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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근대사>조선 망국의 몇가지 징조
(원보)정정용 추천 0 조회 183 18.08.13 20: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러시아 200만 대군 맹신한 고종, 일본 패배에 ‘베팅’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1호 | 20110326 입력

 

조선은 강제로 근대에 편입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이웃국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것이 더 뼈아픈 대목이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을 겪은 끝에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조선은 진통만 겪고 실패했다. 그 결과 조선은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러일전쟁이 터진 직후인 1904년 2월 9일 제물포에서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인 러시아 함정 ‘바랴크’와 ‘코리예츠’. 러시아 측은 격침된 게 아니라 자폭의 길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매년 2월 9일 러시아 수병들이 인천 앞바다에 와서 추모식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가 1904년 4월2일자에 보도한 화보. [명지대 LG연암문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①고종의 오판


황성신문(皇城新聞) 1904년 1월 25일자는 “근일 각국의 보호병(保護兵)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아(日俄:일본과 러시아) 개전론설이 유포되면서…곡식값이 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러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서울의 곡식값이 뛰었다는 보도다.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각국으로부터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명치(明治) 37년(1904) 2월 8일자는 육군 참령 현상건(玄尙健)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각국으로부터 서울을 국외중립지대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하는데 서울의 곡식값이 뛰는 이유는 한국이 전쟁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은 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운명이었다.

이런 성격의 국제전에 국외중립 선언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현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쓴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은 외교적 수완으로 전제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군 선발대 2500여 명이 인천 외항에 도착한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요동(遼東)반도 남단의 여순(旅順)항을 기습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다시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해 순양함 바랴크(Varyag)함과 코리예츠(Koryeets)함을 가라앉혔고, 같은 날 중립선언을 무시하면서 서울에 입성했다. 정식 선전포고는 다음 날에야 발표했다.

1 1904년 한일의정서 서명 뒤 이토 히로부미 특명전권대사(앞줄 가운데). 이토의 왼쪽이 이지용 외부대신 임시서리. 2 압록강을 건너는 일본군.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실감한 고종이었다.

 

경주김씨 김홍집(金弘集)의 온건개화파 내각이 주도하는 갑오개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국 주둔 외국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희한한 사건도 러시아의 힘을 굳게 믿은 결과였다.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2월 12일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A. Pavlow)는 러시아공사관 병사 8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고,

 

다음 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陸軍參將) 전주이씨 이지용(李址鎔: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합방 후 백작 수여)과 고종을 만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했다.

한일의정서는 제3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명기했다. 그러나 제4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며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했다.

 

속으로는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무제한 국토사용권을 주는 의정서를 체결한 데서 고종의 이중성이 다시 드러났다.

 

고종이 러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데는 함경북도 명천의 서민 출신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의 주청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친러파였던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은 현상건과 모의해 전(前) 러시아 주재 한국참서관(參書官) 곽광의(郭光義)를 여순(旅順)에 보내 러시아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 달라고 요청하려고도 했다.

 

이학균과 현상건은 일본의 납치를 피해 프랑스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따르면 이학균과 현상건은 서울에서 탈출한 파블로프 러시아공사와 접촉한 후 고종에게 ‘러시아가 일본을 격퇴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니 잠시 때를 기다리소서’라는 밀서를 보냈다. 고종도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난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상해로 보냈다.

고종이 러시아의 승리를 점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우세했다
.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에 없는 다른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전 국민적인 단결과 군부의 뛰어난 전략전술이었다. 러시아군은 총 병력이 약 200만 명에 달하고 전함의 배수량은 약 51만t이었으나 일본은 상비군이 20만 명에 불과했고 배수량은 26만t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 모두 108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에도 전쟁폐지론을 주장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같은 사상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세가 미약했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북상할 것으로 예상하고 압록강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맞서 싸울 계획이었다. 이에 맞서 일본은 해군 제1함대와 제2함대로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섬멸하고, 제3함대로 대한해협(대마도 해협)을 장악해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더 큰 전략을 세웠다. 또한 육군 제1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한국에 있는 러시아군을 구축하고, 제2군을 요동반도에 상륙시켜 여순을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일본은 외교전에서도 앞섰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지 않으면 불리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전비(戰費)는 약 15억 엔(円)에 달했는데 이는 2억3000만 엔 정도였던 1년 예산의 7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 Roosevelt) 미국 대통령의 하버드대 동창생인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1904년 2월 특사로 보내 미국의 중재를 부탁했다
. 여기에 훗날 한국 주차헌병대 초대 사령관이 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대좌의 주도로 일본군의 기막힌 첩보공작이 보태졌다.

1901년 1월 주(駐)프랑스공사관 무관을 거쳐 1902년 8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아카시는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이 불리한 전세를 승리로 전환시키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이때 아카시가 참모본부에 요구한 공작금 100만 엔은 현재 화폐단위로 약 400억 엔(약 54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참모본부에서도 난색을 표했으나 일본 군부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참모본부 차장 나카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결단으로 지급이 결정되었다. 막대한 공작금은 러시아 내부 분열을 획책하는 공작금이었다.

 

아카시의 유고(遺稿)인 낙화유수(落花流水)에 따르면 그는 이 자금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스트라이크, 사보타주, 무장봉기 등을 획책했고 이에 따라 러시아 내 전쟁을 혐오하는 염전(厭戰) 분위기가 확산됐다고 전한다
.

아카시는 스위스에 망명한 러시아 사회당의 레닌에게도 접근했다. 아카시의 자금 지원 제의에 레닌도 처음에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거부했지만 아카시가 ‘타타르 사람인 그대가 타타르를 지배하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이 무슨 배신인가’라고 설득하자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의 설득보다는 국가를 지배계급의 이익실현 도구로 보는 레닌에게는 조국보다 혁명이 상위개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아카시가 제공한 공작금이 한몫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동궁(冬宮) 앞 광장으로 평화 행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갔다.

 

혁명도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정치의 한 과정임을 보여준 사례들이다. 러시아가 국력의 크기만을 믿고 방심하는 동안 일본은 전세를 뒤엎기 위해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했다. 1905년 1월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고 3월의 봉천대회전도 승리했다.

해군은 더 극적이었다. 그해 5월 26일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군신(軍神) 이순신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황국의 부흥과 몰락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다(皇國興廢在此一戰)”는 휘호로 임전(臨戰) 의지를 다졌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러시아는 설상가상으로 6월 흑해함대의 전함 포템킨 수병들의 봉기까지 일어나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가 곤란했다.

독일 황제 카이저는 “아카시 대좌 혼자 봉천 파견 일본군 3개 군단 25만 명에 맞먹는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러시아도 적진 분열책으로 사용할 카드가 있었다. 제국 러시아에 사회당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조선 의병이라는 취약 요소가 있었다. 러시아가 조선 의병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면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수만 명의 조선 의병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랬다면 러시아 사회당이 러시아 내부를 뒤흔든 것 이상으로 일본군은 조선 의병에게 발목이 잡혔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가자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외교전을 준비했다.

 

 

국제정세 깜깜한 고종, 러일전쟁 후 미국 믿다 발등 찍혀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2호 | 20110402 입력

 

일본은 러일전쟁 때 외교도 전투처럼 임했다. 개전 전부터 강화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미국과 사전 거래하고 한국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고종이 열강이 도울 것이란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일본은 냉정하게 영국 및 미국과 이권을 주고받고 러시아를 상대했다. 게임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전쟁 과정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어야 했다. 1905년 1월 5일 여순에 있는 호두산(虎頭山) 203고지(러시아군의 요새)에서 일본군에게 투항하는 러시아 장병들. 5개월간 계속된 여순 공방전에서 사상자는 일본군 5만9000명, 러시아군 2만8000명이었다. 일본군에 잡힌 러시아군 포로는 2만2000명이었다. [중앙포토]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② 을사늑약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자 고종은 미국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이때 보낸 밀사가 전주이씨 이승만이었다. 일한외교자료집성(集成)은 고종이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 강화회담을 조금이라도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려고 시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독립협회의 열혈 청년 전주이씨 이승만은 1899년 반남박씨 박영효 총리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낙착되었다. 1904년 4월 특별사면을 받은 이승만은 그해 11월 4일 고종의 밀사로 도미(渡美)길에 올랐다. 무기수가 밀사로 극적 변신한 것이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을 대표하는 목사 윤병구과 함께 미 본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믿었던 주미 한국 대리공사 청도김씨 친일파 김윤정(金潤晶)은 밀사를 돕지 않았다. 김윤정은 한국 정부의 공식 훈령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주미 일본 임시대리공사는 ‘작년에 (이승만·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을 회견하게 주선하라고 강청(强請)하다가 격론이 오갔고 폭행까지 했으나 대리공사(김윤정)는 정부 훈령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38년(1905) 8월 5일)’고 일본에 보고했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을 선택했고 실제로 일제 때 충북도지사를 역임한다.

이승만(오른쪽)이 한강섬감옥의 동지인 안명선(가운데)·이승린과 함께 서 있다. [중앙포토]

그러나 김윤정이 이승만의 활동을 도왔더라도 별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1905년 8월 18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의 만주 이권을 어느 정도 넘겨받을 것인지와 배상금이 문제였다. 일본 각의(閣議)는 강화회담이 열리기 4개월 전인 4월 8일 이미 한국에 대해 이른바 ‘보호권 확립’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 외교 연표 및 주요 문서 명치 38년(1905) 4월 8일조에 따르면 ‘한국의 대외관계는 모두 일본에서 전담한다’는 것과 ‘한국은 직접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는 것, ‘일본은 한국에 주차관(駐箚官: 통감)을 두고 한국의 시정을 감독한다’는 것 등을 이미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반 쪽짜리 독립국으로 전락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일본 각의는 ‘이 조약으로 한국과 열국(列國)과의 조약상 관계가 일변할 것이므로 열국의 태도 여하를 고려해 적당한 시기에 단행한다’며 외국의 반응에 마지막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반발은 이미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

 

일본은 1902년 1월 이미 영·일동맹을 체결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영국으로부터 승인’ 받았다. 일본이 1904년 2월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에 특사로 보낸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하버드대 동창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이 루스벨트를 중재 당사자로 점 찍고 루스벨트가 중재를 자처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일종의 사기였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특사인 육군장관 태프트(W. H. Taft)가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을 찾고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밀약이었다.

일본군은 1904년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을 개시했으며 5월30일 대련을 점령했다. 프랑스 신문인 ‘르프티 주르날’이 1904년 6월 19일 당시의 전투장면을 묘사해 게재한 그림이다. [사진가 권태균]

1924년까지 극비였던 세칭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확인해 주고 필리핀을 차지했다.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樺太)까지 양도받았다. 일본과 거래 사실을 숨겼던 악덕 중개인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주선의 공으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 약소국을 한 강대국이 확실히 차지하는 게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평화관이었다.

러시아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배상금 지불을 끝내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의 희생도 막대했던 것이다.

 

1904년 8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벌어진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전사자 1만1100여 명(러시아는 7400여 명)이 발생했다. 총 사상자는 5만9000명에 달했다. 1905년 3월 초의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도 전사자 1만5000여 명(러시아 8700여 명)이 생겼다. 전비도 10년 전 청일전쟁 때의 2억48만 엔에 비해 8배나 많은 15억8400만 엔이나 들었으니 배상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러시아 강경파가 주축인 ‘강화(講和)문제동지연합회’ 등은 조약 체결 당일부터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국민대회를 열었다. 9월 5일부터 7일까지 일본 각지에서 17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체포되는 소동까지 발생했다.

루스벨트가 이미 한국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는 고종은 1905년 10월에도 미국인 헐버트(H. B. Hulbert)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고종은 이미 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패전국 러시아에도 매달렸다. 11월 하순 측근 전주이씨 친러파 이용익(李容翊)을 페테르부르크로 보내 주러시아 공사 전주이씨 이범진과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를 만나 “러시아에 한국의 이권을 주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계자(啓字: 국왕의 결재 도장을 받은 공문) 공문을 전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이용익이 상해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을 정도로 고종의 특사 외교는 일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고종은 1906년 1월에는 런던 트리뷴지 기자 스토리(D. Story)를 통해 북경 주재 영국 공사에게 5년간 열강의 보호를 요청하는 국서도 보냈지만 열강들은 이미 한국을 일본 몫으로 인정한 후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했다
. 그런데 나흘 전인 11월 5일 친일파 은진송씨 송병준이 결성한 일진회에서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내용으로 이토가 할 말을 대신한 것이다. 나중에 은진송씨 송병준과 우봉이씨 이완용은 누가 한국 멸망에 더 공을 세우는지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인 통감(統監)에게 넘어 갔다.

그해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결정되는데, 외교 외에도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사실상의 준(準) 총독이었다. 외교권 강탈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이 일었다.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던 반남박씨 박제순을 비롯해 학부대신 우봉이씨 이완용,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근택, 내부대신 전주이씨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안동권씨 서얼출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와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황성신문은 조약 체결 다음 날(11월 18일) ‘수십 인의 군중이 학부대신 이완용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고 보고하고 있다. 20일에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는 논설을 실어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외치며 의병이 봉기했다.

그러나 고종은 협상 체결 당사자였던 외부대신 반남박씨 박제순을 11월 22일자로 과거의 정승 격인 의정부 의정대신으로 승진시켜 정권을 맡겼다
.

 

다음 날 전(前) 의정 양주조씨 조병세(趙秉世)가 고종에게 ‘박제순에게 방형(邦刑: 사형)을 실시하고 나머지 대신들도 매국(賣國)의 율(律)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하고, 여흥민씨 민종묵·윤두병·경주이씨 이상설·순흥안씨 안병찬 등도 항의 상소를 올렸다. 자결항쟁도 뒤를 이었다.

 

1905년 11월 30일 시종부무관장 여흥민씨 민영환이 자결하고, 다음 날에는 양주조씨 조병세가 음독 자살했다. 주영(駐英) 서리공사 전의이씨 이한응은 영국에서 음독 자살했다. 12월 4일에는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시위대(侍衛隊) 김봉학(金奉學)이 자결했다.

 

성토 대상이 된 을사오적은 12월 16일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궤변과 함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김옥균·김홍집 제거한 고종 곁엔 친일 매국노만 득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3호 | 20110410 입력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친일파에 대해 애국적 친일파와 매국적 친일파로 나눌 수 있다. 급진개화파 안동김씨 김옥균이나 온건개화파 경주김씨 김홍집 등은 일본을 역할모델로 삼아 부국강병을 도모하려던 애국적 친일파들이었다. 반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과 일진회를 이끈 이용구· 은진송씨 송병준 등은 매국적 친일파였다. 김옥균·김홍집을 모두 제거한 고종에게 남은 것은 매국적 친일파뿐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반남박씨 박제순이다. [사진가 권태균]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③친일내각의 갈등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반남박씨 박제순(朴齊純)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12월 13일에는 학부대신 우봉이씨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처단 요구가 드높은 외부대신을 되레 승진시키고 이완용에게 외교권을 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박제순은) 오적(五賊) 중에서 글도 있고 교활해서 오랫동안 전 국민의 타매(唾罵:침 뱉고 꾸짖음)를 견뎌왔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날로 심한 것을 우려해서 지위는 높고 녹봉(祿俸)은 후하지만 일찍부터 밤이 되면 방황했다”고 전한다. 박제순이 방황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조약 체결에 대한 비난이 드높았음을 뜻한다. 1906년 2월 16일에는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근택(李根澤)의 집에 자객이 침입해 자상을 입힌 사건까지 발생했다.

고종의 이중적 정치행보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10년 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전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해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총리대신 경주김씨 김홍집(金弘集)을 역적으로 규정해 경무청(警務廳) 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참살당하게 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의 아관파천에 대해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는데, 이제는 망명할 공사관도 없지만 의병 진영에라도 합류해서 자신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을 내리면 일본이 보호한다고 해도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군중의 분노는 갑오개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한 상대에게는 일단 굴복했다가 나중에 뒤집기를 시도하는 고종의 성격은 일제가 외교권을 빼앗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통감통치에는 장애요소가 되었다.

1 일진회 회장 이용구(오른쪽)와 송병준. 둘은 흑룡회의 첨병이 돼 매국의 길에 앞장섰다.

2 통감관사. 이토는 외교권뿐만 아니라 내정을 총 간섭하는 사실상의 준총독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일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 사이 고종은 1906년 1월 11일 일본 자작(子爵) 후지나미(藤波言忠) 등에게 훈장을 주고, 2월 28일에도 일본 육군중장 이노우에 미쓰루(井上光) 등에게도 훈장을 주어 일본 유력층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이런 한편 이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를 단행해 내각의 친일파들을 당혹하게 하기도 했다.

 

이토는 1906년 4월 21일 업무 협의차 일본으로 가서 6월 23일 귀국하는데 그 사이인 5월 28일 고종은 의정대신에 여흥민씨 민영규(閔泳奎)를 임명했다. 민영규도 합방 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친일파이긴 하지만 고종은 자신이 정승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1906년 8월 28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훈2등을 서훈하는 등 매국적 친일파 달래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봉이씨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주차군사령관에게도 ‘황제의 성격을 고칠 수 없으니 마지막 수단으로 한국 역사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는 폐위(廢位)를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자신과 서너 명의 동지가 폐위를 단행할 테니 일본은 뒤에서 동의만 해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오히려 일본 측에서 세계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폐위에 소극적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정대신 반남박씨 박제순은 같은 친일파지만 이완용처럼 대놓고 고종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일진회의 은진송씨 송병준(宋秉畯)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송병준의 배후는 1901년 2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이 결성한 일본 낭인 집단 흑룡회(黑龍會)였다. 만주 흑룡강 유역을 일본 영토로 삼겠다는 취지의 이름이니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대(對)러시아 개전론을 적극 주창하고 한국은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지역까지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大)아시아주의를 제창한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첨병이었다. 흑룡회 주간 우치다가 일본 정계의 흑막(黑幕:배후 실력자)인 스기야마(任山茂丸)의 추천으로 통감부 촉탁이 되면서 한국 점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흑룡회의 손발이 송병준과 일진회였다.

 

흑룡회는 1930년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에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와 은진송씨 송병준을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송병준은 일본에서 인삼 재배, 직물 염색 등을 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오타니(大谷喜藏) 소장을 따라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면서 직업적 친일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1897년 5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지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송숙준(宋肅畯:송병준)은 이때 이미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고 나오니 일찍이 창씨개명을 한 셈이다.

 

송병준은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8월 전 독립협회 회원 파평윤씨 윤시병(尹始炳) 등 300여 명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이 필요해지자 그해 12월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해 만든 진보회(進步會)와 통합해 일진회를 만든다. 일진회는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만주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일본군을 도왔고, 1906년 2월 28일에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이토를 위해 ‘歡迎(환영)’이라는 큰 현수막을 남대문에 내걸기도 했다.

송병준은 1906년 10월 이일직(李逸稙=이세직(李世稙))의 옥새도용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다.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이 이일직에게 밀칙(密勅)을 내려 국내 이권을 외국인들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상납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자 고종은 이일직이 사적으로 옥새를 도용한 단독 소행으로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이일직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된 것이다. 상납금 일부를 가로채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일한합방비사이때 흑룡회의 우치다가 이토 통감을 만나 송병준을 석방시켜 주고 일진회 고문으로 추대됐다고 전하는데, 이를 계기로 송병준의 친일행각은 도를 더한다.

급기야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반남박씨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고 총사직을 권고했다
.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 무렵 박제순도 참정대신 자리에 목매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매천야록“이때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제순은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약간 공분(公憤)을 토하면서 사직했다”고 적고 있다.

 

나인영은 훗날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 격인 대종교(大倧敎)를 중창하는 나철(羅喆)이다. 나인영 등이 폭약 2궤(櫃)를 “미국인이 보냈다”면서 반남박씨 박제순· 전주이씨 이지용에게 보냈는데 박제순 집안 사람이 열려고 하는 것을 박제순이 막아 겨우 살아났다.

참정대신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이 1907년 5월 22일 사임한 뒤 그 자리는 우봉이씨 이완용이 차지했다
. 내부대신은 임선준(任善準), 군부대신은 이병무(李秉武), 학부대신은 이재곤(李載崑)으로 바뀌었는데 사흘 후인 25일에는 조중응(趙重應)이 법부대신이 되고, 송병준이 삼품대신이란 조롱 속에 농상공부 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제순 내각이나 이완용 내각이나 같은 친일내각이지만 이번 내각은 우봉이씨 이완용·양주조씨 조중응·은진송씨 송병준의 삼각 친일편대가 전면에 등장한 매국내각이었다. 조중응은 영조 때의 소론 영수 양주조씨 조태억(趙泰億)의 후손으로 노론 가문 일색인 친일 관료 집단에 소론 출신으로 드물게 합류했다. 이완용 내각은 고종 축출 특임내각이나 다름없었다.

 

일한합방비사이완용 내각이 수립된 후 고종은 이완용이 궁중에 들어와도 만나주지 않거나 ‘박 참정(박제순) 사직 후 매일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거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늑약 체결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박제순 내각이 그나마 차악(次惡)내각이었던 셈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개화파 김홍집까지 모두 죽여버린 고종의 업보였다.

궁지에 몰린 고종의 승부수가 헤이그 밀사 파견이었다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906년 6월부터 10월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감부문서 1907년 5월 19일자를 보면 통감 이토는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한국 황제가 외국에게 운동한다는 음모는 작년 이후 항상 계속되고 있는데, 전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의지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계책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종의 속셈을 정확히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토가 추측한 헐버트가 아니라 경주이씨 이상설(李相卨)이 밀사였던 것 정도가 허를 찌른 셈이었다

 

 

고종은 한편으로는 자결자들에게 시호와 훈장을 내려 표창하면서 을사오적의 공동 상소에도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 나가야 될 것”이라고 사직을 만류하는 이중적 정치 행보를 계속했다. 고종은 마지막 순간에도 목숨 걸고 저항하는 정치노선을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열강들이 왕국을 이미 일본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줄타기 정치 수완과 외교적 방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종과 일제,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놓고 두뇌싸움

이덕일 事思史 금대를 말하다

| 제214호 | 20110416 입력

 

고종 통치의 특징 중 하나가 이중성이다. 을사늑약 체결 주범에게 정권을 주는 한편 의병에게는 밀지를 내려 거병을 촉구했다. 하지만 각 지방의 진위대는 고종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진압했다. 고종은 표면적으로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순응하는 한편 헤이그엔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찾으려 했다.
경주이씨 이회영의 장남인 이규학(왼쪽)과 조남승(오른쪽). 고종의 조카인 풍양조씨 조남승·조남익 형제는 고립된 고종과 바깥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우당기념관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④ 헤이그 밀사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당사자인 반남박씨 박제순을 승진시켜 내각을 맡겼지만 의병들에게는 밀지(密旨)를 내려 거병을 촉구했다. ‘밀지 정치’도 고종 통치의 한 특성인데, 전 도사 영일정씨 정환직(鄭煥直)이 을사늑약 후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남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킨 것도 고종의 밀지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직의 승리를 바랐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일정씨 정환직이 과거 삼남검찰 겸 토포사로서 동학 및 의병 진압에 나섰던 것처럼 진위대도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 진압에 나섰다는 점이 문제였다.

고종은 재위 41년(1904) 9월에도 동학 비적 잔당이 다시 창궐한다면서 각 지방 진위대에 진압하라고 명했다.
그해 12월 말 참정대신 평산신씨 신기선은 사직 상소에서 “진위대 군사들은 비적을 핑계대고 백성들을 침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위대가 보면 비적이지만 국권 회복 차원에선 의병이었다.

 

의병은 고종이 몰래 내린 밀지에 따라 거병하고 진위대는 고종의 공개된 명령에 따라 진압하는 상황이었다.

 

고종은 외국 여러 곳에도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찾길 바랐다. 특히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어담(魚潭)소장 회고록 등에 따르면 고종은 참정대신 박남박씨 박제순에게 밀사 파견을 미리 상의했는데 박제순이 “일본은 저를 신임하고 있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훗날 고종이 “박제순을 믿은 것은 짐의 착각이었다”고 토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을사늑약 체결의 장본인을 믿는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1 경주이씨 이상설. 고종은 일제가 밀사를 헐버트로 단정짓고 있을 때 이상설을 내정해 허를 찔렀다.

2 풍양조씨 조남익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서훈

밀사 파견을 결심한 고종은 통감 이토와 머리싸움에 들어갔다. 당초 이토가 밀사로 짐작한 인물은 친러파 전주이씨 이용익(李容翊)이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용익은 1906년 상해로 귀환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살아있었다면 밀사가 되었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1907년 2월 급서했다.

 

그 후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주목했다.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1907년 5월 9일자 통감부 총무장관이 진다 스테미(珍田捨巳) 외무차관에게 보낸 기밀보고서를 보면 ‘헐버트가 8일 서울을 떠나 고베와 쓰루가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가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 헤이그에서 한국을 위해 무언가 할 거라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했다.

위 보고서는 “동인(同人:헐버트)이 헤이그에 간다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혹시 한국 조정의 밀사라 칭하고 각국 위원을 역방(歷訪)하는 일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여서 고종의 밀사 파견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박제순에게 발설한 내용은 이미 비밀일 수 없었다.

 

통감부문서 5월 19일자는 이토가 하야시 곤노스케 외무대신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 헐버트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건’이란 전신(電信)을 싣고 있다. 이토도 이 전신에서 “한국 황제가… 러시아·프랑스를 믿고 독립을 회복하려 기획하고 있다. 미국인 헐버트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어 파견했다”며 밀사를 헐버트로 단정지었다. 고종의 카드가 헐버트가 아니라 전 의정부 참찬(參贊:정2품) 경주이씨 이상설(李相卨)이라는 것 정도를 일본이 몰랐을 뿐이다.

 

경주아씨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고종이 외부대신 반남박씨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자 격렬한 항의상소를 올렸다.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로 맺어진 것이니 마땅히 무효입니다… 폐하께서 힘껏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준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천주(天誅:역적들을 죽임)를 단행해 빨리 여정(輿情)을 위로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니, 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고종실록 42년 11월 24일)”

 


안동김씨 김구는 백범일지에 을사늑약에 항의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조문 갔다 나오면서 목도한 이상설의 자살 미수사건을 기록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경주이씨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백범일지)”

이상설은 앞의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祖宗)이 남겨준 유민(遺民)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히 예견했다. 제국의 운명을 알면서도 이상설은 박제순·이완용처럼 그 운명에 편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경주이씨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연안이씨 이동녕과 함께 비밀리에 출국해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장 사이토(齊藤季治郞)는 ‘서전(瑞甸)서숙 조서보고문서’에서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용익과 전 주(駐)서울 러시아 공사 파바로프 사이를 왕복한 형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상설이 이용익을 만나서 논의한 것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것이리라. 이상설의 출국 자체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려는 목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전주이씨 이준 선생전 등).

 

헤이그 평화회의는 당초 1906년 8월 개최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상설이 여기에 맞춰 출국했다가 회의가 연기되면서 연길현 용정촌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열고 숙장(塾長:교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정의 경주이씨 이상설과 서울의 고종을 연결한 통로에 대해서
그간 많은 추측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경주이씨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각종 사료와 일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고종의 조카인 풍양조씨 조남승(趙南昇)·조남익(趙南益) 형제라고 보고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명치 43년(1910) 6월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풍양조씨 조남승은 고종의 명을 받고 미국인 콜브란에게 전기회사의 주식을 매도했다”고 전한다. 이 자금이 밀사 파견 자금인데 흑룡회에서 편찬한 일한합방비사고종이 20만원의 내탕금을 서울에서 전기·철도를 운영하면서 궁중에 출입하던 미국인 콜브란을 통해 지출했다고 전한다.

 

이상설과 고종의 연결 역할을 한 곳이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학교였다. 이 학교에 왕래했던 철원최씨 최남선은 훗날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회택(李會澤:이회영의 오기)·이상설·이준씨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 국사를 모책했는데…상동교회 뒷방은 전주이씨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사건의 온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 운동사)”고 증언했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경주이씨 이상설, 부사 전주이씨 이준·이위종을 평화회의 특사로 내락하고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 등을 내려주었다. 위임장은 시종 조남익과 내시 안호형(安鎬瀅)의 손을 거쳐 풍양조씨 조남승에게 전달되고 다시 상동청년학원에 극비리에 보내졌다.

 

상동청년학원의 경주이씨 이회영·이시영 형제, 전덕기, 양기탁 등은 이를 부사로 인준된 이준에게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일본이 헐버트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고종은 이상설 카드로 허를 찌른 셈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밀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통감부문서 1907년 5월 24일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무역사무관 노무라(野村基信)가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보고한 ‘전(前) 한국 학부협판 이상설 및 이준·이범윤 등에 관한 건’을 싣고 있다.

“이 자들(이준과 나유석)은 협의 결과 전 학부협판 이상설을… 이곳에 불러들여 다시 모의를 짜낸 결과, 한국의 장래에 관하여 직접 러시아 정부에 탄원하기 위해 위원을 간선하여 파견한다는 의논을 결정한 후 이준·이상설 등 3명이 결국 지난 21일 이곳을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한 바 있습니다.”

노무라는 이 문건에서 “또 파견위원은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기회 삼아 헤이그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국의 전권위원 사이에서 운동한다고 합니다”라고 정확히 보고하고 있다. 노무라는 또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당초부터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며 그와 같은 우매한 행동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고종의 밀사 파견을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는 이 대목에서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인사들이 가졌던 국제적 인식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청일전쟁 뒤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주게 만든 삼국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 같은 기적이 재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열강 평화회의에 조선이 낄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5호 | 20110424 입력

 

고종과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미국인 선교사 월리엄 마틴(중국 이름 丁韓良)이 미국 법학자 휘튼(Wheaton)의 저서를 번역한 만국공법(萬國公法)에서 독립국 유지 이론을 찾았다. ?만국공법은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국제법은 강대국들의 약소국 침탈을 합리화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장면. 이준 등 세 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으나 모두 외면당했다. 제1차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에 열렸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⑤ 국제정세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 세 명의 밀사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07년 7월 4일 일본의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무대신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의 헤이그(海牙)에서의 행동 내탐(內探)에 관한 건(件)’이란 전문에서 “3명의 한국인은 그 후 계속 각국 외무대신과 각국 위원을 방문했으나 아무도 상대하지 않음”이라고 전하고 있다. 어느 열강도 밀사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자국 이익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게 열강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열강들이 평화회의를 개최한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군사충돌을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전통적 숙적인 독일과 프랑스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두 나라가 충돌하면 동맹관계의 다른 열강들도 휘말릴 수 있었다. 이 경우 교전규칙이라도 미리 정해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것이 평화회의 개최 목적이었다.

1899년의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해 그해 5~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는데 모두 26개국이 참가했다
. 유럽에서는 러시아를 비롯해 독일·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벨기에·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덴마크·네덜란드·몬테네그로(유고)·룩셈부르크·포르투갈·루마니아·세르비아·스웨덴·스위스·오스만 등 대부분의 국가가 초청된 사실상 유럽회의였다. 북미에서는 미국, 중남미에서는 멕시코가 초청받았고, 아시아에서는 청나라와 일본, 시암(태국)이 초청되었다.

 

일본 대표는 하야시 다다스와 아이가 나가오(有賀長雄:법학자)였는데 대한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의 속셈이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미 두 나라 모두 대한제국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전경. 2 반남박씨 박제순 외부대신. 박제순은 대한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했다.
제1차 평화회의는 군축(軍縮), 전시(戰時)국제법, 중재재판소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군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나마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언하고 1901년부터 헤이그에 상설중재재판소를 설치한 것이 가시적 성과였다. 또 ‘육상전(陸上戰)에 관한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해 육군 전투 때의 규칙을 제정했으며, 1864년 제정한 제네바 협정을 해전(海戰)에서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외에 기구(氣球)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금지한 것 정도가 성과였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인 1899년 10월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들이 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영국이 남아공 북부의 세계 최대 금광단지 트란스발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 보어전쟁(Boer War)이 일어났다. 보어전쟁은 트란스발을 영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끝났으며(베레니깅 조약), 

 

1900년 3월에는 중국에서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프랑스·미국·독일과 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8개국 군대가 그해 8월 베이징(北京)을 점령했다.의화단 사건으로 중국은 9억8000만 냥이란 막대한 배상금 등을 내야 했다(베이징 의정서). 몇 개월 전에 헤이그에 울려 퍼졌던 ‘평화’의 본질이 명확히 드러났다. 20세기는 약육강식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평화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대한제국은 회의가 파한 후에도 이 체제에 들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구한국외교문서황성신문(皇城新聞) 등에 따르면 1901년 5월 30일 외부(外部)대신 박남박씨 박제순은 주한 벨기에 전권대사 방칼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전한다. 구한국외교문서는 또 1902년 2월에도 박제순이 네덜란드 외부대신이자 만국평화회의 총재인 모포(毛包乙伯)에게 만국 적십자사 및 평화회의 참석을 알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고,

 

11월에는 외부대신 서리 조병식(趙秉式)이 특명전권공사 민영찬(閔泳瓚)을 통해 홀랜드(네덜란드) 외부대신 겸 만국평화회장 모부(謨富)에게 적십자사에 참가하게 해 줄 것과 평화회의에 사신을 파견하겠다고 요청했다고 전한다. 이런 요청에 대해 각국은 대부분 본국에 품의한 후 답변하겠다는 의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미 대한제국을 러시아나 일본 몫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1901년 4월 독일의 주영 대리공사 에카드슈타인은 주영 일본공사 하야시 다다스에게 “극동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영국·일본의 3국동맹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1902년 1월 영일동맹으로 가시화되는데,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중대한 국면 변화로 이 무렵 외교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던 대한제국은 비상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2월 25일 서울의 하야시 공사가 도쿄의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에게 기밀(機密) 제36호로 ‘영일협약 발표에 관한 서울 정계의 상황’을 보고한 내용을 보면 상황이 달랐다. 하야시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영일협약)은 동아시아의 큰 국면으로 봐서 평화를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소견에서 비롯된 것이니, 한국 정부도 이를 거울삼아 앞으로 한층 더 양국 간의 친교를 진전시키고 분우(紛擾:분란)를 일으키는 일이 없기 바란다”고 말하자 “외부대신은 지극히 안심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신중한 태도로 본 공사의 구두진술을 청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영일동맹의 의미 자체를 모르면서 외교에 매달렸던 것이 대한제국 외교력의 실상이었다.

이때 하야시 공사는 친러파들이 영일협약에 대해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하는데, 이때만 해도 일본이 우봉이씨 이완용을 이윤용(李允用)·이하영(李夏榮) 등과 함께 친미파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들은 특정 이념·노선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권력과 돈을 좇았던 친권파(親權派), 친전파(親錢派)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부터 열린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의 직접적 계기는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승전국 일본의 피해가 더 컸던 전쟁이었다. 약 129만 명이 참전했던 러시아는 5만여 명이 전사했지만 108만 명이 참전했던 일본은 8만4000여 명이 전사했다(橫手愼二,日露戰爭史). 이른바 평화회의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제안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열리게 된 것도 두 사람 모두 러일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격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독립을 되찾겠다는 고종의 구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고종은 이토가 예상한 헐버트 대신에게 이상설을 밀사로 보내 이토의 허를 찔렀다. 이토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를 고종 강제 퇴위의 구실로 삼았다.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1907년 7월 3일자는 통감 이토가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위 운동(헤이그 밀사)이 과연 칙명에 기초한 것이라면 우리 정부에서도 이 기회에 한국에 대하여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시기라고 믿는다”면서 “위의 음모가 확실하다면 세권(稅權), 병권(兵權) 또는 재판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1906년 2월부터 통감 통치를 실시했지만 고종이 궁내부(宮內府)를 통해 외국과 이권계약을 하는 등 일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
. 1906년 이탈리아 광업회사가 궁내부에 갑산광산 채굴권을 신청하고 1907년 2월에는 프랑스인이 평안북도 구성·선천 등의 광산 채굴권을 신청하는 등 일부 외국인들은 계속 궁내부에 각종 특허와 자원 개발권을 신청했다. 통감부는 그간 대한제국이 체결한 각종 조약 원본과 외교문서를 의정부 외사국(外事局)으로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는 ‘궁중 화재 때 모두 분실했다’고 거절하고는 고종의 조카 풍양조씨 조남승(趙南昇)을 통해 프랑스 주교 뮈텔(Mutel)에게 그것들을 맡겨 두었다.

이토는 앞에선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다른 태도를 보이는 고종을 통감 통치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

 

참정대신 우봉이씨 이완용, 법부대신 양주조씨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은진송씨 송병준,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병무 등이 포진한 친일 내각의 군주는 이미 고종이 아니라 이토였다.

 

고종 앞에서 칼 빼든 이완용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6호 | 20110430 입력

서울 광화문 앞 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

우봉이씨 이완용과 군부대신 전주이씨 이병무는 이토의 지시에 따라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⑥고종 퇴위


통감 이토는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 주인의 질책을 들은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곧바로 고종에게 달려가 따졌다. 일본외교문서 1907년 7월 7일자 등에 따르면 고종은 ‘짐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유의 이중 처신이 통할 때는 이미 아니었다. 1907년 5월 차악(次惡)이었던 반남박씨 박제순 내각이 최악인 우봉이씨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된 터였다.

일진회의 은진송씨 송병준이 혹시라도 친일 경쟁에서 이완용에게 밀릴세라 적극적으로 나섰다. 흑룡회에서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는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 우치다(內田),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입을 맞추고 어전회의에 나갔다고 전한다.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을 도울 열강은 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44년의 왕 노릇이 끝나게 되는 7월 18일.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중추원 고문 박제순을 임시 궁내부 대신 서리로 삼았다가 곧바로 해임하고 총리 이완용에게 겸임시켰다.

1 우치다 료헤이와 은진송씨 송병준(오른쪽). 일본의 침략주의 단체 흑룡회의 우치다는 일진회를 통해 조선 강점에 깊숙이 개입했다. 2 일진회 고문 우치다(왼쪽)와 다케다 한시(가운데),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본외교문서 대한매일신보 매천야록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고종실록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7월 18일 오후는 급박했다.

 

이날 오후 3시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입궐해 고종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했다. 수습책이란 다름 아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5시에 이토를 만나 밀사 사건을 변명하면서 양위(讓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천연덕스레 답하고 떠났다. 7시에는 서울에 온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매달렸으나 소용 없었다.

내각 대신들은 8시쯤 다시 고종을 찾아가 양위를 요구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자 폐하를 모시는 무감(武監), 액례(掖隷)들이 흥분해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밤 11시 고종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면서 평산신씨 신기선(申箕善)·여흥민씨 민영휘(閔泳徽)·민영소(閔泳韶)를 불렀다. 이듬해(1908) 사망하는 신기선은 논외로 치더라도 민영휘·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챙기는 인물들이니 이완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고종은 새벽 1시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고 물러섰다. 양위가 아니라 황태자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복귀하려는 의도였다. 황태자는 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효도’라고 타일렀지만 대리청정은 이토나 이완용 내각이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순종실록 즉위년 7월 19일자는 “(순종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고 이어서 선위(禪位)받았다”고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

 

통감부문서 7월 19일자는 이완용이 이토에게 보낸 ‘황태자 집무대리 조칙 통고건’인데, 19일에도 고종의 뜻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청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7시15분의 통감부문서 ‘황제 양위건’은 다르다. 법부대신 양주조씨 조중응이 통감 이토에게 와서 ‘양위의 건은 짐의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남의 권고 또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종이 ‘본뜻을 오해하여 함부로 분개하거나 폭동을 일삼는 자는 통감에게 의뢰하여 제지하고 기회를 봐서 적절히 진압할 것을 위임한다’라는 칙명까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발적으로 양위를 결심했으며, 반대 봉기가 일어나면 이토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중응의 조작일 것이다.

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40년(1907) 7월 20일조는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을 거행했다’고 적고 있어서 고종은 여전히 황태자 대리청정을 고집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고종과 황태자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우봉이씨 이완용·임선준·제주고씨 고영희·전주이씨 이병무·이재곤·양주조씨 조중응·은진송씨 송병준 등 이른바 ‘정미(丁未:1907) 칠적(七賊)’과 여타 친일파 등이 참석한 식이 열려 고종의 44년 치세가 강제로 막을 내렸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호외는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고종이 거부했다는 궁중 소식 등을 전하면서 밀사 이준이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자결해 만국 사신들 앞에서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헤이그에서 병사한 이준이 국내엔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유래다.

황태자 대리청정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 각지에 시민들이 모여 통곡하거나 친일 내각을 성토하고, 친일파들에게 훈장을 준 표훈원(表勳院)에 투석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경무청(警務廳)에 발포하고 시민들이 밤 11시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했다고 각종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진압권을 이토에게 넘긴 것처럼 총리대신 이완용도 이토에게 “각 조약국에도 일체를 성명하라”면서 열강들에게 황태자 대리청정 사실을 통보하라고 권유했다.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에 ‘한국인 폭도들’이 난입하면 보호해 주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러시아 총영사(Georger de Plan<00E7>on)는 7월 20일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러시아 공사관은 어떤 위험은 느끼지 않지만 만일 폭도들이 침입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방지하는 적절한 대책을 취해주면 고맙겠다’고 회보했다. 미국 총영사(Thomas Sammons)도 “한국 황제 폐하께서…진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통감에게 위임했음을 알리는 귀하의 통첩을 접수했다”고 회보했으며, 청국 총영사는 ‘필요하다면 우리 총영사관에 군 경비대를 보내주기 바란다’고까지 통보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7월 24일 통감 이토,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2조)”고 규정해 통감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격상시켰다. 또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5조)”고 규정했다.

이완용은 이토와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작성했는데 크게 재판권과 군대 해산에 관한 두 가지 사항이었다. 최고법원인 ‘대심원(大審院) 원장 및 검사총장과 전옥(典獄:형무소장)은 일본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육군 1대대를 존치시켜 황궁 수비를 맡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라고 경호대대를 제외한 군대 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 친일 내각은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 해산 D데이는 8월 1일이었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전주이씨 이병무는 아침 8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시위대 각 대장들을 불러 10시에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한다고 통보했다.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는 교관인 구리하라(栗原) 대위가 인솔해 해산식에 인솔하려 하자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했다.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했다. 남대문 안에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 병사들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해산식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군모와 견장을 회수하고 계급에 따라 80~25원의 소위 은사금을 지급했다.

군대까지 강제 해산을 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상실했다. 500년 제국은 그렇게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극렬 외세배척론자 이토, 영국 유학 뒤 개화파로 변신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7호 | 20110508 입력

 

조선과 일본은 모두 개항 과정에서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 속에서도 개화의 방향성은 잃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개화파 인물들을 길러냈다. 조선은 거꾸로 대부분의 개화파 인재가 살해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이토는 ‘개화 일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하세가와 사령관과 통감부로 가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과 함께 ‘국력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며 조선 정벌론에 반대해 이를 관철시켰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⑦이토와 일본 개화


조선에 1870년대 초에 개화파를 양성하던 반남박씨 박규수의 사랑방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송하촌숙(松下村塾:서당)이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급진개화파 안동김씨 김옥균과 온건개화파 경주김씨 김홍집이 나왔다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서는 개항 후 일본의 문치파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와 무단파(武斷派)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나왔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일종의 개화파 정치학교로 만든 인물은 중인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었다
.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던 1853년(철종 4년), 오경석도 베이징에 1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중국의 실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경석은 철종 11년(1860) 8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운 충격적인 현장까지 목격한 후 능동적으로 문호를 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 하급 번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다는 일왕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굳혔다. 존왕은 반막부(反幕府)를 뜻했고, 양이도 개항을 결단한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막부는 조슈번에 명을 내려 요시다 쇼인을 에도로 보내도록 해 사형시켰다
. 이것이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으로서 미·일 수호통상조약(1858)과 도쿠가와 이에모치(<5FB3>川家茂)의 쇼군(將軍) 승계를 반대한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는데 14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요시다는 사형당했지만 이토를 비롯한 그의 사숙(私塾) 출신들이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요시다는 번(藩)과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봉건체제를 신분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통일적인 정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에는 허수아비였던 천황이 중요해져서 존왕(尊王)사상이 싹텄다.

1 무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젊은 시절 스승 요시다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양이론자였다. 2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야마구치, 이와쿠라, 이토, 오쿠보. 이와쿠라 사절단은 귀국 후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이토 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존왕양이 운동에 나서는데, 존왕사상은 계속 유지하지만 외세를 배격하자는 양이는 버리게 된다. 스승의 사상을 절반만 계승한 것이다. 14세 때 요시다 쇼인 문하로 들어간 이토는 동문들과 막부 타도와 양이 운동에 나서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토가 정치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극렬 양이론자로서였다. 1862년 이토는 천황가와 막부의 융합론인 공무합체론(公武合<4F53>論)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의 암살을 모의하고, 시나가와 고텐야마(御殿山)의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야마오 요조(山尾庸三)와 함께 외국인을 우대하는 식전(式典)을 연구하던 하나와 다다토미(<5859>次<90CE>)를 암살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63년(고종 즉위년)에는 느닷없이 영국을 배우겠다면서 이노우에(井上聞多)와 영국으로 향했다. 뱃삯을 지불했지만 선장의 강요로 수부(水夫)일까지 했는데, 상해에서 런던까지 가는 약 4개월 동안 호리 다쓰노스케(堀辰之助)가 편찬한 영일소사전(英和<5BFE><8A33>袖珍<8F9E>書:1862)을 가지고 선원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영국 유학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조슈번이 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1864년 귀국해 포르투갈인 행세를 했다.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조슈와 사쓰마번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이토는 영국 유학 경험 덕분에 외국사무계에 배치되었다. 평민 출신 이토가 일본 근대정치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첫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토 추종자였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90CE>)가 지은 이토 히로부미 전(伊藤博文傳:1940)은 이토의 선조가 13세기 여몽(麗蒙)연합군의 침략 때 몽골 군함을 습격한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라고 서술했다. 고노의 혈통은 7대 고레이(孝靈) 천황의 아들인 이요(伊豫) 왕자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인들 스스로가 제15대 응신(應神) 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별개로 치더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노 미치아리와 연결되는 어떠한 중간 고리도 없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족보 위조에 해당한다. 부친 이토 주조(伊藤十藏)는 날품 팔던 하층민으로서 하급무사 아시가루(足輕)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다. 부친이 지어준 이토의 첫 이름 리스케(利助)는 미천한 가문의 자식이 갖는 흔한 이름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던 이토는 리스케(利介)로 바꿨다가 도시스케(利輔), ?스케(春輔)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된다. 그만큼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다. 같은 송하촌숙 동문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는 이토를 ‘리스케’라고 불러도 이토는 ‘다카스기 님’이라고 존칭을 붙여야 했다.

이토가 외국사무계에서 처리한 첫 번째 사건은 히젠(備前)번의 양이파 병사가 외국 군인에게 상해를 입힌 고베(神戶)사건이었다. 대장(隊長) 다키 젠사부로(瀧善三郞)에게 할복령이 내렸는데, 이토는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을 감시하는 입회 역할을 맡았다.

 

영국공사관에 불을 질렀던 이토가 외국의 앞잡이가 돼 양이파 장교의 할복을 감시했던 것이다. 1871년 11월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함께 구미로 향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사절단의 일행으로 선발돼 두 번째로 해외에 나갔다.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크게 환대했고, 1872년 1월에는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문물시찰과 불평등조약 개정 등의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치외법권 등의 조항이 담긴 불평등조약 개정에는 실패했다. 일본에는 아직 헌법이 없고 재판 또한 구미 각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쿠라 사절단이 독일로 가서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1873년께 일본 본토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으로 시끄러웠다. 신정부 수립 다음 해인 1868년 12월 일본은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를 통해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 데쓰시로(<6A0B>口鐵四郞)를 동래에 보내 왜학훈도 안동준(安東晙)에게 서계와 국서를 전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 ‘우리나라(일본)의 정권이 황실에 돌아갔습니다…조정으로부터 칙명을 받아(일본외교문서 1권)’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황실·봉칙(奉勅)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접수를 거부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1870년 7월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柳原前光)는 “북쪽은 만주에 연하고, 서쪽은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皇國保全)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萬國經略進取)의 기본이 되지만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는 끝난다”면서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일본 대외 전략의 기본 이념인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개념이 이때 벌써 등장한다. 주권선인 국경선을 지키려면 그 바깥쪽에 설정한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는 전략인데, 이때 이미 조선이 이익선이었다.

 

1870년 12월 외무대승(大丞)인 마루야마(丸山作樂)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해 중요한 지역으로 지금 손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다”라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결사대를 모집한 적도 있었다.

 

1873년 일본이 부산 왜관을 일본공관으로 바꾸면서 쓰시마 상인뿐만 아니라 도쿄 상인도 무역행위에 나서자 조선이 단속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동래부에서 왜관에 게시한 문서에 일본을 ‘무법지국(無法之國)’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 정한론이 불거졌다(일본외교문서 6권). 이 내용은 조선 측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정한론자로서 즉각 정벌을 주장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과 농민들의 반발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도 정한론의 배경이었다. 정한론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 결정하기로 미뤄 놓았는데, 1873년 8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1년10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모두 일본은 외정(外征)에 나설 때가 아니라 국력을 더 기를 때라며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이와쿠라 등은 10월 23일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론을 폐기시켰고 사이고와 이타카기 등 정한론자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이때 이토도 ‘내치우선론’에 동조해 정한론을 반대하면서 오쿠보 등의 신임을 획득했다. 어쨌든 이토와 조선의 첫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게 시작했다. 

 

 

조선이 군란 겪던 임오년, 이토는 유럽서 헌법을 배웠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8호 | 20110515 입력

 

조선이 일본과 한·일수호조규라는 새 조약을 체결한 1876년까지만 해도 조선 역시 많은 기회가 있었다. 일본은 평민 출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내각 수상에 오를 정도로 일관되게 근대화의 길로 매진했다. 반면 조선은 근대적인 정치·사회체제 수립에 실패한 채 극도의 혼란에 시달렸다.
조·일 통상조약 체결 기념연회도. 1883년 7월 조선의 민영목과 일본의 다케조에 사이에 맺어진 조약 체결을 축하하는 그림이다. 이 조약에서도 조선의 관세주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⑧평민 이토, 수상이 되다


하급무사 아시가루(足輕)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필적할 만한 입지전적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몇 가지 있다. 그 몇 가지 요인은 일본 근대사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첫째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松下村塾) 출신에다 영국 유학 경험이란 교육과정이었다. 둘째는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란 점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것이 이토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막상 요시다 쇼인은 구마모토(熊本)의 도도로키 부베(轟武兵衛)에게 써 준 소개장에서 이토를 “제 수하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낮은 자…다른 이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토는 송하촌숙 출신이란 게 자기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훗날 요시다를 칭송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신분이 낮았던 이토로선 무사 중심의 봉건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 미래가 없었다.

 

이토가 요시다 쇼인의 존왕(尊王)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양이(攘夷) 사상을 저버리고 영국 유학 후 적극적인 개화론자로 변모한 이유다. 이토 같은 평민 출신에게는 무사 중심의 봉건제가 무너져야 미래가 있었다. 국가 제사장에 지나지 않던 천황 역시 존왕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정권을 장악해야 실질적으로 전국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존왕을 내세운 조슈번과 사쓰마(薩摩)번 연합세력이 천황을 명분 삼아 전국적 복종을 강요한 정치체제였다. 조슈번 출신인 데다 영국 유학 경험이 있던 이토는 출세가도를 달려 1875년에는 내무경(內務卿)의 지위까지 오른다. 이때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상의해 조선과 새 조약을 맺기로 하고 그 적임자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점찍었다.

1 구로다 기요타카. 강화도조약 체결의 주역 구로다는 취중에 부인을 찔러 죽여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2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과 일본 간에 새 조약이 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조선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3 이토 히로부미. 평민 출신이지만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일본은 3년 전인 1873년 이미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아직 조선을 상대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감행할 상황은 아니었다. 구로다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조선에 가자고 했을 때 이노우에가 거절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 내에서도 새 조약 체결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일본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이토와 함께 영국 유학을 했던 이노우에는 이토의 설득을 받고서야 구로다와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고종 13년(1876년) 1월 격렬한 반발에 부딪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고종은 개방에 적극적이었다
. 이때 구로다는 조선 대표 신헌(申櫶)에게 ‘재작년에 정한론이 일어 수만 명이 출병하려 했었다’고 위협하면서 미리 준비한 13개 조의 조약안을 내놓았다. 고종이나 핵심 관료들이 신조약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했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것을 정책의 대강으로 삼았고, 13개 조 조약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도 없이 무관 출신인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신헌은 전권을 사양하면서 세부 지침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나는 경을 장성(長城)같이 믿고 있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신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숙지되지 못한 상태에서 1876년 2월 12개 조관(條款)으로 이루어진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대부분 일본이 작성한 원안 그대로였다.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1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일본의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다”는 9관은 자주관세권을 포기한 것이고,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10관도 불평등조항이었다. 500여 년간 왜관을 통해 시종 우월적인 위치에서 일본과 통상했던 조선이 이때 굳이 불평등조약을 새로 맺을 이유는 없었다. 미국의 공격을 물리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개방이란 방향은 옳았지만 그 방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었다.

일본은 페리의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된 지 20년 만에 거둔 뜻밖의 성과에 고무되어 구로다에게 2000엔, 이노우에에게 1500엔의 상금을 주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전국적 규모의 호적이 있었지만 일본은 1872년에야 전국적 규모의 호적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때 황족(皇族:28명), 화족(華族:2900여 명), 사족(士族:무사:154만여 명), 평민(3100여만 명)으로 나뉘는데,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은 어느 정도 잔존시켰지만 사농공상의 구분이 없어지고 직업 선택과 다른 신분 간 혼인이 허용되면서 지배층은 크게 반발했다.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한 1876년에 칼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廢刀令)이 내려지자 ‘게이신토(敬神黨)의 난’이 발생한 것을 비롯해 그해에만 하기(萩)의 난, 아키즈키(秋月)의 난 등이 잇따랐다. 이듬해에는 정한론을 주창했던 메이지 정부의 참의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일으켜 서해도(西海道)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이끄는 정부군 6만 명과 사이고군 4만 명이 맞붙은 커다란 내전이었다. 그해 9월 시로야마(城山)에서 사이고가 전사하면서 내전은 끝나지만 사이고군은 6200여 명, 메이지 정부군은 4600여 명이 각각 전사했다.

암살사건도 잇따랐다. 서남전쟁 때 정부군을 지휘했던 오쿠보는 1878년 5월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郞) 등 여섯 명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시마다 등은 ‘참간장(斬奸狀:간신의 목을 베다)’을 작성해 메이지 정부 실세들을 극렬하게 성토했는데, 이토와 구로다 기요타카도 간리(奸吏)로 규정지었다. 6인의 무사는 참수형을 당했지만 사이고가 영웅시되면서 이들도 영웅으로 추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해 8월에는 이와모토 도라키(岩本寅喜) 등이, 이듬해 5월에는 고바야시 마키타(小林牧太) 등이 이토 암살을 획책하는 등 암살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정부 내의 스캔들도 적지 않았다. 강화도조약 체결의 주역 구로다는 1878년 3월 만취 상태에서 귀가하다 자신을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을 칼로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을 게재한 단단진문(團團珍聞)은 판매 금지를 당했지만 소문은 급속히 번져 나갔다.

이런 내우외환 속에서도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방향만은 잃지 않았다. 그 요체는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이었는데, 의회를 설립하려면 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국민 참정권이란 개념조차 미미하던 시절이었지만 1876년 9월 메이지 천황은 원로원에 헌법 초안 작성을 명령했고, 1881년에는 10년 후인 1890년 의회를 개설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러자 민권 사상이 확산되면서 정한론자였던 이타가키(坂垣退助)가 ‘사민(사농공상) 평등’을 주창하는 자유민권론자로 부각돼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년) 이토는 훗날 총리가 되는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을 대동하고 다시 유럽으로 가서 헌법을 연구했다. 이토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예방해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의회 권한이 강한 영국식보다 황제 권한이 강한 독일식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독일 헌법학계의 권위자인 베를린대학의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Rudolph Gneist) 교수를 소개했다. 이토는 또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교수에게도 헌법에 대해 배웠다.

1883년 8월 귀국한 이토가 헌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던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의 예상과 달리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이 진압에 나섰고 일본 측에선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대위 등 30여 명이 전사했다. 이토는 천진(天津)으로 가서 1885년 3월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갑신정변 매듭을 위한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그중 제3항이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문서로 알려야 한다(行文知照)’는 상호파병 통보조항이었다. 바로 이 조항이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했을 때 일본군이 자동 출병하는 근거로 악용된다.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그해 12월 관제 개혁으로 신설된 초대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

평민 출신이 당대에 내각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해 말해 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조선 정벌에 나섰다가 몰락했던 것처럼 이토도 조선 침략에 나섰다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을 만나게 된다.

 

 

이토가 日헌법 완성한 순간, 아시아의 고통은 시작됐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19호 | 20110522 입력

 

이토 히로부미는 명분과 실리를 다 가지려던 정치가였다. 근대 헌법을 만들면서 의회 중심이 아니라 천황 중심의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즉각 병합에는 반대한다면서도 일본의 한반도 강점 논리를 만들었다. 그런 모순된 정치행위의 종말이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나는 것이었다.
메이지 헌법 발포식. 이 의식으로 일본 천황은 허수아비인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⑨이토의 이중성


일본은 1873년(메이지 6년) 2월 11일을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즉위일이라고 선포했다. 현재 신무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천황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초대 천황에게서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이른바 기원절(紀元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 헌법 발포식을 했다. 메이지 천황은 궁중 삼전(三殿)에서 하늘과 역대 천황들에게 헌법을 고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해 이세(伊勢)신궁과 야스쿠니(靖國)신사 등으로 사신들을 보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무덤에도 이 사실을 고했다.

헌법 발포식의 하이라이트는 메이지가 새 정전(正殿)에서 전통 복장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내각 총리대신에게 헌법을 하사하는 의식이었다. 헌법이 천황이 국민에게 내리는 선물이란 의미였다.

1 이토는 일본 태자를 방한시켜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과시하려 했다. 왼쪽이 일본 태자 요시히토, 가운데가 영왕 이은. 2 조선 복장의 이토 부부. 윗줄 가운데가 이토, 아랫줄 왼쪽에서 둘째가 부인 우메코. 이토는 풍류통감이라 불릴 정도로 주색에 심취했다.
이 행사로 메이지는 허수아비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메이지 헌법을 하사받은 총리대신은 1876년 한·일 수호조규를 체결했던 구로다 기요타카(<9ED2>田<6E05>隆)였다.

 

그러나 사실상의 주역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1889년 1월 헌법 제정에 관한 공으로 최고훈장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헌법도 이토가 만든 것이었고, 헌법 발포 의식도 이토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토는 헌법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갖기 위해 내각 총리대신에서 보다 한가한 추밀원(樞密院)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의회의 권한이 강한 영국식 헌법을 구상했던 민권론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를 일축하고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고 규정한 전제 군주헌법을 만들었다. 메이지 헌법 제3조는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고, 제4조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는 조항이다.

 

훗날 아시아의 많은 민중은 물론 일본 민중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단초가 12조의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는 조항이다. 원래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고 돼 있었다.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에 군부 통제권이 있게 되지만 이토가 천황에게 ‘육·해군의 편제와 상비군 숫자’ 결정권까지 넘기면서 군은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쇼와(昭和·1926~89년)시대에 군부가 내각의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만 소속된다는 통수권(統帥權) 개념으로 각종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역으로 일본군이 벌인 모든 침략전쟁은 천황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자동적으로 성립한다. 1890년 7월 1일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만 스물다섯 살 이상으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한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는데, 전체 인구의 약 1%에 불과했다.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첫 의회가 열렸다. 귀족원 의장은 평민 출신의 백작 이토 히로부미였고, 중의원 의장은 향사(鄕士·지방토착무사) 출신의 나카지마 노부유키(中島信行)였다. 이처럼 일본은 헌법 공포와 총선거를 통해 근대국가에 한발 더 다가갔는데 이토가 이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면서 전제 군주헌법을 제정하고 귀족원 의장이 된 것처럼 상호 모순된 정치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쓰라 다로(桂太<90CE>) 등의 개전론에 맞서 외교협상론을 주장해 ‘공러병(恐露病)’에 걸렸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토의 대러시아 협상론의 요체는 만주와 한반도를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었다. 만주는 러시아가,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자는 것으로서 야마가타의 군사 해결 노선과 방법만 달랐다.

 

1903년(고종 40년, 메이지 36년) 4월 이토는 야마가타의 저택에서 가쓰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90CE>)와 회담을 하고 4개 항을 합의하는데, 3항이 ‘대한제국에 대한 우선권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한다’이고, 4항이 ‘일본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대한제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든 외교든 수단이 문제일 뿐 대한제국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일본의 강점이란 것이므로 이토는 한국과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내각은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하야시 주한 공사만으로 외교권을 뺏는 대과제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칙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만한교환론’의 구상자 이토가 칙사가 되면서 한국과의 악연이 본격화된다.

이토는 1905년 11월 고종을 알현해 외교권 박탈을 통보하는데, 이토가 귀국해서 천황에게 보고한 대한제국봉사기사적요(大韓帝國奉使記事摘要)는 ‘위장된 온건론자’ 이토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을사늑약에 고종 황제가 불만을 표시하자 이토는 “폐하는 불만을 말씀하시지만 제가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대한제국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폐하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은 “대외관계 위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그 내용의 실제를 취하는 대신 한국에도 형식적인 명목은 남겨 달라”며 “예를 들면 사신의 왕래”라고 말했다
. 형식상의 외교권만이라도 달라는 고종에게 이토는 “외교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이 조약을 거부할 경우 “한층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토는 다시 한국민의 국적(國賊)이 되었다.

이토의 통감정치는 모순의 극치였다. 이토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초대 조선 총독이 되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이 주장하는 즉각 병합론(倂合論)에 반대하고 점진 병합론을 주장했다. 한국을 강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병합을 원치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토는 1907년 10월 16일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훗날의 다이쇼 천황)을 방한시켰다. 이때 순종(純宗)은 황태자 영친왕과 인천까지 가서 영접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데, 이런 행사를 통해 이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않을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2대 총독)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전국 각지의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한 데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이토는 또 풍류통감이라고 부를 정도로 주색(酒色)에도 심취했는데,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그의 한시(漢詩)가 이런 성향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통감부 시절 서울 묵정동 일대에 신마치 유곽(新町 遊廓),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일대에 모모야마 유곽(挑山 遊廓) 같은 기생촌이 번성하면서 일종의 예인(藝人) 문화였던 조선의 밤문화가 창녀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토의 점진 병합론은 일본과 한국의 매국친일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1909년 1월 순종이 남쪽의 대구·부산·마산과 북쪽의 개성·평양·신의주 등을 순행(巡幸)할 때 이토는 직접 호종하기도 했는데, 도야마 미쓰루·우치다 료헤이 등의 흑룡회와 이용구·송병준 등의 일진회는 한국인들의 존황심(尊皇心)만 높였다면서 이토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의 조선병합의 이면(朝鮮倂合之裏面)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병합에 이의가 없다고 동의했다.

이토는 1909년 6월 14일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79B0>荒助)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토는 그해 10월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뤼순(旅順)의 203고지를 둘러보고 ‘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운운하는 시로써 일본 근대사의 감회를 토로했다. 그리고 창춘(長春)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하얼빈 역사(驛舍)의 찻집에서 대한국의용군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安重根)이 이웃 국가에는 큰 고통이었던 일본 근대사의 성취와 이토의 모순된 정치행각을 끝장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상반된 길을 걷던 두 나라의 근대사가 러시아령인 하얼빈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근대화 성공의 여세로 이웃 국가를 강점하려던 가해자 일본에 던진 피해자 조선의 저항이었다. 의병으로 변신한 교육자 안중근이 제국주의로 변한 근대 일본에 동양 평화란 길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하얼빈역의 이토 저격 지점. 삼각표점 하나만 표시해놓은 게 현재 중국 역사 인식의 수준을 잘 말해준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⑩안중근, 일본 근대의 심장을 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의장대의 사열을 요청하자 이토는 예복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사양하다가 거듭 요청하자 받아들였다. 하얼빈 역사의 한 찻집에서 이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찻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동정을 살피다가 스스로 ‘어느 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십분 생각했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그 무렵 이토가 하차하자 각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 연주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귀를 때렸다. 그때 분한 기운이 터져 일어나고 3천 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일은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인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자는 이처럼 기뻐 날뛰면서 아무런 꺼림도 없는데, 죄 없고 어질고 약한 인종은 거꾸로 이런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1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이토.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제국주의로 향하는 일본 근대사의 심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2 안중근 유묵. 단지동맹회를 결성하며 자른 왼손 무명지의 마디가 선명하다.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큰 걸음으로 용감하게 걸어나가서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까지 갔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돌아오는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작은 노인이 이렇게 염치도 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돌아다니는가……하고 곧 단총을 뽑아 그 오른쪽을 향해서 4발을 쏘았다.(안응칠역사)

파란만장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예순여덟 인생은 러시아령 하얼빈에서 서른 살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에게 이렇게 끝이 났다. 안중근은 자서전(안응칠역사)에서 “체포될 때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大韓萬歲)’를 세 번 외친 후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잡혀 들어갔다”고 썼다.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이토를 저격한 것이 한국에 손해였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토를 수행했던 일본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가 “범인은 한인이며 곧 체포했다고 고했더니 이토가 이를 이해하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室田義文 聽取書)는 목격담이 이런 견해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토의 사위 스에마쓰 노리즈미(末松謙澄)는 강점 후의 식민지 통치구조에 대한 이토의 구상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하고, 양반 중에서 50인의 원로를 호선(互選)해 상원을 조직하고, 한국 정부대신은 한국인으로 조직해 책임내각이 되게 하고, 정부는 부왕(副王)의 지배를 받는다”(末松子爵家所藏文書)는 것이다.

이토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구상이 실현되었을지 여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이 역시 명분과 실상이 달랐던 이토의 모순을 보여준다. 부왕(副王)이란 군주를 대신해 식민지와 속주(屬州)를 통치하는 총독(viceroy)을 뜻한다. 일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는 한인 내각으로 원활한 통치는 불가능했다. 대국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서도 한 번도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고종 아래 있었던 이완용 친일내각도 용납받지 못했는데 일본 총독 아래 있는 내각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종·순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을 강점하는 대신 입헌군주제를 설립해 의회에 입법권과 내각 조각권을 주는 정치개혁이라면 모를까 한국을 강점하는 순간 일제가 구상한 어떤 통치조직도 한국민의 격렬한 반발을 사게 되어 있었다. 이토의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매국 친일파들은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반발은 그만큼 더 거셌을 것이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이토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기술했는데

 

‘한국 민 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늑약)을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이 중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에 이토가 직접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나머지는 모두 직접 책임이 있었다. 을사늑약과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은 모두 이토가 주도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선전한 것도 이토였다. 안중근 수사 기록인 공판시말서(公判始末書)에 따르면 안중근은 “‘의병’ 참모중장(參謀中將)으로서 결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병’과 ‘동양 평화’가 거사의 핵심 이유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의병전쟁의 연장선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계봉우(桂奉瑀)는 안중근전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 정거장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적장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고 대승리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이 자서전에서 “1907년 이토가 한국에 와서 7조약을 강제로 맺고, 광무 황제를 폐하고 군사를 해산시켰다……나는 급급히 행장을 차려 가지고 가족들과 이별하고……러시아 영토로 들어가……”라고 회고했듯이 고향 진남포에서 삼흥(三興) 학교와 돈의(敦義) 학교를 운영하던 교육자 안중근을 의병 중장으로 만든 인물은 이토 자신이었다.

의병에 가담한 안중근은 1908년 6월께 러시아령 연해주 연추(煙秋·클라스키노)의 의병창의소를 떠나 두만강 하구의 수도(首塗)를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안중근은 함경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접전했는데, 박은식은 안중근전에서 이때 세 차례 전투에서 50여 명을 사살하고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때 생포했던 포로를 풀어주었다가 의병 장교들로부터 항의를 받는데, 그 직후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숱한 고초를 겪는다.

숱한 고초 끝에 러시아령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연추의 하리(下里) 마을에서 김기룡(金起龍)·황병길(黃炳吉)·백규삼(白奎三) 등 11명의 동지들과 왼손 무명지 한 마디를 자르는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동지들은 붉은 선혈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란 네 글자를 썼는데, 안중근은 재판에서 동의단지회가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결성한 단체라고 진술하고 있듯이(공판시말서) 이토 저격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손가락을 끊은 이유도, 이토를 저격한 이유도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서였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동양에서 일본의 위치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고 시인했을 정도로 일본 근대사의 성취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정책은) 과거 외국에서 써오던 수법을 흉내 내는 것으로 약한 나라를 병탄하는 수법”이라고 비판한 대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길은 동양 평화주의자 안중근의 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는데, 그 핵심은 한·중·일 세 나라가 각기 독립국을 유지하는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성취하자는 것이었다. 여순항을 개방해 일본·청국·한국의 3국 대표가 공동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여순항에 3국 대표를 파견해 세계평화회의를 조직하자고도 주장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재판장 마나베(眞鍋十藏)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에게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정도 늦춰 달라”고 요구했고 히라이시는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이를 사실로 믿은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고 ‘①서문(序文) ②전감(前鑑) ③현상 ④복선(伏線) ⑤문답’ 순서로 구성된 동양평화론 집필에 전념했으나 일제는 전감 집필 와중인 1910년 3월 26일 약속을 어기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일본이 러일전쟁 때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약속해 놓고도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만주 장춘 이남을 점거했다”고 일본의 위약을 비판했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동양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 년 풍운이 어느 때에 그치리오”라고 탄식했다. 일제의 식민지 팽창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될 아시아의 고통스러운 미래를 정확히 예견했다. 그래서 안중근의 총성은 동양 평화란 높은 사상으로 제국주의라는 뒤틀린 길로 매진하던 일본 근대사에 던진 피압박 민족의 외침이었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장충단 이토 추도식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강제 합병으로 달려가던 정국에 여러 충격파를 던졌다. 매국친일파들은 공포심에 휩싸여 더욱 적극적인 합방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일제가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간도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10만 명 이상 조선 주민들의 처지도 극히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 예복 대열 맨 앞이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안중근의 이토 사살에 매국친일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통감부문서'의 헌병대 기밀문서[憲機]는 ‘이완용이 이토 공(公)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서 “이완용은 망국적 거괴(巨魁)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안응칠 제5차 진술내용')라고 비판한 것처럼 다음 표적은 이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마냥 위축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토에 대한 내각 차원의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헌병대 기밀문서[憲機: 2128호]에 따르면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3시45분까지 서울 장충단에서 이토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전·현 내각 대신과 황족 원로, 궁내부를 비롯해 각 부의 고등관과 육군 장교, 황후와 엄비(嚴妃)가 보낸 사신이 참석했다. 같은 문서에선 “그 성대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회(盛會)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공립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참석시켜 추도회장을 채웠던 ‘조작된 성황’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부(親衛府)의 보병 2개 중대를 참석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다.

1 백두산 정계비. 청나라는 토문(土門)을 두만강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추도식 직전 매국친일파들은 태황제 고종으로 하여금 통감관저에 마련된 이토 히로부미의 빈소에 가서 직접 조문하게 하려고 계획했다. '통감부문서' 1909년 11월 1일의 '태황제가 통감관저에 행림하신 내부 사정(太皇帝統監邸へ臨幸の內情)'이란 문서가 그 시말을 전해준다. 고종은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내가 직접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한다면 국민들이 어떤 감정을 갖겠느냐. 칙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국왕의 물품 등을 조달하는 승녕부(承寧府) 총관(摠管) 조민희(趙民熙)와 농상부장관 조중응(趙重應)이 짠 후 조민희가 ‘직접 조문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11월 2일 직접 조문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고종은 황후 민씨 사후 부인 역할을 하던 엄비(嚴妃)가 추도식에 직접 가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면서 상궁 김석원(金錫源)과 황태자 유모 2명을 보내는 것으로 조정했다.

 

고종은 11월 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왕위를 빼앗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했다.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2 간도협약의 일본 측 대표였던 특명전권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

3 간도협약의 청국 측 대표였던 외무부 상서회판대신 양돈언(梁敦彦).

4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간도를 조선 영토라고 확정지었다. 갑오개혁을 주도하다 아관파천 때 고종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경시총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소네(曾荒助) 통감에게 전한 경찰 비밀문서[警秘: 301호]는 11월 5일의 이토 국장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은 물론 한인도 조기를 게양했지만 한인들은 경찰의 경고 및 한성부윤의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는 내용이다. 오후 2시 장례식에는 1만여 명이 참석했지만 강제 동원된 84개 교의 학생 5000여 명이 포함되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준용(埈鎔) 부자,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탁지부 대신 고영희(高永喜), 이하영(李夏榮)·민영기(閔泳綺)·권중현(權重顯)·이지용(李址鎔)·윤웅렬(尹雄烈)·임선준(任善準) 등 대한제국 강점 후 훈작을 받는 매국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조문(弔文)과 순종 비의 삼촌인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 명의의 조사가 낭독되었다.

이완용 내각과 친일 경쟁을 벌이던 일진회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서대문 밖 연설당(演說堂)에서 회장 이용구가 회원 300여 명을 이끌고 참배하고 한석진(韓錫振)이 제문을 낭독하는 등 따로 행사를 치렀다. 일진회는 이토와 이노우에(井上馨) 등 문치파의 점진합방론에 반대하면서 야마가타(山縣有朋)·가쓰라(桂太郞)·데라우치(寺內正毅) 등 무단파(武斷派)의 즉각합방론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일진회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와 일진회 고문이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같은 낭인들이 조직한 흑룡회(黑龍會)와 손잡고, 점진합방론을 주장하는 이토의 통감 사직 운동도 전개했던 터였다. 일진회는 이토 사망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여겼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 간도(間島)지역 조선인들이 큰 곤란에 처했다. 간도는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랴오닝(遼寧)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이다.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 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등에 따르면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길림·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돈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두 청국 관원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 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숙종 38년(1712: 강희 51년) 두 나라가 백두산 분수령에 “(양국 경계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세운 '백두산정계비'해석 문제가 불거졌다.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음과 뜻이 모두 달랐다.'청사고(淸史稿)'길림(吉林)지리지' ‘영안부(寧安府)’조에도 “훈춘강에서 동북으로 토문령이 나온다(琿春河, 出東北土門嶺)”며 토문을 만주 지역의 지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주민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함종어씨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했다.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돈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 탁본)'을 보내게 했다.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했다.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여서다.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다.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도문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되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할 것”(제1조)이라고 정해 토문(土門)을 도문(圖們)으로 둔갑시켰다. 1907년 12월 28일 하야시(林) 외무대신은 소네부통감에게 보낸 '한·청(韓淸) 국경 논쟁의 사적(史的) 배경 설명과 앞으로의 해결과제 지시'에서 청나라 진영(秦煐)이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한다고 말했는데, 일본 측은 이를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다.

1909년 9월 2일 일본의 고무라(小村) 외상은 소네통감에게 '청일간 간도 문제 해결에 따른 간도파출소 철퇴 대비 건'이란 문서를 보내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청국의 영토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 또 잡거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청국에 주고…간도 주재 파출소는 머지않아서 철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9년 10월 19일 통감부 총무장관 이시즈카(石塚)는 고다마(兒玉) 서기관(書記官)에게 '간도파출소 철퇴의 건'을 보내 “간도파출소는 이달 27일경 철퇴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국의 영토 간도를 불법적으로 팔아먹음으로써 현대 한국사의 지형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한 나라가 망할 때는 조짐이 있다. 먼저 내부에서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 등장한다. 안중근·이재명 등이 잇따라 등장하는 와중에서도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는 합방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에게 보내 합방 조건을 타진했다


1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조선은 건국 5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2 통감 관사.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와 소네, 데라우치가 살았다. 조선을 강점하는 데 성공한 데라우치 통감은 총독으로 승격된다. 3 송병준(왼쪽)과 이용구. 일진회는 일제의 사주를 받아 합방 청원에 나섰다. 4 이인직은 이완용의 지시로 고마쓰를 몰래 만나 합방 조건을 협상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⑫ 친일 경쟁


레닌이 아카시가 제공한 일본 군부의 비밀 자금을 수령한 것처럼 중국의 손문(孫文)도 일진회처럼 흑룡회의 지원을 받았다. 손문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는 도쿄의 흑룡회 총부(摠部)와 공동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손문은 중국의 자립과 근대화를 위해서 흑룡회와 손잡았다. 악마와 손을 잡았지만 영혼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일진회와 이완용은 영혼부터 팔았다. 흑룡회가 1930년 간행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는 서문에서 일진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을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 앞에 ‘고국을 팔아먹는 데 큰 공을 세운’이란 형용사를 넣었다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나마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큰 충격을 받고 잠시 몸을 사렸다. 통감부문서 메이지(明治) 42년(1909) 11월 10일자의 헌기(憲機:헌병기밀)는 ‘이완용이 서울 장동(莊洞) 김유정(金裕鼎) 소유의 300여 칸(1칸은 약 3m 정도) 가옥을 매수해 수리한 다음 이달 10일경에 이주할 예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트가 1887년 그린 그림.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것을 예견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30년(1448) 12월조는 “대군(大君)은 60칸(間), 제군(諸君) 및 공주는 5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주택 규모를 법제화했는데, 이완용은 대군의 다섯 배 규모의 집을 소유하려 한 것이다.

 

같은 통감부문서는 “이완용은 이토 공(公)의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어 그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중지하였다”면서 “그저께 이후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방문객을 일절 거절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일진회가 이토 사망을 호재로 삼아 합방 공작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자칫하면 합방의 공로를 일진회에 빼앗길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3일 대한협회와 정견협정위원회(政見協定委員會)를 열고 합방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대한협회가 반대하자 일진회는 그날 밤 재경(在京) 회원 200여 명을 소집해 총회를 열고 합방 제의를 전격 가결했다. 대한협회 고문이었던 일본 언론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의 언동에 관한 건이란 일본 경찰 비밀문서(警秘:제4417호) 등에 따르면 대한협회는 이완용 내각의 협조를 얻어 중추원(中樞院) 관제를 개혁해 중요 사건을 자문하고, 대한협회 회원들을 의관(議官)으로 임용하고, 각도에 유급 참사회(參事會)를 설치하려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협회는 이완용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목표였던 반면 일진회는 나라 자체를 팔아먹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12월 3일 오후 3시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陸軍大臣)이 조선 통감 소네(曾<79B0>)에게 보낸 일진회원의 한일합방 청원에 관한 건이란 비밀 전보는 ‘다음날 합방청원을 결행할 것’이란 사실을 전하고 있어서 일진회가 일본 군부의 하수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12월 4일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는 “100만 회원의 연명”이라면서 한일합방 성명서를 중외에 선포했다. 일진회는 각도 유생 30여 명과 대한상무조합(大韓商務組合) 같은 보부상 단체들을 동원해 분위기를 띄웠다. 그리고 한일합방 상주문(上奏文)과 청원서를 황제 순종과 통감 소네, 총리 이완용에게 전했다. 일본 낭인 조직 흑룡회가 간행한 일한합방비사에 따르면 순종과 이완용에게는 오전 9시에 우편으로 송부하고 소네 통감에게는 이용구가 직접 출두해 사타케(佐竹) 비서관을 통해 전달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7일자는 일진회의 합방청원 성명에 대해 일반 인민들은 ‘일진회는 이미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므로 어떤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한국민의 행위가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는 여론을 전하고 있다. 같은 날 이완용 내각은 일진회의 합방 청원을 각하시켰다.

 

일진회는 다음 날 다시 합방청원 상주문을 우편으로 보냈고 이완용 내각은 다시 각하시켰다. 그리고 대한협회·한성부민회 등을 동원해 일진회의 합방 청원에 반대하는 국민대연설회를 개최시켰다. 일진회의 노력으로 합방이 달성되면 최대 공로자는 일진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합방론 때문에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경시청은 12월 9일 일진회장 이용구와 국민대연설회 회장 민영소(閔泳韶), 국민대회 회장 김가진(金嘉鎭)을 불러 ‘모든 집회 연설 및 선언서 반포를 금지한다’고 명령했다.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이 합방의 공을 가지고 싸우는 와중에 이완용 처단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만 19세의 기독교도 이재명(李在明)은 김정익(金貞益)·이동수(李東秀) 등과 매국친일파를 제거해 망국을 막으려고 계획했다.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처단하기로 뜻을 모았다.

 

12월 22일 오전 11시30분쯤 이재명은 종현(鍾峴) 천주교회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에 참석했던 이완용을 칼로 세 차례나 찔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재명은 합방론이 일자 ‘이용구를 불가불 죽여야 한다’고 했다가 뒤에 ‘이런 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이완용이다’라면서 마음을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용구보다 이완용이 더 큰 원흉이라고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재명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매천야록은 “이때 서울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조중응(趙重應)·박제순(朴齊純) 등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인 검사 이토(伊藤)는 이재명에게 교수형, 김정익·이동수(궐석 재판) 등에게 15년 형을 내렸다.

 

유학자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이재명은 사형이 선고되자 “내가 죽으면 마땅히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서 장차 일본에 큰 화가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다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0년 10월 4일자에선 이재명이 1910년 9월 30일 오전 11시에 사형당했다고 전한다.

일진회에 공을 빼앗길까 우려하던 이완용이 고안해낸 묘수는 비서 이인직(李人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혈의 루의 작가였던 이인직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는 1934년 11월 25일부터 3회에 걸쳐 ‘일한병합(日韓倂合) 교섭과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 수완’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錄)가 필자다. 육군대신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30일 소네의 뒤를 이어 통감으로 임명되었지만 7월 2일에야 부임했다. ‘즉각 합병론자’인 육군대장을 통감으로 삼은 것은 대한제국 강점이 시간문제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이완용은 8월 4일 밤 11시에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내 합방조건에 대해 협상했다
. 이인직은 1900년 2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정치학교에 입학하는데, 고마쓰가 이 학교 교수였다. 이 학교에서 이인직은 소론(少論) 출신의 친일파 조중응과도 사귀게 된다.

 

1903년 2월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을 거부한 채 미야코(都) 신문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던 이인직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했다. 1906년 2월 송병준이 창간한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었다가 다시 이완용의 비서가 된다. 일진회와 이완용 사이에서 이완용을 선택한 것이다.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합방 당론이기도 했다. 이인직은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될 뿐”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

 

이완용이 이인직을 몰래 보낸 이유는 합방 후 자신들의 처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쓰는 “병합 후 한국의 원수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으시게 된다… 또한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에게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재산도 받게 된다”는 방침을 전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이인직은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일본 정부의 대체적 방침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 총리가 걱정하는 정도의 어려운 조건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인직의 보고를 들은 이완용이 드디어 합방 추진에 나섰다.

 

 

 

 

 

1 조선총독부장. 2 3대 조선통감 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후 조선총독 자리엔 군인들이 부임하는 게 원칙이 되었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⑬환호하는 수작자들


총리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한밤중에 몰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매국(賣國) 조건에 대해 협상하고 간 사나흘 후 이인직은 밤중에 다시 그를 찾아갔다. 이완용은 이인직을 통해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다면서 이런 방침이라면 병합 실행은 그렇게까지 곤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자칫 일진회에 매국의 공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난 것이다.

 

이완용이 서두르자 고마쓰는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교섭 등은 아주 싫어한다’면서 “요구 같은 말을 꺼내거나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해쳐 장래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말고 주는 떡이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고마쓰가 1934년 경성일보(京城日報)에 쓴 ‘데라우치(寺內) 백작의 외교 수완’의 핵심은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를 상호 경쟁시키는 것이었다. 그간 일본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이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이미 그해 4월 총리 가쓰라, 외무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한국 병합에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한국을 병합하려면 먼저 격렬하게 저항하는 의병을 진압해야 했기에 8월 14일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실시계획’을 세웠다. 의병이 가장 활발했던 호남을 중심으로 충청도와 영남까지 일체의 의병을 뿌리 뽑겠다는 군사계획이었다. 계획의 제12조는 ‘토벌대는 전 지구 내를 빠짐없이 수색하여 전후종횡으로 행동하고 특히 산지와 촌락은 엄밀히 수색을 실행한다’고 규정했다. 제14조는 ‘거주 남자(20세 이상~60세 미만)를 대조·조사하고 각 가옥을 임검(臨檢)한다’고 규정해 전체 주민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같은 사령부에서 9월에 보고한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는 영남과 호서(충청)에도 의병이 자주 출몰하지만 특히 호남은 “다른 도에 비하여 적세가 창궐하고 수괴가 각지에 할거해서 그 세력이 강대하다. 대병력으로 일거에 이를 탕진하는 방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라남북도의 한국인은 청일·러일전쟁에 있어서 한 번도 우리 군대의 활동을 보지 못해서 그 진가를 모른다. 문록(文祿: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해서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단연 대토벌을 결행, 파견대의 전력을 기울여서……남쪽 벽촌과 산간도서의 한국인들에게까지 황군(皇軍)의 엄숙하고 용감한 무위(武威)에 놀라게 해서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 ‘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南韓暴徒大討伐實施報告)’)”

남한 대토벌을 임란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엿보인다. 일본군의 통계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사상자가 2만1485명이라고 전하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누락된 숫자다.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로 전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후 매국 친일파들을 이용해 병합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고마쓰로부터 보고를 받은 통감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통역관을 보내 통감 저택으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완용은 이때 다시 일진회의 허를 찔렀다. 이인직의 일본 정치학원 동창이자 일본어에 능했던 농상무대신(農商務大臣) 조중응을 대동하고 데라우치를 방문한 것이다. 소론 조중응을 끌어들여 집권 노론이 주도하는 합방 공작을 야당인 소론 일부에 떠넘기려 한 것이다. 1910년 8월 16일 이완용·조중응은 일본의 호우 피해를 위문한다는 표면적 핑계로 데라우치를 방문했다.

고마쓰는 “통감 저택 내의 한 방에서 데라우치 통감은 이·조 두 대신을 면회하고, 일·한 병합의 피할 수 없는 사정과 장래의 처분 안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그 대요를 필기한 각서를 건넸다”고 전하고 있다. 합방 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각서를 받은 두 사람이 30분 만에 통감 저택을 나왔다. 혹시 병합 담판이 아닐까 주목하던 내외 신문·통신들도 30분 만에 ‘500년 종사’를 파는 매국협상이 이뤄질 수는 없다고 보고 위로 방문으로 여겼다.

 

고마쓰가 전하는 유일한 이견은 이완용 등이 “한국 원수(元首:조선 황제)의 칭호를 대공(大公: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문의가 있어 일본 측은 오히려 구래(舊來)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효종 국상 때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예법을 적용해 1년복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선 국왕을 임금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계급으로 여겨왔던 인조반정 이래 노론 당론이 다시 확인되는 셈이었다.

 

두 대신이 데라우치를 만난 지 6일 만인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군사 강점 상태에서 매국 친일파들과 맺은 조약이므로 굳이 황제의 재가가 없다는 사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불법 조약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등에 따르면 두 달이 채 못 된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의 각서를 토대로 만든 이른바 ‘한일병합조약문’ 제5조에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한 데 따른 포상이었다. 76명의 수작자(授爵者)들을 분석하면 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 인사들이다. 가장 고위직인 후작은 이완용을 제외하면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였다. 해평윤씨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였고 반남박씨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또 하나는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었다.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적을 분석하면 남인은 없고,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후작에서 자작까지 31명의 명단과 소속 당파는 다음과 같다(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명치 43년(1910),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대정 2년(1913), 조선귀족약력(朝鮮貴族略歷:1929년께)등을 참조해 작성한 것임) 

후작 이재완(李載完:대원군 조카)

후작 이재각(李載覺:왕족)

후작 이해창(李海昌:왕족)

후작 이해승(李海昇:왕족)

후작 윤택영(尹澤榮:본관 해평, 순종 장인, 노론)

후작 박영효(朴泳孝:본관 반남 철종 사위, 노론)

후작 이완용(李完用:본관 우봉, 노론)

백작 이지용(李址鎔:본관 전주, 노론)

백작 민영린(閔泳璘:본관 여흥, 순종비 민씨 오빠, 노론)

백작 송병준(宋秉畯:본관 은진, 자칭 노론)

백작 고희경(高羲敬:본관 제주, 중인)

한일합방에 찬성한 내각 각료들이 일본을 견학하고 있다. 아래에서 둘째 줄 왼쪽 여덟째가 대원군의 아들 이희(이준용 부친), 두 사람 건너 이재각, 한 사람 건너 순종의 장인 윤택영. [사진가 권태균 제공]


자작 이완용(李完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이기용(李埼鎔:본관 전주, 노론)

자작 박제순(朴齊純:본관 반남, 노론)

자작 조중응(趙重應:본관 양주, 소론)

자작 민병석(閔丙奭:본관 기흥, 노론)

자작 이용식(李容植:본관 한산,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김윤식(金允植:본관 청풍, 노론)-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권중현(權重顯:본관 안동,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하영(李夏榮:본관 경주,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근택(李根澤:본관 전주, 노론)

자작 임선준(任善準:본관 풍산, 노론)

자작 이재곤(李載崑:본관 전주, 노론)

자작 윤덕영(尹德榮:본관 해평, 노론, 순종 처숙부)

자작 조민희(趙民熙:본관 양주, 노론)

자작 이병무(李秉武:본관 전주, 무과 출신)

자작 이근명(李根命:본관 전의, 노론)

자작 민영규(閔泳奎: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소(閔泳韶:본관 여흥, 노론)

자작 민영휘(閔泳徽:본관 여흥, 노론)

자작 김성근(金聲根:본관 안동, 노론)

자작 이상은 소론 조중응 외엔 노론 일색이었다. 송상도(宋相燾)가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강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작을 거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작위를 거부한 조정구(趙鼎九)·민영달(閔泳達)·한규설(韓圭卨) 같은 노론 인사들도 있었는데 모두 남작이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 점령과 고종의 무능에 집권 노론의 매국 당론이 더해 멸망했다.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였다. 그러나 역사는 음지에서도 꽃을 피운다. 음지일수록 그 꽃은 더욱 찬연하다. 이런 폐허 속에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제의 싹이었다.(망국의 몇 풍경끝. 다음 호부터는 ‘절망을 딛고서’가 시작됩니다)

 

구한말 한반도를 바라본 해외의 시선..외국인 식자층 조선 찬양론자 많았다



우리가 열강의 뒷발에 차이던 구한말에 이미 한국인의 매력도는 충분히 높았고 많은 서구인이 이를 알아봤다는 증거가 기록 곳곳에 남아 있다. 구한말 한국은 경쟁력이 없었다는 주장은 일본이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조선을 직접 경험했느냐, 남의 말만 듣고 판단했느냐에 따라 조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 "조센진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 


부정적 의견은 대충 이렇다.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겁이 많다.' '느려 터지고 잠이 가득한 눈매를 가졌다.' '스스로 통제하는 자질이 없다.' 그랬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잠갔던 문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서구문명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더욱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식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세계열강, 특히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하기 위해 조선의 이미지를 깎아내렸다. 일본은 "조선인은 열등 민족이어서 자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선전했으며 세계는 일본의 말을 믿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조지 캐넌은 '나태한 나라 조선'(1905년)에서 조선인을 '몸도 옷도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이라고 표현했다. 캐넌의 친구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악평에 영향받아 '조선은 자치가 부적절하다'고 확신했다. 세계열강들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쑥덕인 끝에 조선인을 '자치가 부적절한 민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조선 찬양론자들의 출현 


'조선'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지자 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과 긴밀히 교류했던 외국인들 중에는 조선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영국 기자 프레드릭 매킨지는 "조선인들은 친절하고 정직하며 사랑받아야 할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조선인을 '열등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은 과대평가하는 반면 조선인은 과소평가했다"며 "조선보다 더 열등한 민족이 4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키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도 조선의 청년 여행가이드와 우정을 나누며 조선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당초 일본의 주장에 따라 조선이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다고 믿었던 그는 조선을 둘러보고 나서 "조선인들은 머리가 명석하다. 이들이 동면에서 깨어나면 독창적 탐구심으로 불타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2년간 도쿄에 머물다 조선의 미국 공사관으로 부임한 윌리엄 샌즈는 일본과 조선에 대해 통달한 인물이었다. 다음은 그가 조선을 분석한 내용이다. 


"일본인은 예의바르고 질서 있는 국민이기는 하나 다른 사람을 기죽이는 습관이 있고, 지구상에서 가장 매섭고 빠르게 주먹질하며 분개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인보다 더 다스리기 쉬운 백성은 없다. 이들은 절망적으로 학대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다. 비겁하다는 말도 옳지 않다.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이 침입했을 때 수병들에 항거한 사람들은 '호랑이를 때려잡는' 조선인들이었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농민들이었다. 일관되고 정직한 통치만 이루어졌다면 조선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다."


○ 꽉 막힌 사람들의 변치 않는 '조선 폄훼' 


이렇듯 조선인들을 섬세하게 관찰했던 서구인들은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 느낀 대로 썼다. 그러나 조선의 겉만 핥고 돌아간 서구인들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틀에 박힌 인상을 가졌다. 


영국의 정치인 조지 커즌이 본 조선인은 이렇다. 


"일본 봉건제의 남성적 기개가 부족하고 무기력하며 고집불통이다. 일본인에 비해 크고 건장하며 잘생겼으나 무관심하고 유약하다." 조선인이 '나태하고 무기력하다'는 인식은 그로부터 30여 년 후 영국인 소설가 헨리 드레이크의 글에서도 보인다. 영제국주의의 우월감과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두 사람은 조선에 대해 잘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조선인은 개선의 여지가 없으므로 우등한 종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조선을 알게 되면서 의견을 바꾼 경우도 많다.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 민속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조선을 처음 둘러본 뒤 '전근대적 조선'을 한탄하고 일본의 근대성을 예찬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과 교류하면서부터 그는 차츰 '문명과 독립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치하의 식민지인기도 했던 그는 조선인과 상호교류가 깊어질수록 조선의 비극을 인식하고 자신이 처한 식민적 정체성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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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변조되고 날인도 없었다



'합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뉴스뱅크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시사저널 > 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두 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조선 국왕의 비준서. '대조선국 주상'이라는 직함을 쓰고 그 아래 날인했다. 러일전쟁 후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조약들도 이런 형태의 비준서가 있어야 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① 조약 관계 수립 초기의 '온전한' 조약들

국제법상 조약(Treaty)은 두 나라의 국가 원수가 각기 협상 대표를 선정해 그에게 전권위임장을 수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위임장을 소지한 두 나라 대표는 합의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 위임장을 보인 다음, 협상에 들어가 합의 결과를 조약문으로 작성해 각기의 직명, 이름을 쓰고 사인 또는 날인하는 순서를 밟는다. 그 다음에 국가 원수가 그 조약문을 받아보고 잘못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비준서를 발부해 효력을 발생시킨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시작된 이러한 절차와 형식은 지금까지 국제 사회에서 그대로 준수되고 있다. 국교가 수립된 나라 사이에는 행정적 편의를 위해 주재 공사(legation)와 외무대신의 책임 아래 국가 원수의 비준서 발부를 생략하는 약식 조약(Agreement, Arrangement)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단, 이는 국권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의 사안에 한했다.





1882년 8월7일자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조선 국왕의 사죄 국서의 어새 날인 부분. ⓒ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과 일본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의 체결로 조약에 의한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이다. 이 조약 체결 당시 조선측은 일본측이 가져온 초안에 대해 최혜국 조관을 제외할 것을 요구하고, 나머지 12개 중 9개 조에 걸쳐 문안 수정과 용어 변경을 요구할 정도로 능동적이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는 달리 개국·개화의 뜻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물론 양국 황제의 비준서 발부로서 효력을 발휘했다. < 사진 1 >

 

불평등 관계는 6년 뒤 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일본측이 교관 피살과 공사관 소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에 물어 압박을 가하면서 생겼다. 이때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고 관세 자주권도 잃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일본은 제물포조약(1882), 세칙(稅則)에 관한 조약(1883) 그리고 갑신정변 후에는 한성조약(1886) 등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 조약들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제물포조약, 한성조약 등은 일본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사죄·사과의 뜻을 담은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로서 비준서에 대신했다. < 사진 2 >

1880년대 일본과의 조약 관계는 이처럼 어느 것도 요건을 미달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측이 요건 충족을 더 강하게 요구했다.

 

한성조약 체결 때 조선 대표(경주김씨 김홍집)가 위임장을 잊고 회담장에 오자 일본 대표(井上馨)는 이를 가져올 때까지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러한 '준법' 태도는 한반도에 대한 청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조금씩 밀어내는 외교 전략의 성과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실하게 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의 충실한 이행을 추구했다. 각 조약들의 내용을 분류한 편람 형식의 < 약장합편(約章合編) > 을 여러 차례 편찬 간행해 실무자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이는 약소국으로서 조약 관계를 통해 독립국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해가려는 '성실 외교'의 모습으로, 일본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대조선 대일본 양국 맹약'. 군주의 비준서가 없는 강제 조약의 최초 사례이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청일전쟁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 일본의 태도

일본은 1880년대 후반에 징병제를 확대 시행하면서 국가 예산의 7할을 군비 확장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청국과 결전을 벌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포석이었다.

 

1894년 6월 초, 동학 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동시 출병했다. 청군이 동학 농민군의 활동지와 가까운 아산만에 상륙한 반면, 일본군 1개 여단 8천여 병력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명백한 내정 간섭이자 주권 위협의 사태였다. 이 난입에 대해 군주와 정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일본군은 7월23일 새벽 0시30분에 1개 대대를 경복궁에 무단 진입시켜 왕을 감금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충남 성환 근처에 있는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1880년대 중·후반에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설한 전신선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관리 총책인 조선 군주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경복궁 바로 앞에 있는 전신국을 장악했다. 첨단 통신 시설의 장악은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측은 이 침략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구성해 국왕 몰래 외부대신과 '잠정합동조관' '대조선 대일본 동맹'이라는 조약들을 체결했다.

< 사진 3 > 이것들은 군사적 협조에 관한 것으로 국권에 저촉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약식을 취해 군주가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약식 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사태는 이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왕비 살해라는 극악한 만행이 바로 뒤를 이었다.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전쟁이 끝난 후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놓게 되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만은 고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신선 관리를 위한 1개 대대 병력 잔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조선 군주 고종은 완전 철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대본영은 왕비를 살해하는 것으로 위협을 가했다.

 

이 만행은 대원군을 앞세워 새벽 4시까지 종결 지워 대원군이 한 것처럼 꾸며졌던 것인데, 시간 계획에 차질이 생겨 한 시간 반이나 늦게 동이 튼 뒤에 이루어지면서 일본인들이 주범이라는 것이 드러나 일본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러일전쟁과 동시에 강요된 '의정서'의 첫 장과 끝장. 앞부분에 위임 사실이 언급되고 마지막에 양국 대표의 서명 날인이 보인다. 비준서 없는 약식 조약이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러일전쟁과 함께 벌어진 국권 탈취 사기극

왕비 살해의 만행이 국제 사회에 폭로된 뒤, 일본은 한반도에서 손을 빼고 유일한 전리품인 타이완에 대한 식민 체제 구축에 집중했다. 고종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틈을 타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을 임시 거처로 삼고 국정 주도권을 회복해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청국이 패전으로 물러나고, 일본마저 움츠러든 상황은 대한제국에게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 미국 워싱턴D.C.를 모델로 한 서울 도시 개조 사업이 이루어져 서울 거리에 전차가 달렸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 서북철도(서울~의주) 부설 공사가 시작되고,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투자도 이들로부터 약속받았다.

영국이 1899년 금 본위제로 바꾼 뒤, 한국은 금광 개발에 많은 이점이 있어 유럽 자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본 공사가 본국 정부에 한국의 변화를 보고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중립국 벨기에의 외교관들로부터 자문을 받으면서 적십자사 등 각종 국제 기구 가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타이완 식민지 체제 구축 중에 러시아와 전쟁을 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최선발대가 이번에도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10년 전에 미수에 그친 한국의 보호국화가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서울에 진입한 1개 사단 병력은 한국 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상주하면서 조약 강제를 지원했다. 국권 관련 조약들은 시종 이 주차군의 무력 시위 아래 강요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5개 조약을 강요하면서 국권을 하나씩 앗아갔다. ①의정서(1904. 2.23) ②제1차 일·한 협약(1904. 8.22) ③제2차 일·한 협약(을사조약, 1905. 11.17) ④일·한 협약(1907. 7.24) ⑤한국 병합 조약(1910. 8. 22, 29) 등이다. 이 조약들 가운데 한국 황제의 비준서를 갖춘 것은 하나도 없다. 국권 관련 사항을 국가 원수의 의사 표명인 비준서가 없이 약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법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강제로 이루어진 조약을 서구 열강에 알리는 과정에서 문서 변조 행위를 일삼았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①을 내놓았다. 한반도의 여러 곳을 군사 기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싫지만 제3조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어 부득이 이를 허용했다. 8월 하순에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②를 내놓았다. 이 협정은 '제1차 일·한 협약'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각서(memorandum)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제3항에는 한국 정부가 타국과 외교 관계를 가지게 될 때는 사전에 도쿄의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는 외교 간섭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제1차 일·한 협약'으로 불리는 각서. 제목도 없고 대표 위임에 관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 사진 5 > 에서 보듯이 이 문건은 약식 조약에서도 반드시 밝히는 대표 선정과 위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세 가지 요구 사항만 나열한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 문서는 조약의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어본이 없다. 일본어로 작성된 것이 일본 외교사료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제1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Agreement)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②를 협조국인 영국·미국 정부에 알리기 위해 영어번역본을 만들면서 머리에 'Agreement'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 사진 6 > (* 당시는 영어 번역본 작성이 필수가 아니었다) 각서에 불과한 것을 조약으로 둔갑시키려 한 것이다. 각서는 '약속' 사항이 당사국 간의 문제에 그치는 반면, 조약은 약식이라도 제3국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 미국 정부는 실제로 이 'Agreement'에 근거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제2차 영·일 동맹,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국권 탈취를 노린 사기극이었다.

문서 변조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11월17일에 한국 정부에 대해 ③을 내놓았다.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보호 조약인 '제2차 일·한 협약' 첫 장과 끝장.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조약문에는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 < 사진 7 > 한국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조약이 제목이 없는 부실 문서라면 누가 믿겠는가? 영어 번역본에는 이 빈자리가 'Convention'이라는 단어로 채워졌다. < 사진 8 > 이 단어는 Treaty와 함께 정식 조약에 사용되는, 특히 보호 조약에 많이 쓰이는 용어였다.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생긴 하자를 감추기 위해 또 문서 변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제2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Convention)이 들어가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영국으로부터 7억 엔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얻고 있었다. 부실 조약의 결함이 노출되면 '문명국'의 반열에서 떨어져나와 채무국으로서 겪을 고초가 더 클 것이 뻔했다. 저들은 사후에 이런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조약의 이름에 제1차, 제2차라는 차수를 붙이기도 했다. '제2차 일·한 협약'을 둘러싼 일본의 범법 행위는 이것이 모두가 아니었다. 국왕과 대신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고종 황제 협상 지시설 유포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일본, 순종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시사저널 > 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19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이즈음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 < 사진 1 >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 < 사진 2 >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 官報 > 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 < 사진 3 >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 < 사진 4 >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 < 사진 5 >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 < 사진 6 >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 < 사진 7 >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 < 사진 8 >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 사진 9 > 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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