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탈린그라드전투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의 #아돌프-히틀러 (위 왼쪽)와 소련의 #이오시프-스탈린 (위 오른쪽)이 맞붙은 전투예요. 전투를 벌이고 있는 소련군(아래 왼쪽 사진)과 독일군(아래 오른쪽 사진)의 모습.
위키피디아
지난 3일 중국이 2차 세계대전 승전일을 기념하는 ' #스탈린그라드전투 ' 관련 전시회를 개최했어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5년 9월 2일 미국 등 9개 연합국을 상대로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했어요. 그래서 미국은 9월 2일을 #승전기념일 로 삼고, 연합국 일원인 중국은 그 다음 날인 3일을 승전 기념일로 정했어요. 한국은 공식 항복에 앞서 일본 국왕이 방송으로 항복 의사를 밝힌 8월 15일을 #광복절 로 기념하고 있지요.
이번 전시회 주제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옛 소련)가 맞붙은 전투죠. 그런데 중국이 관련 전시를 여는 것은 현재 미국이 이념·전략적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가운데 양국이 미국에 대항해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분석되고 있어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전투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전투로 알려져 있어요.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1889~1945)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1878~1953)이 정면으로 맞선 전투이기도 해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어떻게 벌어진 걸까요?
독·소 불가침 조약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대공황 으로 세계엔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어요. 특히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인 독일은 막대한 #전쟁배상금 을 물어야 했는데, 경제 불황까지 닥치니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죠. 이런 혼란을 틈타 '게르만족의 세계 지배'를 내건 #나치즘 이 등장했고, 그 수장인 히틀러는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리고 그는 '독일 민족의 생존권'을 명분으로 또 한 번의 전쟁을 계획했어요.
#폴란드침공 을 단행하기 직전 히틀러에겐 고민이 있었어요. 폴란드를 침공하면 영국·프랑스와 전쟁을 벌여야 할 게 뻔했기 때문에 동부 전선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했죠. 그래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스탈린과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어요. 스탈린 또한 독일과 조약을 맺어 군비를 확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죠. 마침내 1939년 8월 23일, 두 나라는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 #독·소불가침조약 '을 체결했습니다. 이어 히틀러는 9월 1일 새벽 폴란드 공격을 개시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하며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어요.
전략적 요충지 '스탈린의 도시'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독일은 소련의 #군비확장 에 계속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또한 전쟁이 장기화하자 독일은 코카서스 유전 등 소련의 물자를 확보하고 싶어했죠. 자신감에 넘쳤던 독일 군부는 단기간에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 1941년 6월 22일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했어요. 9월엔 #레닌그라드 와 #모스크바 까지 진격하고 10월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며 독일군 계획대로 되는 듯했지만, 추운 겨울이 시작되며 진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되자 전쟁은 다시 시작됐어요.
독일군은 북쪽 전선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자 남쪽으로 눈을 돌렸어요. 그중 하나가 #스탈린그라드 (현재 볼고그라드)였죠.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에 있는 도시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예요. 이 도시는 상징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목표 도시가 됐어요. 독일은 1942년 8월 23일 새벽 폭격기 600대를 띄워 스탈린그라드 공습을 단행했어요. 하지만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독일군은 약 2000회에 달하는 공습으로 1000t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어요. 하늘이 폭탄으로 까맣게 뒤덮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폭격 첫 주에만 스탈린그라드 인구 총 60만명 중 4만여 명이 희생됐어요. 독일 군부는 #민간인학살 로 공포심을 유발해 소련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어요. 실제로 두려움에 가득 찬 시민과 병사들은 볼가강을 건너 도망치려 했어요. 하지만 스탈린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는 명령을 내려 병사들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그 이후 시작됐어요. 대규모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시가전(시가지에서 이뤄지는 지상 전투)이 벌어졌습니다. 건물 안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교전을 벌였는데, 여기선 탱크나 대포 같은 무기보다 소총이나 삽과 곡괭이가 더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선 양측 병사에게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서 대치하기도 했대요.
석 달간 전투를 벌인 끝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80% 이상을 차지했어요. 하지만 소련군은 포기하지 않고 반격에 나섰어요. 소련군 상당수가 징집된 농민이었기 때문에 자기 땅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결사적으로 싸웠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11월 중순 소련군은 독일군의 눈을 피해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군대 100만명을 집결시킨 후 기습 공격을 단행해 독일군 30여만명을 포위했어요. 독일군은 포위된 병사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추위 속에서 독일 병사들은 보급품이 끊겨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립됐습니다. 결국 이듬해 2월 2일 독일군이 소련에 항복하면서 약 5개월간의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어요.
2차 세계대전 흐름 바꾼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독일군을 포함해 이탈리아·루마니아 등 동맹군 총 75만명의 사상자와 9만여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소련군은 100만~150만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돼요. 약 5개월간 약 200만명의 사상자를 낸 거예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이기도 해요. 독일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독일 국내는 공황 상태에 휩싸인 반면, 반(反)파시즘 세력은 무력감과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며 힘을 얻게 됐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의 강세가 계속됐고,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연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