가 대속과 피 흘림을 믿는 것을 통해서 죄는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사람에게 범한 죄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그분의 이름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가 있는 사람에게 평화가 오니 이는 그 사람의 수양이나 덕이나 노력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분별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행복하게 거짓에 미혹됨이 없이 사라고 하십니다.
나무로 만들고 철이나 동이나 금으로 만든 우상은 앞에서 욕을 하고 똥과 오줌을 싸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생명이 없는 헛것이라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 존재에게 가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가서 절하고 경배하니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는 인간에게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만듭니까 만든 이가 사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듭니다. 지금은 로봇도 만들고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이 말도 하고 정보도 주고 사람이 하는 많은 일을 해서 인간을 대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의 집합체이고 여전히 기계이고 바둑도 이기고 계산도 인간보다 너무나 빠르나 너무나 다양하게 인간에게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만 기계입니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지식의 집합체로 태양에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그냥 유용한 일에 올바르게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성철 스님의 가장 큰 죄는 자녀에 대한 죄입니다. 수행하다가 결혼을 해서 집에 둔 아내에게 오랜만에 갔다가 제발 씨를 남겨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잠자리를 해서 딸을 낳았습니다. 잠자리를 하는 것도 딸을 낳는 것도 원효도 했으니 누가 뭐라 할 수고 없고 예수를 믿는 우리는 당연한 일이니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딸의 이름을 불필이라 지었습니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딸은 그 이름을 가지고 나중에 또 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필요 없는데 났으니 이를 어찌 감당하고 살았겠습니까? 딸에게 필요한 것은 고승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그냥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는 모든 아버지가 하는 사랑을 왜 못하고 딸도 일생을 그렇게 살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딸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원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가정에서 받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이해하고 또 그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가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 그리고 자신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저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하고 용서를 해 주십니다. 이를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용서를 본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어떤 딸이 평생을 어둡게 몸을 팔면서 살다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용서하는 길을 찾아서 결국 용서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망가진 몸과 영혼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며 축복을 받으면서 사는 간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게 저의 여러분 모든 분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자비를 강조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며 그리고 죄를 짓지 말게 하는 좋은 점이 있는 불교이나 근본적으로 가정이 틀리고 인간의 사색에서 나온 온전치 못한 가르침으로 죄의 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해결을 하지 못함으로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온전치 못한 종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단순히 절에 가서 복을 빌고 자녀를 낳고 만사 형통하는 정도로 절대로 살아서는 아니 되는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재 창조가 되어서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따라 행하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결국은 천국에 가서 새 하늘과 새 지구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왕이신 예수님과 영원토록 시간이 가는 줄로 모른 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행동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타인을 가장 사랑하는 행동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모두가 전도자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어제 속초에 왔는데 눈이 많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대부분 다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죄에 빠져 죽어 있는 영생을 상실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합니다. 죄가 우리를 이렇게 70-80년 살다가 죽게 했으니 이 죄를 해결해 주시고자 합니다. 인간이 도를 닦고 수양과 고행을 해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댓가를 치루어야 되는데 그 댓가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의 댓가로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 아담을 창조하실 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에덴에서 천국과 같은 에덴에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낙원에서 추방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지고 볶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다다 하고 믿고 죽음을 운명으로 여기고 사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동정녀를 통해서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그리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제 죄가 없으진 깨끗게 된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 몸을 그대로 두고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새로운 창조물로 우리를 완전히 바꿉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창조물은 이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킵니다. 이 법대로 살면 이 땅에 모두가 행복한 천국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수행도 고행도 도를 닦는 것도 아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악된 행위를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고 선하게 살면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의 행위인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하나가 모든 고승보다 깨끗하고 죄가 없고 천국에 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고 고행을 해서 죄가 없어지지 않은 고승이라는 사람보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의 시민이요, 일생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쁜 소식이 우주 최강의 복된 소식 복음이요,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시는 이 땅의 천국은 개인의 해탈로 행해서 오는 세상과 비교가 되지 않게 공평하며 정의롭고 신뢰할 만한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어서 유교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