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말 이야기 6 - 강화 아닌 강화도 교동 토박이 말
행정구역상 강화군는 하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다.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 등의 여러 섬이 강화군에 속해 있다. 섬 사이의 바다는 꽤나 큰 자연장애물이니 언어 면에서도 차이가 날 가능성이 크다. 강화군의 핵심인 강화도도 동쪽은 김포와 인접해 있고, 북쪽은 개풍과 인접해 있다. 인접한 지역과의 소통 과정에서도 언어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실제로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화도면의 말과 북쪽에 위치한 양사면의 말은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강화군 내의 다른 지역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곳이 있으니 바로 교동이다.
▲ 전종대 옹
어드렇게 왓어? 행교 가 볼라구? 그르만 일러리 오너. 이 교동 행교가 천구백이십팔년 고려 인종 오 년에 이 행교가 생겻어.
교동에 가면 아무래도 향교부터 찾게 된다. 향교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전교(典校)를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게 해서 만나 뵙게 된 전종대 옹, 뵙자마자 제보자를 잘못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화도 조사를 하면서 익숙해져 있던 강화말이 아니다. 박사논문을 쓰며 계속 들었던 평안도 말에 가깝다. 아무래도 한국전쟁 기간에 교동으로 건너온 실향민 같다. ‘어떻게’에 해당되는 ‘어드렇게’가 그렇다. 더 놀라운 것은 ‘왓어’다. 받침으로 ‘ㅆ’을 써야 하는데 ‘ㅅ’을 쓸 수밖에 없다. 발음이 [와써]가 아닌 [와서]이니 당연한 표기다. 평안도 말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향교의 전교를 외지에서 들어온 이에게 맡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어르신의 성씨인 ‘全’씨 또한 교동의 주요 성씨 가운데 하나다. ‘그르만’을 들어보니 강화 사람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면’이 ‘하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강화도의 전형적인 말투이니 바로 확인이 된다. 그런데 ‘오너’는 놀랍다. ‘오다’는 표준어에서 ‘와, 와서’ 등과 같이 활용된다. 그런데 어르신은 ‘오너, 오너서’와 같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충남 서해안에서 나타나는 말이다. 교동은 충청도에서도 너무 멀고 평안도에서도 너무 멀다. 그런데 두 지역 말의 특징이 어르신의 말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것이다.
▲ 교동의 지도.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는 교동이 강화도에 속하지만과거에는 황해도 지역과 왕래가 훨씬 더 잦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종대 옹은 19대째 교동에 살고 있는 토박이중의 토박이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의관을 정제한 후 양반다리를 하고 나설 정도로 교동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는 분이다.
어르신의 말에서 확인되는 평안도 말의 특징은 황해도 연백 지역과의 소통 과정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본래 교동은 강화도보다 육지 쪽과 훨씬 더 많은 소통이 있었다. 분단 이전에는 양쪽 지역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한국전쟁 시기에 연백 사람들 상당수가 교동으로 들어와 아직도 살고 있다. 그러니 교동 말에는 황해도 말의 특징, 더 나아가 황해도를 거쳐 들어온 평안도말의 특징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교동 토박이는 맞는데 향교의 전교답게 너무 옛날이야기만 펼쳐 놓으신다. 생생한 교동 말을 듣고 싶은데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건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분을 찾아 나선다.
봄에? 여그서는 흔히 저기 이른 봄에는 인제 이 명일만 쇠만은 시근치를 야채깡에다가 뿌려서 길러서 나물 해 먹구. 봄무이 심구. 상추 심구. 옛날에는 상추만 심어 먹엇는데, 지금은 뭐 양생추, 뭐 저런 거 다 씨앗이 잇이니깐 다 사다 심어서 해 먹어. 뭐 쑥캇이고, 근대 뭐, 그런 거 주로 다 심어서 해먹지 뭐. 지금도 다 모 붜 놓구서...... 깡에 잠깐만 나가만 송두리가 꽉 차.
여러 사람에게 수소문을 해서 만나게 된 이웃마을의 인갑순 할머니, 역시 살림 전문가답게 사는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온다. ‘먹엇는데, 잇이니까’는 전종대 옹과 마찬가지다. 평안도 방언의 영향이 교동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쇠만은’의 ‘만’은 강화도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교동이 강화도보다 연백과 가깝지만 강화도와 공유하고 있는 속성도 있음을 보여준다.
미나리 밭을 뜻하는 ‘미나리꽝’에서 확인되는 ‘꽝’이 ‘깡’으로 나타나는 것도 흥미롭다. ‘무’는 ‘무이’이고, ‘상추’는 ‘생추’로도 나타난다. ‘쑥캇’은 왜 ‘캇’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모 붜 놓다’에서 모종을 붓는다고 하는 것도 흥미롭다.▲ 대룡리의 시장, 황해도 연백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형성된 시장이다.
아직도 황해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모든 것보다 놀라운 것은 ‘시근치’와 ‘송두리’다. ‘시금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자어일 것 같은데 어원을 알기가 어려운 단어였다. 그런데 ‘시근치’를 보니 ‘적근채(赤根菜)’가 떠오른다. 오늘날의 중국어 발음은 조금 다르지만 어느 때인가 ‘시건차이’ 정도로 발음되었던 중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쓰고 있는 것이다. ‘송두리’는 단독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고 ‘송두리째’와 같이 관용적인 표현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니 그 뜻은 사전에도 풀이가 안 되어 있다. 그러나 교동에서는 짚으로 짠 바구니의 일종을 가리킨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져버린 ‘송두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래서 방언은 우리말의 보고(寶庫)라고 하기도 한다.
왜 즈이 땅 놔두고 여기까지 오느갖구 그 난리를 치냐구. 즈이들 바다에서 잽히는 궝이나 잡으면 되지 왜 우리 궝이를 잡을라구 그러냐구.
▲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교동대교
이 다리 덕분에 강화와 교동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2013년 3월 강화의 창후리 포구, 교동의 전 옹을 취재하기 위해 방송국 기자 셋과 함께 교동행 배로 발걸음을 향한다. 총을 들고 막아서는 헌병, 차량은 5일 전에 허가를 받아야 교동에 들어갈 수 있고, 카메라는 절대 휴대 금지란다. 북한의 계속적인 도발로 남북한의 긴장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니 그럴 법도 했다.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린다. 의관을 정제하고 기다리던 어르신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린다. 평화의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는 요즘, 이런 안타까운 목소리는 먼 과거의 것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