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종주 제5-6구간] ⑤ (안동 도산서원—광주 월봉서원) ☆
▶ 2020년 08월 19(수)~21일 (금)
* [국제퇴계학연구회 ‘호남 유학의 연원을 찾아서’] ― 안동 도산서원과 광주 월봉서원
☆… 2020년 8월 17일 이후, 낙동강에 출행하지 못했다. 8월 19~21일, 2박 3일 동안 이광호 박사가 주도하는 국제퇴계학연구회의 ‘호남 유학의 연원을 찾아서’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
* [호남 유학 답사 여정] ☞ 서울→ 담양 ‘소쇄원’→ 화순 ‘죽수서원’→ 화순 ‘주자묘(朱子廟)’→ 능주 ‘정암 조광조 적려유허지(謫廬遺墟地)’→ 나주 한옥민박 ‘희락정’(1박)→ ‘나주 향교’→ 나주 관아 ‘금성관’→ 나주 ‘경현서원’→ 광주 ‘월봉서원’→ 진도 ‘운림산방’→ (울돌목)→ 해남 ‘녹우당’→ 강진 한옥민박 ‘다산명가’(1박)→ 강진 ‘다산초당’→ 강진 ‘만덕산 백련사’→ 광주 ‘한국학호남진흥원’(이종범 원장)→ 장성 ‘고산서원’→ 부안 ‘반계 유형원 유적지’→ 부안 ‘간재 전우 유적지’→ 귀경
조선 중종 때, 정암 조광조가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화순 능주의 유적지를 비롯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돌아가신 스승 조광조를 기리며 양산보가 조성한 담양의 소쇄원(瀟灑園)를 둘러보고, 정암 조광조를 추모 배향하는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을 찾아 참배했다.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소쇄원 [광풍각(光風閣)]
소쇄원 [제월각(霽月閣)]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조선 중종 때 사림(士林)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道學)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주장하여 사림 28명을 선발했으며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였다. 사흘 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전라도 화순의 능주로 귀양 갔으며 한 달만에 사사되었다.
한양 조 씨, 조광조(趙光祖)는 호가 정암(靜庵)이다. 조선왕조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 [사림파의 거두로 역할] ―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 [훈구파와 정쟁] ―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정암 조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정암 선생이 한 달 동안 유거하다 돌아가신 초가 (전남 화순군 능주)
조광조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죽수서원(竹樹書院) 전경
* [경현서원(景賢書院)] ― 퇴계와 학봉 그리고 고봉 등을 함께 모신 서원
퇴계와 학봉 등을 모신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을 둘러보았다. 특히 경현서원에는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하여 호남의 학자 기대승, 나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푼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이 배향되어 있다.영호남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배향되어 그 학덕을 기리는 곳이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에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김굉필 등 7위를 배향한다. 1583년(선조 16) 유림이 상소를 올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실 서원창건을 허락받고, 이듬해인 1584년 금양서원(錦陽書院)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하였다. 당시 서원은 나주 서문 밖 대곡동(현재 나주시 경현동 부근)에 있었다.
1589년(선조 22) 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등 4위를 추가로 배향하고 명칭을 오현사(五賢祠)로 바꾸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중건하였고, 1609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경현(景賢)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1693년(숙종 19)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추가로 배향되어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77년 현 위치(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에 복설되었다.
경현서원
☆… 이어지는 남도의 여정은 고봉 기대승을 모신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을 비롯하여, 남종화의 본향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 고상 윤선도의 해남 녹우당(綠雨堂),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의 다산 초당(茶山草堂), 노사 기정진을 모신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 실학자 유형원의 부안 반계서당(磻溪書堂), 간재 전우의 계화도 유적지 등 호남 일대의 유학의 현장을 찾아서 뜨거운 일정을 마치고 왔다. 그 중에서 월봉서원에 배향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퇴계 선생과 특별한 관계가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강진의 다산 초당(茶山草堂)] ― 다산 정약용은 18년간 유배생활 중『목민심서』등 500여 권의 책을 썼다
유형원의 부안 반계서당(磻溪書堂)
간재 전우의 부안 계화도 유적지
* [광주의 월봉서원] ― 고봉 기대승을 추모 배향하고 있는 서원
월봉서원(月峯書院)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조선전기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김장생(金長生), 1769년(영조 45)에 김집(金集)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숭덕사 사우(祠宇)를 비롯하여 충신당(忠信堂)·존성재(存省齋)·명성재(明誠齋)·유영루(遊泳樓)·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뒤 전라남도 유림에 의하여 1941년 5칸의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으며, 1972년에 4칸의 고직사(庫直舍), 1978년에 외삼문(外三門)과 3칸의 장판각(藏板閣), 1980년에 사우(祠宇), 1981년에 내삼문이 건립되었다.
빙월당(氷月堂)은 광주광역시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고봉집(高峯集)』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3만 6000평과 임야 87정보 등이 있다.
광주시(光州市) 임곡동 너브실[廣谷]에 있는 <월봉서원(月峯書院)> 전경(全景)
* [월봉서원] ― 고절하고 고즈넉한 운치가 감도는 서원
단단하고 반듯한 화강암 돌담을 두른 외삼문에는 '望川門'이라 쓰인 행서체 현판이 걸려 있다. 너브실마을 앞을 흐르는 '황룡강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들어서면 너른 마당 안 깊숙이 돌기단 위에 자리 잡은 ‘氷月堂’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 장판각까지 거느린 당당한 모습이다. 빙월당은 월봉서원의 강당으로, 1938년 전남 지역의 유림들이 세웠다. 묵묵히 서 있는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다.
[望川門] ― 월봉서원의 외삼문
월봉서원― 그리고 장서각
고봉이 4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인 선조 11년, 지방 유림들이 광산군 비아면에 ‘望川祠’(망천사)를 짓고 위패를 모셨다. 그로부터 수십 년 세월이 흐른 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1654년 효종이 '月峰'이란 사액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8년 빙월당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사당과 외삼문, 장판각, 내삼문이 만들어졌다.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에 걸쳐 하나하나 정성 들여 이루어진 모습이다. 너른 마당에서 섰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은 그 세월과 정성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月峰書院'이라 쓰인 현판을 중심으로 '氷月堂', '忠信堂'이라 쓰인 현판이 양쪽으로 걸려 있다. 오른쪽 방에는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이라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가난할수록 즐거움이 더한다'는 뜻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보낸 편지 중 한 구절이다.
월봉서원(月峯書院) 빙월당(氷月堂)
빙월당 뒤편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고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崇德祠’(숭덕사)다. 이 사당도 제법 너른 마당을 거느리고 있다. 사당의 내삼문을 등지고 돌계단에 서면 빙월당의 뒷모습과 너브실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고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崇德祠’(숭덕사)
* [퇴계와 고봉의 만남] ― 한국논쟁사의 가장 치열했던 사단칠정논쟁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은 조선의 성리학자이면서 당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0살에 과거에 합격했고, 30대에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3년)과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철학사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46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558년 11월, 명종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서 관직을 수행하던 퇴계에게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찾아왔다. 앞서, 계축년(1555년)에 퇴계는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작성한「천명도(天命圖)」를 정정하면서, 사단칠정을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 것’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었다.「천명도」란 성리학의 우주론과 심성론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론을 압축해서 도식화한 한 장의 그림이다. 사실「천명도」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추만(鄭秋巒) 스스로 성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우연히 퇴계의 손을 거치며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된 중요한 저작이 되었다. 당시 젊은 유생이었던 고봉도 이「천명도」를 접했고, 몇 년이 지난 뒤에 논란의 장본인이 된 퇴계를 직접 만난 것이 바로 1558년 초겨울이었다. 고봉은 갓 대과에 급제한 신인 관료였고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은 국립대학 총장이다.) 고봉이 평소에 품고 있던 질문을 퇴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당시의 대화 내용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다음해 1월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략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지난번에 서로 만나고 싶은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꿈속에서 잠깐 만난 것 같아 의심나는 것을 깊이 질문할 기회가 없었는데도 오히려 서로의 의견이 흔연히 부합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또 사우(士友)들을 통해서 공(公)이 논한 사단칠정에 대한 설을 전해 들었는데, 나의 의견도 이 점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문제로 여기고 있던 터에 공의 지적을 받고는 엉성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였습니다.” ― 『퇴계선생문집』권16 ‘기명언에게 답함’
첫 만남이 있은 후,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첫 편지이다. ‘깊이 질문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고, 또 논란의 주제인 사단칠정에 대한 질문을 ‘사우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11월의 만남에는 고봉이 직접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거나 비중 있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그해 11월의 만남이 있었기에 서로 서신의 왕래가 시작되었으니, 이 만남이 조선의 학술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이른바 ‘사단칠정논변’의 발단이 된 셈이다. 현재『퇴계집』에 남아있는 고봉에 대한 편지는 총 115통이고 『고봉집』에는 사단칠정을 집중적으로 논한 32편의 왕복서간 외에 일반 편지도 133편이 수록되어 있다.
* [‘사단칠정 논쟁(四端七情論爭)’] ― 주리론과 주기론의 발원이 된 학술논쟁
고봉이 퇴계와 벌인 <사단칠정 논쟁>은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고도 한다. 당시 사단과 칠정은 유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단(四端)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칠정(七情)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을 말한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주제로 한 고봉과 퇴계 논쟁의 쟁점은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을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이 모두 정(情)이라는 주기설을 주장하며 퇴계의 주리론과 맞섰다. 퇴계의 주리론은 경험이나 현실보다는 도덕적 원리(原理)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요시한 이론이었다.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상대적으로 주기론은 현실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도덕세계를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고봉도 주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七包四]이라 하여 주정설(主情說)과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던 것이다.
논쟁도 논쟁이지만, 퇴계(退溪)와 고봉(高峰)의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하던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세이고, 고봉은 32세였다. 퇴계가 1501년, 고봉은 1527년에 태어났다. 26년 차이다. 명종 13년(1558년) 당시 성균관 대사성 퇴계 이황은 이제 갓 정계에 입문한 햇병아리 같은 선비 한사람의 서찰을 받았다. 당시 퇴계 이황은 임금도 존경하는 당대의 거유(巨儒)였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적 질서가 엄존하는 때 그 앞에서 머리들기도 어려울 텐데, 젊은 선비는 대선배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개진한다.
당시 퇴계와 고봉이 사회적 지위와 사상적 배경이 현저히 달랐으나 논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퇴계의 온후한 성격, 넉넉한 마음과 고봉의 불같은 열정, 학문에 대한 도전, 그리고 무엇보다 논쟁이전에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이라 할 수 있다. 퇴계(退溪)의 인품(人品)이 성자와 같았다. 받아주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었던 논쟁이지만, 고봉의 질문과 비판을 퇴계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성실하고 자상하게 응대했다. 나이와 서열이 엄연한 세상에서, 퇴계는 그걸 따지지 않았다. 성심성의를 다했다.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첫 만남에서 이 두 사람은 즉시 사제의 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직접 대면하여 학문을 논할 기회도 많지 않았고, 고봉이 도산으로 퇴계를 예방하려고 계획했던 일은 무위로 돌아갔으므로 실제 왕복하지는 않았다. 훗날 퇴계가 마지막으로 사직하고 낙향할 때, 선조 임금에게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율곡이 아닌 고봉을 천거한 것을 보면, 고봉이 퇴계에게 어떤 제자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배경지식이 없이, 즉 퇴계와 고봉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들의 왕복서신을 접한다면 아마도 이 둘을 사제관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비록 편지에서 고봉이 퇴계를 ‘선생’-상대에 대한 극존칭이다-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학문적 논의에서 만큼은 한 발도 양보하지 않고 대범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계 역시 26살 아래의 제자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함과 동시에 고봉의 견해를 존중하고 때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퇴계의 편진 곳곳에서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 한 대목만 소개한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인 1570년 10월 15일에 고봉에게 보낸 편지이다.
"… ‘물격(物格)과 물리(物理)의 지극한 것이 이르지 않는다’는 설에 대해서는 삼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전에 내가 잘못된 설(說)을 굳게 지키고 있었던 까닭은 주자(朱子)의 ‘이(理)는 정의(情意)와 계탁(計度)과 조작이 없다’는 설을 굳데 지켰기에 … 저번에 도성에서 ‘이(理)가 저절로 나온다’는 가르침을 받고, 일찍이 반복해서 사색해 보았는데도 역시 의혹이 풀리지 않았었는데, 근래 주자의 말에 대한 공(公)의 몇 가지 견해를 김이정으로부터 전해들은 후에 비로소 나의 견해가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이제 공(公)의 고명한 가르침에 힘입어 기존의 망령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얻고 새 품격을 펼치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
죽음을 앞둔 70세의 노학자는 제자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음을 고백한다. 비슷한 학자끼리도 자신의 견해가 비판받으면 서로 감정싸움까지 이어져 원수지간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한 오늘날의 학계와는 완전히 다른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물며 현대의 어떤 학자가 26세 연하의 제자에게 ‘삼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謹聞命矣)고 할 수 있을까? ― 이상의 내용은 이치억 박사의『퇴계에게 묻는 삶의 철학』에서 옮겨온 것이다.
퇴계의 겸허한 마음과 상대를 공경하는 미덕, 따뜻하고 고절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고봉도 학문적인 논쟁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치밀하고 당당하게 주장했지만, 8년간의 논쟁을 하면서도 퇴계에 대한 공경심(恭敬心)은 더욱 깊어졌으리라 생각된다.
¶ 퇴계 선생과 사단칠정의 논변을 치열하게 나누었던 고봉 기대승, 그 고봉을 모시는 월봉서원에서 나는 각별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지금 안동 도산서원의 이병일 원장이 광주 월봉서원 원장을 겸하고 있는 것이 아주 각별한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그 이전 조순 박사도 도산서원과 월봉서원의 원장을 함께 맡았다. 퇴계와 고봉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관계가 지금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월봉서원의 규모나 형세가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현대식으로 지은 교육관에서는 학자들의 연수와 일반인들에 대한 교육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고봉 기대승의 학문과 인품] ― 사칠논변(四七論辯)을 통한 깊은 인간적 유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다. 28세 때 《주자대전》 100여 권을 탐독한 후 4권의 《주자문록》을 남겼으며, 경연(經筵)에서 선조에게 전한 말을 묶은《논사록》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대승(奇大升)이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하다. '인·의·예·지'인 사단(四端)과 '희·노·애(슬픔)·락·애·오·욕'인 칠정(七情)에 관한 8년간의 논쟁은 서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그 편지를 필사해 돌려보는 것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긴 철학적 논쟁 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26세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존중했으며, 강변에서 함께 유숙하며 인간적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물론이다.
앞서 '낙동강 종주 이야기'(14)에서 언급한 바, 당시 퇴계와 고봉이 사회적 지위와 사상적 배경이 현저히 달랐으나 논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퇴계의 온후한 성격, 넉넉한 마음과 고봉의 불같은 열정, 학문에 대한 도전, 무엇보다 논쟁이전에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사상논쟁을 벌이면서도 서로를 얼마나 존경했는가는 문헌 곳곳에 남아있다. 청년 기대승(奇大升)이 편지로 당대의 대유학자인 이황과 논쟁을 벌이다가, 드디어 1569년 퇴계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할 때 고봉은 직접 동호(東湖, 지금 옥수동)에 나아가 이황 선생을 전송하며 시를 읊었다. 〈奉別退溪先生〉(봉별퇴계선생)이다.
漢江滔滔日夜流 한강도도일야류 한강은 도도히 쉼 없이 흐르는데,
先生此去若爲留 선생차거액위류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리랴.
沙邊拽纜遲回處 사변예람지회처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不盡離觴萬斛然 부진이상만곡연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
이에 퇴계선생은 기대승의 시에 화답한다. 〈東湖舟上謝奇明彦〉(동호주장사기명언)이다. '동호의 배 위에서 기명언에게 감사하며'이다. 명언(明彦)은 기대승의 자이다.
列坐方舟盡勝流 열좌방주진승류 나란히 배에 앉은 이 모두가 명사들
歸心終日爲牽留 귀심종일위견유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붙들려 머물렀네
願將漢水添行硯 원장한수첨행연 한강물 벼루에 담아 갈아서
寫出臨分無限愁 사출임분무한수 끝없이 이별의 시를 쓰고 싶어라
기대승의 봉별시와 그에 감사하는 퇴계 선생의 화답시이다.
퇴계는 1968년 12월, 17세의 선조 임금에게「성학십도」를 울리고, 몇 달에 걸쳐 누차 선조 임금에게 사직 상소를 올린다. 1569년 음력 3월 4일 임금은 퇴계에게 일시적인 귀향을 허락한다.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마친 퇴계는 즉시 도성을 나와 고향으로 향하였다. 소식을 들은 조정의 중신들이 모두 한강 동호나루(옥수동)에 나와 전별하였으니, 홍섬, 박순, 기대승, 윤두수, 김귀영, 김성일, 이순인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였고, 그 때문에 귀향길이 늦어진 퇴계는 동호의 몽뢰정과 강남의 봉은사에서 유숙하였다. 그때 기대승이 동호에 나와 선생을 보내며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시를 읊고, 퇴계는 배 위에서, 나루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고봉에게 화답시를 남긴다.
이후 광나루~미음나루를 지나고 남한강의 한여울, 배개나루(이포)를 거쳐 충주 가흥창까지 관선(官船)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충주에서 하선한 선생은 이후 말을 타고 청풍~단양~죽령~풍기~영주~예안 도산의 경로로 돌아왔는데 가는 곳마다 배웅 나온 제자, 영접 나온 관원 및 친구들과 시를 주고받는 등 13일의 여정에서 상세한 기록들을 많이 남겼다.
2019년 4월 9일, 서울 봉은사에서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 45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참공부모임이 주관하여 2019년 4월 9일부터 21일까지 11박 12일 동안, 서울 봉은사에서 안동의 도산서원까지 250여km를 걸어가는 출발 행사를 가졌다. 봉은사에서 충주까지는 남한강 강변길[바이크로드]을 따라 걷고 충주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단양까지 가서 죽령을 넘어가는 여정이었다. … 사진은 그때 봉은사 행사에서 내 건 고봉의 봉별시와 퇴계 선생의 화답시이다.
국제퇴계학회 회장 이광호 박사
행사를 총괄 진행한 손기원 박사
이전, 퇴계(退溪)는 고봉을 만나고서, 남쪽으로 떠나는 고봉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어제는 뵙고 싶은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조심하십시오. 덕(德)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황(李滉)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후에 퇴계는 고봉에게 자신의 아버지인 찬성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써주기를 부탁했고,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묘갈명(墓碣銘)을 써서 바쳤다. 오늘날 퇴계의 묘 앞에 있는 묘비명(墓碑銘)이 바로 그것이다. 그 묘비명 일부를 다시 찾아 읽어본다.
“… 아!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문(銘文, 퇴계의 ‘自銘’)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활(迂闊)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시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탁하여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
이렇게 퇴계와 고봉은 나이와 직위를 떠난 도반(道伴)이었으며 사제(師弟)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에 고봉은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무려 13년 동안, 그것도 광주와 안동에 살면서 114통의 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사칠논변(四七論辯)>을 진행했다. 서신(書信)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교류는 직분과 나이를 초월한 논쟁으로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에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퇴계는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이었지만 고봉을 제자로서보다는 학우로 대하였으며,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대승의 도발적인 질문과 깐깐한 비판에도 퇴계는 기대승을 깍듯하게 ‘공(公)’이라고 칭하고, 나이가 많은 데도 자신은 ‘이황(李滉)’이라고 ‘이름’을 쓰면서, 성실하게 논변을 전개했다. 그래서 퇴계를 ‘노겸군자(勞謙君子)’[주역 겸괘(謙卦)]라고 하는 것이다. 가히 성자(聖者)의 풍모라고 아니할 수 없다.
*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 이광호 박사] *
― 백파의 낙동강 종주를 성원하는 시 한 편 ―
호남 유학의 연원을 찾아가는 답사여행 중, 나대용 박사가 나를 소개하면서, 회원들에게 나의 낙동강 중주 이야기를 했다. 모두 관심을 갖고 성원해 주었다. 특히 이광호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퇴계 선생 예던 길’의 여정 중 청량산~낙동강 풍경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그때의 감동을 이야기했더니, 이광호 박사께서 선뜻 그 풍경과 정취(情趣)에 알맞은 한시(漢詩) 한 편을 건네주셨다.
朝行附聽淸溪響 이른 아침 강을 따라 걸으니 맑은 물소리가 들리고
暮歸遠望靑山影 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는 멀리 청산의 그림자가 보이네!
朝行暮歸山水中 아침에 강을 따라서 걷고 저녁이 돌아오는 산수 중
山如蒼屛水明鏡 산(山)은 초록의 병풍이요 물은 맑은 거울일세! ― (백파 졸역)
[강진 만덕산 백련사 만경루(萬景樓)] 이광호 박사 ― 다산초당에서 산허리길 1.3km 떨어진 천 년 고찰 백련사
☆… 이광호(李光虎) 박사는 1948년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태어났다. 문경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영강(潁江)이 발원하는 곳이다. 영강(潁江)은 백두대간 대미산-조령산(새재)에서 발원하여 점촌을 경유, 함창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 4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교육과정 5년을 마쳤다. 이후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교수와 소장을 역임하고 한림대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한국동양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이며 국제퇴계학연구회 회장으로, 연구와 강연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유학과 동양철학 등 고전을 익히고 연찬하며 인격을 수양하는 일에 정진하였다. 무엇보다 우리의 고전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문학으로 정립하고자 각별하게 애쓰고 있다.『근사록집해』『심경 주해총람』『성학십도』『이자수어』『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등을 번역하였다. 그리고『이퇴계 학문의 체용적 구조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1993),『이퇴계의 찰학이 정다산 경학 형성에 미친 영향에 관한 고찰』『공자의 학문관』『성호 이익의 서학 수용의 경학적 기초』『퇴계 이황의 성학에 대한 현대적 고찰』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퇴계학 연구의 권위자이다.
* [다시 낙동강 출행을 기다리며] ―
☆… 남도 유적답사 8월 22일 이후, ‘낙동강 종주’는 중단되고 있다. 한반도의 남부를 강타한 9호 태풍 ‘마이삭’과 부산과 동해안을 무자비하게 휩쓸고 간 제10호 태풍 ‘하이선’으로 인해 남동부 지역의 강이 범람하는 홍수와 산사태가 났다. 국토는 깊은 상처를 입고 도로, 가옥, 농경지 등이 유실되는 등 엄청난 피해가 속출했다. 근 두 주일 이상 태풍과 폭우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심각한 천재지변으로 인해 낙동강 출행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태풍이 끝나고도 출행은 불가능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성큼 가을이 다가오는 듯 날씨는 매우 좋아졌지만, 코로나19가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다시 창궐하여, 방역당국이 ‘사회적 거리두기 2.5’를 발령함으로써, 모든 생활이 완전히 발이 묶여 있는 상태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추석까지 계속되었다. 아, 낙동강이 그립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