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했다. 손이 쉽게 닿지 않는 맨 위칸에 있는 책들을 꺼냈다. 책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계속 간직할 건지 버릴지 결정했다. 책장은 제법 깊이가 있어서 끝부분은 어떤 책들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꺼운 책 한 권이 내 손에 잡혔다. 시드니와 블루마운틴 지도책이다. ‘이걸 여태 갖고 있었네…’ 비닐 커버의 지도 책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모서리도 얼마나 많이 손으로 펼쳤다 접었다 했는지 휘어져 있었다. 청소용 장갑을 벗고 책을 들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자, 그리운 옛 기억이 떠올랐다.
지도책을 처음 접했을 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운전을 배우기 전 지도 읽는 법부터 배웠다. 남편이 운전할 때는 내가 지도책을 보며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지시해야 했다. 방향을 역으로 읽어서 거꾸로 간 적도 있다. 길을 잘 못 들어서 헤매면 남편과 작은 실랑이를 했고, 결국 남편은 차를 세워 지도를 보고 길을 외운 후 다시 출발을 했다. “방향감각이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당신과 내가 뇌 구조가 달라서 그래” 남편은 지도 보는데 무슨 뇌 구조 애기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시시대에 남자는 사냥과 채집을 하려면 집에서 멀리 떠나 다니다가 돌아와야 하는데, 길 찾기가 곧 생존능력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연구 결과에는 길 찾는데 사용하는 뇌 부위가 남녀가 다르다고 한다. 남편은 나보다 공간지각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사람의 도움 없으면 운전 중에는 지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미리 길을 머리에 입력하고 주변에 상징적인 지형물이나 특이한 건물 또는 주유소의 위치를 기억해서 길을 외워버린다. 남편은 지도에 표시된 데로 목적지를 방문한 후 그 다음 번에는 지도 없이도 찾아가곤 했다. 누군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오면 지도책이 머리에 그려진다는 남편은 큰 도로의 이름을 말해주고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다. 나는 지도를 보고도 길을 헤매는 것이 자존심 상해 혼자 책을 펼치고 자주 가야 하는 길이나 동선이 복잡한 길을 외웠다. 당시 지도를 잘 못 보는 사람을 ‘길치’ 또는 ‘지도치’라 부르기도 했다. 나는 나름의 훈련 때문인지 차츰 지도 읽는 것에 익숙해졌고 재미까지 더해졌다.
시드니를 벗어나면 그 지역에 맞는 지도를 가져가야 한다. ‘Visitor Information Centre’는 대부분 큰 도시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찾기가 쉽다. 방문객들을 위한 안내와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고 그 마을에서 꼭 들러 보아야 할 곳을 알려준다. 어떤 곳은 지역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아이들은 코알라나 캥거루 인형을 손에 쥐고 부모들을 조르기도 한다. 간단한 스낵과 커피, 빵을 팔기도 한다. 마을 안내서와 지도 한 두 장을 챙겨서 새로운 길을 찾아 가는 여정을 시작하는데 간혹 안내서 직원을 잘 만나면 뜻하지 않게 귀한 정보를 얻는 행운도 있다.
NSW 중서부 배서스트 지역을 지나 지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내려가면 코어라라는 동네를 만난다. 작은 동네지만9월이면 온 들판이 유채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방문객 센터의 직원이 지도를 펼치면서 누구나 다 들리는 곳이 아닌 숨겨진 장소를 형광 펜으로 표시해주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알려준 대로 갔는데 끝도 보이지 않게 광활하게 펼쳐진 노란 들판을 보고 와! 와! 탄성만이 나왔다. 봄바람이 꽃을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유채향이 코끝을 스쳐갔다.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벅찼다.
지금은 시드니 지도책이 어떻게 나오는지 검색을 해봤다. ‘Sydney & Blue Mountains Street Directory 2024 60th” 개정판이 나오고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신도시가 개발 되어서 새로운 지역과 도로가 생겨났다. 개정판은 신도시의 새로 생긴 지역과 거리를 추가했고, 표지도 산뜻하게 밝아졌다. 스트리트 맵과 더불어 주변 교외를 탐색할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다. 새 책을 사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종이 지도를 보는 즐거움 때문이다. 요즘은 GPS네비게이션이 차에 설치되어 있거나, 길 찾기 앱이 핸드폰에 있어 지도책을 찾는 사람은 드물지만,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나 통신망이 좋지 않은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은 지도책이 필수품이다.
이민 초창기 시절이 떠오른다. 낯선 언어가 밀려오고, 낯선 길이 두려웠던 때. 일상의 모든 것을 이방인으로 겪어내야 했던 막막한 시간을 살아야 했을 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불투명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도처럼 내 가야 할 길도 누군가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핑크 빛 꿈을 안고 왔으니 고국을 되돌아갈 엄두는 쉽게 낼 수 없었다. 모든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아이를 기르고 밤낮으로 일하며 전투적인 삶을 사는 중에도 지도책이 주는 위안이 있었다. 여유시간이 있으면 지도를 챙겨서 어린 아들과 야외로 나갔다. 목적지를 위해 지도를 펼칠 때마다 설렘이 일었다. ‘바람을 쐬러 나간다’는 것은 일상 속 활력이 되었고, 재충전을 하는 시간이었다. 찾아간 곳마다 다채롭고 아름다운 자연은 친근한 유대감으로 낯선 이방인을 품어주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얼마나 남았을까. 길은 보이지 않지만 두려움은 없다. 이민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은 내 보통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익숙해진 외로움은 친구가 되었고, 낯선 길은 즐거움이 되었으니까. 주어진 인생의 남은 길을 기대하며 잘 걸어가자 다짐해본다. 주말에는 새로 나온 2024년도 개정판 지도책을 사러 가야겠다. 툭툭 털어낸 책 먼지가 오후 볕 속으로 춤추듯 날아간다.
임을옥 (문학동인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