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3. 31
무산소 호흡 공생체 발견 논문을 읽다가 있었던 일이다.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이 세포내공생이라는 언급에 딸린 참고문헌을 보니 1967년 ‘이론생물학저널’에 실린 그 논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Sagan, L.’이다. ‘그래, 칼 세이건이 첫 남편이었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저자의 성은 칼 세이건과 이혼한 뒤 재혼한 남편의 성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익숙한 성이 혀끝에서 맴돌 뿐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라도 떠올리면 될 것 같은데, ‘L.’을 봐도 기억이 안 난다. 머리를 쥐어짜며 절망하다 포기하고 검색했다.
린 마굴리스.
평소라면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순간만은 도대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오랜만에 TV에 나온 유명 탤런트나 가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한 적도 있다. 분명 기억하고 있는 것임에도 어느 순간 해당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혀끝에 맴도는 상태를 ‘설단 현상(tip of the tongue)’이라고 부른다.
▲ 과학영재 린 알렉산더는 불과 14살에 미국 시카고대에 입학해 19세인 1957년 24세인 칼 세이건과 결혼했지만 1965년 이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 그 뒤 1970년 토머스 마굴리스와 재혼할 때까지 린 세이건이라는 이름을 썼다.
기억에서 사라진 게 아님에도 어느 순간 떠올리지 못하는 현상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폰뱅킹을 하다가 갑자기 비밀번호 숫자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고 심지어 현관 열쇠의 번호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익숙한 냄새임에도 해당 음식이 생각나지 않기도 한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고 대상 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이처럼 평소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어떤 순간에 기억해 내지 못하는 현상을 ‘일시적 망각(transient forgetting)’이라고 부른다. 대상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설단 현상을 비롯해 일시적 망각을 경험하면 그 순간 답답하고 심지어 충격을 받기도 한다. 특히 나이 든 사람은 ‘치매의 전조가 아닌가’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시적 망각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망각의 두 가지 형태
20세기까지만 해도 기억 연구는 주로 기억의 형성과 강화(응고화), 인출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였다. 망각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기억의 상실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여기에 설단 현상 같은 일시적 망각이 흥미를 끄는 정도였다. 오늘날 ‘수동적 망각(passive forgetting)’이라고 부르는 범주다.
21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망각 연구가 시작되면서 망각의 대부분은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능동적 망각(active forgetting)인데 기억만큼이나 망각도 뇌의 중요한 ‘기능’이라는 말이다. 매일의 수많은 경험의 일부가 장기기억으로 뇌의 어딘가에 저장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지워진다.
이 가운데 분자 차원의 메커니즘이 꽤 알려진 게 ‘내재된 망각(intrinsic forgetting)’으로 초파리의 냄새기억 연구에서 밝혀졌다. 즉 뇌에는 ‘망각세포(forgetting cell)’가 있어서 디폴트 모드로 수시로 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초파리의 뇌에는 도파민 뉴런의 한 종류인 망각세포가 있는데, 후각기억에 관여하는 버섯체뉴런(엔그램세포)과 시냅스로 연결돼 있다. 망각세포의 시냅스 전부에서 분비된 도파민이 버섯체뉴런 시냅스 후부 표면에 있는 DAMB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Rac1을 비롯한 몇몇 단백질들이 만들어져 신호전달이 일어나고 그 결과 세포골격단백질인 액틴(actin)의 구조가 바뀌면서 저장된 기억이 사라진다.
망각세포의 활성은 초파리가 다른 감각자극을 경험할 때는 촉진되는 반면 잠을 자거나 쉴 때는 억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험으로 새로운 데이터가 쌓일 때는 기존 기억을 부지런히 지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형성할 때만큼 지울 때도 생체분자가 동원되는, 에너지가 들어가는 작업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럴듯한 현상이다.
▲ 초파리 연구로 망각의 분자 메커니즘이 밝혀졌다. 왼쪽은 영구적 망각(permanent forgetting)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으로, 도파민 뉴런(PPL1 DAn)의 일부가 활성화돼 도파민을 분비하면 버섯체뉴런(MBN)의 특정 영역에서 일련의 단백질이 만들어져 기억 엔그램이 지워진다. 오른쪽은 최근 규명된 일시적 망각(transient forgetting) 메커니즘으로, 도파민 뉴런의 다른 부분이 활성화돼 도파민을 분비하면 버섯체뉴런의 다른 영역으로 신호가 전달돼 기억 인출이 억제된다. / 네이처 제공
도파민 뉴런이 관여하는 다른 경로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18일 일시적 망각의 메커니즘을 밝힌 연구결과를 실었다. 역시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미국 스크립스연구소 로널드 데이비스 교수팀은 외부 자극으로 초파리에게 일시적 망각을 유도한 뒤 뇌에서 일어나는 신호 패턴을 다양한 유전 기법을 동원해 분석했다.
먼저 초파리에게 특정 냄새와 강한 전기충격을 연관 짓는 학습을 시킨다. 72시간 동안 반복 학습을 한 초파리는 특정 냄새를 맡으면 회피 동작을 보인다. 이 관계가 장기기억으로 저장돼 특정 냄새를 감지하자마자 기억을 인출해 회피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 인출 실험을 할 때 바람을 일으키거나 약한 전기충격을 주거나 파란빛을 쪼이는 것 같은 외부 자극으로 간섭을 하면 특정 냄새가 나도 초파리가 회피 동작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강한 전기충격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자극을 주고 한 시간 뒤에 냄새 실험을 하면 특정 냄새를 맡자마자 바로 회피 동작을 보였다. 외부 자극이 주어진 순간 기억 인출에 실패해 일시적 망각이 생긴 것이지 기억 자체가 지워진 건 아니라는 말이다.
분석 결과 일시적 망각 역시 기억 엔그램을 지우는 내재적 망각과 마찬가지로 도파민 뉴런과 DAMB 수용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내재적 망각에 관여하는 망각세포와 다른 도파민 뉴런(058B>TrpA1)과 버섯체뉴런의 다른 부위(α2α’2)가 관여한다. 이 경로는 기억 인출을 방해할 뿐 엔그램을 지우는 과정을 유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한편 외부 자극으로 인한 간섭이 없을 때는 이 경로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나이들수록 빈도 늘어
▲ 주어진 실마리에서 관련된 이름을 바로 알 수 있을 때(Know)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Don’t know), 설단 상태일 때(TOT) 뇌의 활동을 비교한 이미지다. 설단 상태일 때 뇌 활성 패턴이 전혀 모를 때보다 바로 알 때와 더 가깝다(위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한편 설단 상태와 바로 알 때를 비교해보면 설단 상태에서 하단왼쪽 뇌섬엽 활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맨 아래). ‘/ 인지신경과학저널’ 제공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이번 발견이 사람의 일시적 망각, 특히 설단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이번 연구가 설단 현상을 포함한 사람의 일시적 망각 연구에 대한 진입지점을 제시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 설단 현상은 단순한 일시적 망각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면 뇌의 한 곳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다양한 양식으로 기억되고 이를 떠올리는 건 여러 곳에서 인출된 정보가 통합된 결과다. 즉 설단 현상은 이 가운데 어휘 정보가 제대로 인출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참고문헌에서 세포내공생설 논문을 보며 린 마굴리스의 얼굴과 칼 세이건이 첫 남편이라는 기억은 즉각 떠올랐지만 이름은 안타깝게도 혀끝에서 맴돈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논문 저자로 찍힌 ‘세이건’이라는 유명한 이름(외부 자극)이 ‘간섭 효과’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 픽사베이 제공
어느 순간 설단 현상을 겪으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절반 정도는 성공한다. 즉 설단 현상은 지금 겪고 있는 망각이 일시적이라는 걸 의식하게 해 떠올리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셈이다. 물론 나는 린 마굴리스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당황하면서 바로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여유를 갖고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면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실제 설단 현상을 겪을 때 감정적 동요가 클수록 기억 인출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수십 년의 삶을 겪으며 뇌에 저장된 수많은 기억 가운데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걸 즉각 떠올릴 수 있다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이 실은 놀라운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실제 기억 인출 과정 자체는 많이 연구됐지만, 어떻게 특정 기억이 저장된 주소들을 이처럼 즉각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가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다.
나이가 들수록 설단 현상이 나타나는 빈도가 잦아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노인들은 하루에 한 번꼴로 설단 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설단 현상 자체가 치매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전조인 것은 아니다. 설단 현상을 비롯한 일시적 망각을 겪을 때 감정의 동요를 겪지 말고 인터넷 검색 같은 대안을 찾거나 이도 여의치 않으면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떨까.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