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케세라세라...최미자 작가
최미자 작가 프로필
2020년 《에세이스트》 수필등단
2025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
진등재문학회
에세이스트작가회의
마산문인협회 회원
경남에세이스트 회장
최미자 작가의 에세이 '케세라세라'[그림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
케세라세라
일주일에 한 번, 나는 다시 소녀가 된다. 주민자치센터의 생활 영어 회화 수업에 들어서는 순간, 중학생으로 돌아간다. 첫날, 선생님은 영어 이름을 정하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름은 중학교 영어 교과서 표지 속의 소녀 쥬디였다.
초등학교 국어책에서 철수와 영희를 만났듯,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푸른 눈동자의 소년 탐과 금발 머리 소녀 쥬디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쥬디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그레이스 등 예쁜 이름이 등장했고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대신 지어주기도 했다. 각자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며 모두 만족했다. 30대부터 70대 후반까지 다양한 나이대가 모였으나 60대 중후반이 많았다. 언니, 형님, 선생님 등 일반적인 호칭보다는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어색함은 잠시였고 몇 주가 지나자 자연스럽게 서로를 부르게 되었다. ‘쥬디!’라고 불릴 때마다 작은 설렘이 일었다.
최미자 작가의 에세이 '케세라세라'[그림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
수업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한 시간은 올드 팝송을 따라 부르면서 배우고, 한 시간은 생활영어 회화를 익혔다. 까마득히 잊었던 문법이 다시 등장했고,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여중생으로 돌아간 듯 마음은 가벼웠다. 외국 여행을 대비해 상황극도 했다. 도착 공항에서 입국심사, 호텔 체크인 등 상대와 대화 연습을 했다. 마치 낯선 나라에 막 도착한 여행자가 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12월이 되자 일 년간 배운 내용을 발표하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가 선택한 곡은 〈케세라세라〉와 〈뷰티풀 선데이〉 두 곡이었다. 먼저 가사와 멜로디를 외우고, 어렵지 않은 율동을 곁들이기로 했다. 1956년에 발표된 팝송 〈케세라세라〉의 가사가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린 소녀가 묻는다.
‘미래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예뻐질까요, 부자가 될까요?’
엄마는 대답한다.
‘이루어질 일은 언제든 이루어진단다.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나는 오랫동안 ‘케세라세라’를 체념의 말로 여겼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모르겠다, 어떻게든 될 대로 되겠지’ 하며 던지던 말, 게으른 삶에 대한 변명이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사를 외우기 위해 수십 번 반복해서 듣고 따라 부르면서, 의미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믿음의 언어였다.
최미자 작가의 에세이 '케세라세라'[그림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
이 말은 스페인에서 유래되었으나 영어권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영어 화 된 스페인어라고 한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 구호로 쓰이며 유명해졌다. 자기 팀에 대한 믿음, 훈련 과정에 담긴 의지, 결과에 대한 긍정이 이 노래의 속뜻이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준비된 현재가 천천히 도달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언제나 순간이다. 지금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면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슬며시 흘러가 버린다. 현재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미래라는 신의 선물이다. 그랬을 때 무엇이든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연습 시간은 실수투성이였다. 율동의 순서를 외웠다 싶으면 가사를 잊어버리고 가사가 생각나면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가사의 숨은 뜻을 알아차린 것이 대단한 발견처럼 느껴져, 엇박자를 내는 몸짓조차 웃음이 되었다.
발표 날, 우리는 청바지를 입고 목에는 빨간 물방울무늬가 있는 스카프를 매어 한껏 멋을 부렸다. 짙은 무대화장 속에 숨은 어린 마음은, 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밝아졌다. 발표가 끝나고 한 사람이 퇴장 타이밍을 놓쳐 혼자 무대에 남았다. 관객들은 큰 박수와 웃음으로 응원했다. 그녀는 기꺼이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다. 서투른 무대였지만 즐거웠고 금발 머리 소녀 쥬디가 되는 설렘은 더 좋았다. 고급 영어 회화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한 줄의 노랫말에도 세상 살아낸 경험을 덧입혀 보는 기쁨을 누린 시간이었다.
최미자 작가의 에세이 '케세라세라'[그림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