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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의 명장’ 김백일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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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창군작업에 참여
고
김백일 중장은 1951년 3월 28일 대관령 부근에서 작전 도중 항공기(L-5)가
추락,34세로
호국의 별로 산화한 6·25전쟁의 영웅이다.
그는
북간도에서 출생했으며, 그곳 길림 고급 중학교를 거쳐 40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내의 한인특설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맞았다.
광복이
되자 백선엽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고향이 공산치하에 지배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해 말 다시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결국
그는 조국의 간성이 되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 중위로 임관했다.
당시
미군정의 한국군 창군계획에 따라 김중위는 전북 이리에서 육군 제3연대를 창설하기
위해 김종오·이한림·백인기·정래혁 소위 등을 지휘해 중대 창설에 이어 대대·연대를
창설했다.
그 후
그는 건군 과정과 인재 육성에 주력해 육군사관학교 교장, 특설부대 사령관, 옹진지구전투사령관, 작전참모부장, 제1군단장 등의 임무를
수행,
오늘날 굳건한 국군을 건설하는 견고한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 대관령에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
유엔군의 재 반격이 완료되던 무렵인 51년 3월 28일,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여주 지휘소에서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여주에서
한미 지휘관회의를 마치고.....귀대할 무렵....>
회의에는
미군 측에서 사단장 이상 전 지휘관이 참석했고, 국군 측에서도 정일권 총장을
비롯해 김백일· 유재흥, 그리고 장도영· 백선엽 장군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캔사스선(임진강~양양)에서의 공세적 방어 작전이 하달됐다.
회의가
끝나 귀대할 무렵 갑자기 기후가 돌변했다. 이른 봄 특유의 기상악화였다. 이때
김백일 장군이 하진부에 배치된 제9사단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서둘러 귀대하려 하자 동료 지휘관들은 물론 조종사마저 비행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악천후 속에서 경비행기(L-5)로 험준한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태백산맥의
산령 위를 비행하던 경비행기는 시야가 흐려진데다가 갑자기 커진 빗줄기에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대관령 산중에 추락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의 유해는 한 달 후에야 발견돼 육군장으로 부산에 안장됐다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돼 영원히
잠들었다.
김장군의
생전 공적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뜻으로 부산 동쪽 금련산에 전공비가
건립됐으며 이로써 그의 공훈이 후세에 빛나고 있다.
그는
혁혁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아울러 중장으로 추서됐다.
고
김백일 중장은 나라 잃은 서러움에서 스스로 택한 군생활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으며 탄우 속에서도 진두에서 부하의 사기를 북돋웠을 뿐만 아니라
오직 조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하다가 죽음의 벼랑으로 추락한,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야전의
명장이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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