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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실한 농촌의 삶의 모습을 훈훈하게 묘사한 촌가잡영(村家雜詠)>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촌가잡영(村家雜詠)>은 가난한 살림이지만 근실한 농촌의 모습을 훈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 농촌의 풍속화를 보는 듯 농부 내외의 전원의 삶이 소박하고 싱그럽게 그려져 있다. 개울과 버들 언덕이 배경으로 나오지만 중심에는 농부가 열심히 가꾼 오이를 따다가 장터에 가서 소금으로 바꾸어 이를 콩잎에 소중히 싸서 돌아오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글의 저자 조선후기 문신 이미(李瀰 1725~1779)는 비록 문집을 남기지 못해 인명사전이나 문학사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문신ㆍ학자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자신을 이어 대제학을 지낼 만하다고 칭찬했을 만큼 문학이 뛰어났고, 당시 명사들의 묘지를 여러 편 제작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당시(唐詩)를 배웠으면서도 조선인의 정감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한편 그는 조선전기 우의정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과 조선중기 형조판서를 지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등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자.^^ 비바람 몰아친 다음날 어스름 새벽부터 밭으로 농부는 나간다. 혹시 농작물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논밭이 황폐화되지는 않았는지, 밤새 마음 졸이다가 잠잠해진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한 밭일이 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아니 날이 어둡기 전에 서둘러 하루 밭일을 마무리한다. 노동의 거룩한 피로와 저녁때의 허기가 그의 발걸음에 묻어 있다. 집으로 향하는 논두렁길로 남정네가 앞장서고, 아낙은 몇 걸음 뒤쪽에 떨어져 걸어온다. 남편은 괭이 메고 아내는 점심바구니에 호미를 얹곤 종종걸음을 친다. 뒤따르던 아내가 농을 건다. “남정네가 어째서 아낙보다 걸음이 성글까?” 앞서가던 남편이 받는다. “어찌 아낙네는 걸음도 말도 종종거릴까?” 밭일의 거룩한 피로를 이렇게 녹이며 걷고 있다. 아낙의 머리에 인 소쿠리 안에서 호미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 거린다. 하루 중에 가장 싱그럽고 유쾌한 시간이다. 산 그림자에 반 넘어 가리운 집이 저만치 보이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녀석들은 주인이 귀가 하는걸 귀로 들었을까? 코로 맡았을까? 흰 삽살이와 늙수그레 누렁이 두 놈이 빈집을 지키느라 심심했다며 꼬리치고 앞다리 들고 울타리 새 코를 박고 짖어댄다. 배고픈 녀석들은 주인이 반갑기보다 주인이 내줄 밥그릇이 더 그립다. 드디어 땅거미가 서서히 마을을 다 덮었다. 이집 저집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한 올 한 올 피어올라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내려앉더니 마을숲속 나무 끝에서 흩어진다.
● 다음 칠언절구 <촌가잡영(村家雜詠)> 3수(首)는 조선후기 문신 이미(李瀰 1725~1779)이 시골의 잡다한 삶의 모습을 읊은 작품이다. ‘灰’, ‘刪’, ‘肴’ 운(韻)을 차례로 사용해 3수(首)를 이루었다.
첫 번째 ‘灰’ 운(韻)의 칠언절구는 폭우가 내린 다음날 농부는 장터에서 오이를 팔아 소금과 바꾸어오는 장면을 그렸다. 다리가 끊어진 시냇물엔 소용돌이가 일고 버들 언덕 농부의 집 사립문은 주인이 출타 중인지 반쯤 열려 있다. 저 멀리 땅거미 어스름 속에 오이 팔아서 소금으로 바꾸어 돌아오는 농부의 발걸음이 가볍다.
두 번째 ‘刪’ 운(韻)의 칠언절구는 농사 일이 늘 그렇듯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물녘에야 비로소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모습을 담았다. 돌아가는 논두렁길로 농부가 앞장서고, 아낙은 몇 걸음 뒤쪽에 떨어져 걸어온다. 집의 삽살개와 늙은 누렁이가 해진 울타리 응달쪽에서 주인이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댄다.
세 번째 ‘肴’ 운(韻)의 칠언절구는 괭이 메고 들판으로 나갔다 저녁밥 때 돌아오는 농부를 그렸다. 비바람 몰아 친 다음날 밤새 애달아 하다가 새벽에 벌떡 일어나 괭이 메고 밭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일에 파 묻혀 있다가 저녁밥 때가 다 된 어스름에야 돌아오는데 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솟아올라 이내 마을 숲속으로 흩어진다.
<촌가잡영(村家雜詠) 시골의 잡다한 삶의 모습을 읊다> 이미(李瀰 1725~1779)
1) 장터에서 오이 팔아 소금과 바꾸어오는 농부
溪橋中斷兩成洄 시냇가 다리 끊어진 양쪽에 소용돌이 이는데
柳岸荊扉爲半開 버드나무 언덕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네.
包藿裏鹽何漢子 콩잎에 소금 싸 들고 오는 사내 누구인가
暮從都市賣瓜廻 장터에서 오이 팔고 땅거미 따라 오고 있군.
2) 저물녘에 농사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事到黃昏始方閒 일이 저물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가해지니
男前婦後荷鋤還 남편은 앞서서 괭이 메고 아내는 뒤에서 따라간다.
白尨蒼犬齊搖尾 삽살개와 늙은 누렁이가 함께 꼬리를 흔들며
迎在疎籬暝色間 해진 울타리 응달쪽에서 맞이하네.
3) 괭이 메고 들판으로 나갔다 저녁밥 때 돌아오는 농부
山南纔送風雨交 산 남쪽에 몰아친 비바람을 겨우 보냈는데
荷鋤丁男曉出郊 새벽에 장정은 괭이를 메고 들로 나간다.
知是村廚炊已熟 시골 부엌에 밥이 다 된 것을 알겠거니
靑煙一抹山林梢 푸른 연기 한 올 숲의 나무 끝에서 흩어지네.
[주1] 성회(成洄) : 소용돌이를 일으키다.
[주2] 유안(柳岸) : 버드나무가 늘어진 언덕.
[주3] 형비(荊扉) : 형(荊)은 아무리 잘 봐줘도 ‘가시나무’다. 비(扉)는 문짝이거나 집이다. 가시나무로 사립문을 만들지는 않고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사립문을 다는 경우는 종종있다. 작가의 뜻은 가시나무 울타리에 만든 사립문을 그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생각만 그렇게 하고 그냥 문이라 하자.
[주4] 한자(漢子) : 남자(男子)를 낮잡아 일컫는 말.
[주5] 모종(暮從) : 지는 해를 따라서. 저물녘. 땅거미 따라
[주6] 하서(荷鋤) : 괭이를 메다. “달빛 아래 괭이 메고 돌아오네(帶月荷鋤歸)“ 도잠(陶潛)의 <귀원전거(歸園田居)> 시에 “남산 아래에 콩 심으니, 풀은 무성하고 콩 싹은 드문드문.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김매고, 달빛 띠고서 괭이 메고 돌아오네. 좁은 길에 초목이 자라나니, 저녁 이슬이 내 옷을 적시네. 옷 젖는 것이야 아까울 것 있으랴, 그저 농사만 잘됐으면.[種豆南山下 草盛豆苗稀 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 道狹草未長 夕露沾我衣 衣沾不足惜 但使願無違]”이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주7] 창견(蒼犬) : 늙은 개, 창(蒼)은 푸르다, 우거지다. 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지만 아주 드물게 창안백발(蒼顏白髮)에서처럼 늙다 로도 쓰인다.
[주8] 명색(瞑色) : 해질 무렵의 어둑어둑한 광경. 땅거미가 내려앉은 상태.
[주9] 일말(一抹) : 어떤 감정 작용이 없지 않을 정도로 약간 있음을 나타내는 말.
◉ 참고 : 저자 이미(李瀰 1725~1779)는 자가 중호(仲浩), 본관은 덕수(德水)로 이행과 이안눌 등 문한가(文翰家)의 후손이며, 한성판윤 이광하(李光夏)의 증손이자,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집(李)이고, 판서를 지낸 이주진(李周鎭, 1692~1749)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옥당(홍문관관원) 출신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며, 부인 또한 옥당 출신 서명빈(徐命彬)의 딸이다.
일찍이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랑(正郞)으로 재직하던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간쟁에 충실하다 한때 영조의 미움을 샀고, 그 뒤 수찬으로 옮겼으나 1759년 일시 파직되기도 했다. 이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1760년을 전후로, 세자시강원의 겸찬독(兼贊讀)을 맡아 세손의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아울러 홍문관교리로 있으면서 산림(山林)·처사(處士)들을 초치(招致)하여 등용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부수찬을 거쳐 응교로서 재직하던 1762년에는 응제(應製)에 수석하여 말안장(鞍裝)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판부사 조재호(趙載浩)가 불령(不逞)한 말을 전했다는 난언(亂言) 죄인 엄홍복(嚴弘福)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삭직되었고, 이후 1764년에는 수원부사 재직 중 옥중 죄인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1765년 승지에 제수된 후 잠시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복귀하였다. 그 뒤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거쳤으며, 승지로 재직하던 1767년에 수원부사 재직 당시 마병(馬兵)을 허술하게 했다는 이유로 전부사 홍지해(洪趾海)·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파직된 뒤, 진잠현(鎭岑縣)에 충군(充軍)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봉조하 홍계희(洪啓禧)를 도와 『의주(儀註)』를 편찬한 공으로 곧 석방되어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1770년(영조 46)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어 영조 말년에는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쳤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찬집청(纂輯廳) 당상(堂上)을 겸하면서 이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촌가잡영(村家雜詠)>은 가난한 살림이지만 근실한 농촌의 모습을 훈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 농촌의 풍속화를 보는 듯 농부 내외의 전원의 삶이 소박하고 싱그럽게 그려져 있다. 개울과 버들 언덕이 배경으로 나오지만 중심에는 농부가 열심히 가꾼 오이를 따다가 장터에 가서 소금으로 바꾸어 이를 콩잎에 소중히 싸서 돌아오는 모습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글의 저자 조선후기 문신 이미(李瀰 1725~1779)는 비록 문집을 남기지 못해 인명사전이나 문학사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문신ㆍ학자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자신을 이어 대제학을 지낼 만하다고 칭찬했을 만큼 문학이 뛰어났고, 당시 명사들의 묘지를 여러 편 제작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당시(唐詩)를 배웠으면서도 조선인의 정감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한편 그는 조선전기 우의정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과 조선중기 형조판서를 지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등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자.^^ 비바람 몰아친 다음날 어스름 새벽부터 밭으로 농부는 나간다. 혹시 농작물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논밭이 황폐화되지는 않았는지, 밤새 마음 졸이다가 잠잠해진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한 밭일이 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아니 날이 어둡기 전에 서둘러 하루 밭일을 마무리한다. 노동의 거룩한 피로와 저녁때의 허기가 그의 발걸음에 묻어 있다. 집으로 향하는 논두렁길로 남정네가 앞장서고, 아낙은 몇 걸음 뒤쪽에 떨어져 걸어온다. 남편은 괭이 메고 아내는 점심바구니에 호미를 얹곤 종종걸음을 친다. 뒤따르던 아내가 농을 건다. “남정네가 어째서 아낙보다 걸음이 성글까?” 앞서가던 남편이 받는다. “어찌 아낙네는 걸음도 말도 종종거릴까?” 밭일의 거룩한 피로를 이렇게 녹이며 걷고 있다. 아낙의 머리에 인 소쿠리 안에서 호미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 거린다. 하루 중에 가장 싱그럽고 유쾌한 시간이다. 산 그림자에 반 넘어 가리운 집이 저만치 보이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녀석들은 주인이 귀가 하는걸 귀로 들었을까? 코로 맡았을까? 흰 삽살이와 늙수그레 누렁이 두 놈이 빈집을 지키느라 심심했다며 꼬리치고 앞다리 들고 울타리 새 코를 박고 짖어댄다. 배고픈 녀석들은 주인이 반갑기보다 주인이 내줄 밥그릇이 더 그립다. 드디어 땅거미가 서서히 마을을 다 덮었다. 이집 저집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한 올 한 올 피어올라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내려앉더니 마을숲속 나무 끝에서 흩어진다.
● 다음 칠언절구 <촌가잡영(村家雜詠)> 3수(首)는 조선후기 문신 이미(李瀰 1725~1779)이 시골의 잡다한 삶의 모습을 읊은 작품이다. ‘灰’, ‘刪’, ‘肴’ 운(韻)을 차례로 사용해 3수(首)를 이루었다.
첫 번째 ‘灰’ 운(韻)의 칠언절구는 폭우가 내린 다음날 농부는 장터에서 오이를 팔아 소금과 바꾸어오는 장면을 그렸다. 다리가 끊어진 시냇물엔 소용돌이가 일고 버들 언덕 농부의 집 사립문은 주인이 출타 중인지 반쯤 열려 있다. 저 멀리 땅거미 어스름 속에 오이 팔아서 소금으로 바꾸어 돌아오는 농부의 발걸음이 가볍다.
두 번째 ‘刪’ 운(韻)의 칠언절구는 농사 일이 늘 그렇듯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물녘에야 비로소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모습을 담았다. 돌아가는 논두렁길로 농부가 앞장서고, 아낙은 몇 걸음 뒤쪽에 떨어져 걸어온다. 집의 삽살개와 늙은 누렁이가 해진 울타리 응달쪽에서 주인이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댄다.
세 번째 ‘肴’ 운(韻)의 칠언절구는 괭이 메고 들판으로 나갔다 저녁밥 때 돌아오는 농부를 그렸다. 비바람 몰아 친 다음날 밤새 애달아 하다가 새벽에 벌떡 일어나 괭이 메고 밭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일에 파 묻혀 있다가 저녁밥 때가 다 된 어스름에야 돌아오는데 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솟아올라 이내 마을 숲속으로 흩어진다.
<촌가잡영(村家雜詠) 시골의 잡다한 삶의 모습을 읊다> 이미(李瀰 1725~1779)
1) 장터에서 오이 팔아 소금과 바꾸어오는 농부
溪橋中斷兩成洄 시냇가 다리 끊어진 양쪽에 소용돌이 이는데
柳岸荊扉爲半開 버드나무 언덕 사립문은 반쯤 열려 있네.
包藿裏鹽何漢子 콩잎에 소금 싸 들고 오는 사내 누구인가
暮從都市賣瓜廻 장터에서 오이 팔고 땅거미 따라 오고 있군.
2) 저물녘에 농사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事到黃昏始方閒 일이 저물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가해지니
男前婦後荷鋤還 남편은 앞서서 괭이 메고 아내는 뒤에서 따라간다.
白尨蒼犬齊搖尾 삽살개와 늙은 누렁이가 함께 꼬리를 흔들며
迎在疎籬暝色間 해진 울타리 응달쪽에서 맞이하네.
3) 괭이 메고 들판으로 나갔다 저녁밥 때 돌아오는 농부
山南纔送風雨交 산 남쪽에 몰아친 비바람을 겨우 보냈는데
荷鋤丁男曉出郊 새벽에 장정은 괭이를 메고 들로 나간다.
知是村廚炊已熟 시골 부엌에 밥이 다 된 것을 알겠거니
靑煙一抹山林梢 푸른 연기 한 올 숲의 나무 끝에서 흩어지네.
[주1] 성회(成洄) : 소용돌이를 일으키다.
[주2] 유안(柳岸) : 버드나무가 늘어진 언덕.
[주3] 형비(荊扉) : 형(荊)은 아무리 잘 봐줘도 ‘가시나무’다. 비(扉)는 문짝이거나 집이다. 가시나무로 사립문을 만들지는 않고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사립문을 다는 경우는 종종있다. 작가의 뜻은 가시나무 울타리에 만든 사립문을 그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생각만 그렇게 하고 그냥 문이라 하자.
[주4] 한자(漢子) : 남자(男子)를 낮잡아 일컫는 말.
[주5] 모종(暮從) : 지는 해를 따라서. 저물녘. 땅거미 따라
[주6] 하서(荷鋤) : 괭이를 메다. “달빛 아래 괭이 메고 돌아오네(帶月荷鋤歸)“ 도잠(陶潛)의 <귀원전거(歸園田居)> 시에 “남산 아래에 콩 심으니, 풀은 무성하고 콩 싹은 드문드문.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김매고, 달빛 띠고서 괭이 메고 돌아오네. 좁은 길에 초목이 자라나니, 저녁 이슬이 내 옷을 적시네. 옷 젖는 것이야 아까울 것 있으랴, 그저 농사만 잘됐으면.[種豆南山下 草盛豆苗稀 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 道狹草未長 夕露沾我衣 衣沾不足惜 但使願無違]”이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주7] 창견(蒼犬) : 늙은 개, 창(蒼)은 푸르다, 우거지다. 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지만 아주 드물게 창안백발(蒼顏白髮)에서처럼 늙다 로도 쓰인다.
[주8] 명색(瞑色) : 해질 무렵의 어둑어둑한 광경. 땅거미가 내려앉은 상태.
[주9] 일말(一抹) : 어떤 감정 작용이 없지 않을 정도로 약간 있음을 나타내는 말.
◉ 참고 : 저자 이미(李瀰 1725~1779)는 자가 중호(仲浩), 본관은 덕수(德水)로 이행과 이안눌 등 문한가(文翰家)의 후손이며, 한성판윤 이광하(李光夏)의 증손이자,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집(李)이고, 판서를 지낸 이주진(李周鎭, 1692~1749)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옥당(홍문관관원) 출신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며, 부인 또한 옥당 출신 서명빈(徐命彬)의 딸이다.
일찍이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정랑(正郞)으로 재직하던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간쟁에 충실하다 한때 영조의 미움을 샀고, 그 뒤 수찬으로 옮겼으나 1759년 일시 파직되기도 했다. 이어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1760년을 전후로, 세자시강원의 겸찬독(兼贊讀)을 맡아 세손의 강학(講學)에 심혈을 기울여 영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아울러 홍문관교리로 있으면서 산림(山林)·처사(處士)들을 초치(招致)하여 등용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부수찬을 거쳐 응교로서 재직하던 1762년에는 응제(應製)에 수석하여 말안장(鞍裝)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판부사 조재호(趙載浩)가 불령(不逞)한 말을 전했다는 난언(亂言) 죄인 엄홍복(嚴弘福)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삭직되었고, 이후 1764년에는 수원부사 재직 중 옥중 죄인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1765년 승지에 제수된 후 잠시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복귀하였다. 그 뒤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거쳤으며, 승지로 재직하던 1767년에 수원부사 재직 당시 마병(馬兵)을 허술하게 했다는 이유로 전부사 홍지해(洪趾海)·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파직된 뒤, 진잠현(鎭岑縣)에 충군(充軍)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봉조하 홍계희(洪啓禧)를 도와 『의주(儀註)』를 편찬한 공으로 곧 석방되어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1770년(영조 46)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이어 영조 말년에는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쳤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찬집청(纂輯廳) 당상(堂上)을 겸하면서 이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