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배운 철학, 정갈한 한글로 적다
◎#26-1009》삶이 증명한 살아 있는 지혜
by여유시간
Oct 9. 2026
문자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고, 내면의 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자각의 과정이다. 글을 통해 스스로를 깨우쳐야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조선 시대 백성들은 글을 알지 못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를 증명하거나 하소연할 길조차 찾기 어려웠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품었던 뜻은 단순히 편리한 문자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백성이 글을 배워 스스로 깨우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애민 정신이 그 바탕에 있었다.
─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28자는 우리말의 다양한 소리를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문자다. 자연의 소리부터 인간의 미묘한 감정에 이르기까지, 적은 수의 글자로 폭넓은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문자의 원리와 창제 정신을 살펴보면, 백성을 생각한 세종의 지혜가 얼마나 깊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말과 글 속에서 언어는 소통의 다리가 아니라 자신을 포장하고 남을 압도하려는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하곤 한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한자어나 전문 용어처럼 보이는 영어를 섞어야 자신의 글이 깊어 보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식을 밑천 삼아 언어로 자신을 뽐내는 모습이다.
─
돌아보면 어릴 적 남들만큼 공부하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학교에서 활자로 인문학과 철학을 배우지 않았기에, 어설픈 관념으로 남보다 우위에 서려하거나 어려운 문장 뒤에 숨어 알맹이 없는 허세를 부리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현란한 글재주 대신 수십 년간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쌓은 삶의 경험이 나에게는 가장 깊은 철학 교과서가 되어주었다.
─
젊은 날 별다른 글공부 없이 살아왔지만, 노년에 이르러 입에서 나오던 말이 글자가 되고 머릿속 생각이 문장으로 적혀 나온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경이롭게 다가왔다. 손때 묻은 연필을 쥐고 내 삶을 문자로 옮기던 떨림에 이끌려 비로소 글을 공부하게 되었고, 지나온 세월을 솔직하게 담아낸 자서전까지 내 손으로 남길 수 있었다.
─
글을 쓰면 쓸수록 자연스럽게 인간과 삶의 본질을 다루는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관념적인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인문학을 스스로 깨우치며 공부하게 되었다. 글이란 잘난 체하는 학식의 전유물이 아니라, 살아온 흔적을 정직하게 비추고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거울임을 몸소 깨달았다.
─
진정한 지식은 내용이 깊을수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명확한 언어로 풀어낼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우리말과 한글의 풍부한 표현력을 두고도 유식해 보이기 위해 어려운 한자어나 외국어를 불필요하게 덧칠할 이유는 없다. 쉽게 뜻을 나누라고 만들어진 문자를 언어적 허세의 도구로 삼는다면, 백성을 위해 문자를 만든 세종의 뜻과도 멀어질 것이다.
─
글은 상대의 눈높이에서 읽히고 마음으로 전달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화려한 껍데기와 지식 자랑을 내려놓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정갈한 한글로 서로의 생각과 온기를 나누는 것. 삶에서 우러나온 쉬운 언어로 진솔하게 소통하는 글이야말로 세종이 남긴 위대한 문자를 제대로 사용하는 길이며, 상대를 존중하는 가장 깊은 언어적 예의다.
◎실용인문학#26》 AI수정·협업》실용인문학을 독학한 관찰작가 여유시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