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와 더불어 쉬어가던 한화의 하위타선을 지뢰밭으로 재편한 하주석의 호쾌한 스윙
'저 친구와 싸우면 이상하게 안 돼.'
'저 팀만 만났다 하면 이상하게 일이 꼬여.'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고향 깡촌 마을에 대처에 나가 태권도를 배워온 청년이 있었다. 오래 전에 독일에 진출해 태권도장을 열고 지금까지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이따금씩 듣는다. 당시 그 청년은 태권도 고단자에다 체격도 건장했고 외모도 준수해서 어런 내가 보기에도 정말 멋진 청년이었다. 인근 부락들은 물론이고 몇 개의 면에서도 그와 대적하려는 청년이 감히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키도 작고 체격 역시 그리 크지도 않았지만 꽤 다부져 보이던 아랫집에 사는 청년이 해병대를 제대하고 마을로 돌아왔는데 이 둘이서 어느 날 정자나무 아래서 제대로 싸움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해병대 출신 청년이 흠씬 두들겨맞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는데 뚜껑이 열리고 보니 달랐다. 한 동네에서 같이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싸움만 했다 하면 왜소한 청년에게 졌던 기억이 남아 기에 눌렸던 탓인지 태권도 청년이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수세에 몰리면서 이내 백기를 들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싸움을 말린 어르신들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겄슈. 당최 저 녀석하고만 싸우면 이상하게 안 돼유."
[징크스] 혹은 [저주]
징크스란 말을 애초부터 믿지 않는다.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확률'에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지만 징크스에 얽힌 일련의 사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무형의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스스로를 옭아매서 일어나는 어리석은 현상쯤으로 이해할 뿐이다. 저주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 존재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카고 컵스를 오랜 세월 동안 옭아매오고 있는 '염소의 저주' 역시 몇 차례의 반복되던 불운에 그런 이름을 가져다 붙이게 됐고 시카고 선수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그 말에 말려들어 매몰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밤비노의 저주' 속에 오랜 세월 우승 문턱에서 내내 좌절을 겪었던 보스턴 레드삭스 역시 마찬가지 신세였지만 그래도 거의 한 세기 만에 그 저주 아닌 저주를 풀 수 있었다. 보스턴이 지겹게 따라다니던 밤비노의 저주를 풀 수 있었던 요인으로 페드로 마르티네즈, 매니 라미레즈를 비롯한 걸출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낭만적인 악동 죠니 데이먼의 활달함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켜보기에 그가 팀에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모습은 실로 대단해 보였으니까.
[하주석]
어제 경기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초반부터 우규민의 공략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방망이 중심에 잘 맞히면서 좋은 타구들을 많이 만들어내곤 했지만 이상하게 수비수들 정면으로 가는 타구가 많이 나왔다. '엘지만 만나면 꼬이는 현상이 재현되는 걸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우려는 우리 선수들이 행여라도 존재하지도 않는 '징크스'란 괴물에 매몰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2016년의 한화 이글스에겐 엘지 트윈스야말로 기나긴 악몽의 시작을 안겨 준 팀이었지만 개막 무렵과 달리 지금은 지독했던 부조화에서 벗어나 팀이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보았기에 우리 선수들이 평상심만 유지해 준다면 무난히 이길 것이란 판단이 들었으므로 나의 그런 걱정들이 제발 기우이기만을 바랐다. 징크스란 건 분명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선수들이 그런 것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순간 아쉽게도 이 괴물은 활성화된다. 찰나의 순간을 다투는 타격과 수비에서는 더욱 그렇다. 불필요한 잡념들이 한창 집중하고 있는 선수들의 뇌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때 꼬이는 플레이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플레이는 존재하지 않는 징크스란 허깨비를 다중들에게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한화 이글스에는 하주석이라는 강한 선수가 있었다. 기질이 아주 강해 보이는 이 선수가 선제 홈런을 날리기 이전의 타석에서 강한 스윙으로 일관하다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래, 잘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결국 하주석은 그대로 이닝이 끝날 뻔한 투아웃 상황에서 상대에게 멋진 선빵을 날리듯 벼락같은 홈런을 터뜨렸다.
그리고 더욱 감탄했던 것은 그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동점을 허용하고 역전의 위기까지 몰렸던 한화이글스에게는 연장 10회말 선두타자로 나온 하주석의 진루가 무척이나 절실한 순간이었다. 하주석이 나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게임은 끝이라는 직감이 들어 나 역시 어느 때보다 그의 출루가 간절하던 때이기도 했다. 투스트라이크에 먼저 몰린 하주석은 투수 쪽을 노려보면서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다짐하고 암시하는 하주석만의 루틴이었으리라.
비슷하면 걷어내기라도 해야 된다. 요행수를 바라다 루킹삼진을 당하는 모습이 가장 싫다. 하주석이 볼을 잘 골라 풀카운트. 소극적인 타자들 같았으면 볼넷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컨택 위주의 스윙을 했을 법한 상황에서 이 대찬 선수의 방방이는 실로 힘차게 돌아갔다. 코스는 평범한 2루 방면 땅볼로 보였지만 하주석의 기백이 실린 강한 타구는 그라운드에 강하게 부딪히면서 상당한 운동에너지를 빼앗겼음에도 다이빙 캐치를 시도한 엘지 트윈스의 2루수 글러브를 피해 외야로 힘차게 굴러갔다. 그리고 포수 리드가 뛰어났던 영웅 차일목이 안타를 만들어 그를 2루로 보냈고 우리의 전사 정근우가 홈으로 불러들여 박진감 넘치던 용호상박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려하던 '징크스'의 현신을 대단한 기질의 용감한 하주석이 단번에 눌러버린 것이다. 하주석을 보고 징크스에 관해 질문하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징크스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송은범, 차일목, 권혁, 송창식, 정근우, 이용규를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정말 멋졌다. 그리고 블론세이브 후에도 계속된 1사 1,2루 위기에서 좌절감이 엄습했을 법한데도 흔들림 없이 매 순간 침착하게 집중하면서 추가 실점을 막아 상대에게 리드를 허용하지 않은 정우람 역시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노장이 된 나의 영웅들이 장차 은퇴한 뒤에도 이 젊은이는 나의 노년을 오래도록 야구에 붙잡아둘 새로운 영웅이 될 것 같다. 원년부터 야구라는 스포츠에 결코 적지 않은 시간들을 할애하면서 '이래도 되는 걸까?'하는 의문에 아주 가끔씩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에 이내 당당해진다. 오늘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메이저리그를 보더라도 젊은 시절부터 가졌던 열정의 관성은 100세가 넘어도 지속되면서 경기장을 찾는다.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은 그의 시 '청춘'에서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한화 이글스 파이팅!!!
첫댓글 어제의 승리로 기분좋은 주말 아침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의 노년을 오래도록 야구에 붙잡아둘 새로운 영웅들~~~~~~~
언제나 항상 같이 하길요~~~~~~
헛..맞춤법 몇 곳을 손보던 중에 어느새 댓글을 다셨네요.
어제 승리의 여운이 채 가지지 않은 대단히 상쾌한 주말의 아침입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청죽님 글에 잠시 울다가도 되지요?ㅠㅠ
내가 이글스 팬이라는게 이렇게도 좋을수가 없네요.
좋은글 매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연승을 향하여 아자!!!
나 어릴적 윗집에 살던 한살 어린 남자애...할머니들끼리 이미 사돈을 맺은 남자애였다..어릴때부터 그애랑만 뽀뽀하구ㅋ 소꿉놀이땐 늘 부부였던..그애는 태권도 천재였다.그러나 국가대표 탈락을 경험하고는 그대로 추락해 지금까지도 망나니로 산다...
어제의 주석인 우리팀에 보배였습니다.수비좋고 어쨌든 그 쏠로포와 마지막타석 안타가 팀을구했으니까요~~
은범이의 확실한 선발피칭, 일목이와 궁합 죽였고..뒤이은 불펜은 뭐 철벽...정근우선수의 끝내기...그리고 장민석 선수의 살인수비는 잊지 못할겁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이 글 속에서 헤어 나올수가 없네요...
아....나중에 청죽님 글만 모아서 따로 책을 내셔도 좋을듯 싶습니다....
어제 경기의 하주석 다치지 말고 잘 커주지글 기원 합니다...
너무도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번세번 읽어도 기분 좋은글입니다
좋은글 잘읽고 추천합니다
대단한 글입니다. 잘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