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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강의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자기를 알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일반적으로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참나, 불성, 진면목 등으로 표현합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주로 마음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애정의 뜻으로 ‘자기’라고 해요.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가 아닙니다.
티벳 불교의 중심은 바로 자기, 불성입니다.
티벳 불교는 불성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것은 심오하고, 분별이 없고, 찬란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심오하다는 것은 근본불교의 가르침인 사성제를 의미합니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인 공 사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찬란하다는 것은 금강승의 가르침인 불성을 가리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륜을 세 번 굴리셨습니다. 실상을 세 종류의 가르침으로 밝혔습니다.
초전 법륜은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셨고, 중전 법륜은 영축산에서 반야, 공 사상을 설하셨습니다.
삼전 법륜은 준비된 이들을 위해 곳곳에서 불성을 설하셨습니다.
불성, 즉 자기를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로 몸, 마음, 이름을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피곤하면 ‘내’가 피곤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슬프면 ‘내’가 슬프다고 합니다. 이름을 부르면 ‘나’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는 자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무심코 자기에게 집착합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이생에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자기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불성을 마음의 본성, 청정본심, 릭빠(rigpa)라고 합니다.
릭빠는 awareness, 다시 말해 자각,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불성은 의식을 의미하는 겁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세 가지 무한한 성품으로 불성을 정의합니다. 세 가지는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힘입니다.
무한한 자비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연민입니다. 무한한 지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무한한 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품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무한하게 훌륭하고 순수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본질적으로 나쁘면 희망이 없어요. 우리는 본질적으로 순수하지만 습관적으로 안 좋아요. 본질은 버릴 수 없지만 습관은 버릴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천은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얼룩이 묻어서 지우면 천의 순수한 본질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업을 닦으면 청정한 본성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처님과 똑같아요. 우리 모두 부처님입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보면 부처님이고, 참 모습을 몰라보면 중생입니다. 수행은 이 사실에 대한 자신감을 기르는 겁니다. 우리는 불성을 모르고 계속 자기를 구체화해서 없는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생각으로 자기를 계속 정의하면서 자기 집착을 키웁니다. 모든 고통과 장애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자기를 더 이상 정의하지 않고, 생각으로 만든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리의 참본성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고요하고 명료하고 행복합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생각이 없고 개념에서 벗어난 겁니다. 명료하다는 것은 식識이 있다는 겁니다.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비춰 주는 자각입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무한하게 평화롭고 충만하다는 겁니다. 조건 없는 사랑 같습니다. 수행의 길에서는 이 세 가지 특징을 번갈아 가면서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지극히 고요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명료합니다. 때로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체험하면 평생 찾고 그리웠던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경이롭고 반가운지요!
자기를 모르는 이유는 생각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알기 위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초월해야 합니다. 자기 집착, 탐진치, 윤회와 고통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계획하거나 공부할 때의 생각은 필요하지만,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생각을 계속 이어서 구체화하는 것이 윤회입니다.
수행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참본성과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생각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생각에서 놓여나고 참본성이 드러납니다.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집착해서 고통을 만듭니다. 수행의 진수는 생각을 놓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방하착, 놓아 버리기, 내려놓음, 받아들임, 하심, 알아차림, 전부 다 생각을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우 간단하지만 엄청 어렵습니다.
알아차림으로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여기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겁니다.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명료하고 행복합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자신입니다. 여기 이 순간에 있으면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행복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 이 순간에 마음을 열어서 행복합니다. 불행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생각을 굴려서 불행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평화로운 알아차림입니다. 행복할 때 본성과 가까이 있는 겁니다.
평생 살아도 항상 놓치는 것이 자기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자기를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티베트 말로 쎌똥sel-tong이라고 합니다. “쎌”은 명료하다는 말이고 “똥”은 공하다는 말입니다. 공하다는 것은 허공과 같다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허공처럼 걸림이 없고 자유롭고 무한하고 비어 있어요. 동시에 식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경험이 자기가 아니고 경험의 본질이 자기인데 본질을 놓치고 경험에 사로잡혀 삽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볼 때 스크린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스크린을 자각하지 못하고 비치는 내용에 사로잡힙니다. 스크린은 참본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스크린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참본성이 있어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을 자각하면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경험의 본질과 삶의 본질과 자신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것이 스크린 즉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입니다. 내용은 변하지만 스크린은 변치 않는 것처럼 경험은 늘 달라지지만 참본성은 변함이 없어요. 모든 경험의 배경, 즉 참본성은 잘 보이지 않아요. 늘 놓치는 본질을 알아봐야 자기를 알게 됩니다. 본성은 때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눈썹보다 가깝지만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도의 위대한 대성취자 틸로빠께서, “일체 붙잡는 게 없을 때 참본성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하셨어요. 마음을 그저 쉴 때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마음을 어떻게 쉽니까? 몸을 쉬면 마음도 따라서 쉬어집니다. 몸은 어떻게 쉽니까? 긴장을 푸는 겁니다. 긴장을 풀면 따라서 생각도 쉬어집니다. 생각하고 있는 한 몸에 긴장이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면 생각도 풀립니다. 본성과 연결하는 키워드는 릴렉스입니다. 릴렉스하는 순간, 생각에서 놓여나고 마음이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명상하고 있지 않지만 산란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자유로운 알아차림, 진정한 명상입니다.
티베트 요기들의 토굴 벽에는 “마엥”, “마곰”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마엥’은 산란하지 않는 것이고 ‘마곰’은 명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상 없이 그저 깨어 있는 겁니다. 보통 명상할 때는 호흡 같은 정해진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명상은 대상 있는 명상과 대상 없는 명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상 없는 명상은 티베트 불교의 보석이며, 쉼 명상, 자유로운 알아차림, 명상 아닌 명상이라고도 합니다. 이게 최고의 명상이며 참본성과 연결하는 비결입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대상 없는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힘을 빼는 겁니다. 긴 하루 끝에 할 일을 다 했고 생각 없이 쉬는 것과 같아요. 두 번째 방법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을 인지하는 겁니다. 산란하다가 알아차림이 돌아옵니다. 망상에서 깨어난 그 순간을 알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잠에서 깨듯이 여기 이 순간에 깨어 있습니다. 지난 생각에서 놓여났고, 다음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사이 공백에 머물고 있습니다. 생각 없는 깨어 있음이 참본성입니다. 이것을 경험할수록 더 자주 오래 경험하게 됩니다. 깨어나는 순간을 알아볼수록 이 순간에 더 오래 자주 머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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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명상
자기와 함께 하는 시간을 한번 가져 보겠습니다. 척추를 바르게 하고 몸의 긴장을 푸세요. 많이 피곤하시면 누우셔도 괜찮습니다. 깊이 천천히 들이마시고 자연스럽게 내쉬는 심호흡을 세 번 하셔요. 우리의 마음이 많이 지쳤어요. 쓸데없는 생각을 굴려서, 뇌도 피곤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해요. 마음을 잠시 쉬어 볼게요.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가지세요. 몸도 쉬고 마음도 쉬세요. 사실 몸을 쉬면 마음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Just relax!
고된 일을 하고 나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쉬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지친 마음을 잠시 쉬어봐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잠시 누려 보세요. 여기 이 순간에 그저 머물러 보세요. 특별히 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어요. 다만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자신에게 친절하세요. 마음을 여유롭게 가질 때 망상이 저절로 가라앉고 평화롭고 고요한 참본성이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안 할 때 그저 쉴 때 평화와 자유가 있어요. 이게 참된 자신입니다. 그저 쉴 뿐, 그저 알아볼 뿐입니다.
참본성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하기 어렵지만, 현존하는 느낌과 같아요. 뭐라고 하기 어렵지만, 순수한 사랑 같아요. 뭐라고 하기 어렵지만, 앎과 같아요. 뭐라고 하기 어렵지만,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입니다.
릴렉스하는 순간 생각에서 놓여나고 마음이 깨어 있어요. 무엇이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껴질 수 있어요. 생각과 감정이 보일 수 있어요. 오감을 온전히 열어 놓고 마음이 자유롭게 흐르는 대로 함께합니다.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지켜볼 뿐입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생각도 감정도 그대로 둡니다. 대상에 집중하지 않지만 깨어있습니다. 여기 이 순간에 있어요.
평화는 어떤 것이나 어떤 곳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합니다. 흙탕물을 휘젓지 않으면 물이 저절로 맑아지는 것처럼, 마음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맑아지고 이미 있는 평화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드러나게 할 뿐, 허용할 뿐입니다. 늘 있는 언제나 가능한 본성의 평화와 잠시 함께하세요. 본성의 고요함과 함께하세요. 앎과 함께하세요.
지극히 평범합니다.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래서 놓쳐요.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고, 너무 쉬워서 어렵고, 너무 미세해서 잡히지 않아요. 코앞에 숨겨져 있어요. 내용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세요. 영화를 보지 말고 스크린을 자각하세요. 현상을 집착하지 말고 현상을 가능하게 한 본성을 보세요.
지금 현존함을 느끼잖아요? 깨어 있어요. 지금 명상을 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존재해요. 그저 깨어 있어요. 이게 참본성이에요. 평범하다고 너무 쉽다고 의심하지 말아요.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없고,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고, 알려고 하면 알 수 없어요. 찾으려는 마음을 놓을 때 찾게 되고, 알려는 마음을 놓을 때 알게 되고, 안 본 것이 잘 본 것입니다. 참본성은 늘 여기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보세요. 모든 것을 버리고 그저 현존하세요.
드디어 자기가 자기를 알아봤어요. 생각으로 살지 말고 습관으로 살지 말고, 자기로 살아요.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 살아요.
명상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숨을 깊이 천천히 들이마시고 자연스럽게 내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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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자기를 알아볼 때 주체와 객체가 무너집니다. 등불이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스스로 알고 빛납니다. 이것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고 체험으로 알 수 있어요. 주체와 객체는 망상입니다. 주체와 객체와 행위 즉, 삼륜을 집착해서 무명과 고통이 있습니다. 삼륜을 벗어난 마음자리와 함께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로 살고 싶지 않으세요?
참본성 수행이 주요 수행이지만 세 가지 필수 요소가 있어요. 죽음을 생각하는 출리심, 중생을 생각하는 보리심, 그리고 스승을 생각하는 신심(구루요가)입니다. 출리심을 기반하여 보리심의 동기와 스승의 가피로 참본성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출리심의 기반 없이는 수행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보리심의 동기 없이는 수행의 힘이 약해요. 스승의 가피 없이는 참본성을 알아보기 어려워요.
출리심은 죽음을 아는 것입니다. 죽을 운명을 받아들이면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아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세속을 향한 관심이 수행과 해탈로 향하게 됩니다. 이게 수행의 기초 출리심입니다.
보리심은 중생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약해서 많은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먼저 본성을 자각해서 모든 중생도 훌륭한 본성을 알게 하겠다는 다짐이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의 동기에 따라서 수행이 수월하고 장애가 없습니다.
스승의 은혜를 아는 것이 구루요가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구루요가가 수행의 핏줄이라고 합니다. 핵심적으로 구루요가는 깨우친 스승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합일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피로 참본성이 깨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놓치는 ‘자기’, 잘 보이지 않는 ‘자기’, 가장 그리운 ‘자기’, 가장 도움이 되는 ‘자기’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요?
이 글로 인하여 자기를 알아보셨나요? 자기를 구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요. 결국 남는 게 자기 마음뿐입니다. 부처님도 스승도 대신할 수 없어요. 자기가 스승이고 부처님입니다. 내면의 부처님을 만나서 자기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