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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될래, 사자 될래, 양 될래?
(시편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낙타 될래, 사자 될래, 양 될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낙타 될래, 사자 될래, 양 될래?’
요즘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 선수의 골 소식이 자주 들려옵니다. 경기 동영상을 보면 손흥민 선수는 골에 대한 집념이 상당히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골을 넣기 위해 공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다가 골에 실패하면 동료들이 원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기회만 있으면 슛을 시도하는 것이 손흥민 선수의 특징일 것입니다.
기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골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율법에 사로잡혀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아예 기도를 못하거나 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기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면 삶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봐도 정확한 진단일 것입니다. 일을 못하더라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삶은 저절로 풀려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믿음생활은 대충하고 삶은 철저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을 굉장히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을 철저하게 하고 삶은 거저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면 잘못되어가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삶의 밑동까지 흔들리기 전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되는 것일까요? 기도가 골을 넣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손흥민 선수를 비롯해서 해외에 진출한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경기를 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는 골을 넣는 기쁨을 압니다. 골을 넣으면 춤을 추기도 하고 개구리처럼 뛰어올라서 동료들에게 안기기도 하고 손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기도 합니다. 골을 넣는 기도 또한 이렇게 기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강박으로 기도를 하는 경우에도 이 기쁨은 느낄 수 없습니다.
공격수가 축구장에 들어서면 반드시 골을 넣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손흥민 선수가 골에 대해 강한 집념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라는 축구장에 들어온 공격수입니다. 기도의 골을 넣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하고, 이 기도의 골을 넣음으로써 삶은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기도의 골과 삶의 시작이 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골을 넣음으로써 시작되는 삶의 질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넣어야만 하는 기도의 골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문제가 있을 때에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에 대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도는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아도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부족함이 크게 느껴지는 상태였지만 기도한 후에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부족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부족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족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절대로 인도하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기도를 통해서 부족함이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이유는 삶 자체를 잘해나가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주어지는 과제나 상황들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함을 유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삶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 즉 복음을 받아들인 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특히 기도와 연관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를 통해서 항상 드리는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항상 드리는 기도는 골방 기도를 끝내고 시작한 삶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골방 기도는 기도의 골을 넣을 때 마쳐집니다. 지금 상황에서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 항상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골을 넣은 마음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사명입니다. 그럴 때에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와 과정과 숙제들은 다 하나님의 몫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인이 기도를 제대로 드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루할 만큼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다윗에게 배울 것이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입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양이면 여호와는 목자이십니다.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십니다. 양이 누웠다는 것은 이미 배가 불러서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목자는 양을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십니다. 이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노년에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이렇게 양이 푸른 초장에 누워서 되새김질을 하고 쉴 만한 물가가 있는 목가적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파란만장했고 생의 굴곡마다 너무도 많은 부족함이 있었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다윗처럼 부족함이 많았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타당한 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이시면 양으로써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인데도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기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다윗의 삶은 너무도 파란만장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이 노래가 의례적으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잘못도 없이 사울 왕의 질투를 받아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무려 십년 간 광야를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서는 밧세바 간통사건으로 인해서 죄악을 지적받고 베개가 썩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였으나, 그 결과로 나라에는 전염병이 돌고 집안에는 피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하였고, 이에 분노한 다말의 친오빠이자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 외가로 도망갔던 압살롬은 몇 년 후에 돌아와서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에 다윗은 궁궐을 빼앗기고 피난을 가게 되는데, 압살롬은 백주에 궁정 옥상에 올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첩들을 겁탈합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 집안은 없을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동양적 관점으로 본다면 다윗의 집안은 망한 집안입니다. 집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평생 정적들의 위협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들을 겪은 다윗이 말년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거짓말로 아첨하는 노래 같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거짓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합당한 내막이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과 대비되는 말을 남긴 사람으로 야곱이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을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이 말이 다윗의 노래보다는 인간적이고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가 목자이시기 때문에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받는다고 느낀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 삶, 지루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삶이 정말이라면 무엇 때문인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윗만큼 파란만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못 느낀 부족함을 왜 항상 느끼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노골적이든 은근히든 지금과는 다른 어떤 기대나 갈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이 든다면 부족함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나에게 다윗만큼 신경을 쓰지 않으시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내 삶의 환경은 편안히 누워서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푸른 초장도 아니고 갈증이 나면 언제나 물을 마실 수 있는 쉴만한 물가가 아닌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 되심은 다윗에게나 우리에게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분명하고 변함없는 사실이라면 지금 주어진 삶은 푸른 초장일 수밖에 없고 쉴만한 물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 되심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부족함을 느끼는 이율배반적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천 가지 만 가지 조건과 상황과 미래에 전개될 우리의 삶의 과정을 모조리 고려하고 계십니다. 그 결과 이 삶의 현장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목자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신 결과로 주어진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런데 양이 아니라 표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탁 트인 감옥에 불과합니다. 표범이든 곰이든 육식동물이라면 푸른 초장은 이들을 먹이지 못합니다. 설령 같은 초식동물인 말을 데려다 놓는다 하더라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말은 결코 양처럼 눕지 않을 것입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밀림이나 아프리카의 사바나에 있어야 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사자나 호랑이에겐 맞지 않습니다. 또 숨기를 좋아하는 사슴이나 토끼를 데려다 놓아도 몸을 숨길 수 없는 푸른 초장은 불안한 장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푸른 초장은 목자의 보호 아래에 있는 양에게만 가장 어울리는 곳입니다.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양되기를 바라시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나 이리나 곰 같은 육식동물이라면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같은 초식동물일지라도 말이나 사슴이나 토끼 같다면 목자가 있는 초장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양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가지 동물을 예로 들어보았습니다만 목자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특징을 가진 동물 중에서 대표적으로 낙타와 사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낙타와 사자의 상태가 된다면 하나님이 목자 되셔서 아무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도 부족함만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낙타와 같은 유형의 사람입니다.
낙타는 크고 구슬퍼 보이는 눈을 가리는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발굽이 갈라져 있지 않고 등에 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할 정도로 구슬프게 웁니다. 이 모든 낙타의 특징들은 한 가지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낙타의 속눈썹이 긴 이유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낙타를 타고 가는 주인은 도저히 정면을 주시할 수 없는 모래바람 속에서도 낙타는 길을 주시하며 사막을 걷습니다. 발굽이 통으로 되어 있어서 모래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등의 혹에서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어떤 동물보다도 갈증에 강합니다. 낙타는 사막에 들어갈 때에 사람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구슬프게 운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들어서는 끝없이 황량한 사막 길을 바라보면서 절망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낙타는 이 절망 속에서 한 순간이라도 빨리 사막에서 빠져나겠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렸던 부족감을 느끼는 형태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의 주어진 상황을 무조건 싫어하고 빨리 빠져나가야만 하는 과제로 생각합니다. 구슬프게 우는 낙타의 울음처럼 마음은 현재 상황에 대해 몸부림을 치면서 싫어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절대로 목자가 되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예언들 중에서 아주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이사야 35장 1~7절을 보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중략)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일어날 일을 비유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특징이 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사막 같은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느낍니다. 건강문제 재정문제 가족문제 인간관계문제 등 삶에는 얼마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골을 넣는 기도가 되려면 지금 사막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낙타에서 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양이 될 때에 비로소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타가 되어서 현재 처한 상황을 사막으로 여기고 빨리 빠져나가기만 바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양으로써 지금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절대로 문제에 손을 대고 상황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노래가 나의 고백이 될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주기도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지난주에 항상 드리는 기도를 말씀드렸고 오늘은 골방 기도를 할 때에 골 넣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타이밍은 사막이 아니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느껴지는 때입니다. 이때에 삶을 시작하면 하나님의 목자 되심이 이어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사막으로 여기고 빠져나가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낙타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자가 되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상황임에도 싫다고 뿌리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자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본 장면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수사자가 눈을 지그시 뜨고 나지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해가 지고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이리나 하이에나 같은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멋진 모습입니다. 사냥은 주로 암사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수사자가 하는 일은 멀리 바라보며 위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자(獅子)의 사(獅)자를 보면 금수 변에 스승 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냥 짐승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멀리 보는 모습이 마치 스승 같다는 것입니다.
양이 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낙타 유형 아니면 사자 유형입니다. 물론 눈앞의 이득만을 쫓아가는 이리나 표범 같은 유형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이 사자의 위엄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전과 꿈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전과 꿈이라는 유행이 교회마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자처럼 멀리 보며 살아가는 모습을 꿈꿉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은 어떨까요? 양에게도 시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수치로 환산하면 –10이라고 합니다. 양은 멀리 내다 볼 수가 없기에 바로 앞에 있는 목자만을 바라보고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과 같은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영어로 기프트(gift)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독일어 기프트(gift)는 ‘독’이라는 뜻입니다. 둘 다 ‘주다’라는 뜻의 기브(give)와 게벤(geve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하는 바는 완전히 다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푸른 초장이라는 비전은 내게 엄청난 선물(gift)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마음으로 바라보면 독(gift)이 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내가 가지면 나는 양이 아니라 사자가 됩니다. 사자는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시력이 –10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목자만을 바라보고 목자의 음성만을 듣습니다. 길 잃은 양이 생기는 이유는 목자를 시야에서 놓쳤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비전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양들의 모임이어야지 사자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자가 된 교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미래를 향하여 내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이 목표를 이루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푸른 초장의 위치를 목자에게 지시하려는 양은 없습니다. 목자는 이렇게 사자가 되어버린 양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을 싫어하는 것은 낙타형의 사람이나 사자형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낙타가 지금을 무조건 벗어나기 위한 장소로 여기는 반면에, 사자는 미래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지금을 받아들입니다. 이 모습이 일견 적극적이고 훌륭하게도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비전은 리더십을 위한 덕목으로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하나님이 목자 되셔서 삶을 이끌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자가 되어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끌고 가려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관계는 성립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갈등 구조를 겪으며 부딪치고 깨지게 됩니다.
양으로 바뀌기만 한다면 독생자까지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보장해주십니다.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지금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부족한데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부족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낙타나 사자는 푸른 초장에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양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반드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끄실 것입니다. 설령 범죄자이고 지금 있는 곳이 감옥이라 할지라도 양이 될 수 있다면 그곳은 푸른 초장이 됩니다. 빚이 산더미인 상황에서도 양이 될 수 있으면 지금은 푸른 초장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이 되기만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원수의 목전도 하나님이 펼쳐두신 잔치 상이 있는 푸른 초장이 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낙타나 사자 같은 마음을 양 같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본문 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라는 말에서 의의 길은 단순히 올바른 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의 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하셔서 내게 좋게 여겨지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내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항상 이름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으면 몸으로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러면 영혼이 제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도록 하시고 하나님께 마음을 다 쏟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장 좋은 쪽으로 인도하실 때에 현실에서는 원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죽이려고 하는 순간일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이 된다는 것은 원수가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원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먼저 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양이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목자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먼저 보는 동안 나는 양이 되고,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보시기에 좋은 의의 길로 인도해나가실 것입니다.
내가 바꾸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주어져 있는 문제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과제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제나 문제나 상황보다도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상황이 미래를 위한 과정으로 여기는 사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자와 같은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비전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 낙타처럼 지금을 사막처럼 여기며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을 쳐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목자이신 하나님입니다.
제가 25살 학부 신학생 1학년 때에 결혼을 해서 보증금 400만 원짜리 월세 방을 얻었습니다. 그 월세 방이 대로변에서 보면 1층인데 뒤쪽에서 보면 지하입니다. 그 위층은 주인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집이 평온할 날이 없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말로 끝내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싸움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했기에 큰일이 날까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거실 앞에 있던 큰 유리창을 발로 차서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온 집안은 피투성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옆집에 살던 쌀가게 아저씨가 주인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고 저하고 집사람은 주인아주머니를 말리고 그 집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집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TV가 켜져 있었습니다. 무슨 여행 프로그램인지 아름다운 산속에 호수가 비치고 있었습니다. 지금 집안 상황은 아비규환인데 TV에서는 세상에 다시없을 평화로운 장면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상황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양이 되는 것은 삶에서 어떤 아수라 같은 환경이 펼쳐지더라도 마음은 평화로운 장면이 나오는 TV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TV속의 장면이 아니라 실제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양은 시력이 –10이라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목자 말고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양과 같이 되어서 목자를 먼저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원수가 창을 겨누고 있더라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고비이고 정점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이 싸움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선민들이 이 싸움에 졌을 때에 우상숭배에 빠졌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제일 힘듭니다. 지금의 상황이 풍전등화의 위기처럼 보이는 현실이 닥쳤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되어서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때에 하나님은 목자로서 나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나는 부모이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녀를 먼저 보면 사자나 이리나 표범이 되지 않을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의 낮은 성적이 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보면 목자가 되셔서 자녀와의 관계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공부 못하는 자녀를 두었다고 큰일 났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은 TV에서 나오는 풍경처럼 평온합니다. 자녀가 저렇게 공부를 못하는데도 마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금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력 –10의 양이 되어서 계속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대한 안목은 양의 시력 미만입니다. 재정 문제를 바라보고 열심히 해결책을 찾아보지만 그것이 원하는 대로 해결될 적은 극히 적습니다. 더 안 좋은 국면을 향해서 가기 일쑤입니다. ‘한치 앞을 못본다’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안목을 가진 우리가 10년 뒤를 계획하고 20년 뒤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뭘 알아서 지금을 싫다고 합니까? 못 보기 때문입니다. 뿌옇게 아무것도 못 보면서 온갖 것을 보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시력 –10의 양처럼 되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목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봄을 통해 부족함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다윗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평생을 두고 사자처럼 비전을 갖지도 않을 것이며, 낙타처럼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으리라는 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따를 것을 믿기 때문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은 곧 성전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성전에 살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십년을 쫓길 때에도,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도,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피난을 갈 때에도 마음은 항상 성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상번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피난할 때에 그 상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낙타처럼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때에 바로 성전의 상번제를 떠올리며 번제로 죽어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의 마음을 죽이기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죽으면 지금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보고 싶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동일시합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고, 온 몸은 채찍으로 맞아 살갗이 터졌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고백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할 곳이 마땅치 않다면 화장실에 가서라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나는 죽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과장되고 부장될 것을 꿈꾸는 사자가 되지 마세요. 지금 상사로부터 구박받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낙타가 되지도 마세요. 지금 십자가를 생각하며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처럼 상사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속으로는 웃음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 이곳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두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성전 곧 십자가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먼저 보고 반응하는 내가 끊임없이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내 생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내 마음이 죽으면 지금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보입니다.
부족함이 느껴지는 상태로는 삶을 살지 마세요. 이런 삶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미 인도하셨습니다. 지금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양이 아닌 사자이고 낙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앞에 계신 목자를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고 미래의 비전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양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을 싫어하지 말고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마음을 죽이면 설령 감옥에 있더라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었고,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극단적 상황가운데서도 하늘이 열리면서 목자이신 하나님과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었으면 좀 지켜주시지 왜 안 지켜주셨나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키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을 지키시며 의의 길을 여시기 위해 몸을 사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붙잡으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목자에게 붙어있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라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지루할 정도로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어져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메일이나 전화로 ‘목사님! 지루해 죽겠어요. 너무나 부족함이 없어요. 어쩌면 이렇게 푸른 초장에서 되새김질 하는 삶을 사는지, 어쩌면 이렇게 쉴만한 물가에서 갈증을 해결하는 삶이 주어지는지요.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골은 바로 이렇게 부족함이 없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삶은 하나님이 목자 되셔서 인도해나가실 것입니다. 양이 되어서 주어진 상황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면 됩니다.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반복할 때에, 지루할 정도로 부족함 없는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함으로써 상황이 죽고 하나님이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제일 먼저 봄으로써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마음껏 만끽하며 살아가는 초원의 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