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왕실 최초로 세자(世子)가 아닌 세제(世弟)로서 왕위에 오른 군주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모친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이복형 경종의 재위 도중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영조는 1724년 30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게 즉위했지만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다.
2.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초상화는 1714년(숙종 40년), 영조가 20세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秦再奚)가 그린 것이다. 초상화의 오른쪽 일부가 불에 탔는데, 표제가 오른쪽에 있었다면 신원을 밝힐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왼쪽에 있어 매우 운좋게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의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 등이 원본을 보면서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전신이 아니고 상반신만 있는 이유는 이 어진의 원본이 진전(眞殿)에 걸렸던 어진이 아니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에 걸렸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즉 원래 상반신만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라 상반신만 있는 것이다. 이 어진의 원본인 육상궁에 있던 영조의 초상화는 영조의 다른 어진들과 함께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됐는데 이 이모본만 유일하게 전혀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932호이다.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 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약간의 사각턱 등 다른 영조 초상화나 연잉군 초상화와 이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3. 가계
3.1. 본가(전주 이씨)
고조부: 인조(仁祖) 이종(李倧)
고조모: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증조부: 효종(孝宗) 이호(李淏)
증조모: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조부: 현종(顯宗) 이원(李棩)
조모: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아버지: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
어머니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년 11월 3일 - 1757년 5월 13일)
생모: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년 11월 6일 - 1718년 3월 9일)
3.2. 배우자/자녀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 1757년)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제1후궁: 온희정빈 이씨(溫僖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제1왕녀: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제1왕자: 진종 소황제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며느리 : 효순소황후 조씨(孝純昭皇后 趙氏, 1716년 1월 8일 - 1751년 12월 30일)
제2왕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제2후궁: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제3왕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제4왕녀: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제5왕녀: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제6왕녀: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제7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제2왕자: 장조 의황제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며느리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손자 : 의소태자 정(懿昭太子 琔,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9월 27일 - 1751년 6월 6일) - 조졸
손자 : 정조 선황제 산(正祖 祘,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손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년 7월 14일 - 1821년 6월 9일) - 광은위(光殷尉) 김기성(金基性)에게 하가
손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년 윤9월 - 1802년 7월 20일) - 홍은위(弘殷尉) 정재화(鄭在化)에게 하가
며느리 : 숙빈 임씨(肅嬪 林氏, 출생 미상 - 1773년)
손자 : 충정공 은언군 인(忠貞公 恩彦君 䄄, 1754년 - 1801년 7월 9일)
손자 : 소민공 은신군 진(昭愍公 恩信君 禛, 1755년 2월 21일 - 1771년 5월 13일) - 조졸
며느리 : 경빈 박씨(景嬪 朴氏, 빙애(彬愛), 출생 미상 - 1761년 1월)
손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년 - 1835년 9월 1일) - 당은위(塘殷尉)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손자 : 효민공 은전군 찬(孝愍公 恩全君 禶, 1759년 10월 4일 - 1778년 10월 16일)
제9왕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제3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제8왕녀: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제10왕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제4후궁: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 미상 - 1776년 8월 10일)
제11왕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제12왕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제5후궁: 상궁 이씨(尙宮 李氏, 생몰년도 미상)
4. 여담
한국사에 유일무이한 공식 왕세제(王世弟)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형제승계 사례 자체는 많았지만, 그 형제들은 보통 선대왕이 후사 없이 사망한 이후 정치적 결정에 의해 즉위하거나 선대왕이 임종하면서 직접 유언으로 왕위를 물려주거나 했지 태제/세제를 공식적으로 임명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은 고대부터 부자세습이 원칙이라 아무리 왕에게 후사가 없더라도 혹여나 후사가 생산되는 것을 기다려야지 세제를 임명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 더 이상 아들 못 낳소" 하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례없는 세제책봉을 해야 했던 경종의 처지가 열악했다는 소리다. 영조 이전 사례로는 최충헌 묘지명에서 고려 신종을 고려 명종의 황태제였다고 기록하긴 했는데, 정사를 보면 신종은 사저에 있다가 얼떨결에 추대된거라 정식으로 황태제에서 즉위했다기보다는 최충헌 정권에서 즉위를 위해 대충 붙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례가 없는 만큼 이걸 청나라 황제에게 책봉받아야 했던 연행사들의 입장도 굉장히 난처해져서, 노년의 강희제나 다른 관료들이 "너네 임금 젊은데 웬 세제?"냐며 의문을 표했을 때 이건명이 강희제한테 둘러댄답시고 금상께서 양기가 부족하시다는 무엄한 소리를 했다가 훗날 목이 달아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봉 과정에서 조선 혈통 예부상서 김상명이 큰 도움을 줬는데, 조선 사신들이 영조 즉위 후 의주에 있는 김상명의 증조 묘소에 그의 부탁을 받아 대청광록대부조선국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지묘(大淸光祿大夫朝鮮國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之墓)이라는 묘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한 신하들이나 들은 영조의 반응은 《영조실록》에나 《승정원일기》에나 몹시 띠꺼운 태도로 남아 있는데, 대략 "ㅉㅉ 오랑캐 주제에 제 뿌리는 잊지 않았으니 기특하네여", "님 근데 절충장군 소리는 뇌피셜 아닌가염?",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냥 세워 줘라" 등의 말이 남아 있다. 《영조실록》 기사 《승정원일기》 기사 원문 《승정원일기》 기사 국역 이후 영조 때는 물론 정조 때까지도 이 가문의 사람들이 역관 등의 직책으로 조선 사신단에 자주 따라오기도 했고, 조선 측에서도 이 가문을 통해 이런저런 로비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김귀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오빠이며 당색은 노론 벽파이다. 홍봉한 탄핵에 실패한 그는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정순왕후 김씨의 6촌 오빠 김관주는 먼 훗날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순원왕후를 등에 업은 안동 김씨들과 싸우다 져 다시 함경도로 유배를 가서 죽는다.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여는 인물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많이 닮았다. 이복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서로 형제자매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다혈질이고 평소에 검약을 실천하였고 둘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학식이 수준이 높았고 장수하면서 재위가 길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전통적으론 명군으로 분류되었지만, 근래엔 선정과 실정, 애민과 억압, 명석한 두뇌와 인격적 결함이 공존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군주로 평가가 수정된 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하지 않아 직계후손이 없었다는 것 정도. 자신의 혈육이자 다음 대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사도세자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를 죽이라는 명령을 자신이 내렸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결국 사후 왕위는 자신들이 죽인 혈육의 아들들인 정조와 제임스 1세에게 돌아갔다는 점도 비슷하다. 거기에 아버지인 숙종과 헨리 8세는 자기 왕비였던 여자인 희빈 장씨와 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를 죽여버렸다. 이것도 차이점이라면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라는 것과 엘리자베스 1세는 다름아닌 이 앤 불린의 딸이라는 차이가 있다.
영조 말년은 서구에서 급격한 사회 변화가 일어나던 시대다. 다름 아닌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던 시점이 영조의 치세와 겹친다. 1733년 플라잉 셔틀이 발명되고 1769년에는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도 영조가 죽기 1년 전(1775년)에 일어났다.
영조 때의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 청나라는 옹정제의 완벽한 내치, 이를 물려받은 건륭제의 준가르 복속으로 최대 판도를 자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해서 조공국들과의 조공 무역이 본궤도에 올랐다.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치하의 안정기로 도쿄 인구는 현재 추산 100만을 넘는다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유럽도 아직 산업혁명 초입에 불과한터라 인도 동쪽까지는 본격적으로 손을 뻗지 못했지만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동쪽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영조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렸고 조공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서방의 문명을 조금씩 들여오고 있었다. 영조가 안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이나 고구마, 감자, 참마 등 이국적인 구황 작물이 조선 전역에 널리 재배됐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금주령을 내렸다.
영조 본인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영조실록》 곳곳에는 자신도 몰래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본인은 오미자차라 변명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름은 차이지만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실상은 알코올이 함유된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1770년(영조 48년)에 영의정 홍봉한을 탄핵하는 김관주의 상소에서 몇 해 전 영조가 송다(松茶)를 내오라 시켰을 때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해 왕의 체면과 건강에 해를 끼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진짜 차가 맞는데 홍봉한이 금주령 핑계로 막은 거라면 몇 년 후에 탄핵당할 일이 아니라 금주령 운운한 그 시점에서 기군망상으로 박살이 났어야 한다.
나주괘서사건 당시 역적 윤혜를 국문할 땐 윤혜가 '열성의 어휘'를 한 문서에 적어놓고 "내 아들 이름 지을때 참고하려고 했다!" 하고 발악을 하자 극도로 분노하여 거의 발광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실록 이때에 대놓고 아예 "왕이 술에 취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의외로 피휘에는 부정적이었던 모양. 자신의 이름을 즉위 후 약 40년간 발설하지 않았고, 우연히 말하게 된 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도승지가 상소를 읽을때 영조의 휘인 금(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읽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혀를 차면서 괜찮으니까 그냥 읽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후 선왕의 휘와 발음이 같다고 다른 글자까지 죄다 피휘하는 걸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록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 영조는 절제하는 왕이었다. 그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었고 식사는 아침에는 타락죽, 점심과 저녁에는 밥, 김치, 시금치, 청경채와 같은 채식 위주의 반찬과 고추장 같은 장류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식사는 물론 생일이나 명절, 잔치날에도 소식(小食)했다. 여자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 연과 여(왕실 가마)의 금박을 주석으로 교체시켰다.
치아가 약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에 "어머니는 절편과 병자를 좋아하시는데, 나는 치아가 약해 먹지를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동국문헌비고》와 《해동악장》을 말년에 편찬하고 대보단(大寶團)에 제사도 열심히 드렸다고 하며 자신의 자서전을 편찬했다.
영조가 검소하다고 여겨지는 행동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전혀 검소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위선자라는 비판마저 있다. 특히 금주령을 내렸으면서 정작 자신은 솔잎으로 만든 술인 솔잎주를 먹으면서 차를 마신다고 자기합리화를 했으며, 왕실에서 쓰는 가마에 금 도금을 금지하는 대신 당시 한반도에서 구하기 매우 힘들었던 주석 도금을 했으며, 영조가 선호하던 음식은 당시 기준으로는 사치스러운 고급 요리인 인삼,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꼬리, 고추장이었다. 이인좌의 난까지 극복한 군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재위 후반부의 행적은 위선자에 가깝다. 이 점은 비슷한 시기 '검소'를 빙자한 스페셜 건강 식단 덕에 장수한 청나라 건륭제와도 겹치는 부분. 다만 재위 후반부 당시 영조의 나이는 조선 역대 왕들의 평균 수명인 40~50살을 넘긴 나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왕이 병이 들 경우 그만큼 비상 사태이기에 검소고 뭐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 그리고 때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릴 필요는 있었다.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명군 혹은 성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과 심각한 권력욕, 실속은 없고 공허한 정책들과 그로 인해 심화된 조선의 병폐에 초점을 맞춘 부정적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봉호인 연잉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왕이기도 했는데, 조선 왕들 중 제일 장수한 것은 물론 후대인 1954년에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다른 조선 왕들의 어진들이 대부분 잿더미로 변하거나 얼굴이 타버린 상태로 구해진 경우가 태반이었던 상황에서 영조 혼자만 어진 2축을, 그것도 모두 얼굴이 100% 멀쩡한 상태로 건져냈기 때문.
개성을 방문해서 아버지 숙종이 다녀간 경덕궁 옛 터를 둘러보고 감회에 젖어 시(詩)를 짓기도 했으며 개성 만월대에서 과거시험을 열기도 했다.
영조는 83세까지 살았다. 현대 사회에서도 큰 병 없이 80대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장수 비결로 저탄수화물·저지방·채식 위주를 고집한 소식(小食)과 검소한 식단이 거론되는데 좋아하는 과일로는 밤으로 밤을 삶아 먹는 것을 좋아했으며 타락죽과 복령차, 인삼차, 삼령차, 강계다음, 이중탕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장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조실록》을 보면 당시에는 영조의 금욕적인 소식과 채식 위주 식단을 주변에서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는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영빈 이씨보다 오래 살았고 즉위 52년간 큰 병 없이 조선시대의 최장수 왕이 되었다.
싫어하는 음식은 기름지고 찬 음식이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왕으로서는 소박하게도(?) 고추장이었다. 영조가 즐긴 고추장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특별한 별미가 아닌 검소한 반찬으로 보아야 할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국에 고추가 전래된 것 자체가 임진왜란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고 그 고추를 이용해 담그는 고추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0년(숙종 46년)에 어의 이시필이 지은 책 《소문사설》로 알려져 있으며 영조 시기의 《승정원일기》 기록에서도 당시는 고추장이 궁중 요리에 도입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시절의 고추장은 흔하고 소박한 반찬이 아니라 개발된지 얼마 안 되어 제조법도 널리 알려지지 않고 종종 약재처럼 다뤄지기까지 하던 새롭고 희귀한 진미였다는 것. 반찬을 고추장에 찍어먹었으며 때론 밥과 반찬을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서 먹었다고도 한다. 또한 고추장과 함께 영조가 즐긴 것으로 유명한 밥상의 네 보물이 송이버섯, 전복, 꿩고기인데 이 중 송이버섯은 말할 것도 없고 전복이나 꿩고기 같은 경우도 결코 저렴한 식재료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귀하고 값진 식재료들이었다. 영조의 식성은 검소하고 소박하다기보다는 채식 중심으로 소식하지만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동물성 단백질 역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전복, 민어, 굴비, 조기,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꼬리 등 저지방 고단백에 맛이 좋은 귀한 재료들로 충분히 섭취하고 입맛을 잃지 않도록 자극적인 감칠맛의 고추장까지 챙기는 현대 기준으로 보면 럭셔리 웰빙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검소하다기보다는 영양학적 균형에 맞춰서 잘 먹은 것. 이 때문에 현대 한국의 웰빙 바람과 더불어 영조가 건강면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영조는 반찬으로 고추장을 즐겨 먹었으며, 아예 고추장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궁내에서 만든 것보다 민가, 특히 사헌부 지평인 조종부의 집에서 만든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조종부는 탕평파 영의정인 이천보의 비리를 문제 삼았던 인물이다. 영조는 이를 당파성의 발로라며 조종부를 괘씸히 여겼지만, 그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집 고추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말년에도 "내의원에서 만든 고추장이 사대부집에서 만든 것만 못하다"고 평했다. 근데 그 조종부라는 사람, 성씨에서 알 수 있듯 순창 조씨다. 거기에 숙종 시대 어의인 이시필이 집필한 요리책 소문사설에도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과 그 제조법을 기록했을 정도로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은 명성이 자자했다. 제조법도 일반 고추장보다 손이 한참 갔다고. 아이러니한 건 그 고추장을 처음 궁궐에 가져와 영조에게 바친 사람이 바로 아들인 사도세자였다.
또한 영조는 국수 마니아였다고 하는데 신하들한테도 권할 정도로 고추장 못지 않게 좋아했다고 한다.
영조는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조선 왕들의 유전 고질병인 종기나 당뇨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입에 달고 사는 체질이었으며 알레르기와 회충에도 시달렸고 소화불량이나 소화장애로 고생했고 말년에는 극심한 피로와 하지 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골골백세였는데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소음인적 체질인 비위허냉(脾胃虛冷) 체질이라서 산증(疝症)에 시달리며 살았다.
친모인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하려 했으나 "후궁을 중전으로 승격시키지 말라"는 부왕 숙종의 유언과 함께 국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에 성사시키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설화가 있다. 영조가 잠행을 하면서 백성들을 만나보고 있는데 한 나무꾼이 나무를 팔면서 소령릉 근처에서 베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숙빈 최씨는 후궁이므로 무덤 또한 원래는 소령원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이 나무꾼은 무식해서 단지 '주상 전하 어머니의 무덤이니 왕릉이겠지'라고 여기고 소령릉이라고 생각없이 말한 것. 영조는 "내 어머니의 무덤을 왕릉으로 불러 주다니!"라고 기뻐하며 그 나무꾼을 불러다가 소령원 수봉관(종3품)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일화는 덕흥대원군을 필두로 상당히 많은 편이라 단순 민담/야사로 읽는 게 낫다.
사람의 인생은 사주팔자에 달려 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한 영조는 자신과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뒤 농촌에서 꿀벌을 키우며 살아가는 한 노인이 어명을 받고 영조를 알현하게 되었다. 영조가 묻자 노인은 영조와 같은 해, 같은 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영조는 앞서 말한 사주팔자 이야기를 꺼내며 노인과 영조는 같은 사주인데 자신은 국왕이고 노인은 평범한 농민이라며 사주라는 게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소인에겐 자식이 8명이니 이는 전하께서 다스리는 전국 8도와 같고, 소인이 키우는 벌통이 360개이니 이는 전하께서 다스리는 360개 고을의 갯수와 같으며, 그 벌통에 사는 벌이 700만 마리이니 이는 이 나라 백성들의 수와 같습니다. 사주라는 것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영조는 노인의 대답에 감탄하며 큰 상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고려 말의 장수인 최영의 사당은 말에 탄 사람이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영조가 능행을 위해 지나가다가 비바람이 불자 영조는 최영에게 "고려도 500년이나 지속되었거늘 뭘 더 바래서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라고 호통을 쳤는데 비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도 이런 일이 벌어지자 "최영 네 놈이 현명하였다면 왜 고려가 망했겠느냐? 썩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마찬가지로 비바람이 그쳤다고 한다.왜긴 왜야 우왕때문에 망했지
여러 사대부와 대신들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불같이 화를 내며 모조리 다 처벌하고, 대신들에게 좋은 말로 할때 자수하라고 욕하며 윽박질러 신하들이 공포에 떨며 약을 먹고 좀 진정하라고 애원할 정도였다.실록,실록 이때 금주령을 범한 자들을 효시하라고 한 권극도 걸려 장형을 맞고 귀양가다가 죽는다. 나중에 너무 지나쳤다고 판단했는지 자수한 이들은 용서해주고, 또 슬며시 귀양간 사람들을 용서해준다.
이렇듯 화를 낼땐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과 가혹한 처벌을 남발하고 엉엉 울다가 나중에 진정됐을땐 또 용서해주고 하는 일이 빈번하여 영조의 강박증과 성격장애를 의심하는 글도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 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조중회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조중회가 충신 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 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 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라 하더니 연못 물에 빠져죽겠다면서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들어간 채 군사들을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여 신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당연히 감히 왕명을 어길수도 없으니 다들 어쩌지 못해 당황만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알현을 허락받은 세손도 안절부절못하며 영조를 뜯어 말리는데도 영조는 조중회의 목을 베어와야만 연못에선 나오겠다고 버티었다. 세손은 조중회의 목을 가져오라고 신하들을 다그쳤으나 그렇다고 평상시 옳은 말을 자주 하는 충신의 목을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벨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조중회를 흑산도로 위리안치하기로 하자 영조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라며 연못에서 걸어나와 당당히 입궐하였다. 그리고 이 난리를 쳐놓고는, 조중회가 흑산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 보내던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가 노망난 거 아니냐고 수군댔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노망에 대한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영조가 노년에 노망이 났다', '조중회가 영조의 화를 키웠다', '세손이 말렸다'는 내용을 실제 《영조실록》 내용과 검토해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영조 노망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1743년(영조 19년) 《영조실록》에 나오긴 한다. 노여움을 보이고, 눈물까지 흘렀으니 《영조실록》 내용도 같은 것 아닌가 싶은 이도 있겠지만.. 영조 19년은 왕이 50세가 되는 해이다. 또 설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자 또는 세손이 말려서 화를 풀은 것도 아니다. 영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중회를 용서한 것이 1748년(영조 24년)으로, 영조 나이 55세 때였다. 세손은 저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승정원일기》를 찾아보아도 연못에 뛰어든 기록은 없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증세는 더 심해졌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증상을 치매나 노망이라 하지 않고 소화기 장애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담증인 담후(痰候)라 불렀다. 기억력 장애 현상이 자신의 지병이었던 소화기 질환에서 비롯했다고 우긴 것이다. 하지만 영조가 말년에는 실제로 치매 증강과 난청 등을 겪었다고 한다. 재위 51년(1775년) 81세 때에는 영조의 치매 증상이 매우 심해졌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에는 영조의 치매 증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대로 나타난다. “영조의 담후(치매)가 덜했다 더했다 오락가락하니, 하교(下敎)는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로 한 하교의 반포는 절대 금한다.” “헛소리를 하시는 중에 내리신 하교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영조는 신하들에게 어제 본인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我國百物, 無不受害, 而唯猫無害。今予進着, 則四方效之, 猫將盡矣。此豈齊宣王易羊之意乎?
우리나라의 여러 물건 중에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으되 오직 고양이만이 무사하다. 지금 내가 이것을 입으면 사방에서 이 효과를 보려 할 것이니 고양이가 장차 씨가 마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선왕이 양을 바꾼 뜻이라 하겠는가?
영조 20년 11월 5일 승정원일기 기록
애묘가였던 아버지 숙종의 영향을 받아 고양이를 아낀 것으로 보인다. 키운 것은 확인되지 않으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면 팔의 통증 때문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신하들이 고양이 가죽을 붙이고 자라고 권했으나, 근 두 달이나 아예 대답하지 않고 다른 처방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맹자 등의 고전을 인용하며 말을 돌리고 실랑이를 벌이거나 백성들이 너도 나도 고양이 가죽을 근육통에 쓰려 할까봐 두렵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다가 마침내 '옛날부터 수라간에서 고양이가 오고 가는 걸 봐서 불쌍하다'라고 실토하는 훈훈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 실랑이가 의외로 족히 몇 년을 갔는데, 기록을 보면 근육통이 너무 심했는지 결국 중간에 한 번 시험해 보긴 한 모양.
한편 현대에는 경종과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로 '과학군주'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금주법(금주령)
급유방
균역법
노비종부법
동구릉
몽어노걸대
몽어유해
백자 달항아리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백자 청화죽문 각병
병장도설, 속병장도설
사도세자
정조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속대전
승총명록
신보수교집록
열성지장통기
영조갑자진연의궤
영조실록
경종실록
경종
경종 독살설
숙빈 최씨
영빈 이씨
인원왕후
정성왕후
정순왕후
자웅장추
준천시사열무도
증보전록통고
탕평채
탕평책
탁지정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효안전일기
삼수의 옥(목호룡의 고변)
신임옥사
이인좌의 난
임오화변
조선/왕사
편집성 성격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