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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시대의 강해(4부)-서머나 교회시대.(THE SMYRNAEAN CHURCH AGE) 계시록2장8~11절.
*소 개*
월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는 1960년 12월 4일부터 11일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요한계시록1~3장까지
일곱 교회 시대에 관한 메시지를 연속으로 설교했는데, 이 지면을 통해서 시리즈로 소개해 드리고자합니다.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님의 놀라운 사역은 말라기4장:5~6절, 누가복음17장:30절, 계시록10장:7절, 등등,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 대한 성령께서 입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계적인 사역은 다른 여러 성경 예언들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 마지막 때에 성령께서 그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의 사역은 신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켜 휴거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이 메시지를 읽는 동안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비(마음 판=고후3:3)에 쓰이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정확하면서 편집하지 않은 번역을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영어 오디오 파일들이
브래넘 형제님이 하신 설교를 있는 그대로 전해 줄 것입니다. 브래넘 형제님이 설교한 1,100여개의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통역과 번역이 되어 있으며, www.messagehub.info 에서 다운로드 받고 인쇄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메시지 책자들을 보고자 하시면 한국성서교회 (biblechurch.kr) 를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책자에 대해서 문의하실 일이 있으신 분들은 이 메일 주소는 biblechurch77@gmail.com 입니다.
이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바이블 애플 KJV 흠정역이며
메시지 책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하였음을 미리 알립니다.
계시록2:8.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9.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 10.네가 장차 당할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 서 론.
여러분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교회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신약 교회의 역사가 없어지지 않도록 지켜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시고 그것을 오늘날 다량의 두루마리들과 토기들과 고고학자들이 발견해 해석한
다른 고대 유물들을 가지고 확증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어지지 않게 보존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역사의 첫 페이지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실황 중계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읽고 우리는 여러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하나님의 원 패턴인 사도 바울과 가장 가까웠는지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진리의 말씀에 되돌리기 위해서 사용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검토해 볼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 중에 각각의 시대를 위해 말씀의 패턴과 능력에 있어 가장
가까우면서 열매를 나타낸 가장 탁월했던 사람이 한 사람 있게 될 텐데, 그가 바로 그 시대의 사자일 것입니다.
교회시대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발견됩니다. 단순히 계시록에서 알 수 있는 시대들을 읽어 보기만 하면 그 모든
패턴들이 역사와 그대로 일치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시대를 미리 말씀하셨고 그 시대들의
상태가 나타내졌으므로 그렇다면 필수적으로, 후에 이어올 역사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정도로 너무나 단순합니다. 단순성은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저는 연구가와 역사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확실한 인정을 받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듯 이것은 사실입니다.
* 서머나 교회에 보내진 사자.
각 시대의 사자를 고르는 하나님이 주신 규칙을 사용해,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이레뇨(이레니우스)가 주님이
그 위치에 올리신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레뇨는 위대한 성도요. 믿음의 용장이었던 폴리캅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레뇨가 그 위대한 사람의 발치에 앉아서 그의 헌신적인 삶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우아함을
배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폴리캅은 나무랄 데 없는 삶을 산 걸로 보아 전 시대를 통틀어
진실로 뛰어난 성도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폴리캅이 순교했다는 사실을 읽어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늙어서 도망가지 못했고, 너무나 신중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숨겨 주고 그가
그 행위 때문에 자신이 받을 형벌을 받을 것을 용납하지 않아 자신을 죽음 앞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고 허락을 받고 두 시간 동안 주 안에 있는 형제들과
주관자들과 그의 원수와 그를 잡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전 시대의 위대한 성도들처럼,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그는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라는 청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양심을 지닌 채 죽었습니다.
그는 기둥에 세워져 있었고(그의 부탁으로 묶이지 않은 채로) 불이 당겨졌습니다. 불은 그를 닿지 않고, 그의 몸
밖으로 구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로 찔렸습니다. 그러자 물이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와 불길을 껐습니다.
그의 영이 가슴에서 나와 흰 비둘기의 형태로 떠나는 것이 실제로 목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위대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자 요한의 제자는 니골라당 체제에 대해 투쟁적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조직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제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일을 육성하기에
좋은 계획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마귀의 속임수였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 이레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레뇨는 어떤 형태의 조직에 대해서도 투쟁적 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을 섬겼던 그의 인생사는 성령 안에서 많은 표명 중의 하나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바울의 원 가르침들에 적합하게 가르쳐졌습니다. 프랑스에 있던 그의 교회들은 그들 가운데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방언을 했고, 예언을 했고, 죽은 자들을 일으켰고,
믿음의 기도로 아픈 자들을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레뇨는 장로들, 목사들, 기타 등등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조직에 의한 형제 관계의 위험성을 보았습니다. 그는 일치되고 성령 충만되고 은사가 드러나는 지역 교회를
위하여 굳건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존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성도들 사이에서 표명됐기
때문입니다. 이레뇨는 또한 신성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폴리캅의 제자였고, 폴리캅은 성 요한의
제자였죠? 우리는 이레뇨가 이 주제에 관하여 최대한 완벽한 가르침을 받았으리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니케아 이전의 조상들 이란 책의 제 1 권 412 페이지에서 이레뇨는 신성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표현들은, 마찬가지로, 한 분이며 동일한 존재의 타이틀(직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권능의 주,
주님, 모든 이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이, 창조주, 만드신 이, 기타 등등, 이런 것은 각기
다른 존재의 연속된 이름들과 직함들이 아니라, 한 분이시고 동일한 존재의 이름들과 직함들입니다."
이레뇨는 이것들은 샤론의 장미, 광명한 새벽별, 제일 아름다운 이, 기타 등등과 같이 직함들임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래서 이레뇨가 말씀을 엄격히 고수한 것과 성경의 놀라운 이해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그의 사역에 함께하심을
볼 때, 그는 그 시대의 사자임에 분명합니다. 다른 시대들이 그들의 사자에게서 그와 같은 열매와 능력과 성령과
말씀 안에서의 지도력의 균형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정말 안타까우며 유감스러운 일이였습니다.
* 서머나 성.
서머나성은 서머나 만 입구에 에베소의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서머나는 훌륭한 항구가 있었으므로
수출품으로 유명한 상업적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수사학, 철학, 의학, 과학학교들과 정교한 건물로 인해 돋보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거기에 살았고 로마인들보다도 더욱 심하게 그리스도교를 반대했습니다.
사실 서머나에서 처음 감독의 자리를 맡았던 폴리캅은 그 유대인들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그 유대인은 폴리캅을
화장시킬 장작더미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옮기느라. 그들의 거룩한 날(토요일)을 범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머나(Smyrna)라는 말은 "쓰다."라는 뜻이고 몰약(Myrrh)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몰약은 시신을 향기롭게 하여 부패를 방지하는데 쓰여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이름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 시대는 죽음으로 가득 찬 쓴 고통의 시대였습니다. 교회라는 틀 안에서 두 포도나무는
더욱 더 멀어져 갔고, 거짓 포도나무는 참 포도나무를 향해 더욱 쓴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망은 거짓 포도나무의 열매였을 뿐 아니라 참 포도나무 안에서도, 마비와 그들이 이미 오순절 후 첫 몇 해
동안의 더럽혀지지 않은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조용히 진행되는 무능함이 있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예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진실로 믿는 자라도 말씀의 지식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지 않으면 더 이상 능력을 잃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조직은 급속도로 자라나고
있었고, 참된 신자들의 죽음을 찬성하고 그 악한 힘은 더욱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미 그 자리에서 밀려났고, 말씀은 신조와 독단과 인간이 만들어낸 의식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과 어긋나는 세상과의 동맹 상태로 들어갔을 때,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그들이 포로 상태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제사장 무리들과 성전과 말씀을 가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율법 선생과 바리새인들의 신학적 체계와 회당과 탈무드를 가지게 됐는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부패한 상태가 되어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 아비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시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그 똑같은 일이 다시금 반복해서 우리 이방인들의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듯이, “소수의 무리만이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분의 사람들을 위해 오실 때까지는 항상 소수의 진실한 그리스도인 무리, 그리스도의 신부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우스를 경배하려고 세워졌고 다른
하나는 씨벨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 두 신전들 사이에는 고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볼 수 있는데
금가(金街)라고 불리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것은 첫째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던 이교도의 계속적인 잠식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로마에만 있는 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남신과 여신의 두 신전의 연합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 불리우고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함을
부여하는 존경과 직함과 권세를 받고 있는 마리아 숭배 사상의 씨입니다. 그들을 연결하는 금가는 니골라당을
조직하는 자들의 탐욕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정부와 교회를 연합시켰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부와
권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시대가 장차 올 비극적인 버가모 시대의 묘상(苗床)에 불과했다면,
이 서머나 시대는 완전한 부패를 보장하는 비와 해와 자양분이었습니다. 이 부패는 그 교회가 우상 숭배 상태에
있음을 확실케 했습니다. 우상 숭배란 영적인 간음을 뜻하는데, 여기에서 그 교회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망이 뿌리에 스며들어 가지에 퍼졌고, 그 교회에 참예한 자들은 쓴 것과 사망에 참예했습니다.
이 시대는 주후 170년에서 312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 인 사 말.
계시록2:8.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있는 이가 가라사대,
“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있는 이” 그런데 이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사람이 무덤에서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살았다가 죽었노라." 인간에게 맨 처음 일어나는 일은 태어나는(사는)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은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인간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분은 하나님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을 가지고 죽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인 이 사람 예수는 죽음을 가지고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망과 어둠의 골짜기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희망과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첫 아담은 순결함을 가지고 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죄를 가지고 의로움으로 바꾸셨습니다.
첫 아담은 낙원을 가지고 황량하고 쓸쓸한 광야로 바꾸었지만, 이 분은 파멸로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는 땅을
또 하나의 완전하며, 아름다운 에덴으로 바꾸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와 생명의 기쁨을, 인간의 혼속에 모든 죄와 도덕적 타락과 왜곡과 고통과
온갖 속임수와 부패를 가져온 영적인 어둠의 사막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인류에 충만해 있던 모든
비극적 죽음과 타락으로부터,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영원한 자유와 생명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죄가 들어와 사망 안에 왕 노릇 했듯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라는 분으로 말미암아 의로움 가운데서
우리로 왕 노릇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범죄함이 없었던 게 아니라, 범법함이 아무리 컸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만큼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의 은사가 더욱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구속하신 자 즉 그의 교회
사이에서 거닐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구속 받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죠? 많은 이들이 바울처럼, 살인하는
자와 뇌물 수수자들이 아니었던가요? 많은 이들이 죽어가던 강도처럼, 도둑이요 살인자들이 아니었던가요?
모두 다 그분이 죽음에서 얻으신 그의 은혜가 얻은 전리품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모두 다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입니다. 모두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첫째 시대에 했던 인사말과 이 시대에 하신 인사말을 주의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연결시켜 보십시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분은 한분이며 동일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그의 것임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있습니다. 열매의 씨는 열매의 중앙에 있듯이, 왕가의 씨인 그도 교회 사이에 서 계십니다.
씨가 홀로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듯이 그도 교회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가 걷고 있다는 것은 쉬지 않고
교회를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양들을 돌보는 목자장 이십니다. 그것은 그의 권리입니다.
그가 자기 피로 그 교회를 샀기 때문입니다. 그 피는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현재 그 교회를 소유하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 이십니다. 그 직함은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구속의 댓가를 지불 했으므로 홀로 하나님의 성전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그 안에서 경배를 받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주재권과 권위를 장악하는 걸 분개하십니다.
그가 각 시대마다 자신을 신성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분명히 사람들을 경고하고 한편으론 위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거짓 포도나무를 경고하며 진짜 포도나무를 위로하십니다. 이 분은 참되시며 전능하신 한 분 밖에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시고, 바로 사십시오.
* 이 시대의 상황.
계시록2:9.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히 환난입니다.
첫째시대에 환란이 있었다면, 지금 둘째시대에 걸쳐서는 더 모진 환란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한 다음의
말이 세계 도처 어디에 있든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무리에게 적용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히브리서10:32.그러나 너희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던 이전의 날들을 회상해 보라.
33.한편으로는 너희가 비방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경거리가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취급 받은 자들과
사귀는 자들이 되었으니 34.너희에게 하늘에 더 낫고 영구한 실체가 있는 줄 너희 자신이 알므로 결박 중에
있는 나를 너희가 불쌍히 여겼고 너희 재산을 노략 당하는 것도 기쁘게 여겼느니라. 35.그러므로 너희의 확신을
버리지 말라. 그것이 큰 보상을 얻게 하느니라. 36.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니라. 37.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께서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된 신자를 돕거나 사귀는 것만으로도 그 친절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거닐고 계십니다. 거기에 양떼의
목자장이신 그가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핍박을 막으십니까? 환난을 정지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내가 네 환난을 안다. 나는 네 고통당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들을 사랑하시는지 의심했고, 그것을 알고자했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걸 서서 지켜보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의롭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말라기1:1.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말씀의 경고라.
2.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떤 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주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광야의 용들을 위해 그의 산들과 유산을 피폐하게 하였느니라.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은 아무 고통도 받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부모님의 돌보심을 받는
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증거는 택함(Election)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의 사랑은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선택되었다.”는 사실로
진정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선택해서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을 죽게 그냥 두실지도
모릅니다. 욥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이 고생하게 그냥 두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분이 가지신 특권입니다.
그분은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목적이 없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좌절의 근원이시지 평강의 근원은 아니실 것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잠시 고난을 받은 후 온전케 되고, 굳게 세워지고 강하게 되고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욥기23:6.“…내게 힘을 넣어 주시리라.”고 말한 것처럼, 알다시피 그분 자신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 자신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그는 실제로 고난 받았던 일들로 인해 완전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5:8.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친히 고난 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
9.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쉬운 말로 해서, 예수님의 성품은 고난을 통해서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의 교회에게 일정한 분량의 고난을 남겨두셨는데, 이는 그들도,
그를 위하여 고난 받는 동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의 의심이나 비난이나 혼란스러워 할 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이것을 원하셨을까요?
야고보서1: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3.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4.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왜 하나님께서는 옆에 서서 지켜보고만 계십니까? 이유는 로마서8장17~18절에 있습니다.
17.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그와 함께 다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스리기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성품은 단순히 결코 고난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은사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성품이 없는 사람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성품이 없이 가진 모든 권력은 마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격을 갖춘 권력은 지배하기에 적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게 된 것과 같이 우리가 그의 보좌에 동석하길 원하시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동석하기 위해서 인내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작고 임시적인 고난은,
그가 오실 때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될 위대한 영광과는 비교조차도 안될 것입니다. 많은 고난을 겪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선한 좋은 보물들이 쌓여 있을지 모릅니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오는 그리스도와 닮은 성품을 훈련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이상스럽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아들처럼 시험과 징계를 받습니다.
한 가지뿐이 아니고 계속 연달아 겪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고, 시험을 받고 있지 않고, 시험이 없는 교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교회가 아닙니다. 히브리서12:6.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시느니라. 7.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런데 서머나 교회에 있는 이 특별한 상태는 각 교회시대에 그대로 다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운 시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운 참된 신자는 더 더구나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온유하며)" 마태복음5:11.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온갖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폭풍이 몰아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반대하신다는
표시는 아닙니다. 또 맑게 갠 하늘과 잔잔한 물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인정하신다는 표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중 누구를 인정하심은 오직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일 뿐입니다.
그의 사랑은 선택적이며 그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위해서 가지셨던 그분의 변하지 않는 그분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분의 성영을 주시고,
우리를 아들로 세우심으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심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명하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향한 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시험들 가운데서 기쁘게 행동함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네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또 나오는군요. 그의 교회 사이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니시고 계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아버지처럼 그는 자기 가족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는 집안의 가장입니다.
그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분입니다. 그는 보호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궁핍함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 훈련을 받지 않은 신자는 이것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고 말지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의
자녀들을 내려다보시고 그것 모두를 그치게 하고--그들이 원하는 물질들을 아낌없이 주시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 여러분이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완전하신 지혜를 믿어야만 될 게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6장25~33절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고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백합화를 입히시고, 참새를 먹이시는 그가 너희를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하시리라.
이 육신적인 것들은 너희가 살아가는데 진실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아니니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물질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둡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있는 보물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에서 오는 완전한 선물인 하늘의 보물을 찾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아닌 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편에 듭니다.
예수님시절에도 그랬었습니다. 바울의 때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에는
그리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면 라오디게아 교회시대는 엄청난 부를 소유한 시대이고, 종종 세상 물질의 풍부함에
따라 얼마나 영적인가 하는 영성(靈性)을 기준으로 삼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교회는 물질면에서 참으로
부유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얼마나 가난합니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고기와 음료가 아니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부유하지, 세상적인 것들로가 아닙니다.
성령은 외칩니다, "나는 네 궁핍을 본다. 난 네가 필요로 하는 걸 안다. 너는 자랑할 것을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구나. 네가 가지고 있던 것도 빼앗겼구나. 그러나 너는 영원한 것들로 교환하려 네 소유를 기쁘게 포기했구나.
너는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 너는 실패하면 돌아가 사용할 물자도 없다. 그러나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이다. 네 보장은, 방패이며 엄청나게 큰 보상이신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네 왕국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왕국은 영영한 왕국이 될 것이다. 그렇다. 난 네 시험들과 재난들을 잘
알고 있다. 난 네가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이 들지 알고 있다. 내가 너를 내 것이라고 주장하러 돌아오면 난
이 모든 일을 기억할 것이고 그때 네게 상을 주리라.”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을 반대하는 말이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부유합니다.
그러나 돈은 가진 사람뿐 아니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큰 올가미가 될 수 있습니다.
저 옛날 첫째 시대에서, 야고보는 부유한 사람들을 중히 여기던 자들에게 이렇게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거기 있던 가난한 자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아첨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야고보는
야고보서2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돈이 해답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역시 돈이 해답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건 돈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십니다. 오직 성령의 그 움직임은 말씀에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만 옵니다.
* 사탄의 회당.(Synagogue)
계시록2:9.…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
여기에 생각을 깊이 해 봐야 할 절이 있군요. 그것이 내용상 매우 독특해서 일뿐만 아니라, 나중에 천 년이 넘는
한 시대에 실제로 반복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2:9.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그러나 네가 부유하
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
먼저, 유대인이라는 말은 유대 백성들의 종교를 기술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유다 사람들에게만 언급되며 제가 전 아일랜드 태생이라고 말할 때와 똑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실제로 유대인들 즉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생에 의해 유대인이 아니었고 종교에 의해서도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온 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선택한 이브처럼 사탄에게 속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포도나무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참 교회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사탄의 회당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로 사용하는 말과 똑같은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회(Church)는 "부름을 받아 밖으로 나온 자들" 또는 "소집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시편65:4.주께서 택하시고 주께 가까이 오게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자, “회당” 이라는 의미는 “집회 또는 모임”입니다. 이것은 좋은 모임일 수도 있고 나쁜 모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나쁜 모임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모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닙니다.
이 모임은 지식의 나무로부터 온 그들 자신의 지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사야54:15.보라, 그들이 확실히 함께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아 모이지 아니하리니 누구든지 함께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로 인하여 쓰러지리라.
그런데 이들은 분명히 참 포도나무를 대항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그들을 멸망으로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라는 구조 속에 섞여 자신들이 유대인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이었으므로 그들은 바라는 주장은 아무거나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사실인양 말하고 그리고는 그 말을 고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마음 속에 아주 강력한 생각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는, 전부가 유대인들은 아니었지만, 거의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들을 주의 몸의 초기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겠습니까?
열두 명의 사도는 유대인들이었고 후기 사도들도 유대인들이거나 개심자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으뜸 됨과 정통성의 주장을 하도록 놔두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나 해 보시고 계속 그것을 붙드십시오. 사실이나 역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그 거짓말을 계속 사람들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곧 그 거짓말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뭔가 깨달으셨습니까?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 쑥 들어와 있는 영과 똑같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원조이며 진실한 교회여서 자기교회만 구원을 찾을 수 있다 주장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베드로에게서 받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베드로가 그들의 초대
교황이었고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절대로 없는데도,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의 학식이 많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지자들은 그 거짓말 인지 알면서도 믿고 있습니다.
그렀습니다. 그들이 바로 사탄의 회당입니다! 만일 사탄이 그 교회의 아버지이고, 그가 거짓말의 대부라면
그의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 훼방(신성모독)에 대해서 여러분은 깊이 심사숙고해 보십시오.
사단의 회당에 속한 이들은 이 순간에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지 않습니다.(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들은 참 교회를 훼방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처럼, 형식적이고 죽은 유대교 신봉자들이(예수님은 그들은 자기 아비 마귀에게 속했다고
하셨습니다) 전통 유대종교에서 보냄을 받은 사울이 회심하기 전에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심히 박해했던 것처럼.
사단의 회당에 속한 조직된 종교체제는 첫째 시대의 처음 몇 해에 그리스도인들을 멸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지금 이 똑같은 무리(거짓 포도나무)는 두 번째 시대에 더욱 더 강력하게 참 신자들을 멸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적-그리스도 영은 계속해서 자라고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주 느리게 교회 속으로 그들의 행위
(니골라당 주의)로 들어가던 그 무리는 더 이상 노출을 겁내지 않았고 이제는 공개적으로 그들 자신의 모임에서
한 무리로 조직되고 위장하지 않은 적(敵)으로 참 교회를 대항 하려 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은 조직된 적그리스도의 교회였다고 말할 때에, 여러분에게 역사가 확증하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는(우리는 세 번째 버가모 교회에서 그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기로 하겠습니다)
벌써 이교도의 종교를 기독교의 이름과 의미로 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교회 시대에 와서는 그 교회는 너무도 이교도적이어서(그들은 자신들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폴리캅은 그들에게 돌아서라고 간청하려고 노령의 나이에 약 2,400km를 달려 왔습니다.
그들은 돌아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급제도와 조직이 굳건했고, 말씀으로부터는 완전히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사탄의 회당이며 신성 모독하는 말이 가득하고 그 말 속에는 이미 니골라당주의 교리의
씨가 있었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탄적 종교의 실제적인 자리나 권세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계시록2장9절 하반절은 이 사람들은 사단의 회에서 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곧 사단의 회당, 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적그리스도의 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영은 교회 시대들 안으로 막 들어온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영은 그곳에 쭉 내내 있어왔습니다. 그 영이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교회에서 정복하는지
명백하게 이해하려면, 구약을 보고 거기에서 그 영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교회가 되어 있을 때 이스라엘 가운데서 표명되었는데 이 영을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초기 교회가 표적과 기사와 예언과 방언과 방언 통역과 지혜와 지식과 병고침 같은 표명들을 동반한 성령의
순수한 사역 하에서 출범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났을 당시에도 여러 은사로 표명되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지도자이셨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이며, 왕이셨습니다. 그는 남편이 자기 가정을 돌보듯 이스라엘을 보살피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그들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그는 그런 문제들 때문에 바삐 움직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가 참된 하나님 되시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블레셋과 다른 나라들이 왕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길을 끌었고, 자기들의 지도력을 인간화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잘못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직접 지도력을 인간화 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앞질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그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을(지금은 성령인 말씀)앞지르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와서는 왕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너무도 당황해서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헌신적이고 성서로 입증된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오셨는데 사무엘은 자기가 거절당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그들을 자녀처럼 이끌었고 번성케 했고 축복하셨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지 말라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끄는데 있어 절대로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경제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절대로 뭘 감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기적과 지혜와 공급과 하나님의 보호를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우리는 왕이 없는 걸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전쟁터로 이끌고 나갈 왕을 원합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싸우러 나갈 때 우리는 제사장들을 앞에 세우고 유다부터 따라가며, 나팔도 불고 외치고
찬양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빼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서 우리를 이끌 왕을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그들이 너를 거절한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왕으로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나를 거절한 것이니라."
그 일은 너무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들로 세상 사람들처럼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자기들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과는 다르게 행동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패턴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처럼 보이지도 않고 세상처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고린도후서6장17절에서.
17.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딸들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이스라엘과 나머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있는 한 가지 차이점이 하나님이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컨으로 제켜두면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똑같았습니다. 삼손이 머리털을 잘랐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지도력을 한 컨으로 제켜두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이름뿐인 세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모두 다 같은 덩어리에서 나옵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가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것처럼.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그 차이를 생기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을 여러분 안에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이는 여러분은 배교자이며, 그분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진리입니다. 아멘.
얼마 전 저는 어떤 부인에게 그리스도인이시냐? 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자분은 제게 말했습니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저는 매일 밤 촛불을 킨답니다." 세상에 그게 그 질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감리교인입니다. 저는 침례교인입니다. 저는 오순절교인입니다. 그것은 성령과는 하나도 관계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여러분은 망합니다. 저 옛날 첫째 교회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추론하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무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패턴에서 서서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부는 딱 한 말씀만 바꾸면 되고, 그 다음엔 그 작은 누룩이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만듭니다.
율법 하나를 범하는 자는 전체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브는 말씀 하나를 바꿨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그 사탄을 중심에 둔 그 무리가 형성되었을 때, 그것은 자신들이(외인들)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참 신자들을 미워하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조직이 증오를 낳는지 잘 보십시오.
조직은 교제를 파괴합니다. 조직은 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몰약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서머나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쓴 감정. 쓴 뿌리는 많은 이들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세상적인 더럽힘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매 시대는 그것의 상처를 느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원 교회로부터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잡종이 되어 갔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브가 했던 식으로 섞였습니다. 잡종이란 두 종을 혼합함으로써 나오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원래의 것처럼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잡종입니다. 뱀이 자기 씨와 이브의 것을
섞이게 이브가 허락했을 때, 가인이라 불리는 순수한 인간이 아닌 피조물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가인이 아벨과 얼마나 달랐는지 잘 보십시오.
그리고 가인이 셋과 얼마나 달랐는지 보십시오. 가인은 하나님을 미워했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의로운 자를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다 올려 세웠습니다.
교회도 처음에 있던 위치를 떠났습니다. 교회는 잡종입니다. 즉 이름뿐인 교회는 잡종입니다.
사람들은, “난 침례교인입니다.” “저는 감리교인이에요.”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대신, 교회 안에 성령이 주신 계시에 의해 이끌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 대신에, 이제는
신조와 부수적인 법들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교육된 추측들이 있습니다. 배움이 계시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추론이 믿음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성령 안에서의 자발적인 찬미를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종(種)이 변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잡종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잡종화되면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낳을 생명 또는 씨가 그들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각기 종류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침례교회들은 침례교인들을 낳고 그들은 침례교인처럼 행동을 합니다. 감리 교회들은 감리교인들을 낳고
그들은 감리교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능력을 행한다고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경배하는 것과 그들의
신조와 독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잡종에 대해서 말해 볼까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잡종을 아십니까?
그것은 매 시대마다 우리와 함께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노새입니다. 노새는 당나귀와 말을 교배시켜 나온 잡종
동물입니다. 노새는 자기와 같은 노새를 재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노새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에 관해서 노새는 말이나 당나귀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을 지켜봅시다. 노새는 고집이 세어 여러분은 그 놈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것은 잡종 종교의 완벽한 모습입니다. 진리와 어둠을 교배시킨 것입니다. 말은 진실한 신자의 모형이고
나귀는 불의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섞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불임성 형식적 종교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씨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상태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낳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그 가운데 하나님은 모시고 있지 않지만, 함께 모여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러는 동안 내내 체계적으로 권능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들에게는 소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조직된 종교라도 부흥을 가졌던 적이 없었음을
깨달으셨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일단 조직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의 모형을 통해 보여드릴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13:13.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보십시오, 나귀는 구속될 수 있습니다. 비참한 죄인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물에 의해 구속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도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노새를 구속할 순 없습니다. 노쇠에게는 구속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피 안에 피했지만 노새는 교회 안에 피했기 때문입니다.
노새는 몸 속에 소생함을 받을 수 있는 "씨가 하나도" 없지만 나귀는 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삼 주 전 저는 사설을 하나 읽었습니다. 네, 그 사설은 구원받지 않은 실업가가 쓴 사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쓴 게 아닙니다. 그는 교회들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수들로 꽉 찬 신학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는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나 자유 이상가나 그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했을 때 그것은 계획적인 살인과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잡종 종교가 있습니다. 교회들이여 너무 늦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교회가 말씀에서 멀어지면 지적인 가르침이나 교리라면 다 믿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브처럼 속임을 받았습니다.
가인이 태어나자 이브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브가 정말로
그런 뜻으로 그 말을 했다는 걸 깨달으셨습니까? 이브는 자기가 주로부터 사내아이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탄의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단 속아 넘어가고 나서는, 이브는 자기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내아이를 얻었다고 말했으면, 그러면
이브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내아이를 얻은 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우주의 법칙들을 정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좋은 씨는 오직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나쁜 씨는 나쁜 열매만을 맺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씨라 해도 각각의 씨는 같은 땅과 영양과 습기와 햇빛을 이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기 자기와 같은 종류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가인 가계의 역사를 잘 살펴보십시오.
셋의 가계의 역사를 잘 보십시오. 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든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는데 최초의 씨 였 습니다.
이브의 이 진술을 아주 자세히 보신다면 여러분은 이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는 것 이상의 이해력을
가졌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브는 가인을 사탄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탄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마리아의 태 속에 난자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오로지 창조된 것을 가지고 왜곡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잘못된 씨로 이브를 속였던 것입니다. 그 가인을 낳은 것은 뱀의 씨였습니다.
아벨과 셋을 낳은 것은 아담의 씨였습니다. 그들 씨들은 정확하게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왔지만 자녀들은 다른
씨에서 나왔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달랐습니다. 이브는 가인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믿었습니다. 이브는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교회들은 자신들을 진리의 샘으로써 내세우고 있지만, 진리는 그들 안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낳은 자녀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맹세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지하기 위해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디모데후서3장 전체와 4장의 처음부터 5절까지 읽어보십시오.
4:1.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3.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해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많이 두고 4.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인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
교회가 최초의 오순절 교회로부터 자신을 멀어져 가게 놔두었을 때,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서 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물질은 풍부하나 성령이 주시는 영적인 힘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는 추물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형식과 의식 쪽으로, 또 성직자들을 조직하여 성령과 그의 말씀과는 별도로
인간의 지도력을 결정했을 때, 인간의 가르침과 교리로 한 조직을 만들어 성직자 쪽으로 움직인 바로 그 순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병들기 시작했으며, 교회가 병들게 되자. 교회는 논쟁을 유일한 무기로 삼는 일단의
무리로 변했습니다. 교회는 세상 프로그램에 희망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두지 않았으므로 성령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나타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램을 심었으므로 프로그램을 거두었습니다.
왜곡을 심었으므로 왜곡된 자녀들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함부로 다루시면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주입시킨 것을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인간은 그 사실을 자연에서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그 동안 자연을 함부로
다루어 왔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자신의 과학을 주입시켜 분자니 뭐니 그런 것들을 재 조종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간은 그 결과로 폭풍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자 사람들이 닭을 어떻게 개량시켰는지 보십시오.
그 닭은 최고의 품종이므로 알을 낳는 알 낳는 기계입니다. 그 닭은 음식으로써는 좋지 않습니다.
부드럽긴 하지만 먹는 데는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먹는 고기에 물질을 첨가시켜, 그것 때문에 인간의
몸이 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엉덩이는 점점 좁아지고 어깨는 넓어져가고 남자들은 그 반대로 되어갑니다.
자, 사람들이 자연을 가지고 놀다가 추물과 예상 밖의 불리한 결과를 얻는다면, 진리의 말씀을 거짓말로 바꾸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답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만들어낼 것이며 너무나도 왜곡되어 최초의 것과는 전혀
닮지 않거나, 최초의 것이 만들어 내던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 경건한 종교체제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와 같은 상황에 준비하신 유일한 대답은 불 못입니다. 그 가엾은 서머나 시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죽었을 때, 그 교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대도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부흥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흐름과 진행으로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늘로부터 온 재생(quickening)이 필요합니다. 이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서 오순절의
부흥의 불로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하고 더 확장시키기 위해서 곧 바로 조직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대신에 자신들의 지혜와 신학을 취하고 매 시대에서 행해진 그대로
조직을 만들어 신조들과 교리들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그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했습니다.
즉 말씀 대신에 예배 의식서(규정)를 구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예배 의식대로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은 쫓겨납니다. 형제여. 그러면 그들은 여러분을 핍박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인
양 자신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거룩한 성직자인 것처럼 내세울 것입니다. 평신도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나 자신들의 조직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조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자 힘씁니다.
그들은 오순절의 제 2 세대이고 하나님은 손자는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신조와 예배형식으로 알려진,
그들의 아비들의 자식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 교파는50년 전에 시작되어 전통과 권위를 가진 정통성을 부여
받은 수많은 교인들을 가진 명문 교단입니다. 그들은 옛날에는 어떠 어떠 했는지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은
나타내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직은 사람들이 시작한 움직임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왔습니다. 성령은 전 세계에 내렸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오순절 날
사람들이 가졌던 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라고
여러분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것을 계속 그런 식으로 지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시작하셨다면, 어떻게 되어 하나님이 그것을 유지시키고 그것을 끝내실 수 없었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시작하시려고 신조들과 공식들과 독단적 교리들을 조그만 책에 기록하시지 않으셨는데도,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침례교인들, 감리교인들, 나사렛교인들, 재림교인들,
장로교인들, 형제회교인들, 하나님의 교회의 교인들(몇몇이 그렇게 부르죠?) 등등 위에 그의 성령을 부었습니다.
이들 형제들은 다 각기 다른 교리들과 준칙들과 교회 의식서들 기타 등등 위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모두를 다 한 쪽으로 쓸어놓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륜에 대한 인간적인 이론들을 다 멸하시고
성령의 은사들을 회복시키시고 자신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저들 오순절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조직에 대한 교훈을 배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곧바로 조직을 만들고
자신들의 교재와 준칙들과 교회 책자와 교인명부를 기록하고 있는데, 마음 속에는 그들이 이제 모든 진리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기들이 길을 알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안내자로서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엘리트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일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빠져 나왔던 옛 무리들과 똑같이 자신들을 잡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이 신부들 속에 소속되고 싶다면 자기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밖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같습니다. 부흥은 끝났습니다. 그들은 명성을 유지하며 살려고 하고 있으며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관해 줄곧 얘기하면서도 대신 조직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증거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들은 마귀도 방언을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바벨의 혼돈이 그대로 그들 가운데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이라 말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하는 대신, 인간이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 때문에 바로 여기서 절 꾸짖고 싶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순절교와 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로 그것을 증명하게 해 보십시오.
오순절 날 불이 구름가운데 와서 각자 위에 혀처럼 갈라져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 그 불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순절 날 그들은 방언을 했고 들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이해했습니다. 그게 어디 있습니까?
그 전 신자들 무리는 한 가족처럼 행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교는 역사상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수도 없이
갈라졌습니다. 아무도 초대 오순절 교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홀로 믿는 자의 수를 보태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들 중에도 염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 복음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말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처럼 힘이 연약합니다.
만약 그들이 순 복음이라면 우리는 성경이 오순절날 순 복음 사람들을 묘사할 때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내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네,"하고 노래합니다.
그들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좋은 쪽으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었습니다. 방언이 부흥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사망의 증거입니다.
방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종교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했다는 증거를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이방인 교회 시대들의 커튼을 내리고 있고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방언이 위대한 영적인 움직임에 있어 선구의 역할을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잘못 알았습니다. 사실인즉 방언은 모든 인간의 사상과 프로그램들과 왕국들의 종말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의 왕국이 안으로 모셔 들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신다면, 자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와 정통파 무리들
가운데서 그들은 실업가들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는데 설교단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와 하나님의 움직임의 창시자로 꾸미고,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셨던
에베소서4장10~13절의 은사 받은 사역이 실패했으므로 자신들이 이어간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예언의 성취를 볼 수 있는데 고라의 패역이라 칭해지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예언을 응하게
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눈먼 상태대로 진리 대신 경험을 계속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길 간구합니다. 때가 너무 늦게 되기 전에 눈이 뜨이길 기원합니다. 오, 제 말을 들으십시오.
언제 돈의 많음과 사회적인 지도력이나 사업 수완이나 완전히 정신적인 용감성이 누가 영적인 지도력을 가졌다는
척도가 되거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대시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역사하시는
매개체로서의 성령이 홀로 역사하시는 대신, 어떤 식으로든지 물질이나 인간적인 가치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그 때는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는 때이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이제 저는 바로 지금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장로들을 반대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장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과 행위가 장로에 합당한가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경제 사정이나 사회적
위치를 불문하고 그가 장로나 집사로서 진짜 영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임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분열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해진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에서 예언의 시간이 주는 또 다른 징표입니다.
"네 궁핍을 아노니" 그들의 궁핍은 똑같은 절에서 사단의 회당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보셨습니까?
네, 그것은 부를 가진 부유하고 유력한 조직인데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면, 건물들과 재산을 떠나는 이는 누구입니까?
적은 양 무리는 항상 커다란 조직에게 패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들은 가정들이나 낡은
창고 건물들이나 지하실 안에서 경배 드립니다. 처음 그들이 지하묘지(카타콤)로 가서 경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의 물건들을 기준으로 따지면 가난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부유했습니다.
"그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니" 그런데 여기서는 거짓된 자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다는데 중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참 교회를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똑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모독했습니다. 이방인 중 다신교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난을 받는 무리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참된 씨일 것입니다.
로마에서 네로 왕 시대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재난에 심지어 로마를 불태운 것까지도 누명을 썼습니다.
공산 국가들에서도 적은 양떼는 수적으로는 정말 얼마 안 되어도 항상 몰살당하는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선한 일만 하는 선량하고 충실한 사람들인데도 육신이 멸해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항상
모욕당하고, 항상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불 못에서 고통
당할 것을 알기에, 죄에 길에서 나와 생명의 길로 오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책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말씀에 대한 첫사랑을 버릴 때, 교회의 담을 낮추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들어 올 수밖에
없는데, 교인들의 옷차림이나, 그들이 모여 나누는 교제를 들어보면,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악인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데, 한결 같이 그들은
침례 요한이 헤롯과 논쟁을 벌였듯이 분쟁에 끌려든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헤롯과 그의
아내를 해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철저하게 오해를 받아 막강한 대항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요한은 그 일로 인해 죽임까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한 선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공중 앞에서 굴욕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좋은 일만 행한 자들을 조금의 양심의 가책 없이 악으로 갚은 사람들 뒤에는 정말 어떤 잔인한
세력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네,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입니다. 그 해답은 다음 절에 있습니다.
* 십 년 동안의 환난.
계시록2:10.네가 장차 당할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라고 말을 사용하실 때마다, 커다란 위험과 고통과
궁핍들이 오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은 퉁명스럽고 짤막하게 "환란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을 끄려고 하는 엄마가 애가 놀라지 않도록
자녀에게 다정스럽게 “자 놀라지 말거라, 불이 꺼지면 깜깜할 거야. 하지만 엄마가 네 옆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분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 말고 또 사람이 네게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가 깊은 물을 건너갈 때 물이
널 넘지 않을 것이다. 사망 가운데서 조차도 너는 패배하지 않는다. 너는 능히 이기고도 남는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그런 말들의 실재를 체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8장35~39절에 기록했습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일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네,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해 보십시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유대인들은 그때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제사장들이 그때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던 총독들은 사람들이 투기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풀어
놓고 사자와 검투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왜 그를 탓하느냐고요? 네, 하지만 마귀의 증오가 그것 모두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 모두의 배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시는 것을, 사탄은 멸하려고 애쓰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여기에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만약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는 유대인들의 뒤에 있다면, 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마귀의 종교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임은 역시 사단의 회당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암흑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수만 명의
신자들을 죽였다면, 또 예나 지금이나, 그러면 그들은 마귀에게서 나왔으며 사탄에게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충격적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계시록13장의 예언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려보십시오.
놀라운 일이지만 미 합중국이 그 장에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13이라는 숫자는 바로 미국의 상징적 수입니다.
미국은 13개의 식민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국기는 초기에 13개의 별과 13 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13장에 미국의 운명이 나와 있습니다.
계시록13장에서 언급된 우상에서 그것 이전에 있었던 짐승의 온갖 악함이 발견될 것입니다.
그 짐승이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그 우상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로부터 마귀의 진노를
하나님의 참 포도나무 위에 쏟아내기 위해 모든 비 경건하고 사탄적인 권세를 받고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양처럼 온순한 것처럼 비쳐지지만 실상은 말씀을 거부하고 온갖 마귀 적 간교와 잔인성을 재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겸손한 자들과 싸우고 비난하고 멸하는 자들--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과 종교의 이름으로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과 다르게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대항하는 그들의 행위로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드러냅니다.
그들로 더욱 큰 조직을 만들고 말씀을 가진 적은 양떼들을 배척하게 놔두세요. 그것은 그들이 모두에게 자신들은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더 밝힐 뿐입니다. 그들은 거짓 포도나무, 살인하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들의 증오가 그들의 참 모습을 증명해 줍니다. 니골라 당 적-그리스도 교회는 사실 그들의 참 모습입니다.
"그들은 옥에 던져질 것이다." 네, 그들은 고소를 받으며 법정에 끌려가 거짓되게 참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아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 일은 모두 종교와 교리들과 격노한 순수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는 종교재판이란, 모두가 선한 명분을 위해서 행해진 일입니다. 지금 저는 대법원이 학교에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에 대한 지배를 갖고 있는 것이 생각납니다. 누가 그 뒤에 있습니까? 사탄이 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을 대항한 또 다른 화의 분출에 불과합니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여기 예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서머나 교회시대의 생존 기간을 결정하는 수단이 하나 있습니다. 황제들 중 가장 잔인한
디오클레티언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대적하는 테러운동을 벌여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더라면 신자들을 모두
없애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렸던 사건이었고, 302년에서 312년까지 십 년 동안
(계시록2장10절 하반절의 십 일)지속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until) 충성하라가 아니라 죽도록(unto)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증거를 여러분의 피로 인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수천 명, 수백만 명이 일곱 교회 시대 동안
죽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며 죽었습니다. 충실한 순교자 안디바처럼, 그들은 죽도록 자기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우리는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하려고 매일 사용하는 믿음은 폴리캅과 다른 모든 순교자들을 지탱하는
동일한 믿음임을 감히 상기해 봅니다. 최고의 믿음은 최고의 시각에 최고의 은혜를 줄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송축 할지어다!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의 이름으로 주어진 냉수 한 컵도 상을
잃지 않는데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순교자로 자기의 생명을 내어준 자에게 주어질 상급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경주에서 이기면 받는 관과 이 상급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이제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장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올림픽 육상 경기의 승자에게 주는 관은 올리브 가지로 엮은 화환입니다.
그러나 여기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관은 순교자에게 주는 관으로 왕의 면류관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부르십니다. 앞서 말한 관은 분투한 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 다음 면류관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내어준 사람들을 위한 관입니다. 이 면류관은 결코 썩지 않을 면류관입니다. 그들은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경주의 우승자들은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 가졌던 기쁨을 금세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자기들의 목숨을 내어준 자들은, 매일 분투함으로써든 그들의 목숨을
바치는 최고의 희생으로 피를 흘림으로써든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너무도 적은 시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상을 위해 수고하는데 쓰여 집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너무도 가볍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의 부활의 실재성과 실제적인 영원한 왕국을 믿는다면, 우리는 충실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그 선한
보화들을 하늘에 쌓아야만 할 것입니다.
* 이기는 자를 위한 보상.
계시록2: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자, 다시 한 번 성령은 모든 시대들에게 말합니다.
이 메시지는 모든 다른 시대들에 살던 우리 형제들을 위로해 왔듯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둘째 사망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둘째 사망은 불 못 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계시록20:14.사망과 지옥도 불 못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물론 그것은 그 안에 있던 자들은 다 불 못에 던져졌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뭔가를
꺼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사람들로 제 이상한 교리에 대해 한 마디씩 하게 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위에 서서 불신자가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탄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우선, 지옥 또는 불 못 또는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영원한(eternal) 게 아닙니다.
그것이 시작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습니까? 영원이라는 것은 시작한 날도, 끝나는 날도 없습니다.
마태복음25:41에 보면 "영영한(everlasting) 불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비 되었다면 시작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시작을 가졌다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영영한(everlasting)”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 때문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만세부터 만세까지"를 의미하며 그것에 붙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3장13~14절에서, 하나님은 사무엘더러 하나님께서 영영토록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며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제사장으로서 "영영토록(forever)" 제사를 바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하2장27절에서, 솔로몬은 엘리의 마지막 후손들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하였습니다.
그것은 네 세대 아니 조금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영영한(everlasting)"은 "영원한(eternal)" 것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여기 이 경우에서 영영한(everlasting) 이라는 말은 "사라지는 시점까지"를 뜻합니다.
그게 바로 엘리 제사장에게 일어났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1장9절에서 나오는 "멸망(destruction)"이라는 말을 보십시오. "영영한 멸망으로 형벌을 받으리라."
헬라어로 "멸망"은 분명하게 전멸을 뜻합니다. 그런데 "멸망"이라는 말은 멸망하는(destroying)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멸망하는"이란 말은 뭔가가 계속 부패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영한 전멸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계속 전멸되어가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멸망"대신 "멸망하는"이라는 말로
쓰일 것입니다. 그것은 끝나는 지점까지(언제인지 모르지만) 멸망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끝내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럼 언제"영원한(eternal)"이란 말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그건 간단합니다. 그 말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영원”을 의미합니다.
영원이란? 시작한 날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지속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인 그것을 마음에 염두 해 두고 있습니다.
"또 증거(기록)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영생=Eternal)이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들만 영원한 생명 즉 시작이 없고 항상 있었던 그런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게 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 속에 영원한 뭔가 즉 시작도 끝도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같이 죄인이 지옥에 가서 똑같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 죄인도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명과 동일한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제가 “지옥과 불 못과 형벌을 믿지 않노라.”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믿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계시록21장8절에 보면 거기에 언급된 그들 죄인들은 불 못에 참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예한다.”는 말의 옳은 해석은 “시간을 가진다.”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거기에서 그게 또 나오는군요.
그래서 악인들은 지옥(음부 또는 무덤)으로 던져지고, 지옥은 마지막으로 불 못에 던져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결국은 완전히 분리가 됩니다.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의인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생명)로 구속하신 자들이니까요. 그들은 그의 품 안에 있으며 그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왜, 이 이기는 자들, 즉 이 신자는 둘째 사망을 피하여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기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려고 우리 대신에 댓가를 지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분리의 틈을 채웠고 멀리 있던 우리는 그분의 피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정죄를 받지도 않고, 더군다나 그 불 못에는 더 더구나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속 받은 자는 한 사람도 예수님이 계신 곳 말고 딴 데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설명해 드리죠? 제게는 어린 소년인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생기든지 제 분신입니다.
제가 부자라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것이겠지만, 제가 그를 부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셉은 저의 부분이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혈액 검사를 해 봅시다.
요셉의 피와 제 피를 비교해 봅시다. 그것은 요셉이 제 아들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요셉은 제 아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은 혈액 검사입니다. 저는 콜로라도 주에서 순종 헤리포드종
소들을 치며 말을 타고 다니던 때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정부 소유의 방목지에서 먹이기 위해서는 그 소들을
정부의 검사를 받기위해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귀에 혈액딱지를 가지지 않은 동물은 한 마리도 통과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딱지는 그 소가 순종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방목지 경비원들은 한 번도 소의 품종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피가 올바른 피 인지 보려고 그 혈액딱지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만약 그것이 올바른 피라면, 그것은 올바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고 "죄 지은
혼은 죽으리라. 그것은 내게서는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내게 가까이 올 수 없다,"고 선언하셨음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할 자들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두 죽었고 모두 분리되었고
언젠가 생명의 마지막도 끊어져 모든 게 끝나게 될 때가 올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사랑 가운데 하나님은 동물 한 마리를 잡아 죄인의 목숨 대신 그 동물의 목숨을 취해 대속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죄인은 어린양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제사장이 그 양의 목을 자를 동안 양의 머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 흘리는 것을 보았고 양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양의 몸이 죽어 굳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뿌려진 피의 연기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걸 보았습니다. 그는 어린양이 자기자리를 대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 상실되었음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양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이므로
죄인을 깨끗하게 하고자 다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죄를 버리지 않고 나가 일 년 뒤에 다시 돌아와 똑같은 일에 대한 제물을 바치곤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어린양은 많은 이들을 위해 속전으로 자기 피를 주셨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걸어가 그 어린양 위에 손을 얹고—우리는 그 피투성이 된 상처들과 채찍 자국이 남은 등과
이마를 찢은 잔인한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봅니다--우리는 그의 고통을 느끼고 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터진 혈액 세포를
떠난 생명이 믿음으로 회개한 자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분 안에 있었던 생명이 우리 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죄 짓고자 하는 욕구를 더 이상 가지지 않고 돌아가며 우리는 이제 육체의 행위들과 정욕들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아버지에게서 나온 단 하나의 작은 세포에 불과합니다. 여성은 헤모글로빈(혈색소)이 없습니다.
여성은 난자를 만들어내고 여성은 인큐베이터(밭)입니다. 그러나 피(씨)는 남자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의 이름을 가집니다.
엄마는 남편에게 낳아주는 자녀를 위한 인큐베이터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령이 마리아 위에 덮히고 마리아는 아들을 낳아 그를 예수라 했습니다. 위대한 창조자께서 내려오사 우리 죄를
위해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피가 흘려졌고 예수께서
고통 가운데 죽었을 때 영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동일한 생명(영)이 회개한 죄인 안에 내주하고,
그를 자유케 하고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죄인은 해마다, 제물을 연이어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제물로, 그는 단번에 죄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죄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누르고 승리하며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저주받은 세상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네게 한 징표를 주리니 처녀가 잉태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게 네게 징표가 되리라.
그것은 영영한 징표가 될 것이다. 그녀가 낳은 것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혈액 세포 안으로 내려 오셨는데,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하셨고, 처녀의
태내에 죽음을 목적으로 한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여자의 씨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상함을 입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했을 때, 그는 마리아의 태내에 증식하여 우리 주님의 몸이 될 세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세포는 창조된 세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신 이는 거룩한 피로 즉 하나님의 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성전은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라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단강으로 가, 거기서 그 희생 제물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씻김을 받았습니다. 그 받을만한 희생 제물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를 성령으로
충만히 채우시며 그분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로 이끄셨고 그런데 그가 죽고 피를 흘렸을 때,
하나님의 완벽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죄인 위에 돌아오기 위해서 해방되었습니다.
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호와께서 동물의 오물더미에서 어린 아이로 울면서 태어나시다니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밀짚으로 가득한 구유 안에서 태어나시다니 말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한 징표가 있는데,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과 자신들의 신학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지혜로운 자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울고 있는 아이라니요.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에게는 자랑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치켜들고 우리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난하기도
하고 그렇게 교만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여기 여러분들의 진짜 징표가 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징표입니다.
소년으로 뒤놀고 있는 여호와입니다. 목공소에서 일하는 여호와입니다. 어부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여호와입니다.
"내가 네게 한 징표를 주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흰 칼라를 댄 성직자의 징표가 아니다. 부와 권력의
징표도 아니다. 이 징표에는 네가 원하는 것이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한
징표니라. 그것은 모든 징표들 중 가장 큰 징표니라." 법정에서 얻어맞으면서 서 계시고 이마에 가시관을 쓰셔서
피를 흘리시며 조롱을 받고 무시당하며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계신 여호와입니다. 멸시를 당하며 거절당하여
맨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여호와입니다. 그때 위선자들은 조소하며 그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감히
요청했습니다. 돌아가시는 여호와입니다.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호와입니다. 그리고나서 여호와는
죽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모든 인간을 위하는 징표입니다. 그와 같은 징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징표입니다. 그리고나자 어둠이 이 땅에 내리 덮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거기서 삼 일 밤낮을 누워 있다가 지진이 밤의 어둠을 흔들자 나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여호와는 그의 교회 안에 내주하고자 돌아오셨습니다.
여호와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꽃들과 함께 다시 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교회 가운데서 걷고 그의
사람들에게 권능을 주고자 다시 돌아 오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오셨는데 이번에는 그의 사람들 안에
머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또 여호와는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며 성령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방언으로 말하고 다시 해석으로 답을 주시면서 돌아오셨습니다.
여호와는 돌아와 창녀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얼굴에 오물이 묻은 채
시궁창에서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술꾼에게도 왔습니다. 네, 여호와께서는 육신 안에 표명코자 오셨고 육신을
통해 표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오셨습니다. 즉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그의 길 잃은 양들을 구속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 중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데,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할 권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소유이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 각 시대 안에 계시는 성령.
계시록2: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절이 언급되지 않은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각각의 시대는 각 시대의 사람들에게 향한 동일한 권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각기 다른 시대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2:6.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거니와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없게 될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라. 7.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10.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 11.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14.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 15.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마태복음13: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요한복음8:42.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나왔기 때문이라. 나는 스스로 오지 아니하였으며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43.너희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이들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합니다. 마태복음16:17.예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revealed)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절들을 종합해 보면 각 시대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무리는 각 시대에 주어진 계시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단의 특별한 무리입니다.
그 무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녀들인데, 들을 수 없는 무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8장42~44절) 성령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들으면 그 말씀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무리는
(고린도전서2장6~16절)에 기술된 그 무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의 성령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우리가 방금 한 말을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역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자는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가 말할 때 염두하고 있어야 할 성경구절을 사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요한복음6장45절에서 말씀하신 걸 보십시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하지만 이 말씀이 취해진 이사야54장13절로 넘겨보십시오. 그 절은 이렇습니다.
13.또 네 자녀들이 다 주에게 가르침(교훈)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 큰 평강이 있으리라.
하나님에게 난 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짜 자녀는 성령이
임하고 내주하는 자라는 증거가 또 다시금 여기서 성령에게서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라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왜 방언이 성령 침례의 증거가 아님을 아시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걸 말할지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 그런
것들을 성령 받은 증거로서는 제쳐두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령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네, 성령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성령)가 오셔서 하리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한복음14:26.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약의 사복음서가 쓰여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이 마음 속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가 정확한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완벽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모든 것을 그들의 마음 속에 생각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해 더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에 관해서 성경의 갈라디아서1장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그 당시 정통 유대교파들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성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렀습니다. 바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들은 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방식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시고 정해 놓으신 그분의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어느 날 어떤 중요한 사람이 방문했습니다. 이 사람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인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바로 막은 것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몸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이 아니다. 나는 죄를 위한 희생양이다. 나는 내 영으로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할 것이다. 하지만
선생이신 이가 앞으로 올 것이다. 그는 성령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어린 양으로서 또
선지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영으로 교회에 다시 오셨을 때 그는 선생님(성령)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각 시대마다 똑같은 진리를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 된 자만이 그 시대에 주어진 계시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2장6~16절에서 말한 바와 똑같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을 기쁘게 해야만 합니다.
방송을 들어보면 무척 독특한 교리가 흘러나오는데 그것은 상당한 오해와 딱딱한 감정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교들은 여러분들은 방언을 꼭 말해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은 거라고
말하면서 낙스, 무디, 테일러, 고포스와 같은 그런 위대한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하거나 그들은
모두 비밀리 방언으로 말했고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방언이 성령 충만됨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12장에서 언급된 아홉 가지 은사의 표명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방언을 말하면서 성령을 받는다거나 방언으로 말함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 된 후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예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순절교 신학자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 사람들이
방언을 한다고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는 걸 자인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다섯 번 중 세 경우에
사람들이 방언을 한 체험들로부터 그것을 추정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또 아무런 성경 구절 없이 방언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받으면서 하는
방언인데 그것이 `증거'이며, 나중에 믿는다면, 가끔씩 말할 수 있는 방언의 은사는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성령을 받는 증거로서 방언으로 한 번 말하면, 다시는 결코 방언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것이 말씀 가운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무척 알고 싶습니다.
말씀 속에 없다면 하나님은 그걸 말하지 않은 것이고 그 말씀에 더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하지만 말씀 속에는 이 주제에 대해서 그들이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뭔가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그 장은 사람과 천사의 방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방언들은 이해할 수 있는 방언과
이해되지 않는 방언일 것입니다. 현대 오순절교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즉 천사의 방언으로 말하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 앞에 수레를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2장에 보면 그 사람들은 불신자들도 듣고 이해했던 여러 나라 말로 완전한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실 땐 우리도 침묵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씀하신 데에선 우리도
역시 말하는 게 좋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증거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침례를 받은 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선생님이 오셔서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내적인 선생님이지 외적인 선생님이 아닙니다. 성령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진리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그 시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시대에 내주하는 성령의 표시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성령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오직 사람의 말로 듣고 거기에 잘못된
해석을 붙여 죄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는 신자를 위한 성령의 시대입니다)--각 시대마다
그 증거는 한결같았습니다. 성령 즉 선생을 가진 자들은 말씀을 들었고, 그들 안에 계신 그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그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사자의 말과 그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여 말씀 가운데 생활한 소수의 무리에 속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소수의 무리에 속함이 좋지 않은가요?
저는 오순절 날과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이 내렸던 날을 참고하여 그 두 개의 동일한 체험을 성령 침례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커다란 유혹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에 방언들은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오순절 집회의 혼돈스런 현대판 바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그런 추론들을 떨쳐버리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가 방언을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지혜의 말이나 영의 분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믿음이나 병고침이나 심지어 기적과 같은 다른
여덟 가지의 표명들의 일부를 삶 가운데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그런데 이 관찰은 방언은 아홉 가지 은사 중 가장 작은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으로 말하지 않거나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은사들을
표명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전보다 더욱 더 완벽하게 그런 교리들을 신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은 건 말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역사와 영원히 찬양 받으실 이의 표명은 각 시대의 진리를 그 시대의 참된 씨들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줄 때, 우리는 성령은 그 사람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시대에 주어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멘.
말씀과 성령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말씀 없이 성령을 취할 수가 없고, 성령 없이는 말씀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4장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는 진리의 영이니, 모든
진리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주제를 벗어나기 전에 저는 성령 침례는 말씀에 의한 것임을 분명하게 해두려고 합니다.
그것은 저에 의한 게 아니고, 또 여러분에 의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는 게 됩니다. 아멘.
저는 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았고 저는 확고부동하게, 침례교들은 믿을 때에(when)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들은 "믿은 이후에(since)"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행전19:2.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그렇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은 후로, 믿을 때에가 아니고,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은 후”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1장13절은 사도행전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후에 그 안에서 또한 믿은 후에 (믿을 때에가
아니라)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자 여기에 제가 말하려던 절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현대주의자들과 (자칭) 정통파들이 구원을 어떤 특정한 때 즉 대부분의 경우에 "결정의 순간"이라
불리는 때에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또는 거듭나는 순간이라고 불리는데, 그때에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의 영을 영접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의 영을 영접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들은 믿었습니다. 그건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받는데 까지 이르지 않고 멈추고 맙니다.
여러분은 믿은 후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첫 지시의 말은 오순절날 베드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지시는 오순절날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과 관련이 있는 베드로에게서 나온 직접적인 해답으로서
왔습니다. 그때 이루어진 일은 하나님께서 요엘서에 따라 약속된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그 이전에는 부어지지도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때였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성령을 그들에게 선물로 채워주실 의무가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너는 거듭나야 하고 그 다음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일과 관계된 체험의 방식이면, 성령이 사람들 위에 내린 다음의 경우를 주의깊게 살펴보세요
사도행전8:5.그때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매 6.빌립이 행한 기적들을
사람들이 듣고 보며 한마음으로 빌립이 말한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였으니 7.이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부정한 영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마비 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과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더라.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그러나 시몬이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전부터
바로 그 성에서 마법을 이용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홀리며 자기를 대단한 자로 내세우매 10.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 그들이 다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큰 권능이라, 하더라.
11.시몬이 오랫동안 마법으로 그들을 홀렸으므로 그들이 그를 존중히 여기더라. 12.그러나 빌립이 하나님의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것들을 전도하는 것을 그들이 믿고 남녀들이 다 침례를 받으매 13.그때에 시몬
자신도 믿고 침례를 받은 뒤 빌립과 함께 머물며 그 이루어진 기적들과 표적들을 보고 놀라니라.
14.이제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니 16.(이는 아직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아무
에게도 내려오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다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더라.) 17.그때에 그들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그들이 성령을 받으니라.
12.절에 의하면, 그들은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16.절에 의하면, 그런 것 모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고 올바르게 침례를 받은 후에야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2장38~39절에서 베드로를 통해 성령이 말씀한 것과 똑같은 방식(패턴)으로 와야 했습니다.
잠시 다른 주제이지만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식(패턴)을 볼 수가 있는데, 이방인들의 교회가 오도록,
마태복음16장16절에서 베드로는 그 시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위한 왕국의 열쇠들을 받았고, 실제로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고, 유대인들을 위해
왕국의 열쇠를 열었습니다. 사도행전8장에서는 사마리아 인들을 위해서, 사도행전10장에서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 일은 오직 베드로를 통해서 왕국의 열쇠들(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로 이 땅에서 열리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놀라운 빛을 비춰주는 성경 구절로 갈라디아서3장13~1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14.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아브라함의 복"은 거듭남이고, "성령의 약속"은 성령 침례라고 두 번의 별개 사건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왔다. 이것은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오기 위함이다.”
제가 방금 말한 것을 이해하면 성경 연구자들이 바울이 언제 "거듭나고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을
절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해결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다고 추론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집어넣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7장37~39절을 보시고 이제는 이해하면서 읽어 보십시오.
37.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39.(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께서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은 믿음으로 마시는 신자는 그에게서 나오는
생수의 강을 가지리라고 분명하게 강조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체험을 오순절 날로 연결시킵니다.
이제 이것을 염두 해 두고 요한복음4장10절, 14절을 읽읍시다. 10…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기 이 동일한 생수가 또 나오는데 이번에는 강이라 불리지 않고 샘이라고 불립니다. 대부분 거기가 실수하는
부분(대목)입니다. 그것이 샘과 강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쪽에서 그것은 성령이 주신 영생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 강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이제 능력(역동적인 큰 힘으로)의 부여로서 주어진 성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입니다. 생명과 능력을 주는 것은 동일한
성령이며, 성령은 오순절 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발생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해답은, "체험"입니다.
우리는 체험을 따라 행했지 말씀으로가 아니었습니다. 측정 줄로 삼는 체험을 없애버리십시오. 경험을 없애세요.
오로지 하나의 다림줄, 오로지 하나의 막대가 있는데 그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주의 깊게 보시고 이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바울은 "너희가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것이 바로 여기 우리 문제의 해답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가 성령을 받는 데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성령을 받을 때까지 믿으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을 향한 올바른 방향의 처음 단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멈춥니다. 그들은 물까지는 나가는데 거기서 멈춰버립니다. 그들은 믿다가는 멈춥니다.
성경은 여러분들이 믿을 때에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입니다.
정확하고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너희가 전에 믿었는데, 성령을 받았느냐?"입니다. 사람들은 믿다가 멈춥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그분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계속 앞으로 나가서 성령을 받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정통파들이 잘못한 부분입니다. 그들은 믿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에까지 움직여서 미쳐 다다르지 못하고 멈춰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권능이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멈췄던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을 떠났던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백만이나 되는 강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함께 여행을
떠났고, 모두 다 똑같은 하나님의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모두 다 똑 같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내려친 바위에서
나오는 똑같은 물을 마셨습니다. 모두 다 낮엔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밤엔 똑같은 불기둥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오직 두 사람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만이 진실된 또는 진짜 믿는 자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그 나머지는 믿지 아니함으로 죽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3장에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경고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또 두 사람만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머지는 진실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두 사람은 항상 말씀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가데스에서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마음이 낙심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씀을 믿었으므로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그 땅을 넉넉히 차지하고도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내가 너희에게 그 땅을 주었노라,"고 말하셨기 때문에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구원하심을 보고 나서도, 안식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 아주 적은 수만이 끝까지 믿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저는 앞으로 더 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감정을 사게 되리라는 걸 저는 압니다. 그러나 그건 제가 책임질 바가 아닙니다. 전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하나님이 저로 설교하라고 보내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말하라고
주신 모든 것에 충실히 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6장37절과 4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요한복음1:12.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13.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
태어난 자들이니라. 에베소서1:4.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5.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
자 하나님의 주권성의 주제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고(그것 자체만도 책 한 권이 나올 것이므로) 저는 여기서
이 절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남자들이 자기 신부 감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 자신의
신부를 고르고 계심을 지적하겠습니다. 오늘날 신부들이 그녀가 어떤 남자를 남편으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를 자기의 신부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신랑입니다. 요한복음15: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신부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 신부 선택은 그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1장9, 그리고 로마서9장11절에서는, "이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말씀을 다르게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정한 뜻,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신부를 스스로 택하시는 것이었고, 그 뜻은 그분 안에 있었으며 영원하심은 창세전에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잘 살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주진(塵)이 조금이라도 있기 이전에 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인데 그때는 경배할 아무도 없으므로 그 당시는 잠정적인 하나님이셨을 뿐 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홀로 영원한 영으로서 알려지셨고 그 분 마음속에는 신부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신부는 그의 생각 속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영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런 생각들은 어떻습니까? 그 생각들은 영원한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한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은 많은 것들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으로든 행동으로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아봤고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으로서 전지
(全知)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전지하신 분이라면 그는 지금 배우시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과 상의를
하시지도 않으며, 아무 때라도 자신이 알고 있던 것에 더하지도 않으십니다. 이미 알던 지식에 더할 수 있다면,
그는 전지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언젠가 그는 전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어떤 일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의 모든 생각들은,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도 가질 것이며, 하나님이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들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적인 생각들입니다. 그 생각들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그린 언젠가는 형체와 실체로 변모될
청사진과 같은 것이 아니고 이미 실제적이고 영원하며 하나님의 일부분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담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생각들로서의 아담은 아직 표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편139:15~16절을 보시면 그걸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5.내가 은밀한 중에 만들어지고 땅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 묘하게 꾸며졌을 때에 나의 실체가 주께 숨겨지지
아니하였나이다. 16.주의 눈이 나의 실체가 아직 불완전할 때에도 그것을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되 그 지체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기록되었나이다.
제가 말한 대로 아담에 대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절은 아담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고, 그 생각은 영원하고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아담이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고 그의 영적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했을 때, 그때 아담은 표현된 하나님의 생각이 되었고 그 영원한 생각들은
이제 표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수십 세기를 거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 예레미야, 침례 요한을
찾아내는데 이들 각자는 정해진 때에 표현된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로고스이신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는 표현된 완벽하고 완전한 생각이셨고, 그는 “말씀”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며 영원히 예수님은 말씀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가 우리를
창세전에 그(예수) 안에서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세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안에서 바로 그와 함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 영원성을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주입하겠습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탄생조차도 택함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난소는 수많은 난자를 생산해 냅니다.
그런데 어째서 특정한 때에 특정한 난자가 내려오고 다른 난자가 내려오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또 남성의 정자 가운데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는데 어떤 특정한 정자가 그 난자에 달라 붙습니다.
쉽게 달라붙을 수 있었던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가졌던 다른 정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는데 말입니다. 이 모든 배후에는 유전 정보가 있어 그 애기가 남자인지, 여자 아이인지, 금발 머린지 갈색
머리인지, 눈이 푸른지 까만지 기타 등등을 결정짓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염두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49에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죽은 그들 부모들은 예수께서 대하여 말씀하시던 사람들의 조상들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있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영적으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계속 나갑시다. 이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정해진 때에 육신으로 표현될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로마서4:16.그러므로 그것이 은혜로 되게 하려고 믿음에서 나나니 그 목적은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곧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 그 약속을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로마서9:7.또한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아이들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8.곧 육체의 아이들인 자들 즉 이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이 아니요 오직 약속의 아이들이 그
씨로 여겨지느니라. 9.그 까닭은 약속의 말씀이 이것이기 때문이라. 곧 이 때에 내가 오리니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느니라 10.이뿐 아니라 리브가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으로 말미암아 수태하였는데
11.(그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그때에 그분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셨나니 13.이것은 기록된바, 야곱은 내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3:16.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갈라디아서3: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로마서4:1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 모두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셨고,
바울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 정의 하에 자신과 모든 믿는 자들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의 정의를 좁혀 내려갈 뿐 아니라 그것을 끝마치고 있는데,
왜냐하면, 갈라디아서3장29절에서 그는 그 씨(하나)를 예수로 연결시켰고 "그 씨 자녀"를 약속의 자녀로서,
그리고 약속이 "택하심" 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이 있다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얘기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고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미리 아신 자들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그의 생각들 속에 있던 자들입니다. 간단한 말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비록 각자가 정해진, 예정된 때에 이 땅에서 나올 때까지는 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각 지체가 나왔을 때 그것은 표현되었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위치에 맞게 각 각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부는 문자 그대로 말해진 말씀의 씨 신부입니다. 신부는 정의상 여성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으로도 불립니다. 신부는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예정되었고, 동일한 출처에서 나왔고, 그와 함께 영원한 존재이며
지금은, 한 때 하나님께서 한 몸 안에서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표명되었던 것에 비해, 여러 지체로 된
몸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렇게 불리어야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 일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영원한 로고스(하나님)가 아들 안에 표명되었습니다. (골로새서2장9절)
골로새서2:9.그분(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예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안에 거하셨고 영원하신 이는 육체로 표명된 아버지였고 그것으로 아들의
직함을 얻으셨던 것처럼, 우리 차례로 그의 생각 속에서 영원한 우리는 육체로 표명된 여러 지체로 된 말해진
말씀의 씨가 되었고 이제 육체 안에 표명된 그런 영원한 생각들은 우리가 불리우는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씨가 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오해하거나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씨였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자만이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씨였기 때문에 우리는 소생될 수 있었습니다. 씨가 아닌 것 속에는 소생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점을 주의 깊게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갑시다. 구속은 값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원주인에게 되돌립니다. 구속이란 자신의 소유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흘려진 피로, 그의 사람들을 다시 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해진 말씀의 씨 신부를 다시 사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말씀)을 듣고 나를 따르느니라." 여러분들은 항상 양이었습니다. 결코 돼지나 개였다가 양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각 종류는 자기와 동일한 종류를 생산하며
그 종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다가 육체 안에 표현되었으므로, 우리가
그의 음성(말씀)을 들을 날이 와야 했고, 그 음성을 듣고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깨닫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듣고 탕자가 "오 나의 아버지, 나를 구하소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왔나이다."하고 말했듯이 우리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아들은 자기가 아들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진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이들은 암탉 아래서 부화된 독수리 새끼 이야기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독수리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는
예표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 가져다가 암탉 밑에다 두었습니다.
정해진 때가 되자 암탉 밑에 있는 알들이 다 깼습니다. 병아리 새끼들은 어미 닭과 함께 잘 지냈지만 그 어린
독수리는 닭들이 꼬꼬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먹이를 찾느라고 오물 더미를 헤집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찌 어찌 간신히 살아나갔지만 모든 것이 아주 혼돈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 위 하늘에서 알을 낳았던 어미 독수리가 땅에 있는 그 어린 독수리를 발견 했습니다.
그 어미 독수리는 놀랄 만큼 빠른 속력으로 내려와 새끼 독수리더러 날아 올라오라고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는 그때까지는 한 번도 독수리 울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 외침을 들었을 때,
그 어린 독수리 안에 있던 뭔가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외치고 있는 어미 독수리의 음성으로
날아가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그 어미가 공중으로 날아 올라 자기를 따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무섭다고 외쳤습니다.
다시 한 번 어미는 한 번 해 보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해 보다가
용기를 내서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라갔습니다. 어미 독수리의 외침에 대답하면서 파란 창공을 가르며
솟구쳐 올라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새끼 독수리는 언제나 독수리였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 병아리처럼 행동했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미 독수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자
자기 위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말씀으로 성령의 외침을 듣게 되면, 그도 역시
자기가 누군지 깨닫고 그 위대한 선지자 독수리에게 달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리에 앉아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성령 침례 위에 우리 승리의 머릿돌이 내려옵니다.
갈라디아서4:4.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기신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5.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로 아들의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로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구속은 구입 즉 값을
지불함으로써 원 주인에게 회복시키는 것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아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미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아들로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그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아들이었습니다.
자, 이것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오순절날 누구 위에 성령이 내렸죠? 아들들입니다. 고린도에서는? 말씀을 듣는 동안 아들들 위에 내렸습니다.
성령 침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향한 선한 양심의 표로
물속에서 침례를 받은 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여러분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제시한 것은 모두가 신성의 단일성의 교리를 믿는다면 모두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성 안에는 세 분이 아니라, 오직 단 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생명의 영이 안으로 들어오고, 그에 이어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러 들어오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왜 우리는 아버지에게 우리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시키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고 주는 세 분이 아니라면, 그도(아버지) 역시 뭔가
할 일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분은 아버지이며 그 분 뿐이고 믿는 자
안으로 들어오실 분은 아버지이고 그 분 뿐이라고 명백히 밝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4:16절은 아버지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7절은 나중에 그(예수)가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예수님은 그가 그들에게 오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아버지와 아들)가 저에게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한 번에 들어오시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강림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두 번이 아닌 한 번 오셨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진짜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죄 사함을 위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주제를 끝내기 전에, 저는 여러분들 마음 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영혼의 선재(先在)를 믿는지 알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저는 혼의 환생이나 윤회를 믿지 않는
것처럼 영혼의 선재라는 몰 몬교의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조심하시고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예정되어 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 또는 씨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저 옛날, 인간의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을 만큼 먼 옛날, 영원한 생각을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로마서9:13) “야곱은 내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로마서9:11)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함이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아시겠죠? 그것은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생각은 이 땅에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만이 씨였기 때문에 야곱만 다시 구속하셨습니다. 야곱 혼자서 그 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장자권과 언약을 존중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진짜 씨라면,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들을 것이고 성령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하고 채우고 권능을 주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때와
시대를 위한 말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읽혀지는 표명된 그분의 쓰여진 편지가 될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에게 계시되어지면 진짜 증거가 얼마나 명확해지는지 보셨습니까? 다시 한 번, 주의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왕가의 씨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 속에서 살았습니다. 성령이 그(말씀으로 표명된 생각)를 불렀을 때,
그는 요단강에 가서 거기서 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자 성령이 그 위에 임하고 음성이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 음성은, “이는 내 아들이 되었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셨습니다. 성령은 그들 모두 앞에서 그를 그 아들로서 세우셨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충만되어(그런데 그 동일한 패턴은 오순절 날에도 마찬가지이며 그 후로도 쭉 그럴 것입니다)
그는 그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권능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자, 우리는 성령으로 침례받는 것의 참된 증거는 믿는 자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주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계속 강조해서 말해왔습니다. 제가 매우 분명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계시록2장~3장에 제시된 일곱 교회시대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의 전 기간 즉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은혜로 다루고 계신 시간 전체를 포함합니다. 매 시대마다 예외 없이, 각 시대에 주어진 메시지의 개봉과
마감에서는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쓰라” “...귀 있는 자는(한 사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길 보십시오.
예수님은(성령으로) 매 시대에서 자신을 그 시대에 주어진 말씀에 관련된, 유일한 한 분으로 얘기하고 계십니다.
각 시대에 보냄을 받은 한명의 사자만이 성령이 그 시대에 말씀하셔야만 할 것을 받아들이고, 그 한명의 사자는
참 교회에 보냄을 받은 사자입니다. 그는 성령을 대신하여 계시로 "교회들"에게, 참 교회와 거짓 교회 둘 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그 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 소수의 무리들을 통해서 모든 자에게 전파됩니다.
그런데 메시지 영역 안으로 오는 자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하더라도 그 메시지는 어떤 특정한 식으로 어떤
특정하게 자격을 갖춘 무리에 의해서만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무리의 각 개인은 성령이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듣는 그들은 자기 스스로의 개인적인 계시를 받지 않으며,
어떤 무리도 자기들의 종합적인 계시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그 사자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듣고 있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손 아래서 이 방식(패턴)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선지자 겸 사자임을 인정했던 다른 사도들과의 대결로 증명된 대로, 바울 혼자 그의 시대를 위한 충만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 속에 있는 실제적 설명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양들(그의 자녀들)이 마게도니아에 있고,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은(마게도니아인들) 성령이 바울을 통해 말씀하셔야만 하는 것을 들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원했을 때, 바울을 금지시켰습니다. 매 시대마다 우리는 정말로 똑같은 방식(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자를 통하여 와야 하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서 그
사자로부터 충실하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여러 곳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그 시대 말씀의
빛이 확산되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전파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사자가 전했던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14장37절에서, 사람들에게 그가 말한 것만 말하라고 경고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뭐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나왔다고요? 또는 그게 당신에게서만 왔다고요?
그들은 여기서 보탭니다, 또, 아니면 저기서 빼냅니다, 그러면 곧 그 메시지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아 부흥은
곧 죽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해야만 할까요,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인 단 하나의 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말한 것만
말하라고 경고했고,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바울 자신이라도 자기가 계시로 준 그 말씀을
하나라도 바꿀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그 시대의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사자들의 경고로 교회들에게 말하라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만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이제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했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제 어째서 제가 정통파들과
오순절교와 손을 맞잡지 않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계시해 준 그대로의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자. 저는 그것을 다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전하려면 책을 따로 하나 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모든 성경을 종합하는 걸 도와드리기 위해 이 모든 점들에
대한 설교와 테이프와 메시지를 많이 내놓을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각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매 시대마다 그것은 똑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여러분은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 즉 그 시대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매 시대에 보냄을 받은 모든 사자들은 그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온갖 신선하고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인데 사람들이 그 시대에 주어진 말씀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매 시대의 외침은 책망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성경에 있는 첫 번째 책(창세기)에서부터 마지막 책(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불쾌하게 여기신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말씀을 떠나는 것이고, 그의 호의를 되찾을 처방은 딱 한 가지,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베소 시대에서, 그리고 이 서머나 시대에서, 그리고 매 시대에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이해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인 라오디게아 교회, 마지막 시대에서, 우리는 말씀의 정전 상태
즉 대환난으로 이끌어갈 완전한 배교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씨라면, 여러분이 진실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필요한 고기보다도 더 소중히 여길 것이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저의 진정어린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말씀으로부터 가져다주시는 것을 듣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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