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고문치사사건[ 朴鍾哲拷問致死事件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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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7.20. 13:44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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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고문치사사건
[ 朴鍾哲拷問致死事件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
1986년부터 시작된 직선제 개헌 요구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학생·노동자 등은 이에 동조하여 반외세·반독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는데,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박종철(朴鍾哲)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초 경찰의 강민창(姜旼昌)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하며 사망 원인을 단순 쇼크사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부검의(剖檢醫)의 증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사건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은 정부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으며,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9천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등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국은 고문정권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이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을 통하여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부 장관 등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19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 |
발생시기 | 주요사건 |
1986년 4월 1일 | 서울대학교 재학생 박종철 군이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됨. |
1986년 7월 15일 | 박종철 군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 |
1987년 1월 13일 |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 활동을 이어가던 박종철 군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됨. |
1987년 1월 14일 | '대학문화연구회'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고문을 당하던 중 조사실에서 사망.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박종철 군 사망 관련 2단 기사를 내보냄. |
1987년 1월 15일 |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박종철군은 수사 중 돌연 사망했다고 공식발표. |
1987년 1월 16일 | 사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중앙대병원 전문의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 |
1987년 1월 17일 | 박종철 군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과 전기고문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는 부검 결과를 발표. |
1987년 1월 19일 |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됨. 고문에 대한 시민 항의가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과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전격 해임. |
1987년 5월 18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부의 사건 축소조작을 폭로.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와 관련한 규탄대회와 박종철 군 추모집회가 개헌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