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기독교 목사들이 종철 스님의 유언 시를 인용해 종철 스님과 불교를 비하하는 일이 있다.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갈래나 된다/한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ㆍ불교 스님들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불교의 부처를 비교하며 부처의 우월성을 논하는 장면도 본다.
ㆍ과학이 인류를 지옥에서 파라다이스로 인도한 구세주라는 진화교 사제들과 신자들의 얘기도 듣는다
...
사상의 통합은 왜 이뤄지지 않을까? 그리고 왜 21세기에도 종교는 극단으로 존재할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
《섭리 때문》
우리는 신의 연극 '무대' 위의
ㆍ지나가는 객 1
ㆍ지나가는 객 2
ㆍ지나가는 객 3 ... 들이다.
각자의 역이 다르고 섭리의 한 자락에 이유없이 휩쓸려 생멸을 반복하는 순환의 극히 찰라적 순간을 연기하는 엑스트라다.
이곳에서 자력으로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섭리'를 프로그래밍한 섭리 주관자의 메세지를 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인간들의 사유 찌꺼기들을 가차없이 걷어찰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유함을 얻는다.
.
이를 가장 잘 실천한 분이 예수다. "또 뻔한 얘기를 하려는게 아녀?"
예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을 안했다. 상종을 안했다는 것은 서로 멀리 했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을 혐오하고 모든 접촉을 피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아무리 신앙심이 강해도 기독교인들이 불자를, 불자들이 증산 신도들을 혐오하고 접촉을 피하진 않는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스스로 접촉해 대화하고 그들의 동네에 일부러 머무르며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경계》를 허물었다.
작은 《앎》에 기반해 모든 정신 영역에 경계를 쳐 대는 우를 피해야 그나마 《자유함》을 얻는다.
ㆍ자유자는 과학을 신봉하지 않고 인간이 갖는 사유의 부산물로 취급한다.
ㆍ자유자는 종단의 쓰레기에 대해선 비판할 수 있으나 종교의 다양함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는다
ㆍ자유자는 신의 섭리가 정상으로 회복된 세계가 진정한 자유의 세계임을 자각한다.
ㆍ자유자는 새로운 사상의 사조에 늘 의문을 품는 탐구자의 길을 걷는다.
이런 자유자들이 늘어나 인류의 의식을 깨우는 것을 《개벽》이라 부른다. ^^
(아침에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것을 옮겨 옴)
카페 게시글
(仙房) 불휘기픈 나무
💢 크리스찬-붓디스트-증사니스트의 융합적 사유하기
혜공[蕙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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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08:2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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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빨간 글씨 속의 '자유자' 뒤의 설명글을 읽다보면 < '자유자' = 혜공[蕙孔] > 이 되는군요....ㅎ
😀🙂🤔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