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꽃처럼
원준연
그 시절이 그리웠다. 다시 가서 보고 싶었다. 힘들고 고생한 시간은 더 오래 기억에 남는가 보다. 일본 돗토리대학의 외국인연구자 시절의 얘기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아들과 딸이 함께 일본의 돗토리현을 여행하잔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가슴이 벅찼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나는 우리 아이들과 여행하는것이 제일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다.
그러니까 꼭 9년 전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요즘은 환갑을 챙겨주는 가족이나 친구도 드문 것 같다. 해마다 돌아오는 평범한 생일 정도로 생각을 하니, 가족이 모여서 식사만 해도 황송한(?) 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갑 기념 여행으로 유학 시절의 도시를 찾는 여행을계획하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기특한 일이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이미 항공편이며 숙소를 모두 예약해 놓았다. 기특하다는 말만으로는 매우 부족할 듯하다. 고마운 감동이 밀려온다.
돗토리현 요나고공항에 내려서 처음 찾은 곳은 요괴 만화의 원조 미즈키 시게루의 고향 사카이미나토의 요괴 마을이다. 유학 당시에는 조성되어 있지 않았었는데, 제법 잘 꾸며져 있고 관광객들도 꽤 북적인다. 요괴 만화의 고전 '게게게의 기타로'는 그의 대표작이다. 돗토리현에는 또 한 명의 유명한 만화가가 있다. '명탐정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쇼다. 돗토리공항은 그의 작품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어서 보는 눈을 즐겁게 하고 있는데, 동그랗고 큰 눈이 귀여움을더하고 있는 코난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띈다.
살던 아파트가 그대로인지 아니면 개발 붐이라도 일어서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궁금하다. 기억을 되살려 택시를 이용해서 도쿠요시시영아파트를 찾아갔다. 들어가는 입구는 변했어도 건물도 상가도 그대로다. 순간 울컥한다.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난다. 풀 향기 가득 담은 다다미방, 생활의 필수품 코다츠, 한 달
에 한 번 청소하던 배수로, 머리를 깎던 이발소, 장을 보던 마트 등. 동과 호수가 또렷하게 기억났다면, 그 부근이라도 어슬렁거리고 싶었다. 하긴 20년이 넘었으니. 또 기억난들 어쩌지도 못하겠지만. 나는 그리움만 안은 채 연구하던 대학으로 향했다.
대학은 무슨용도인지 건물이 한두 채 더 들어섰을 뿐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연구실이 있던 농학관으로 들어서려는데 어라! 문이 잠겨있다. 하필 찾아간 날이 돗토리대학의 자체 입학시험일이었다. 연구실의 낯모르는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허사가 되었다. 도서관에 들러서 검색을 해보니, 내가 기증한 '한국농업개론' 등 5권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누구의 손길이라도 미쳤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로 전화를 걸었던 공중전화 부스에도 공연히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고 잠시 포즈를 취해 보았다. 이제는 장성한 아들의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각이 되어서 서둘러 대학을 빠져나왔다.
꿈같은 3박4일이 일순간에 지난 것 같다. 아들은 그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듯 굵은 앨범으로 엮어서 선사한다. 지금도 가끔은 펼쳐보고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추억에 젖는다.
희미하던 '70'이라는 숫자가 또렷하게 코앞으로 다가왔다. 며칠만 지나면 칠순을 맞게 된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는 그의 곡강시에서 인생칠십고래희라 하여 칠순을 '삶에 있어 칠십도 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가 살던 시대는 분명히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매우 달라졌다. 세계보건기구는 체질과 평균 기대수명 등으로
새롭게 나이를 구분하였는데, 70세는 중년에 해당한다. 동작이 좀 느려지고 민첩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나 자신도 노인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이 70을 건강하게 맞이하는 것은 축하받아도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세계 3대 겨울 축제를 관람하는 것이 들어 있다. 매년 2월 초에 열리는 일본 삿포로시의 유키마쓰리는 몇 년 전에 다녀왔고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빙등 축제와 캐나다 퀘벡시에서 열리는 Winter Carnival은 아직이다. 작년에 하일빈의 빙등 축제를 추진하였다가 성원이 되지 않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번에는 아이들이 빙등 축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사이에 새 가족이 된 자부와 사위까지 가세하여 진행을 함께하니 마음이 한결 더 든든하다.
이번 제26회 하얼빈 빙설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얼음 조각 축제로 겨울의 꿈, 아시아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눈과 얼음의 도시'로 불리는 하얼빈의 겨울 평균 기온은 영하 20도 안팎이란다. 추위에 단단히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방한용품을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꼽고 있다.
지금도 화목한 우리 가족이지만, 여행을 다녀와서는 정이 뭉쳐져 얼음처럼 단단해지고 무지갯빛 조명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얼음꽃처럼 우리가족의 사랑도 더욱 단단해지고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첫댓글 월간 수필문학 202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