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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링필드 주범 4인 키우 삼판, 누온 체아, 이엥 티리트, 이엥 사리(왼쪽부터). photo AFP·연합뉴스 |
지난 6월 28일자 조선일보를 받아본 독자들은 잠시 놀라움으로 멍멍한 기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인물 4인의 사진이 1면에 실렸기 때문이다. 4인의 사진 위에 얹힌 제목은 이랬다.
‘킬링 필드’ 급진 공산주의 4인, 32년 만에 피고인으로, 국민 170만명 학살 ‘反인륜범죄’ 법정에 세우다
키우 삼판(79) 전 국가주석, 누온 체아(85) 전 부서기장, 이엥 티리트(79) 전 내무장관, 이엥 사리(85) 전 외무장관. 이들 4인에 대한 재판이 지난 6월 27일 프놈펜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ECCC)에서 벌어졌다.
40대 이상의 독자들은 4인 중 전 국가주석 키우 삼판을 기억한다. 당시 크메르루주의 폴 포트 정권은 노동자·농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명분으로 지식인·기술자 등 글 읽는 사람과 손이 하얀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0·20대 대부분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에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비극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킬링필드(Killing Fields)’로 불리는 크메르루주의 대학살이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어졌으니 당연하다. 캄보디아는 20대 한국 대학생 사이에서 오지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그들에게 ‘킬링필드’는 아무런 파토스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크메르루주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공격을 받고 붕괴됐다. 이후 태국과의 접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폴 포트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한 1998년 이후 공식 투항했다. 이들은 그동안 훈센 정부에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캄보디아에서 살아왔다.
크메르루주 4인에 대한 재판을 보도한 세계 언론을 보자.
“독일 나치 전범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가장 주목받는 재판이다.”(AP통신)
“유엔이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ECCC)를 통해 아직 유약한 캄보디아 정부를 설득한 덕분에 주요 범죄자들이 죽기 전 법정에 서게 됐다. 유엔은 이번 재판을 열기 위해 ECCC를 설립하고 1억달러의 비용과 5년의 세월을 투자했다.”(미국 뉴욕타임스)
ECCC(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는 2007년 캄보디아·유엔 합동으로 프놈펜에 설립됐다.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가 설립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벤 키어난(Ben Kiernan·59)이다. 그가 없었으면 ECCC는 햇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좌파 키어난 캄보디아로
키어난은 1994년 예일대 국제지역학센터 내에 ‘캄보디안 집단 학살 프로그램’(Cambodian Genocide Program·이하 CGP)을 설립했고 미국 의회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CGP의 13년간에 걸친 방대한 조사활동으로 크메르루주 핵심 4인은 인류에 대한 범죄 혐의로 마침내 세기의 법정에 세워졌다.
벤 키어난은 누구인가? 미국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상당수 CGP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CGP를 설립해 운영해온 벤 키어난에 대해선 잘 모른다.
벤 키어난은 1953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이후 호주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현재 예일대 국제지역학 교수 겸 ‘집단 학살 연구 프로그램’ 소장이다. 키어난은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한 세계 최고의 작가이기도 하다.
키어난이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대 초반. 그는 당시 좌파 성향을 보였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벌어지던 공산주의 세력의 혁명 투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74년 무렵, 급진 마오쩌둥(毛澤東)주의 세력인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민주정부 전복 투쟁을 벌일 때 키어난은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캄보디아에서 키어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직후 키어난이 캄보디아를 떠났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 시점은 크메르루주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에 대해 추방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폴 포트 정권의 대학살은 키어난이 캄보디아를 떠난 직후부터 차곡차곡 진행됐다. 키어난은 처음에는 크메르루주가 세운 국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가 자행한 학살의 규모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입장이었다. 1978년 이전, 키어난이 잡지 ‘캄푸치아로부터의 뉴스’에 쓴 글들은 크메르루주에 우호적이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예컨대 1976년 호주에서 출간된 책 ‘혁명 캄보디아의 사회적 결속’은 제목에서부터 캄보디아에서 세워진 공산정권에 대한 우호적 시선을 느끼게 한다.
크메르루주 환상이 깨지다
크메르루주에 대한 키어난의 인식이 바뀐 것은 1978년 캄보디아 난민 수백 명과 연쇄 인터뷰를 하고 난 뒤였다. 크메르루주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키어난은 강경한 비판자가 됐다. 이 무렵 하노이 정부는 프놈펜 정권과 갈등을 빚었고, 프놈펜을 공격해 ‘민주 캄푸치아’를 붕괴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좌파에 기울었던 많은 이들은 캄보디아 내에서 일어난 크메르루주의 집단 학살을 ‘발견’하게 됐다.
이후 키어난은 편견 없는 대학살의 관찰자로 변신했다. 그는 대학살을 연구하기 위해 먼저 크메르 언어를 배웠다. 크메르 언어를 익힌 그는 캄보디아 난민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키어난은 1980년부터 학살연구자 그레고리 스탠튼과 공동으로 크메르루주를 특별재판소에 세우려는 작업을 해왔다. 키어난은 1983년 호주 모나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키어난은 37세이던 1990년, 미국의 역사학 연구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예일대 역사학부 교수가 됐다. 예일대에 오면서 키어난의 캄보디아 집단학살 연구 활동은 날개를 달게 된다. 그는 1994년 예일대 국제지역학 센터 내에 ‘캄보디안 집단학살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이어 미 국무부 산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국 캄보디아 대학살 조사처가 CGP에 1차로 연구비 49만9000달러 지원을 결정했다.
CGP 설립은 시의적절했다. 1994년 초, 미국 의회는 ‘캄보디안 집단학살 처벌법(Cambodian Genocide Justice Act)’을 통과시켰다. 이어 의회는 집단학살 희생자를 위한 책임자 처벌 촉구를 미 정부에 위임했다. CGP는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했고, 미 국무부의 보조금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조금 지급 결정은 워싱턴 정가에 논란을 촉발시켰다. 키어난의 20대 초반 행적이 문제가 됐다. 일부 동료 학자들과 언론인은 당시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에게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라고 압박했다. 그가 1970년대 초반 친(親)크메르루주 성향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저명인사들이 월스트리트 저널 등 주요 언론을 통해 키어난에 대한 연구비 지급 결정을 비판했다. 제라드 헨더슨 시드니인스티튜트 소장은 “키어난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시체로 썩어갈 때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키어난은 곤란한 지경에 놓였다. 이때 29명의 캄보디아 학자와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키어난 편을 들었다. 그들은 청원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CGP의 중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 키어난 교수의 순수성, 전문적 능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다. 키어난 교수는 최고 수준의 역사학자이고 국무부의 연구비를 받을 만한 뛰어난 인물이다.”
캄보디아인들은 키어난이 1978년 이후 보여준 태도와 입장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논란은 이로 인해 일단락됐다.
이 논란은 아이러니하게도 CGP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을 줬다. 1995년 태국 접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크메르루주의 법정은 ‘캄보디안 저항애국단에 대한 처형과 테러 혐의’로 키어난을 기소하고 궐석재판을 했다.
캄보디아 연구에 미 국무부 예산 지원
CGP는 1995~1996년 호주와 네덜란드 정부, 헨리 루스(Henry Luce)재단으로부터 추가로 재원을 지원받았다. 1997년에는 미 국무부 산하 ‘민주주의·인권·노동국’으로부터 100만달러의 연구비를 추가로 받게 됐다. 1999년에는 15만달러를 더 지원받았다.
초반의 어려움을 이겨낸 키어난과 팀원들은 CGP 운영에 전력을 다했다. 키어난은 연구비를 기반으로 1995년 1월, 프놈펜에 캄보디아 기록센터(DC-Cam)를 설립했다. 전범을 재판에 세우려면 증거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대학살과 관련된 기록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이 선행돼야만 폴 포트 체제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규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CGP는 1996년 폴 포트 정권 당시 보안경찰 특별지부인 산테발(Santebal) 관련 자료 1만쪽을 확보했다. 이 자료들은 예일대 스털링도서관에 의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세계 모든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2008년 1월까지, CGP는 2만2000건의 전기적 기록을 출판했고, 1만장이 넘는 관련 사진, 관련 지도, 관련 자료 등 CGP 도서 목록을 확보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 158개 교도소가 운영됐고, 309개의 집단 매장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여기서 캄보디안 집단 학살 데이터베이스(The Cambodian Genocide Data Bases·이하 CGDB)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CGDB는 학자·기술자·문헌정보수집전문가로 구성된 CGP팀, 캄보디아 기록센터,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대학이 합동으로 관리·발전시켜 왔다.
CGDB는 1997년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캄보디아 일반에 예비 공개했는데, 이때 밀려든 추가적인 정보의 대부분은 투올슬렝 교도소로 알려진 ‘S-21’에 집중됐다. CGDB는 1998년과 2001년 보다 광범위한 정보를 공개했다. 이때 정보는 크메르루주 보안경찰본부 관련 자료와 특별지부 산테발이었다.
프놈펜 ‘투올슬렝’ 교도소를 주목하다
CGP가 특히 주목한 교도소는 프놈펜의 ‘투올슬렝’ 교도소. 이곳은 악명 높은 ‘S-21’처형센터로 불렸다. 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신문을 받고 처형되는 과정에서 죄수들 사진이 5000장 이상 촬영됐다. CGP는 5000장의 사진을 확보했으나, 사진 속 희생자 대부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CGDB는 이 사진들을 ‘투올슬렝 교도소’ 편에 전시했다. 이를 통해 CGDB 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들의 신원을 눈으로 확인해 이름과 인적사항을 인터넷을 통해 올릴 수 있게 했다. 열람자가 이름을 올리면 CGP는 이름과 전기적 세부 사항, 다른 정보와 상호 연관성을 확인해 최종적으로 희생자의 신원을 등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CGDB는 문헌 자료, 전기적 자료, 사진 자료, 지도 자료 등 네 가지의 다른 정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 문헌자료 데이터베이스(DB)에는 1·2차 기록물, 기사, 서적을 자료 목록화했다. 전기적 DB에는 1만9049명의 크메르루주 지도자들과 희생자들의 정보 목록을 갖췄다. 사진 DB에는 투올슬렝 교도소에서 촬영된 5000명 이상의 죄수 사진을 전시했다. 지도 DB에는 약 1만9000개에 이르는 집단 무덤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스캐닝해 언제나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했다.
CGP가 이런 활동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1997년 캄보디아 정부는 크메르루주의 대학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유엔은 캄보디아 정부와 재판소 설치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수년간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재판소의 성격을 놓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2002년 2월, 유엔은 모든 협상 테이블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특별재판소 설치는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그해 말이 다 돼가던 11월, 유엔 총회 제3위원회의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재판소 설치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듬해인 2003년 3월, 유엔은 캄보디아 정부와 생존한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소를 프놈펜에 세우기로 협정을 체결했다.
재판소 설치에 필요한 국제법적 문제가 해결됐지만 실제로 재판소가 설치되는 데는 4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7년 7월 18일 캄보디아 검사와 유엔 소속 검사가 합동으로 프놈펜에 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재판소의 설치 근거는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 대학살, 무덤 훼손, 살인, 고문 그리고 종교 탄압이었다. CGP가 13년에 걸쳐 확보한 희생자 2만8000명에 대한 개인적 기록, 죄를 입증하는 핵심 주범의 증거자료 등이 특별재판소에 제출됐다.
‘피와 흙’ 등 관련 저서도 유명
2007년 12월, 5명의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유엔·캄보디아 합동 재판소에 의해 기소되고 감옥에 갇혔다. 지난해 7월, 특별재판소는 투올슬렝 교도소장 카잉 구엑 에아브에 대해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이번 재판이 주목을 끈 것은 ‘대학살의 설계자’로 지목받는 누온 체아 전 부서기장을 비롯한 공산정권의 실세 3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키어난 교수는 캄보디아 역사, 크메르루주의 집단학살, 베트남 역사에 관해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이며 작가다. 그의 유명한 저서 목록을 살펴보자. ‘피와 흙: 스파르타에서 다르푸르까지 학살과 인종 청소의 세계사’(2007·예일대), ‘폴 포트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2004·예일대), ‘폴 포트 체제: 인종, 권력, 대학살’(2002·예일대) 등이다. 이 중 ‘피와 흙’은 미국독립출판인협회가 수여하는 2008골드메달을 수상했다. 키어난 교수가 쓴 ‘피와 흙’은 14개 언어로 번역됐다. 키어난 교수의 부인 역시 저명한 역사학자인 글렌다 길모어이다.
크메르루주 학살 주범 재판은 지금 세계인에게 자국민 학살과 반인륜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시절 잠시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가 대학살이라는 사실 앞에서 진실 규명에 인생을 건 역사학자 키어난. 그가 30여년에 걸쳐 수집한 사실 앞에 20세기의 악마(惡魔)들이 떨며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