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 난간에 선다. 코끝에 와닿는 비린내가 어머니 젖내 같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직한 다리는 이미 철거되고 새 다리로 복원 공사 중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배들이 폐타이어로 띠를 두르고 호황을 누렸던 한때를 그리며 작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엄마의 정을 뗄 수 없어 떠나지 못하는 듯 보여 마음이 짠하다. 수많은 실향민들이 난간을 부여잡고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지도 60년이 지났다. 그들의 아픔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하지만 나 역시 진하게 남겨진 추억을 곱씹는다.
다리 저만치 선자네 아저씨가 밀물에 목말을 타고 오는 듯하다. 여덟 살 때였나 보다. 아저씨는 나무 지게에 작대기를 받쳐놓고 길을 가로막았다. “내가 어제 부산에 가서 영도다리 밑에서 너를 낳아 준 엄마를 만났는데 요강에 갱엿을 담아놓고 우리 딸 봤느냐고 물어보더라. 어서 가봐라.” 내 볼살은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잖아도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던 시절이었다.
언니에겐 언제나 새 옷을 입혔다. 동생에게는 이래저래 내가 양보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무엇이든지 잘해서 어머니께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언제나 미운 오리 새끼였다. 여러모로 종합해보니 자식 중에서 구박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느껴졌다. 선자네 아저씨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너무나 외롭고 서러웠다. 그렇다고 못생기고 더러운 요강에 엿을 파는 엄마를 찾아가는 건 더더욱 싫었다. 감쪽같이 속았던 생각을 하면 울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가난에 모두가 휘어지는 시절, 아저씨에게는 나를 놀려먹는 일이 유일하게 웃는 일이었을까.
영도다리가 지척인 광복동 패션 업계에서 나는 오랫동안 근무했다. 가사와 직장 일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퇴근하기 무섭게 시장으로 달려가 찬거리를 사야 했다. 하루 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을 정리하고 나면, 또다시 내일 일을 준비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를 기다렸던 당시에 초등학교 일 학년 딸아이는 엄마의 정이 그리워 치마폭에 매달리며 칭얼대었다. 일에 지친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어린 마음을 헤아려주기는커녕 “너 자꾸만 칭얼대면 영도다리 밑에 널 낳아준 친엄마 찾아가!” 그 말이 죽도록 듣기 싫었던 것을 장난삼아 아이에게 하고 말았다.
하루는 퇴근을 해 오니 아이가 풀이 죽은 채 울고 있었다. 가방도 챙겨 놓았다. 영도다리 밑에 엄마를 찾아가려 하는데 차비가 없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를 찾아가다니.”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 꼴이다. 함부로 뱉은 말에 아이가 받은 상처는 심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말에 아이는 조목조목 따졌다. 무엇이든지 오빠랑 차별을 한다는 거다. 솔직히 그랬다. 빵이나 과자를 줄 때도 양이 많은 것을 아들 쪽으로 슬쩍 밀었다. 따지면 오빠에게 대든다고 딸을 나무랄 때가 많았다.
남자 옷이라고 안 입겠다는, 아들 입었던 옷을 우격다짐으로 입히지 않았던가. 이런 내 행동을 딸이 마음에 담아놓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다 엄마 아빠를 닮지 않았다는 논리까지 펼쳤다.
어른이 되면 내 자식에게만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어느새 나는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다급했던 나는 영문을 모르는 남편의 양말을 급하게 벗겼다. 그의 길쭉한 발가락과 유난히 짧은 나의 새끼손가락을 물적 증거물로 내밀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너를 낳았던 산부인과 출생카드도 있다.”며 사태 수습을 하느라 한 시간 넘게 진땀을 흘렸다. 딸이라면 그저 미소가 넘치던 남편이 뒤늦게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나의, 생각 없는 행동을 나무람이 하늘에 닿았다.
그랬던 딸이, 결혼을 해서 밤톨 같은 손자를 낳았다. 다섯 살이 된 녀석이 너무 개구지다. 움직이기만 하면 사고를 쳐낸다. 딸이 제 아들에게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너 자꾸만 말 안 듣고 그러려면 영도다리 밑에 네 엄마 찾아가!”
아동 미술 심리학을 전공하여 매사에 FM이건만 그날의 상처가 대물림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어린 손자는 영도다리 밑이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른다. 하지만 자라다 보면 엄마에게 소외당했다고 생각이 드는 날, 이 녀석이 혹시나 어릴 적 제 엄마가 말했던 영도다리 밑을 생각할까 봐 불안하기는 하다. 나는 딸을 멀뚱하게 바라만 보았다. 딸도 멋쩍게 웃고 있다.
크고 작은 배들이 물살을 만들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오간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인생 또한 그렇다. 추억은 빛이 바래도 여전히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고,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달픈 삶을 넋두리하시던 어머니도, 요강에 갱엿 담긴 선자 아저씨의 짓궂었던 놀림도, 다시 보고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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