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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습지연구회 '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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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방 스크랩 들판을 볼 때 마다 당신 생각이 납니다.
발바닥 추천 0 조회 154 10.07.22 19: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대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한 '유기농주의자'

 

일평생 유기 쌀농사를 고집하며 ‘쌀도사’란 별칭까지 얻은 대한민국 유기농업의 선구자 강대인 선생이 지난 1월 30일, 단식수련중이던 전남 고흥군 팔영산의 한 토굴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30년 넘는 세월동안 오로지 유기농업 외길을 걸으며 자연을 살리고 인간을 살리는 생명농업에 매진해온 그가, 아직 못다 한 꿈들을 후세에게 남겨둔 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한민국 유기농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그만의 특별한 농업철학과 농법으로 수많은 농업인들에게 발전적 영향을 미쳤던 터라, 선생의 유고는 한 개인이나 가족의 슬픔을 넘어 이 나라 유기농업의 손실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죽이는 농법과 살리는 농법 사이


1951년,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 태어난 강대인 선생은 격변의 시절을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어렸을 때부터 땅을 놀이터 삼아 땅과 함께 살아온 전형적인 농부의 아들이었다. 진학도 자연스럽게 순천농림고등전문학교(현 순천대)로 이어졌고, 졸업을 앞둔 1974년부터는 본격적인 농사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그의 농업 여정은 출발부터 크게 삐걱(?)거렸다. 인생의 푯대요 우상이었던 아버지께서 농약 중독으로 쓰러지셔, 결국 운명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뜻하지 않은 아버지의 유고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그야말로 관행적으로 해오던 농법(농약 살포와 화학비료 시비 등)으로 인해 잡초는 물론 사람까지 죽어나갔으니….
충격은 쉽게 가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농업 인생도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강대인은 관행농법을 포기하고 오로지 유기농법에 의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사람이 사는 길이고, 또한 자연이 사는 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기농사를 의지만 가지고 지을 수는 없었다. 근대화 이후 만연된 관행농법으로 인해, 불과 몇 십 년 만에 유기농법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땅은 이미 병들었고, 그 땅에서 자랄 수 있는 품종과 농법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지기는 농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좌절 끝에 찾아온 생명의 빛


당연히 실패가 따랐다. 잡초야 힘들어도 일일이 손으로 뽑을 수 있다지만, 병충해 앞에서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경험삼고 옛 문헌을 뒤져가며 하나하나 유기농업의 틀을 새로 잡고, 그에 맞는 종자를 개발하고, 그것들을 제대로 키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게다가 주위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았다. 나라에서 시키지도 않는 이상한 농사를 짓는 그를 '빨갱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포기할 수 없었다.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거나 복원하는 한편, 해충 방제용 산야초를 개발하고 목초액에 물을 섞어 농약 대신 뿌렸다. 국내 최초로 오리농법을 시도하였으며, 우렁이를 논으로 끌어들였다. 수확 직후 나온 쌀겨를 논에 뿌려 양분을 보충하고 잡초를 예방하는 그의 쌀겨농법은 전국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듯 유기농법으로 지은 쌀은 고가에 팔려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를 본 주변 농부들이 그와 뜻을 같이 하며 '강대인 생명의 쌀'이라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녹미(청량미), 적미, 흑향미 등 기능성 쌀을 개발해 위기에 처한 한국 농업의 활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가 개발한 녹미는 <동의보감>에도 소갈증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나오는 품종으로, 특히 당뇨환자들이 많이 찾는다.

 

'유기농공화국'을 꿈꾸던 농업예술가


강대인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1995년 국내 최초의 벼 부문 유기재배 인증 획득으로 이어졌으며, 평생 쌀 종자 300~400종을 관리하며 80여 종의 품종 개량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그가 사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에 우리원교육관을 세워 생명의 쌀, 백초액, 어성초, 함초액 등의 제조비법을 여러 농민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5년부터 전남 생명농업대학 학장을 맡아 친환경농가 육성에 힘썼으며, 이밖에도 상지대학교 초빙교수, 조선대학교 친환경 생명농업 지도교수, 전국귀농운동본부 전임교수, 한국농업대학 현장교수 등을 맡아 자신의 농업철학과 비법을 전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친환경농업과 바른 먹을거리', '유기농업의 실제', '유기농 토양관리', '환경을 살리는 농업' 등의 주제로 전국의 농업기술센터, 농협연수원, 기술원, 관공서 등에서 연 70회 이상의 강의와 교육활동을 하며 친환경농업 확산에 앞장서 오기도 했다.
생전의 강 선생은 이러한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2004년 전라남도 농업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04년 세계 쌀의 해 기념식에서 농업인으로 최고의 상인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환경·농림부 공동주최인 제1회 친환경농업대상에서 생산자부문 최우수상을 수여하기도 하였고, 이밖에 보성군민의 상, 제2회 울진전국친환경농산물 품평대회 은상, 광주 MBC 희망대상 농업부문 대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그 공로를 인정받은 바 있다.

 

하늘과 땅과 벼와 하나 된 마음


강대인 선생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무릇 농사란 하늘과 땅이 지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었다. 사람이란 단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자연의 심부름꾼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농부는 하늘과 땅과 하나 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벼와 하나 된 마음을 익힐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던 강대인 선생. 
이제는 그를 다시 만날 길이 없어졌지만, 자식 대하듯 온갖 정성으로 벼를 돌보던 선생의 열정과 의지와 노력은 세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죽기 직전까지도 "유기농업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했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 "몸에 좋은 유기농 쌀을 모든 국민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 곧 평화"라는 강대인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일. 그가 꿈꾸던 '성국'(聖國)을 이루는 일은 이제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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