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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부모님 생애노정 - 5권 제2차 7년 노정 제3절 1970년 승리적 통일전선 8. 유효원(劉孝元) 협회장 승화 1970.7.24. 음6.21. 3차의 수술과 투병 1969.10.26. ~ 1970.7.24., 서울대학병원 유협회장의 몸이 불구라는 것이 그의 생애에 뼈저린 한이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수술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가외의 증상이 나타나게 되어서 죽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암이라는 병은 1년 반 내지 2년 이상의 잠재기간이 있습니다. 그 암이 그도 모르는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가 수술기간에 드러나서 이런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폐도 상당히 나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유협회장이 육체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리를 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나왔다는 것을 느끼는 바입니다. 선생님은 유협회장이 1차, 2차, 3차까지 수술을 받게 될 때에 영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은 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최후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를 위해 정성들이는 기간에 선생님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정성을 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며칠 후에 그가 가게 된 거예요. 감옥에 있을 때, 내가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인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생에 내가 저 아들을 대신하여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불구의 그 신세는 면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하루라도 건전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루만이라도 기쁜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면 한이 없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수술을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또 뜻이 찾아 나온 모든 역로를 헤아려 볼 때, 그가 피를 흘려야 할 때인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수난의 행로를 책임지고 선생님의 명령의 의하여 입원하였다가 선생님의 뜻을 중심삼고 갔다는 사실을 볼 때, 오늘날 우리 협회가 가야 할 수난의 노정에 있어서 전체는 안 되더라도 한 부분의 슬픔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가는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선생님의 소원입니다. 그가 낫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맡기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왜? 광활한 이 세계를 맡기 위해 세계의 슬픔을 남겨서는 안 될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기때문입니다. 뜻적인 차자의 희생 뜻적으로 보면 언제나 둘째 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들도 언제나 둘째 번 아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담가정에서도 둘째 아들인 아벨이 문제가 되었고, 노아가정에서도 둘째 아들인 함이 문제가 되었으며, 아브라함 가정에서도 둘째 아들인 이삭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6천년 역사를 두고 볼 때도 둘째 사람, 혹은 둘째 가정, 둘째 번 책임을 진 나라가 문제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해든지 4월부터 10월까지는 우리 협회에 있어서 문제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유협회장을 두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는 희진을 책임을 졌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책임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협회장 가정이 하나님이 바라는 그 기준에서 희진이를 중심삼고 모심의 생활의 전통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희진이가 죽었던 것입니다. 유협회장은 음력으로 따져서 희진 애기가 간 날짜(1969년 음력 6월 19일)보다 3일 뒤(1970년 음력 6월 21일)에 갔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둘째가 언제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생님 가정의 둘째인 희진이도 갔습니다. 이처럼 탕감역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통일교회의 원리는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탕감의 역사노정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유협회장의 가정도 뜻적으로 보면 둘째 가정입니다. 그러한 입장이기에 선생님이 그에게 전체의 책임을 지위 놓았던 것입니다. 유협회장의 충정과 뜻적인 공헌 지난날 유협회장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서대문 형무소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어려운 일에 있어서 불구의 몸으로서 선생님을 도와 주던 것들이 선생님의 뼛골에 사무칩니다. 그런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직접 간접으로 선생님을 도와 모든 일을 처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 통일교회 역사에 있어서 협회장과 선생님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생님을 따라 나오는 데 있어서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을 많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유협회장을 생각하면 '그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방에 누워 있다가 새벽이면 만나고 싶은 그 정에 이끌렸고, 전해 받은 쪽지 하나까지도 생명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연의 뒷받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협회장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번에 유협회장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선생님을 만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나왔는데 끝을 어떻게 맺을 것이냐?'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유협회장은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
| 真の御父母様の生涯路程 5 第二次七年路程 第三節 一九七〇年 勝利的統一戦線 八 劉孝元協会長昇華(一九七〇・七・二四〔陰暦六・二一〕) 劉孝元協会長が一九七〇年七月二十四日、肝臓がんで昇華し、協会葬による昇華式を挙行した。満五十六歳を一期に昇華した劉協会長は、一九一四年九月二十五日平安北道定州で出生し、一九三九年京城帝国大学医学部在学中病気により中退、一九五三年原理原本筆写本を通読後、その年十二月二十四日釜山で真のお父様に出会い入教、一九五四年協会長に選任され、原理講義、『原理解説』、『原理講論』の整理等で大きな活躍を遂げ、一九六〇年四月十六日真の御父母様により史吉子女史と三家庭の祝福を受け、一九六八年には七年路程大を受賞した。 三次の手術と闘病(一九六九・一〇・二六~一九七〇・七・二四、ソウル大学病院) 劉協会長の体が不自由であるということが、彼の生涯に骨髄に染みわたる恨だということを先生は知っていました。ところで、彼が受けた手術のせいでなく、彼に現れなかったそれ以外の症状が現れて死ぬようになったのです。 皆さんも知っているように、がんという病気は一年半ないし二年以上の潜在期間があります。そのがんが彼も知らないうちに定着していき、手術期間に現れてこのような結果を迎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またそれだけでなく、肺も相当悪くなっていました。このようなことを考えてみると、劉協会長は肉体的な困難を顧みることなく無理をしながらも、精神的にすべてのことを克服してきたということが感じられるのです。 先生は、劉協会長が一次、二次、三次まで手術を受けるようになる時、霊的にそのような感じを受けました。皆さんに、彼のために祈祷しなさいという命令はしましたが、先生は既に最後の祈祷をしていたのです。それで、皆さんが彼のために精誠を捧げている期間、先生はこの国とこの民族のために精誠を捧げていたのです。そうする中の数日後、彼が逝くようになったのです。 監獄にいる時、私は忘れることのできない衝撃的な印象を受け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れで、一生涯私があの息子(劉協会長)の身代わりとなり、いかなる犠牲の代価を払う恨があったとしても、不自由なその身を免れるようにしてあげたかったのです。彼が一日でも健全な体をもち、神様の息子らしい姿で神様に仕え、一日だけでも喜んだ顔で笑う姿を見ることができるならば恨はない、というふうに思ったのです。それで彼に「手術を受けなさい」と言いました。また、み旨が訪ねてきたすべての苦難の道を推し量ってみる時、彼が血を流さなければならない時であることを感じたのです。 そのような受難の行路に責任を負い、先生の命令により入院し、先生のみ旨を中心として逝ったという事実を見る時、今日私たちの協会が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受難の路程において、全体にはならなくても、一部分の悲しみを身代わりし責任を負っていく息子になってくれればというのが先生の願いです。彼が治ることを切実に祈祷できない私自身であることを感じながら、神様のみ前にゆだねてきたのです。それはなぜでしょうか。広大なこの世界を担うため、世界の悲しみを残してはならない時代が私たちの前に追ってくるためです。 み旨から見た次子の犠牲 み旨から見れば、いつも二番目が問題になりました。息子も、いつも二番目の息子が問題になりました。アダム家庭でも二番目の息子であるアベルが問題になり、ノア家庭でも二番目の息子であるハムが問題になりましたし、アブラハム家庭でも二番目の息子であるイサクが問題になりました。また六千年の歴史を置いて見る時も、二番目のアダム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が問題になったのです。このようにいつも、二番目の人、あるいは二番目の家庭、二番目の責任を負った国が問題になったのです。 いつの年でも四月から十月までは、私たちの協会においては問題の期間でした。それで先生は劉協会長について心配していたのです。彼は喜進に責任を負っていた人です。そのため彼には、神様が願う基準の前にどのように生き、どのように責任を果た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という問題がありました。このような観点から見る時、劉協会長の家庭は、神様が願うその基準で喜進を中心として侍る生活の伝統を立てなくてはならない責任があったのですが、そう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喜進が死んだのです。 劉協会長は、陰暦で計算すると、喜進が逝った日(一九六九年陰暦六月十九日)から三日後(一九七〇年陰暦六月二十一日)に逝きました。このように見る時、二番目がいつも問題になるということを皆さんは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先生の家庭の二番目である喜進も逝きました。このように、蕩減歴史というものは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皆さんは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れを見ても、統一教会の原理は漠然としたものではないというのです。蕩減の歴史路程では、そのような過程を経ていくのだということを皆さんは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劉協会長の家庭も、み旨から見れば二番目の家庭です。そのような立場であるため、先生は彼に全体の責任を負わせたのです。 劉協会長の真心とみ旨への貢献 過ぎ去りし日、劉協会長はどれほどたくさん苦労をしましたか。西大門刑務所事件をはじめとする様々な困難なことにおいて、不自由な体で先生を助けてくれたことが先生の骨髄に染みわたっています。そのような事件がどんなに多かったか知れません。そのたびに、彼は直接間接に先生を助け、すべてのことを処理したのです。このようにいろいろなことに思いを巡らせば、統一教会の歴史において協会長と先生とは、切っても切れない間柄になっているのです。 彼は先生に従ってくる中において、私のために多くの苦労をしました。その中でも、先生が監獄にいた時、先生のことをとても思ってくれました。それゆえに先生が劉協会長のことを振り返ると、「彼はこれこれこのような人だった」と思い出すようになるのです。監房に伏していても明け方になれば会いたいと思うその情に駆られたし、劉協会長から送られてきた紙切れ一つまでも生命の価値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るほど、内的因縁の後ろ盾が彼にはありました。そのような協会長だったことが思い起こされます。 今回、劉協会長がこの世を去るようになる時、「先生に出会い、これまでこのように歩んできたが、終わりをどのように結ぶつもりか」と私が聞きました。すると、劉協会長は「永遠に変わらない」という言葉を残して逝きました。そうで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す。 |

첫댓글 感思합니다 我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