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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연구 방법론
동중한합회 목회자 협의회
2009. 3. 10~12.
남 대 극
감동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연구 방법론
감동적인 설교의 필수요건
1.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
목회자가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의 영적 성숙과 헌신을 위해서이다. 목사들이 대부분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성경을 날마다 펴서 다시 읽는 것은 그 안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용기와 영적인 능력을 얻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매 끼니마다 음식을 다시 먹는 것과 비슷하다.
둘째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기 위해서이다. 목회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도들과 초심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성경을 잘 읽고 잘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어떤 방법으로 설교하고, 성경을 어떤 식으로 가르쳐야 회중이 기뻐하며 감동을 받을까? 목회자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연구하고 정리하는 것이 그의 설교를 살찌게 하고 감명 깊게 할까?
2. 감동적인 설교란?
감동적인 설교란 어떤 설교일까? 그것은 청중 또는 회중에게 감명(感銘)과 영감(靈感)을 주는 설교일 것이다. 영어로 ‘감명’은 ‘Impression’이라 하고, ‘영감’은 ‘Inspiration’이라 한다. 설교에서 이 두 가지를 많이 얻은 사람은 예배 후에 “나는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를 전혀 주지 못하는 설교는 청중을 실망시키고, 회중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설교를 계속하는 목회자는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따라서 그의 목회는 성공할 가망성이 매우 희박하다.
목회자가 하는 일이 설교만은 아니지만, 목회자가 하는 일 중에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는 일차적으로 성공의 가능성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내용도 훌륭하고 방법도 뛰어나야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용에 국한할 것이다. 설교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설교학의 전문가에게서 듣기 바란다. 나는 설교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설교를 빼어나게 잘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이 지난 세월 동안 대학교회와 지역교회에서 비교적 자주 설교를 하면서, 또 수십 년간 수없는 설교들을 들으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에 기초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교를 들어야 할 회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종의 요망사항을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취지에서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고,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여기에 기록된 사항들이 권위 있는 설교학 강의는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설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또 설교를 많이 듣기도 하고 해보기도 한 사람이 동료 설교자들에게 드리는 청유형(請誘形) 제안으로서의 가치는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것을 쓰는 나의 태도는 “우리 모두 설교 준비를 이렇게 합시다!”이지, “그대들은 설교를 이렇게 준비하시오!”가 아니다.
3. 감동적인 설교의 첫째 필수요건: ‘Information’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가 회중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고 감동적인 설교, 즉 감명(Impression)과 영감(Inspiration)을 주는 설교가 되려면, 적어도 두 개의 “I”가 그 설교에 꼭 포함되어야 한다.
그 첫 번째 ‘I’는 ‘Information’(정보, 지식)이다. 매 설교에는 새로운 Information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중은 ‘만날 듣던 설교’ 또는 ‘언제나 같은 설교’를 듣게 되고, 안식일 아침에 영적으로 기름진 식사를 기대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은 맛없는 ‘식은 밥’ 한 그릇을 억지로 먹고 귀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교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썩 내키지 않게 되며, 목회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실에 있어서,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이나 사상에 대하여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이야기할 때와 다른 문헌들을 참고하여 이야기할 때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노아의 홍수 사건에 관하여 설교할 때, 성경에 있는 내용만을 말한다면 아무리 신명나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 설교는 진부하게 들리고, 따라서 ‘만날 듣던 설교’가 되어,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조와 선지자’와 같은 영감적인 책을 참고하여 거기에 자세히 기록된 홍수 당시의 생생하고 엄청난 상황들을 재현시킨다면, 그 설교는 거의 압도적인 설교가 될 것이다. 설교의 내용의 줄거리는 동일한 것이지만, 세부사항이 다르거나 접근방법 또는 제시방법이 다를 경우에 청중이 받는 감동은 사뭇 달라진다. 설교자가 성경에 기록된 사항 이외에 ‘예언의 신’이라는 새로운 Information을 가미(加味)하면, 그의 설교는 활력을 얻고 청중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독서를 광범하게 해야 하고, 많은 정보에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도 회중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가 있다. 만약에 목사의 설교에 새로운 정보가 전혀 없고, 항상 듣던 얘기뿐이라면, 그 설교는 내용이 부실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며, 회중의 마음은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 회중이 동일한 주제의 설교를 듣더라도 “그런 것을 생전 처음 들었다”는 반응을 하도록 해야만 그 설교는 훌륭한 설교라 할 수 있다.
4. 감동적인 설교의 둘째 필수요건: ‘Illustration’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설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의 두 번째 ‘I’는 ‘Illustration’(예화, 예증)이다. 사실상 모든 설교에는 Illustration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예화나 이야기가 없는 설교는 너무 무미건조(無味乾燥)하고 딱딱하게 들린다. 따라서 그런 설교는 재미도 없고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예화는 회중의 마음이 어려운 교리나 사상을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촉매이기도 하고, 그것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교인들이 설교의 주된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예화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만큼 예화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아무리 고매한 사상이나 아무리 귀중한 교리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에게 감화나 감동을 거의 주지 못한다. 그것들이 예화와 함께 제시되어 사람들의 심령에 와 닿을 때 비로소 그것의 의미가 확실해지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가 뚜렷해진다.
설교자가 예화를 사용할 때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는 예화들은 여러 가지 요건을 고루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에 있어서 설교자가 이용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예화는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하지만, 흥미위주로 예화를 택하면 거룩한 감화를 손상하기 쉽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내용이 세속적인 것은 설교의 예화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목사들은 회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설교 시간에 유머(humor)나 조크(joke)를 사용하는데, 이것 역시 극도로 절제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예배의 분위기를 오히려 망쳐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설교는 신학 강의도 아니고 종교 연설도 아니다. 설교는 구원의 선포(Kerygma)이며 말씀의 선언(Proclamation)이다. 따라서 설교에는 생명이 있어야 하고 복음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는 종교적 재담(才談)이나 도덕적 만담(漫談)에 그치게 된다.
예화로서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감화가 큰 것은 설교자 자신의 신앙 경험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 경험을 인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생한 경험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과 감명을 주고, 그들도 같은 경험을 하고 싶게 하는 충동과 분발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Illustration을 사용하는 목적이요 효과이다.
야담(野談)과 전설(傳說)은 설교의 예화로 적합하지 않다. 실화(實話)라 할지라도 너무 잔인한 장면과 난폭한 내용은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므로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어서는 안 되고, 예화가 너무 장황해서도 안 된다.
예화는 어디까지나 설교를 돕는 보조수단이지 예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핵심이나 주된 내용을 가리어 버리는 예화는 예화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설교 시간의 대부분을 예화로 장식하거나 여러 개의 예화를 계속해서 나열하는 것은 설교의 질(質)을 크게 떨어뜨린다. 한 편의 설교에 세 개 이상의 예화를 말하는 것은 설교를 이야기 시간으로 착각하게 만들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간증(干證)이나 경험담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이 청중의 마음에 좋은 감화를 주는 훌륭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Kerygma로서의 설교는 아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설교 시간을 간증이나 체험담으로 대신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규 예배의 설교에는 반드시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선포되어야 하며, 성경 자체에 기초한 거룩한 진리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llustration이 없는 설교는 삭막하고 감동이 결여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준비한 설교에 적합한 예화를 발굴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좋은 예화와 함께 제시된 설교라야 회중의 심령에 감동을 주고 또 그 내용이 오래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Information이 없는 설교는 지성적(知性的)으로 공허하게 느껴지고, 적절한 Illustration이 없는 설교는 정서적(情緖的)으로 건조하게 느껴진다. Information만 가득하고 Illustration이 없는 설교는 회중의 머리만 무겁게 하고 가슴을 울리지 못하며, Illustration만 늘어놓고 Information이 없는 설교는 일시적인 감흥은 일으켜도 지속적인 교훈은 주지 못한다. 따라서 탁월한 설교는 두 개의 ‘I’, 즉 새로운 Information과 적합한 Illustration을 조화 있게 배합한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설교는 예외 없이 회중에게 감동을 주고 회심과 결심을 유발할 것이며, 설교자에게도 크나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이 두 개의 “I”를 구비한 설교는 다른 두 개의 ‘I’, 곧 가슴을 울리는 Impression (감명)과 머리를 스치는 Inspiration (영감)을 회중에게 선사(膳賜)할 것이다.
감동적인 설교를 위한 성경연구 방법론
성경 연구 방법의 실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무슨 목적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그 방법과 결과도 사뭇 달라진다. 예컨대, 우리가 단순히 어느 부분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다면 그 부분의 줄거리만 이해하면 되므로 세부적인 사항들에까지 신경 쓸 필요 없이 통독만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개인적인 유익과 교훈을 위해 성경을 통독한다면 좀 더 경청하는 마음과 자신을 살피는 태도로써 조용히 낭송하거나 간간이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주석(註釋)하거나 강해(講解)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의 읽는 방법이 위의 방법들과는 달라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와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야 할까?
1. 본문을 자세히 읽으라
목회자가 성경 본문을 주석하거나 그 본문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그는 선택한 본문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사 34:16)고 하였다. 어느 정도로 ‘자세히’ 읽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로 ‘자세히’ 읽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을 때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우리가 본문에서 찾아낼 것들이 무엇인가?
(1) 선택된 본문의 주제 또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평범한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목회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분이 과연 오늘의 설교를 위해 선택한 본문의 주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소위 ‘주제 파악’을 잘 못하고 있는 설교자들이 왕왕(往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설교자가 본문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를 하면 그 설교는 회중에게 감동을 주는 일은 요원한 일일 뿐만 아니라 유식한 교인들의 빈축(嚬蹙)을 사고, 그 결과 목회자의 실력이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를 위해 선정한 성경 본문의 대의(大義) 또는 진의(眞義)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을 자세히 읽고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주자(朱子)가 남긴 글 가운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現)”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글이나 책이든지 100번을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문장의 다독(多讀)과 정독(精讀)을 아울러 강조하는 말이므로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기억할 만한 말이 아닌가 싶다.
(2) 주어진 본문에서 실제적 교훈이나 영적 덕목을 찾아내야 한다. 설교는 단순히 신학 강의나 철학적 담론이 아니고, 히브리인들의 고대 역사를 재진술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구원의 선포(Kerygma), 즉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하는 위대한 선언(Proclamation)이다. 그러므로 설교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행해야 할 실제적 교훈이나 영적 덕목이 포함되어야 한다. 좀 더 차원을 높여서 말한다면, 주어진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발견되거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항이 드러나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용할 윤리적 가치가 강조되고 구원의 은혜가 부각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심도 있는 명상과 연구가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을 억지로 꿰어 맞추는 식으로 하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로 하면 감동은 사라지고 억지만 기억된다.
설교를 음식에 비유한다면, 실제적 교훈과 영적 덕목은 그 음식에 함유된 영양분이라 할 수 있다. 음식의 색깔이 아무리 화려하고 반찬의 가지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거기에 포함된 영양분과 칼로리가 없으면,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배부른 느낌은 가질지 모르나 실제로 건강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설교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의 설교는 재료가 확실하고 영양가가 높으며, 그러면서 먹기에도 좋은 밥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설교자가 설교의 본문을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면밀히 연구해야 한다.
(3) 본문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뽑아내야 한다. 설교자가 택하는 성경 본문에 있는 모든 단어나 모든 사항이 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측면을 다 강조하면 상대적으로 강조가 희석되거나 약화되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없어진다. 사람들은 한 설교에서 한 가지만 강조할 때 가장 잘 기억하고 감명도 깊게 받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대상에만 초점을 맞추는(uni-focused) 설교가 효과적이다. 초점이 여러 개(multi-focused)인 설교는 아무리 조직적이고 열정적으로 제시되어도 산만하고 복잡하게 느껴져서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선택된 본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나 단어들을 뽑아내어 그것이 갖는 신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어진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사항들이 한 가지 사상 또는 개념을 중심으로 맴돌게 해야 하며, 이 중심 사상은 설교 시간 내내 여러 번 반복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특징적인 요소들을 강조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 설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고 감동 있게 기억한다. 예컨대, ‘사랑’, ‘은혜’, ‘희생의 결과’, ‘봉사의 기쁨’, ‘전도의 책임과 특권’, ‘기도의 능력’, ‘율법과 계명의 중요성’, ‘성경과 말씀의 권위’, ‘절대적 신뢰의 중요성’, ‘환란과 시련의 목적’, ‘그리스도인 가정의 행복’, ‘순종의 의무와 축복’ 등은 설교의 주된 사상으로서 설교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초점이 분명한 설교를 들은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실행할 의지를 가질 것이다.
2. 문법적인 지식을 활용하라
깊이 있는 설교로써 청중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자 하는 설교자는 신학대학 시절에 배운 성경 원어에 관한 지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기 위해 바친 그 많은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설교를 준비할 때 그 언어들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힘들게 배운 성경 원어들을 너무나 적게 이용하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반드시 언어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설교에 이용할 수 있음을 모든 목회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성경 원어를 모를지라도 국어를 정확하게 읽을 줄만 알아도 설교에 향기와 광채를 더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영어 성경을 참고하는 것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1) 사용된 동사들의 시제(時制)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의 문장 안에서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시제나 문법에도 맞지 않는 시제로 말씀된 경우들이 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시제를 사용한 이면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과 진리가 있다.
비근한 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의 경우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이 가야 할 땅을 아직 지시하지 않은 상태임을 보여주신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기는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현재 시제이고, 하나님이 목적지를 지시하시는 것은 미래 시제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가 나타나 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 11:8). 이것은 동사의 시제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교훈이다.
또 다른 예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경우이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전에] 내가 있느니라’고 하시니”라(요 8:57, 58). 이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을 영어 성경(NIV)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이것은 문법적으로는 틀린 문장이다. 종속문장의 시제가 과거이고, 주문장의 시제가 그보다 먼저이면, 주문장의 시제는 대과거이므로 과거완료 시제로 표현되어야 문법적으로 옳다. 이러한 문법에 맞게 하려면 이 문장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전에] 내가 있었느니라”(Before Abraham was born, I had been)로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짐짓 쓰셨다.
여기에는 특별한 진리가 숨어 있다. 예수께서는 문법적 파격을 통하여 자신이 영원한 현재적 존재임을 천명하신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존재하시고 영원히 선재(先在)하시는 하나님임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있느니라”(I AM, ἐγώϏεἰμι, egō eimi)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출 3:14)라고 하신 선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여기에 사용된 분법적 파격 또는 오류를 통하여 나타난 예수님의 신적 속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깊은 문법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말 문장이라도 자세히 또는 유심히 읽으면 동사의 시제가 특별한 것을 금방 알아챌 수가 있을 것이다. 설교자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회중에게 자세히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의 오묘함에 신비감을 느끼고 감춰진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도요한이 사용한 과거 시제는 요한의 특징임을 유의해야 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요일 2:14; 참고 2:21, 26; 5:14).--“The Johannine Aorist” (ἔγραψα, egrapsa).
--Cf. 요일 1:4; 2:1, 7, 12, 13 (γράφω, graphō).
(2)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의 수(數)를 잘 살펴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에 이르렀을 때, 그의 사환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고 하였다. 우리말 문장에는 수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서 “돌아오리라”라는 동사의 주어가 무엇(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누가 “돌아올”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이 좀 더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영어(NIV)로는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로 되어 있다. 이 문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경배하고” 그와 함께[‘we’] “돌아오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이삭을 잡아 제물로 드리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과는 상치되는 진술이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산에 올라가서 경배할 때까지는 이삭과 함께 둘이서 가겠지만 돌아올 때는 이삭은 제물로 바쳐지고 아브라함 혼자서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we will come back”(“우리가 돌아오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원문 성경의 히브리어 문장에서도 “돌아오리라”(הוּשׁ)라는 동사의 주어는 1인칭 복수[we]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며,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배어 있는 말이다. 이것은, 잠시 후에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얼떨결에 대답한바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한 말과 함께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정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는 완벽하였고,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명사나 대명사의 수(數)도 자세히 살피면 감동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수난주간(受難週間)에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32). 이 말씀 가운데는 2인칭 대명사가 5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 것은 복수(‘너희’)이고, 나머지 4번은 단수(‘너’)이다. 여기서도 설교자는 숨어 있는 은혜로운 뜻을 찾아낼 수 있다. 사단은 “너희”[여러 사람, 복수]를 시험하려고 청구하지만, 예수님은 ‘너’[한 사람, 단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예수님의 기도와 관심과 애정은 개별적인 것이요 인격적인 것이다. 사단은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하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돌보시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개별적으로 돌보시고 각인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개인의 구주이시다.
이런 식으로 설교자들이 성경 본문에 숨어 있는 미묘한 차이점들을 착안하여 설명해 준다면 회중이 받는 은혜는 배가(倍加)될 것이다.
3. 반복되는 단어나 구절에 유의하라
성경을 꼼꼼히 살피고 자세히 읽다가 보면 반복되는 단어나 구절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발견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통독을 부지런히 하고 특히 정독을 하면서 앞서 읽은 부분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발견을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자주 “인자의 온 것은…” 또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이와 비슷한 표현들을 반복해서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구절들을 모두 모아보았다. 그랬더니 사복음서에 있는 그러한 구절들이 자그마치 20개도 더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똑같은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이중으로 기록된 것도 있었다. 나는 본문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그것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이것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거기에 “성육신(成肉身)의 목적”이라는 부제목을 붙였다. 이것을 설교강목 형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설교제목: “인자의 온 것은…”
부제목: ―성육신(成肉身)의 목적―
성경본문: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서론: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말씀하시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럴 경우, 예수님은 대체로 “인자의 온 것은…” 또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등과 같은 서두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꼭 이런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시는 본문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이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취지의 말씀들을 모두 찾아내어 정리해 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인자의 온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거나 다른 어떤 곳으로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 구절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직접적인 표현들이고, 둘째는 상징적인 표현들이며, 셋째는 포괄적인 표현들이다. 이 세 부류의 말씀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I. 직접적인 표현들
(1) 막 10:45 (마 20:28)-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심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 눅 5:32 (마 9:13; 막 2:17)-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심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 막 1:14-복음을 전파하러 갈릴리에 오심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4) 막 1:38-전도하러 오심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5) 눅 19:10-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심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6) 요 6:38~39-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러 오심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7) 요 10:10-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러 오심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8) 요 12:46-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오심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9) 요 12:47-세상을 구원하러 오심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10) 요 18:37-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오심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이상에서 살펴본 모든 본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또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 목적 또는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전도’(傳道) 또는 ‘선교’(宣敎)이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의 목적은 전도이다.
II. 상징적인 표현들
(1) 마 10:34-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2) 마 10:35-가족들이 서로 불화하게 하러 오심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 눅 12:49-불을 땅에 던지러 오심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4) 눅 12:51-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오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 요 9:39-심판하러(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러) 오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상징적인 표현들도 모두 동일한 내용을 말해주는데, 그것 역시 “전도”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전도하러 오신 것이다.
III. 포괄적인 표현들
(1) 마 5:17-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오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2) 요 3:16-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러 오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포괄적인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다면 우리도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전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참고 딤후 4:1~2). 전도 또는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이상의 모든 구절들을 정리하여 적절한 예화들과 함께 설교하면 회중은 전도를 해야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질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반복된 단어나 구절을 찾아서 연구하면 새롭고도 감명적인 설교들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든 것은 하나의 비근한 예(例)에 불과하다. 각자가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하면 더 좋은 설교재료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교를 준비하는 데는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말 성경만 자세히 읽어도 구성할 수 있는 설교이다. 다만 반복된 단어나 구절 또는 자주 나타나는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열쇠라 할 수 있다.
다음에 예시된 설교강목은 또 하나의 예이다. 독자들이 주어진 본문들의 문맥을 찾아보고 온전한 설교가 되도록 정리해 보기 바란다.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정리한 재료로써 설교할 때 가장 감동적인 설교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교제목: “예수의 발치에”
성경본문: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서론: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분의 발치에 와서 엎드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수제자 베드로를 위시하여 죄인인 여자와 귀신들린 남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분에게 나아올 때는 그분의 발 아래나 무릎 아래 또는 발치에 와서 요청도 하고 감사도 하고 불평도 하고 애원도 하고 때로는 말씀을 듣기도 한다. 오늘은 예수님의 발치에 나온 사람들의 장면들을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I. 예수님의 발치에 나아온 사람들
(1) 시몬 베드로(눅 5:8)—죄를 고백하는 자리, 죄인이 찾아갈 곳
(2) 문둥병자(눅 5:12)—더러운 질병을 깨끗이 치료할 수 있는 곳
(3) 죄인 여자(눅 7:38)—애정과 헌신을 표시하는 자리
(4) 귀신 들렸던 사람(눅 8:35)—정신 차리는 곳, 제 정신으로 감사하는 곳
(5) 회당장 야이로(눅 8:41)—죽어가는 딸을 살리러 가는 곳
(6) 마리아(눅 10:39)—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7) 사마리아 문둥이(눅 17:16)—병 나음을 감사(Thank You!)하는 자리
(8)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가진 여자(막 7:25)—자녀의 질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곳
(9) 마리아(요 11:32)—오빠가 죽은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과 아쉬움을 쏟아놓는 곳
(10) 마리아(요 12:3)—오빠를 살려주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곳
II. 예언의 신의 권면
(1) “어떻게 죄인이 그의 죄에서 돌아서고자 할 때, 예수의 발 앞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버려라. 그와 같은 생각을 품는 것보다 더 큰 손해를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로의 계단, 123).
(2) “그대는 어리석고 연약한 상태 그대로 나와서 죄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팔로 그대를 두르시고 그대의 상처를 고쳐주시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정결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정로의 계단, 119).
(3)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과오 때문에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슬피 울어야 할 것이다.” (정로의 계단, 147).
(4)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사상과 의지를 희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Our High Calling, 2002. 1. 18).
III. 결론과 호소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치에 나아가자! 우리 각자의 문제나 자녀들의 질병을 위하여, 헌신과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혹은 원망스러운 일이나 가슴 아픈 일을 쏟아놓기 위하여, 죄를 용서받고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 모두 그분의 발치에 나아가자! 그곳은 치유와 용서와 휴식과 생명이 있는 곳이다. 그분의 발치로 나가자!
이런 식의 성경 연구 또는 설교 준비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거나 비슷한 사항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이들은 누구나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다 적절하고 흥미있는 예화들을 곁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4. 성구사전을 사용하라
설교자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하고도 효과적인 도구는 성구사전(聖句辭典, concordance)일 것이다. 성구사전은 우리가 어떤 내용이나 단어가 담긴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자 할 때 가끔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 사전의 용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구사전의 더 중요한 용도는 특정한 단어들의 위치와 용례와 분포 그리고 빈도를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용도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우리말 성구사전은 완벽성경성구대전이다. 이것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만든 성구사전으로서 1982년에 아가페출판사가 간행한 것인데, 그 표제가 말하는 것처럼 ‘완벽’한 성구사전이다. 이것이 ‘완벽’하다는 것은 매 단어가 사용된 성경절을 빠짐없이 다 수록하면서 그 절의 전문(全文)을 생략 없이 옮겨 적었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완벽’한 성구사전은 다른 언어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것에 필적할 만큼 완벽한 성구사전은 역시 컴퓨터로 제작하여 1985년에 출판한 신약 헬라어 성구사전인 Computer Concordance to the Novum Testamentum Graece이다. 이 두 종류 이외의 거의 모든 성구사전들은 특정 단어가 사용된 성경절의 전문을 옮겨 쓰지 않고 일부 또는 한 줄만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절의 내용을 완전하게 알기 위하여 다시 성경을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성구사전의 용도는 무엇이며,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목회자가 성구사전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감동적이고 심도 있는 설교를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먼저, 성구사전의 용도부터 생각해 보자.
(1) 성구사전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특정한 성구(聖句)의 일부 또는 한 단어만 알고 그것이 성경의 어디에 나오지를 모를 때, 그 위치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절들을 많이 기억하는 목회자들은 그것들을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회중에게 상당한 은혜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들이 다 성경절들을 무한정 암송하거나 기억할 수 없으므로 불가불 성구사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2) 성구사전의 두 번째 용도는 특정한 단어의 용례와 분포와 빈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특정한 단어나 사상이 어떤 배경과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 그것은 성경의 여러 책들에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어떤 빈도로 사용되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눅 12:27)라는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고 가정하면, ‘백합화’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사실들에 관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곧바로 성구사전을 펴서 ‘백합화’가 어떤 경우에 얼마나 자주 쓰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백합화’(百合花)라는 단어가 수록된 완벽성경성구대전 제3권 421쪽을 보면 이 화초는 성경에 16번 나타나고, 그 중의 절반인 8번이 아가(雅歌)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꽃은 주로 연애시(戀愛詩)에 등장하고, 그밖에는 성전의 문양에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단 2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설교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혹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경우에라도 설교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아가에 나오는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상징이며, 애모(愛慕)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나 연인들의 환경을 기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꽃으로 등장하고 있다.
(3) 성구사전을 사용하는 또 다른 목적은 우리말 단어의 원어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좋은 성구사전들은 각 단어에 원어를 병기(倂記)했거나 원어를 찾아볼 수 있는 번호를 붙여놓았다. 우리가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 중의 어떤 단어가 그 성경절에서 어떤 원어로 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때때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 원어 성경을 보아도 되겠지만 그렇게 할 실력이나 시간이 없을 경우에는 성구사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어가 가진 독특한 의미나 강조되어야 할 뜻이 있으면 그것을 설교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마태복음 24:1~14을 본문으로 삼아 ‘말세와 징조’ 또는 ‘말세의 징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자. 이 본문 가운데는 “끝”이란 단어가 4번 나타난다.
3절(제자들의 질문):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6절(예수님의 대답):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12~13절(예수님의 말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절(예수님의 말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우리말로는 모두 ‘끝’이라고 했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원어로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단어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절의 ‘끝’은 헬라어로 συντελεία (sunteleia)이고, 기타 절들의 ‘끝’은 τέλος (telos)이다. συντελεία (sunteleia)는 진행적이고 선적(線的)인 끝 시간을 말하고, τέλος (telos)는 결정적이고 점적(點的)인 끝 시간을 가리킨다. 전자는 마지막 기간을 의미하고, 후자는 최후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3절의 ‘끝’은 말세의 징조들이 일어나는 비교적 긴 기간이고, 나머지 절들의 ‘끝’은 그 기간이 마감되는 시각이다. 이러한 단어의 뜻을 의식하면서 본문을 다시 읽으면 전체의 사상과 두 종류의 ‘끝’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아울러 이 헬라어 단어들이 다른 본문들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더 뚜렷해진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라고 했을 때의 ‘끝’은 물론 συντελεία (sunteleia)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는 이 본문에서 ‘끝’이 최후의 시각을 가리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끝’(‘종말’ 또는 ‘말세’)의 성경적 의미를 분명하게 깨우쳐 줄 뿐만 아니라, 설교의 격조를 높여준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갈라디아서 6장에 대하여 설교할 경우, 설교자는 외견상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2절과 5절의 의미를 시원하게 해명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5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말씀은 서로 상충되는 명령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두 구절에서 말하는 ‘짐’들은 과연 어떤 짐들인가? 성구사전을 펴면 이 짐들은 서로 다른 헬라어로 되어 있고, 따라서 그 의미도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2절의 ‘짐’은 βάρος (baros)이고, 5절의 ‘짐’은 φορτίον (phortion)이다. 전자는 개인에게 할당되지 않고 서로 도우면서 감당해야 할 공동의 짐이나 타인이 대신 져줄 수 있는 짐을 가리키고, 후자는 각 개인에게 부여되어 다른 사람이 져줄 수 없는 짐을 말한다. 군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서로 도와가면서 감당하도록 주어진 공용화기는 βάρος (baros)에 해당하고, 병사 개개인이 책임지도록 지급된 개인화기는 φορτίον (phortion)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갈라디아서 6:2, 5을 다시 읽으면 바울이 두 본문을 왜 그렇게 썼는지를 명확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본문에 대한 오해를 씻어주고 성경 말씀에 대한 흥미를 북돋우어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말 역어로는 한 단어이지만 성경의 원어로는 두 단어로 되어 있는 경우들이 매우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들을 편의상 ‘1역어—2원어’(一譯語—二原語) 상황이라고 일컫기로 하자. ‘1역어—2원어’의 경우들을 면밀히 파악하여 그 의미의 차이를 설교에 반영하면, ‘들을 귀 있는’ 교인들은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평범한 회중일지라도 설교자의 지식과 연구력에 상당한 찬사를 보낼 것이다. 목회자가 신자들의 찬사를 얻기 위해 설교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교인들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게 하려면 설교자가 교인들이 감탄할 수 있고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주요 성구사전들
우리 목회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성구사전들에 관하여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말로 된 성구사전들 중에서는 완벽성경성구대전(전7권)이 압권이다. 이것 외에 죠지 V. 위그럼(George V. Wigram)의 원어성구사전(구약 1권, 신약 1권)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나와 있다. 영어로 된 성구사전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많이 이용되는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영의 분석성구사전(Young's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과 스트롱의 완벽성구사전(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of the Bible)이다. 이밖에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훌륭한 원어 성구사전들이 다수 출판되어 있지만, 우리 목회자들이 이것들을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여튼 우리가 설교 준비나 성경 연구를 위하여 이용할 가치가 있는 성구사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완벽성경성구대전, 전7권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2). 이것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출판된 그 어떤 성구사전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더 세밀한 성구사전이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성구대전’이다. 전체가 7권으로 이루어져서 너무 방대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하기를 즐겨하는 이들은 상당한 도움과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 성구사전에는 원어가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고, 스트롱의 완벽성구사전의 뒷부분에 첨부되어 있는 히브리어 및 헬라어 단어들의 고유번호가 매 성경절 끝에 적혀 있다. 히브리어 단어의 고유번호는 BDB (Brown-Driver-Briggs) 히브리어 사전의 일련번호와 일치하고, 헬라어 단어 고유번호는 United Bible Societies가 발행한 신약 원전[The Greek New Testament]의 말미에 첨부된 헬라어 단어들의 일련번호와 일치한다. 이 성구사전에 각 단어의 원어가 숫자로만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원어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또 펴야 하는 불편이 있기는 하지만, 7권으로 된 이 전질(全帙, set)은 우리 한국인이 자랑할 만하고 애용할 만한 탁월한 작품이다.
(2) George V. Wigram, The Englishman's Hebrew and Chaldee Concordanc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번역판: 舊約 聖句辭典, 김만풍 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3).
(3) George V. Wigram, The Englishman's Greek Concordance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번역판: 新約 聖句辭典, 고영민․김만풍 역 (서울: 기독교문화출판사, 1981).
위의 두 성구사전은 구약과 신약의 원어를 알파벳순으로 열거하고 그 단어가 사용된 성경절을 한 줄씩만 옮겨 쓰는 식으로 만든 성구사전이다. 성경 본문은 영어 또는 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이 성구사전들의 장점은 성경 원어가 어떤 말들로 번역되었는지를 우리가 바로 알 수 있는 것이고, 단점은 번역된 단어의 원어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중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므로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려는 이들에게는 매우 요긴한 성경 연구 도구이다.
(4) Robert Young, Young's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 이것은 너무나 유명하고 널리 사용되는 것이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성구사전의 특징은, 영어 표제어에 해당하는 원어가 여럿일 경우, 각 원어별로 구분하여 성경절들을 나열한 것이다. 따라서 각 표제어 아래에는 원어 단어들이 기재되어 있어서 원어를 바로 알 수 있다.
(5) James Strong,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of the Bible. 이것도 널리 통용되는 성구사전이므로 영어 성경으로 연구하는 이들은 자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의 특징은 표제어의 원어를 직접 기록하지 않고 원어의 고유번호를 각 성경절의 우측 끝에 기재해 놓았다. 따라서 표제어의 원어를 확인하려면 다시 이 사전의 뒷부분에 부가된 원어표를 보아야 한다.
(6) Abraham Even-Shoshan, editor, A New Concordance of the Old Testament (Jerusalem: “Kiryat Sefer” Publishing House, 1985). 이것은 지금까지 나온 히브리어 성구사전들 중에서 가장 근래에 나온 것이고 가장 세밀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표제어들의 여러 가지 변화형들은 물론이고, 표제어에 격어미나 대명사가 첨가된 형태까지 낱낱이 열거하고 있어서, 세부적인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각 단어가 사용된 횟수를 그 표제어 옆에 기록하고 있는 것도 연구자에게 편리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히브리어 실력을 가져야 한다.
(7) Computer Concordance to the Novum Testamentum Graece (Berlin: Walter de Gruyter, 1985). 이것은 이름 그대로 컴퓨터로 만든 헬라어 성구사전이다. 헬라어 알파벳순으로 매 단어의 용례를 열거한 것인데, 국어로 된 완벽성경성구대전처럼 각 성경절의 전문(全文)을 수록한 것이 장점이다. 이것 역시 꽤 높은 수준의 헬라어 실력을 가진 목회자가 아니면 사용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신약 본문에 대한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도구이다.
(8) J. B. Smith, Greek-English Concordance to the New Testament (Scottdale, PA: Herald Press, 1955). 이 성구사전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이 사전에는 헬라어 단어가 「제임스왕역」(King James Version)에서 어떤 단어로 번역되었는지, 그 원어와 역어(譯語)가 신약의 어느 책에 몇 번 나타나는지, 결과적으로 그 단어가 신약 전체에 몇 번 사용되었는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사전이 보여주는 정밀한 통계는 단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을 사용하는 데는 기본적인 헬라어 지식만 있어도 될 것이다.
6. 성경 원어 실력을 활용하라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이수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한다. 하지만 그 언어들을 공부하는 일에 바친 그 많은 노력은 대부분의 경우에 도로(徒勞)에 그치고, 그것을 위해 소비한 그 많은 시간은 거의 허송세월(虛送歲月)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토록 열심히 학습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목회 현장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또 그것들을 이용할 만큼의 실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성경 원어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고, 전통적인 교과과정은 그 과목들을 예나 다름없이 필수과목으로 정하여 신학생들에게 그것들을 이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신학생들이 성경 원어들을 꼭 알아야 하고, 그래서 신학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배운다면, 그들이 졸업한 후에 일선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그것들을 사용하게 해야 할 것이고, 만약에 목회자들이 그 언어들을 목회 현장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신학대학의 교과과정에서 그것들을 없애든지 선택과목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언어들을 배우는 데 투여되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큰 것에 반하여 그것들의 유용성이 거의 없다면, 그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다른 과목이나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일에 바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한 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 원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왕에 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는 일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바쳤으니, 그 언어들을 목회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이용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각자가 배운 만큼이라도 설교에 사용함으로써 “본전이라도 찾자”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막대한 투자를 몽땅 날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 원어를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꼭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관한 정통한 지식이나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구든지 자기가 배운 만큼만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 원어 과목들을 많이 이수하여 상당한 지식을 축적한 사람들은 그만큼 많이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기본 학점만 취득한 사람들은 그 기본 실력을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기초 문법만 배웠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설교를 은혜롭고 흥미롭게 하는 일에 그 지식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에 성경 원어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언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세와 습관에 있다. 이미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허다하고, 처음 알게 되는 단어나 문법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살피고 연구하면 새로운 깨달음과 유용한 설교 자료들을 많이 얻을 수가 있다. 이제 그 실례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7. 서로 다른 원어들의 의미에 유의하라
성경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나란히 또는 서로 이웃하여 사용된 경우가 허다하다. 앞에서 우리는 성구사전(concordance)을 이용하는 방법을 다루면서 마태복음 24:1~14의 ‘끝’이란 단어가 헬라어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들로 기록된 것과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갈라디아서 6:2, 5에 각각 쓰인 ‘짐’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어떻게 다른지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리말 역어로는 하나의 동일한 단어가 원어 성경에서는 두 개의 상이한 단어들로 되어 있는, 이른바 ‘1역어—2원어’(一譯語—二原語)의 경우들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설교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언급하였다. 이제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성경 원어 사전을 이용하는 연습의 일환으로 ‘1역어—2원어’의 경우들을 몇 개 더 살펴보기로 한다.
(1) 창세기 1:3의 ‘빛’(רוֹא, ʼôr)과 1:14의 ‘광명’(רוֹא, māʼôr)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창조에 관한 기사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꽤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첫째 날에 창조된 ‘빛’(창 1:3)과 넷째 날에 창조된 ‘광명’(창 1:14)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우리말 역어인 ‘빛’과 ‘광명’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어서 이 둘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말 번역에서 굳이 두 개의 단어를 쓴 것은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졌으며,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광명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히브리어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상책(上策)일 것이다.
루드비히 쾰러(Ludwig Koehler)와 발터 바움가르트너(Walter Baumgartner)가 편찬한 구약히브리어사전(Lexik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에서 이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 것을 볼 수 있다.
רוֹא (ʼôr) (118회 사용됨): 1. brightness (밝음); 2. light (빛).1
רוֹא (māʼôr): 1. place of light (빛이 있는 곳); 2. luminary (발광체), light-bearer (빛을 지닌 물체).2
이 정도만 보아도 이 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대충 알 수 있다. רוֹא (ʼôr)는 밝음 즉 빛[光] 자체를 의미하고, רוֹא (māʼôr)는 그 빛을 지닌 물체 즉 발광체(發光體)를 의미한다. 이 두 단어의 형태를 보면 רוֹא (ʼôr) 앞에다 (mā)를 더한 것이 רוֹא (māʼôr)이다. 기초 히브리어를 배운 사람들은 히브리어 명사들 중에 (mā), (me), (mi)로 시작하는 것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생긴 단어들은 거의 모두 물체, 매체, 장소, 공간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법적 기능이 רוֹא (ʼôr)와 רוֹא (māʼôr) 사이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רוֹא (māʼôr)는 רוֹא (ʼôr)를 가지고 있는 물체나 매체, 또는 רוֹא (ʼôr)가 존재하는 장소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רוֹא (ʼôr)는 전기(電氣) 자체와 같은 것이고, רוֹא (māʼôr)는 그 전기를 가지고 빛을 발하는 전등(電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창세기 1장에 적용하면, 첫째 날의 ‘빛’은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밝음 자체 또는 하나의 요소(要素)로서의 빛을 가리키고, 넷째 날의 ‘광명’은 그 빛을 받아서 비추거나 반사하는 물체들인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설명으로써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설명을 듣고도 많은 사람들은 수긍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2) 스가랴 4:6의 ‘힘’(ל, ḥayil)과 ‘능’(, kōaḥ)
스가랴 4:6은 매우 잘 알려지고 널리 인용되는 구절이다. 특히 그 후반부가 그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힘’과 ‘능’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인가?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무수히 많다. 어떤 개념 또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동의어(同義語)나 유의어(類義語)를 나열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현상이 두 개의 문장으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동의대구법(同義對句法, synonymous parallelism)이라 하고, 두 개의 단어로 나타나는 것을 이어일상(二語一想, hendiadys)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본문에서, 전반부의 “소가 그 임자를 아는 것”과 “나귀가 주인의 구유를 아는 것”은 같은 개념을 두 개의 비슷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고, 후반부의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것”과 “나의 백성이 깨닫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개념을 두 개의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소와 나귀가 아는 것”과 “이스라엘과 나의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은 서로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반의대구법(反義對句法, antithetic parallelism)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1:3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각 동의대구법을 이루고 있고, 그 두 개의 동의대구법은 서로 반의대구법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자비롭고 은혜롭고”(출 34:6), “허물과 죄”(창 50:17; 욥 13:23; 겔 33:10), “기쁨과 즐거움”(욜 1:16), “어둡고 캄캄한”(욜 2:2), “때와 기한”(행 1:7),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벧후 3:11) 등은 같거나 비슷한 사상을 두 개의 단어로 강조하거나 더 포괄적으로 나타낸 이어일상(二語一想)의 경우들이다. 이러한 수사법(修辭法)은 성경의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스가랴 4:6의 “힘과 능”도 바로 이러한 이어일상의 표현법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어일상의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 전혀 차이가 없는 동의어들인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유사한 뜻을 가진 단어들이라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두 개의 단어는 서로 다른 뉘앙스 또는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스가랴 4:6의 ‘힘’과 ‘능’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이 단어들의 원어를 보면, ‘힘’은 ל (ḥayil)이고, ‘능’은 (kōaḥ)이다. 이것을 위에서 언급한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ל (ḥayil): 1. faculty, power (the capacity to effect or produce something) (능력, 영향력, 세력 또는 생산할 수 있는 힘[生産力]); 2. wealth, property (부[富], 재력[財力], 재산).3
(kōaḥ) (124회 사용됨): 1. strength, power (of man) (인력, 체력); 2. power, force (무력, 완력); 3. power, ability (능력, 수완).4
이것을 정리해서 말하면, ל (ḥayil)과 (kōaḥ)는 둘 다 ‘힘, 능력’을 뜻하는 명사들이지만, ל (ḥayil)은 주로 ‘영향력, 세력, 재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kōaḥ)는 주로 ‘체력, 무력, 수완’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스가랴 4:6의 본문에 대입하여 읽으면 다음과 같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이 땅의 세력이나 재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인간의 체력이나 무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 정도의 간략하고도 명확한 해석을 얻기 위하여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책꽂이에 꽂혀 있는 히브리어 사전을 뽑아 펴서 두 개의 단어를 찾아보는 일뿐이다. 대단히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성경 원어에 대하여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 그러지 말기를 당부한다. 과감하게 원어 성경을 펴고, 원어 사전들을 펼치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단어들을 찾아보라. 그러면 여러분의 설교에는 물이 오르고 힘이 배일 것이다.
(3) 마태목음 9:17의 “새(νέος, neos) 포도주”와 “새(καινός, kainos) 부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여기에 언급된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둘 다 “새(new)” 것을 가리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신약 원전에서는 이것이 두 개의 다른 형용사로 되어 있다. “새 포도주“는 οἶνος νέος (oinos neos)이고, ”새 부대“는 ἀσκοὶ καινοί (askoi kainoi)이다. 다시 말해서, ‘새’(new)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νέος (neos)이고, 다른 하나는 καινοί (kainoi, καινός [kainos]의 복수형)이다. 그렇다면 ‘새’ 것을 뜻하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제는 신약 헬라어 사전을 펴볼 필요가 생겼다. 헬라어 사전은 여러 종류가 나와 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사전은 발터 바우어(Walter Bauer)가 편찬한 신약과 초기 기독교 문서의 헬라어–영어 사전(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이다. 이것은 한국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어서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사전에서 위의 두 단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νέος (neos): 1. new, fresh (새로운, 신선한); 2. young (젊은, 어린).5
καινός (kainos): 1. new in the sense unused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새로운 것); 2. new in the sense of something not previously present, unknown, strange, remarkable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미지의, 이상한, 눈에 띄는 새것).6
이것을 종합하면, νέος (neos)는 단지 시간적으로 새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고, καινός (kainos)는 시간과 관계없이 질적으로 새롭고 더 좋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최근에 양조(釀造)된 포도주를 가리키고, “새 부대”는 최고로 튼튼한, 아직 사용한 적이 없는 부대를 가리킨다. 본문 주석 설교가 아닌 표제 설교를 하는 경우에라도 이 정도의 사전적인 뜻풀이는 해줘야 내용이 있는 설교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1:6~7의 “다른(ἕτερος, heteros) 복음”과 “다른(ἄλλος, allos) 복음”
몹시 화가 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른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6, 7). 이 본문의 우리말 번역에는 “다른 복음”이라는 구절이 두 번 언급되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형용사로 되어 있다.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할 때의 ‘다른’은 헬라어로 ἕτερος (heteros)이고,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할 때의 ‘다른’은 헬라어로 ἄλλος (allos)이다. 그렇다면 이 두 헬라어 형용사는 어떻게 다른가? 다시 사전을 찾아보자.
ἕτερος (heteros): 1. other, another (다른, 또 다른); 2. different, to indicate a difference in kind (종류가 다른, 이질적인).7
ἄλλος (allos): 1. other, another (다른); 2. different in kind (종류가 다른).8
이와 같이 이 두 단어는 일반적으로 서로 엇바꿔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의미를 가진 동의어가 되었지만 그 용례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근본적인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근본적인 차이란, ἕτερος (heteros)는 종류가 전혀 다른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고, ἄλλος (allos)는 종류는 같지만 개체가 다를 때 쓰는 말이다. 이러한 차이를 위의 성경 본문에 반영하여 다시 읽으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른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질적으로 다른 복음 즉 변질된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없노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외의 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의 유일성(唯一性)과 그 성격의 고유함을 강조하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같은 변질된 복음을 강력히 경계하고 있다. 복음은 순수해야 하고 그런 복음은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밖에도 이런 관점으로 본문을 연구하고 해석해야 할 경우가 허다하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 다 제시할 수는 없으므로 설교자 자신이 친히 연구해 보기 바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본문들은 설교자들이 스스로 연구해 볼 만한 것들이다.
(1) 요한복음 21:15~18의 ‘사랑하다’(ἀγαπάω, agapaō)와 ‘사랑하다’(φιλέω, phileō)의 차이.
(2) 사도행전 9:7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과 22:9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의 비교.
행 9:7 “hearing the voice” (ἀκούοντες μὲν τής φωνής, akouontes men tēs phōnēs)
[ἀκούω + Genitive (2격) =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소리만 듣다]
행 22:9 “but did not hear the voice” (τὴν δὲ φωνὴν οὐκ ἤκουσαν, tēn de phōnēn
ouk ēkousan) [ἀκούω + Accusative (4격) = 뜻을 이해하면서 듣다]
(3) 데살로니가전서 2:13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παραλαμβάνω, paralambanō) 때에”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δέχομαι, dechomai)이니”의 차이(참고 행 17:11 [“말씀을 받고”], δέχομαι, dechomai).
παραλαμβάνω (paralambanō)--받다: 전달 받다, 접(接)하게 되다, 접근하다.
δέχομαι (dechomai)--받다: 내용을 받아들이다, 옳게 여기다, 믿게 되다.
8. 주요 성경 원어 사전들
성경 원어 사전에서 설교를 위해 상당한 유익을 얻으려면 적어도 위에서 인용한 사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설교에 이용할 수 있는 통찰이나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려면 단어장 수준을 능가하는 전문적인 사전을 이용해야 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원어 사전들 중에서 히브리어 사전 하나와 헬라어 사전 하나를 구입하여 설교 준비에 이용하는 이들은 이 일에 투자하는 재정과 노력 이상의 큰 유익을 반드시 얻게 될 것이다.
(1)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translated by Samuel P. Tregelle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49).
(2) Francis Brown, S. R. Driver, and Charles A. Briggs, editors, The New Brown-Driver-Briggs-Gesenius Hebrew and English Lexicon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79).
(3)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editors,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eiden: E. J. Brill, 1958).
(4) Walter Bauer,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editors,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미주(尾註)
1.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editors,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eiden: E. J. Brill, 1958), 22.
2. Ibid., 489.
3. Ibid., 295.
4. Ibid., 430.
5. Walter Bauer,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editors,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536.
6. Ibid., 394.
7. Ibid., 315.
8. Ibid., 39~40.
9. 성경(백과)사전을 활용하라
설교의 목적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성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북돋우는 것이므로, 설교의 성패는 그것의 내용과 전달 방법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앞에서 우리는 설교의 내용을 알차게 준비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그 모든 것들에 더하여 성경사전을 잘 활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설교자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대단히 유용한 도구는 아마도 성경사전 또는 성경백과사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전들에는 성경에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들과 주요 개념들이 모두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백과)사전은 성경의 내용에 대한 심오한 지식과 정리된 정보가 가지런히 진열된 보고(寶庫)이다. 목회자들이 가장 친숙하게 대하고 가장 빈번하게 만나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백과)사전이다. 설교자가 성경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세부적인 지식을 풍부하게 하려면 성경(백과)사전을 보아야 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상과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면 그것을 읽어야 한다. 좋은 성경사전에는 실로 탐스러운 보석들과 진주들이 가득 담겨 있다.
10. 설교에 성경사전을 이용하는 방법
가령, 출애굽기 30:34~38을 본문으로 하여 “분향(焚香)과 기도(祈禱)”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자. 분향에 사용된 향의 제조법을 자세히 연구하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향을 사르는 것은 언제나 기도를 드리는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에 따르면,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사르던 향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고급 향료 즉 특별한 재료들로써 만들어졌다: (1) 소합향(蘇合香), (2) 나감향(螺감香), (3) 풍자향(楓子香), (4) 유향(乳香), (5) 소금.
요한계시록 5:8과 8:3에 비춰보면 성소 또는 성전에서 피워 올린 향은 분명히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에 포함된 향료들은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요소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향을 제조하는 데 쓰인 다섯 가지의 재료들에 대하여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는 이 향료들의 목록을 들고 성경사전들을 뒤져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온 성경(백과)사전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 몇 가지를 택하여 거기에 이 향료들에 관하여 설명된 것들을 종합하고 간추리면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소합향(stacte)
생산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출처: 고무 수지(樹脂) 특성: 쓴맛
(2) 나감향(onycha)
생산지: 홍해, 지중해 출처: 조개류, 연체동물 특성: 끈적끈적함
(3) 풍자향(galbanum)
생산지: 페르시아, 인도 출처: 회향(茴香)(당근과) 특성: 쏘는 맛
(4) 유향(frankincense)
생산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출처: 보스웰리아속(屬) 특성: 단맛, 우유 맛
(5) 소금(salt)
생산지: 홍해, 지중해 출처: 바닷물, 돌소금 특성: 짠맛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성경사전에서 파악한 설교자는 이제 이것을 설교에 적용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도를 상징하는 향의 구성요소들이므로 이것들이 기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 향료들이 가진 특성들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성격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합향의 쓴맛은 우리의 기도에 비통함 즉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쓰디쓴 통회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을 암시하고, 나감향의 끈적끈적한 성질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야 할 끈기와 열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풍자향의 쏘는 맛은 우리의 기도가 지녀야 할 구체성과 면밀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유향의 단맛은 우리의 기도에 감사와 찬양이 꼭 포함되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향료들 위에 뿌린 소금의 짠맛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도모하는 중보의 간구가 있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도가 우리의 개인과 공동체를 죄의 부패케 하는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참고 레 2:13; 막 9:49, 50; 골 4:6). 이처럼 향료들이 기도의 내용과 역할에 대하여 암시하는 바는 매우 실제적이요 교훈적이다.
이밖에도 이 재료들의 생산지와 출처가 암시하는 것도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향료들의 다양한 생산지들만큼이나 많은 지역, 즉 세계의 도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향료들의 여러 출처들만큼이나 많은 대상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기도에 대하여 설교하면 매우 풍부한 내용과 흥미 있는 접근법으로 인하여 회중은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감명과 신선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적절한 예화가 곁들여야 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감동적인 설교에는 언제나 두 개의 “I” 즉 새로운 Information과 함께 적합한 Illustration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관유(灌油) 제조법과 사용법(출 30:22~33)을 연구하면 또 하나의 탁월한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관유를 만드는 데 사용된 고급 향품들은 다음과 같다: (1) 유질(流質) 몰약(沒藥) 500세겔, (2) 육계(肉桂) 250세겔, (3) 창포(菖蒲) 250세겔, (4) 계피(桂皮) 500세겔, (5) 감람(橄欖) 기름 1힌(hin).
이 향품들을 성경사전에서 하나씩 찾아보면 참으로 재미있고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인 “거룩한 관유”(출 30:25, 31)를 제조하는 데 이것들의 특성이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각자가 한번 연구해 보기 바란다. 설교 제목은 “관유(灌油)와 성령(聖靈)” 또는 “관유로 상징된 성령의 역사”라 하면 좋을 것이다.1
11. 성경사전의 또 다른 가치
성경(백과)사전에는 단어 또는 용어를 풀이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유용한 정보들이 적재(積載)되어 있다. 어떤 사전에는 많은 고고학적 발견들과 지리적 참고사항들이 사진과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고, 다른 사전에는 잘 정리된 도표나 일람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전에는 성경의 각 책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그 책의 개요와 배경 그리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설명까지 첨가되어 있으므로, 좋은 성경사전 한두 질(帙)만 가지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된다.
예컨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 관하여 알고 싶거나 설교하기를 원할 경우, 성경사전에서 “동물”(Animals 또는 Fauna)과 “식물”(Plants 또는 Flora)이라는 표제어를 찾으면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을 한 데 모아서 종류별 또는 알파벳순으로 자세히 설명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도 우리가 설교에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 무궁무진하게 있다.
어떤 성경사전에는 한 표제어에 대하여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학술적인 논문을 게재한 경우도 있다. 한 예를 들면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에 실린 “예루살렘”(Jerusalem)이라는 표제어를 보면 자그마치 2칼럼으로 된 면으로 35페이지를 채우고 있다.2 여기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모든 것들이 지극히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 모든 내용이 설교에 이용될 수는 없겠지만 설교자가 성경을 이해하는 폭을 크게 넓혀줄 것이다. 아무튼 성경사전의 가치와 그것이 설교자들에게 주는 유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설교자들이 성경사전과 친숙하면 할수록 거기서 얻는 유익은 기하급수로 커질 것이다.
12. 대표적인 성경사전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종류의 성경사전 또는 성경백과사전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 비교적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것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Geoffrey W. Bromiley, ed.,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4 vol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2). 이것은 가장 널리 보급되고 가장 권위 있는 성경백과사전들 중의 하나이며, 많은 사진들과 약간의 지도들을 곁들여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2) The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3 vol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0). 이것은 이름 그대로 삽화와 사진과 지도가 많이 첨가된 성경사전이다. 이 사전의 내용은 위의 사전보다 덜 상세하지만, 표제어에 대하여 간명한 지식만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더 편리하게 이용될 것이다.
(3) David Noel Freedman, ed., The Anchor Bible Dictionary, 6 vols. (New York: Doubleday, 1992). 이것은 영어로 출판된 성경사전 및 성경백과사전 중에서 가장 근래에 나왔고 가장 방대한 규모로 되어 있다. 이 사전에는 그림이나 사진은 없고 약간의 지도와 도표만이 곁들여 있어서 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지만 내용면에 있어서는 가장 충실한 연구와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
(4) Merrill C. Tenney, ed., 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5 vol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5). 이 백과사전은 책명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림(사진, 지도, 삽화 등)이 많이 들어 있는 사전이며, 내용도 매우 훌륭하다.
(5) George Arthur Buttrick, ed.,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5 vols. (Nashville, TN: Abingdon Press, 1962). 이것은 출판된 지 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많이 이용되는 사전이며, 출판되던 당시에는 최고의 성경사전이었다.
(6) Allen Myers, revision editor, The Eerdmans Bible Dictionar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7).
(7) David Noel Freedman, ed.,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0). 이것은 최근에 나온 1,425페이지로 된 단행본이며, 단행본이기 때문에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
(8) Siegfried H. Horn, Seventh-day Adventist Bible Dictionary, SDA Bible Commentary Reference Series, vol. 8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60, 1979). 단행본(1,229페이지) 성경사전으로서는 매우 충실한 사전이며, 많은 사진들이 곁들여 있고, 재림교회 학자가 만든 것이라 재림교인들이 이용하기에 매우 편하고 편리하다.
(9) 정인찬 편, 성서대백과사전, 전8권 (서울: 기독지혜사, 1979~1981).
(10) 민영진 편, 성서백과대사전, 전12권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79~1982).
위의 두 백과사전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된 성경사전으로서 그 용도와 특징도 거의 같으며, 당시까지 영어로 출판된 사전들에서 좋은 내용들을 많이 활용하였으므로 매우 훌륭한 사전들이라 할 수 있다.
(11) 도서출판 청지기 편집부 편, 청지기 성경사전 (서울: 도서출판 청지기, 1995). 한국에서 나온 단행본 성경사전으로서는 매우 잘된 것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부 표제어에 관한 설명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고 비평적인 견해를 채택한 것이다.
이상에 소개된 성경사전들 중에서 적어도 두세 잘(帙)을 마련하여 찾고자 하는 표제어들에 관하여 연구하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배우게 될 것이고, 따라서 설교에 필요한 내용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설교는 마치 요리사가 시장에서 사온 여러 가지 채소들을 잘 씻고 다듬어서 적당한 분량과 적절한 크기로 자른 후에 그것들을 냄비에 넣고 끓여서 식탁에 올려놓는 요리와 같다. 그 요리에는 충분한 영양분 즉 다양한 요소들과 칼로리가 들어 있어야 하고, 또한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요리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지 사람들이 그것을 먹어야 영양분을 얻지, 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설교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요리처럼 되게 하려면 재료(정보)도 좋아야 하고 요리솜씨(기술)도 좋아야 한다. 설교의 내용이 부실하여 회중이 듣고 난 후에 공허한 느낌이 들게 한다든지, 제목과 목소리는 거창한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 설교자는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방향과 방법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설교를 알차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사전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신속한 효과를 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목회자가 잠시라도 짬이 있는 날에는 성경사전을 펴서 눈 가는 대로 읽어보라. 그리고 새로 깨달은 것이 있거든 노트하고 정리하여 설교에 이용하라. 그리하면 그대의 설교는 머지않아 성도들이 먹기를 탐하는 맛있고 영양가 높은 요리가 될 것이다. 진실로 성경(백과)사전은 영양가가 높은 고급 식료품이 가득히 진열된 식료품 백화점과 같다. 설교를 위한 자료 조달에 어려움을 느끼는 목회자들이여, 어서 속히 성경(백과)사전으로 달려가라!
미주(尾註)
1. 남대극, 오실 자의 표상: 구약의 그리스도 (서울: 시조사, 1989), 205~209를 참고하라.
2.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2:998~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