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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4
느후스단 / 윤영택 목사(옥스포드교회)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 뱀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불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히스기야 임금이 그 놋뱀을 파괴하고 누후스단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부르며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하는 기간에 역대 유다 임금들 중에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길 정도로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궁지에 몰릴 때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은 보화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큰 나라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선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구원병을 보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함락시켰고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우상 제단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제단에 제사를 드리니 효험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우리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구조와 규격 등을 그림으로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것과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놓으라 명령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왕은 새롭게 세워진 제단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그 단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놋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제사는 새로 만든 큰 단에 드리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을 닫아 걸었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에 새로운 산당을 세워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시달렸습니다(역대하 28장).
그와 같은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멸망당한 사마리아 성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앗수르에 패한 이방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는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온 이방 민족들이 각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 우상들을 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잡족이 되었으며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는 종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행을 보시고 벌하여 이방인들 몇을 죽게 하셨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앗수르 왕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법을 몰라 이런 벌을 받았으니 전에 사마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제사장을 보내어 우리에게 그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하나를 돌려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잡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여러 산당에 두었고, 각 성읍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땅의 수호신에게 잘 보여야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사마리아 지역의 수호신 정도로 여겨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럴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아하스 왕을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상 다윗의 의로운 길을 따랐던 히스기야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 산당들을 무너뜨리고 거기 두었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에 일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를 가리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왕들보다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킨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백성들이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놋뱀이 처음부터 우상으로 섬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내용과 오늘 말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던 놋뱀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하는 죄인들의 치료와 생명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방식이었지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뱀의 모양을 한 그 놋조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라’ 하고 끝까지 거부하던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을 언급하시며 ‘나도 높이 달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요3:14, 15) 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이 나의 죄를 대신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뱀과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남 보성의 어떤 교회 목사 부부가(엄밀히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자칭 목사지만)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했습니다. 처음에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정신질환을 앓는 부부가 아이들을 학대한 폭행치사 사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면서 이 부부의 어리석은 행동이 갈수록 기가 막혔습니다.
감기 든 아이들의 몸 안에 병을 가져다 준 귀신이 들었으니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린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가며 때렸습니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부부를 부추겨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하고 돈을 뜯어낸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 14)
잠언의 말씀을 귀신 내쫓는 푸닥거리에 적용하였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지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요?
작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자기 손발을 못 박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나 이번 보성의 사건들 모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자칭 예수의 엽기적인 자살 사건은 종교적 영웅심으로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재현한다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코메디 같은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이 날보란 듯이 쇼하는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히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바퀴달린 십자가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나무 십자가를 끌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전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모세의 놋뱀 느후스단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자기 주관적인 어떤 신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느후스단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신앙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었습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되고 있는 왜곡된 신앙 행동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이기적인 욕심과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행위에 몰입하는 일입니다.
예배당과 불당이라는 장소만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를 뿐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금식하며 맹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이지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시지 사람들이 부자되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을 말하기 꺼려하는 기독교는 세상의 도덕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선생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영생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도와준 사람, 존경스런 신앙의 인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놋뱀 섬기듯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신성한 부적처럼 여기는 믿음도 있으니 이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라는 물질을 바라보거나 이차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느후스단이고 불신앙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만 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찍어 불태우고 깨뜨려야 할 누후스단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의 기회로 삼는 종교인들이나 종교 장사치들의 헛된 영웅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깨뜨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라 했지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셨지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형상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절하며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종탑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모두 거룩한 교회는 아니며, 거실과 안방 벽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거룩한 백성의 집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 행실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입을 열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고 모두 좋은 믿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 중심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종교활동은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제사했던 혼합주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히스기야가 부쉈던 놋조각 느후스단일 뿐입니다.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된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들이 섬겼던 다원주의, 혼합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컬리지의 성당에 가면 옥스포드 수호신을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부서져 일부만 전시되었고 주변의 여러 조각상들을 보면 코가 깨지거나 얼굴이 무너진 흔적들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벽화 등을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 못해 그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기 절하고 복을 비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며 교회 안에 어떤 형상이든 세우거나 걸어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상들도 대부분 파괴되고 교회 밖으로 내던져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고 있는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조차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형상 속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섬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와 섬김의 궁극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주문을 외면 불려 나오는 알라딘 등잔의 거인처럼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상숭배요 미신적인 습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니고는 나에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아무 능력도 자격도 지혜도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