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1-51 영사詠史 5 왕망王莽
매복방맹우한쇠梅福逄萌遇漢衰 매복梅福·방맹逄萌이 한나라 쇠망할 때 만나서
괘관손산향하지掛冠損產向何之 갓 걸고 재산 버리고서 어디로 향했던가?
삼강이절종난구三綱已絕終難救 삼강三綱이 이미 끊겼으니 끝내 구하기 어려웁고
구법장휴경막위九法將隳竟莫爲 구법九法이 장차 떨어지니 끝내 시행 못하였네.
►매복梅福·방맹逄朋
한나라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왕망王莽의 난 때 몸을 숨겨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구법九法 천하를 다스리는 9종의 大法.
1․ 오행五行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2. 오사五事 모貌·언言·사思·시視·청聽
3. 팔정八政 식食·화貨・사祀·사공司空・사도司徒・사구司寇・밀蜜·사師
4. 오기五紀 세歲·월月·일日·성신星辰·력수曆數
5. 황극皇極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標準이 될 만한 지극至極히 올바른 法.
6. 삼덕三德 정직正直·강극剛克·유극柔克)
7. 계의稽疑 우雨•제霽•몽蒙•역驛•극克)•정貞•회悔
8. 서징庶徵 우雨•양暘•오燠•한寒•풍風•시時
9. 오복五福 수壽·복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및
6극六極 흉단절凶短折·질疾·우憂 빈貧·악惡·약弱
연작처당상여락燕雀處堂相與樂 제비들은 당堂 위에서 서로 함께 즐기지만
기린도망숙능기麒麟跳網孰能覊 기린이 그물을 뛰어나가니 누가 굴레를 씌우리.
견기이작유군자見機而作惟君子 일의 기틀 보고 하는 것이 오직 군자이니
위란지방불입의危亂之邦不入宜 위태롭고 어지러운 나라 안 들어감이 당면함일세.
고금진위혼난분古今真偽混難分 고금古今에 참과 거짓 분변하기 어렵지만
성자선암질피군誠者先諳疾避羣 성자誠者는 먼저 알고 빨리 무리들을 피하였네.
흡사일중간흑백恰似日中看黑白 마치 대낮에 검고 흰 것 보는 것 같고
유여정실별유훈猶如淨室別蕕薰 깨끗한 방 속에서 유蕕·훈薰의 구별 같구나.
►유蕕·훈薰 유蕕는 나쁜 냄새나는 풀이고 훈薰은 향기로운 냄새나는 풀이다.
청언관행인언수聽言觀行人焉瘦 말 듣고 행실 보면 사람 어찌 속이리
응물유중과막문應物由中過莫文 물物을 응할 마음에서 나오니 과실을 꾸밀 수 없네.
가석한가다소보可惜漢家多少輔 아깝도다 한나라의 저 많은 정승들이
순료어망부지훈醇醪於莽不知醺 왕망에게 도취되어 깨어날 줄 몰랐네.
룡하유랑서하정龍何遊浪瑞何呈 용이 어찌 물에 놀아 상서祥瑞가 어이 보였던가?
진타요갱졸막명盡墮妖坑卒莫明 모두 요망한 구덩이에 빠져 끝내 밝히지 못했다네.
와정단서미국맥窪井丹書迷國脈 깊은 우물에 단서丹書 나와 나라 계통 흐려
만천백치현여정蠻天白雉眩輿情 오랑캐의 흰 꿩은 여론輿論을 현혹했네.
►룡하유랑龍何遊浪 용이 어찌 물에 놀아
왕망 때에 龍이 물에 놀았다고 지방관이 보고하였다.
►단서丹書
임금이 쇳조각에 지워지지 않게 주서朱書하여 공신에게 주어
대대로 죄를 면 하게 하던 증명서를 말한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與功臣剖符作誓 丹書鐵契 藏之宗廟” 라 하였다.
나지한업경당세那知漢業傾當世 어찌 알랴? 한漢의 왕업이 그때에 다하여서
수사주공소후생遂使周公笑後生 주공周公으로 후세 사람을 비웃게 할 줄이야.
찬시자위개약차篡弒自爲皆若此 찬탈하고 시역하기를 다 그같이 하였으니
불감독사분수병不堪讀史憤愁并 사서 읽다 분노와 수심 함께 일어남을 견딜 수 없네.
►백치白雉 흰 꿩.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쳤다.
►주공周公
왕망王莽은 <주례周禮>라는 책에 있는 대로 정치를 해보려다가 세상만 시끄럽게 하고
자신도 패망했는데 그 <주례>는 周公이 저술한 것이라고 하나 실은 위작僞作이었다고 한다.
●왕망王莽(BC45-AD23)
字 거군巨君. 山東 출생.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BC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8년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大司馬가 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하였다.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는 평제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척세력을 모두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 왕우王宇도 독살하였다.
AD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嬰(宣帝의 현손)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되는 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AD8년 유영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하였다.
황제 왕망은 유교를 중시하였고 주나라 시대의 정책을 폈다.
周나라 시대의 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賖貸制度를 두기도 하였고 노비 매매를 금지시켰다.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 교전인 <周禮>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왕망의 이러한 정책은 후세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사회혼란을 증대시켰다.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18년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南陽의 호족 유수劉秀(後漢의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長安의 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한 왕조의 혈통을 이은 유수(광무제)에 의해 후한이 건국되었다./두산백과
►왕망王莽 신新나라 화천貨泉(AD7-23)
화천貨泉은 문자 그대로 "재화[貨]가 샘솟는다[泉]"는 의미의 화폐로
기원전 45년부터 기원후 23년까지 생존했던 왕망王莽이
서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신新나라에서 사용한 엽전이다.
‘화천貨泉’은 기원후 14년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후한 광무제가 ‘오수전五銖錢’으로
화폐를 통합한 기원후 40년까지 통용된 화폐로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고
통용 시기가 한정되어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전圓錢의 형태로 내부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자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오수전五銖錢보다 약간 작은 지름 1촌(약 2.25㎝)이며 무게는 5수銖(5수는 약 3.19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