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파로호 / 권수진
할머니 마음속에는 파로호가 묻혀 있다
옻칠 벗겨진 장롱문을 활짝 열면
잘 정리 정돈된 이불처럼
유월의 못다 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포탄이 빗발치는 포화 속으로
달콤한 신혼의 나날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오마! 굳게 약속했던 할아버지
그 약속 지키지 못한 채
무표정한 얼굴의 영정사진만
밤하늘 별이 되어 호숫가에 일렁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인이 뒤바뀌던 용문산 전투
할머니 고운 손 뿌리치며
살아서 돌아오마! 그 맹세 어디 가고
참호 속에 가라앉은 꽃다운 청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보자기 속 유품들만
장롱 안에 고이 잠들어 있다
옷걸이에 걸린 전투복이 허공에 흔들릴 때마다
소총을 꽉 움켜쥔 굵은 손가락
철모를 눌러 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동족상잔의 비극이 요동치는
그날의 함성 생생하게 귓가에 맴도는데
영글지 못한 할아버지 꽃다운 청춘을 가슴에 묻고
거센 풍랑은 다시 잠잠해졌지만
장롱문을 열고 이부자리 펼칠 때마다
한평생 다 쓰고도 모자랄 할머니 이야기가
뜬 눈으로 밤새 출렁이고 있다
카페 게시글
신춘문예 등 문학상 수상작
할머니와 파로호 / 권수진(제28회 보혼콘텐츠 공모 대상)
김수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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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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