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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38. [역경의 열매] 김선도 <1-35> 성시화된 평북 선천서 태어난 것은 축복
장로교 가정서 청교도적 신앙 체득… 일제 강점기에 신앙이 버팀목 역할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1930년 기독교 복음화율이 50% 이상이었던 평북 선천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국민일보DB
나는 1930년 12월 2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서 아버지 김상혁과 어머니 이숙녀의 4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탁하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평북 정주에서 강도사로 활동했다.
선천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곳이다. 시내를 4등분해서 동서남북에 교회가 하나씩 있었는데 이사를 가면 그 지역 교회를 다녀야 했다. 1890년 북교회가 시작됐고 1907년 양전백 목사가 목회할 땐 1500명이 모였다. 1910년엔 김석창 목사가 남교회를 개척했는데 1200명이 모이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당시 선천읍 인구가 50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두 교회 성도만 해도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당시 5일장이 주일과 겹칠 때면 장사꾼들이 장사하러 왔다가 인파를 따라 교회까지 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만큼 선천은 성시화된 곳이었다.
선교사들과 김석창 목사는 1906년 미션스쿨인 신성학교를 세웠다. 신성학교는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평생 인술을 베푼 장기려 박사, 장로교 신학의 거목인 박형룡 박윤선 박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였던 고 방지일 목사 등 크리스천 지도자를 배출했다.
선천은 내게 축복이었다. 기독교의 살아있는 역동성과 원형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은 선천의 기독교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교회밖에 모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 새벽기도와 하나님 제일주의, 십일조와 예배를 목숨처럼 지키는 분이었다. 나는 장로교 가정에서 청교도적인 신앙의 엄격함을 습관처럼 체득했다.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통해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성실과 선행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제 강점기 청교도적 신앙은 도피처 같은 역할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킹’이라는 일본 잡지를 봤다. 거기에 마적단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 독립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밀리에 전승되는 장백산(백두산)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움터 올랐다.
‘그래, 백두산을 찾아가자. 거기서 독립운동 유격대에 참여해 나라를 구해내자.’ 앞뒤 재지도 않고 짐을 쌌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발각됐다. “선도, 네 이놈.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냐.” “독립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 나라가 독립하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어린 네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실력을 키운 다음 운동을 해도 늦지 않다.” “예….”
중학교 2학년 때까진 일본말만 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동네에 와서 놀 때도 일본말을 쓰라고 했다. 우리말을 쓰면 벌표 10장을 받았다. 게다가 학교 옆에 가미다라라는 신사가 있었는데 일왕 히로히토의 유년 시절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절을 해야 했다.
억눌렸던 감정은 졸업식 때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내 이름은 마츠나가 센토가 아니라 김선도다. 내가 왜 일본 신사에서 절을 해야 하나.”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선도 <1> 성시화된 평북 선천서 태어난 것은 축복
* [역경의 열매] 김선도 <2> "주님처럼 병든 자 치유" 의학전문학교 입학
* [역경의 열매] 김선도 <3> 6·25전쟁 터져 북한군 군의관으로 끌려가
* [역경의 열매] 김선도 <4>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국군한테 간다"
* [역경의 열매] 김선도 <5> 국군장교 "당신이 필요하오, 도와주시오"
* [역경의 열매] 김선도 <6> 국군 군의관 돼 청천강 건너 북진… 중공군 개입
* [역경의 열매] 김선도 <7> 인산인해 중공군에 포위돼… 필사적으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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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선도 <31> 교회서 민방위 교육… 폭발적 성장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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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선도 <34> 43년 목회 마무리 앞두고 리더십 승계 문제 고심
* [역경의 열매] 김선도 <35·끝> '5분의 은총' 이후 맺어 주신 모든 열매에 감사
약력=△1930년 평안북도 선천 출생 △해주의학전문학교,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미국 애즈베리신학대학원, 호서대, 감신대, 서울신대 명예박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 △한국월드비전 이사장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
***[역경의 열매] 김선도 <2> “주님처럼 병든 자 치유” 의학전문학교 입학
북녘은 공산주의 물들며 교회 수난… 외투에 숨긴 성경 들켜 밀고당해
김선도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부친 김상혁씨와 모친 이숙녀씨.
중학교 시절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과 신앙 열정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나는 문학보다 생물학과 같은 과학에 마음이 끌렸다. 당시 평안북도 선천 동교회에 출석하며 학생회에서 전도하거나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쳤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자연과학적 사고와 기독교 신앙은 아무래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의사가 되기로 진로를 결정했다. 의학이라는 체계적 과학, 의술을 통해 예수님처럼 병든 사람을 고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이 내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과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신앙 감수성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고 2년 뒤 신의주의과대학의 전신인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경쟁률은 5대 1이었다.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저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자를 걷게 하고 눈먼 자를 보도록 치유하신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고통받는 이 시대의 병든 자를 주님처럼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1948년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남과 북이 이미 갈린 상황이었다. 북한은 공산주의 당파성을 갖고 계급을 구분하며 차별했다. 신의주 일대를 비롯해 북한 전체가 공산주의 사상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교회 십자가가 서서히 뽑혀 나갔다. 일부 교회에선 강대상이 치워졌다. 건물마다 온통 붉은 글씨의 선전문구가 붙기 시작했다. 낯선 공산체제를 3년간 경험해 보니 하나님을 향한 예배 열망이 더욱 거세졌다.
‘이 낯선 체제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고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물질적 이념과 사상으로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하나님나라와 거리가 멀다. 주님, 어찌 일제 치하 36년의 억압을 갓 뚫고 온 우리 민족에게 공산주의라는 더욱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신 것입니까.’
부르짖어 간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비통함이 컸다. 찬양을 마음껏 부르지 못하고 숨죽이듯 토해내야 하는 답답함이 컸다. 공산주의 체제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동일한 기도문을 일기장에 반복해서 썼다. “하나님,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이 땅에 보내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이 땅에 모세와 같은 신앙의 지도자를 주셔서 거짓 이념과 생명을 억압하는 이 공산주의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일기장은 자물쇠가 있는 서랍 깊은 곳에 숨겨 놨다. 하루는 수요예배에 몰래 참석하려고 두꺼운 외투 속에 작은 성경을 숨겨 놓았다. 당시 신의주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다. 같은 반 친구가 코트를 빌려 달라 했는데 그 속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가차 없이 나를 학교에 고발했다. “어이, 김선도. 의학도가 교회를 다닌다는 게 말이 되나. 과학을 한다는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친구는 내 책상을 뒤져 일기장까지 찾아냈다. 반동분자라며 나를 공개적으로 몰아갔다. 학교에선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갖은 말로 모멸감을 줘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그 여파로 등록금의 50%나 되는 장학금이 없어졌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모세 같은 지도자를 갈망할 게 아니라 월남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 6·25전쟁 터져 북한군 군의관으로 끌려가
꿈에서조차 북한군에 협력 생각 안 해,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 탈출 기회 엿봐
월남을 결심하고 남쪽으로 넘어가기 쉬운 아래 지방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남한과 가까운 해주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곧바로 전학을 했다. 그러나 해주라고 해서 공산주의의 광풍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병원 실습을 나갔는데 장로의 딸이 폐렴으로 입원해 있었다. 평소엔 환자들에게 속으로 기도해 줬는데, 장로 딸이라고 하니 그날은 소리를 내서 기도했다. 그런데 이걸 병원 직원이 발견했고 곧바로 윗선에 고발했다. 상급자들의 호된 질책이 이어졌다. “아니 김선도는 의학도라고 하면서 어찌 미신적인 기도를 했는가. 의학도가 주사 놓고 약만 처방하면 되지. 무슨 이유로 기도 따위를 했단 말인가.”
또다시 반동분자로 몰리면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선 환자에게 기도해 주는 정성 하나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건조하고 메말랐다. 그때 번쩍 든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의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체제가 변화되지 않는 이상 학문도 오염될 수밖에 없다. 월남만이 답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의 징집이 시작됐다. 집집마다 군인들이 징집장을 전했다. 내 마음은 이미 신앙의 자유를 따라 남쪽에 가 있었기에 절대로 북한군에 편입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징집됐다. 끝까지 눈에 띄지 않고 버티면 저 무신론의 대열, 살인의 대열에 섞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저를 숨겨주시옵소서. 주의 깃으로 덮으사 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결국은 걸리고 말았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북한군의 눈에 띈 것이다. 멍에에 매여 끌려가는 소처럼 북한군 진영으로 질질 끌려갔다. “오 하나님, 저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들은 내게 북한군 군의관 장교 배지를 달아줬다. 군의관복을 입고 청진기와 알코올, 밴드, 테이프가 들어있는 손가방을 멨다.
내가 속한 부대는 평양 아래 황주와 흑교 사이에 있는 산속 벙커로 들어갔다. 평양을 지키는 일종의 수도사령부 같은 곳이었다. 나의 머릿속은 온통 탈출 생각뿐이었다. ‘가족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미 월남했을 텐데… 이 삭막한 곳에 나 혼자 남는 게 아닐까.’ 고독감이 밀려왔다.
몸이 결박당해 피해갈 수 없는 현실에서 정신만은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무신론의 대열에서 내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행위는 진료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갖가지 이유를 대며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이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사상에 동의해서 자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저들도 공감할 수 없는 이 구속에서 꾀병으로라도 위로받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지하 벙커에서 참모회의가 열렸다.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다. “큰일 났다.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 전투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오, 하나님.’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내 눈에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후 우리 부대는 평양으로 옮겼다. 야간 행군을 하는데, 황주 쪽에서 북한군이 소리를 지르며 올라왔다. 패잔병이었다. 군대라고 볼 수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본능만 남은 무리였다. 부대가 잠시 술렁였다. 패잔병의 무리를 보며 다들 엄습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나는 꿈에서조차 북한군에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 기회를 놓쳐선 안 돼.’
***[역경의 열매] 김선도 <4>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국군한테 간다”
국군이 평양 점령, 드디어 기회가…연락병 “군의관님을 따르겠습니다”
미군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때 생포한 북한군 포로를 검색하고 있다. 당시 북한군 군의관이었던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월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드디어 기회가 왔다. 우리 부대가 전투에서 패한 것이다. 환자를 챙기는 척하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때 나를 호위하는 연락병이 있었다. 부대에서 일탈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내 옆에 붙어 있었다. 갓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순하고 깡마른 청년이었다. 사전에 내 사복을 늘 갖고 다니도록 해 놨다. “너, 내 사복 꼭 가지고 다녀야 해.” “네.”
한 가지 걱정은 이 친구가 기관단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저 친구가 내게 총을 난사한다면.’ 마음 한편에서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탈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기회가 한 번은 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나는 6·25전쟁 동안 총을 한 번도 쏴 본 적이 없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남과 북을 향해서 총을 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했다. 만일 내가 총을 쏘았고, 그 총탄이 누군가의 몸을 관통이라도 했다면 그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이 북한군 청년에게 말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 거냐고,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질문도 없었다.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려오다 보니 평양 순안 비행장까지 가게 됐다.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을 뒤덮은 수천 개의 낙하산이 비행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유엔군 낙하산 부대였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와아, 온 하늘이 낙하산 천지구나. 대단하다. 이거 완전히 북한군이 포위를 당했구나. 뚫고 나가야 해. 그럼 자유를 얻을 수 있어.”
나는 계속 내려갔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릴 정도였다. 온몸에 털들이 바짝 곤두섰다. 생과 사가 결판나는 순간이 닥치니 내 온 신경이 쭈뼛쭈뼛 칼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생사기로의 순간 앞에서 아무리 예민해진다 하더라도 그 신경에 내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붙잡고 기도하고 싶었다. 그래서 밤중에 내려가다가 소나무를 끌어안았다. 무엇이라도 의지하고 싶은 절박함 때문에 소나무를 발견하자 안기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오래도록 습관처럼 토로하던 분의 이름을 한을 풀듯 내 입에서 쏟아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저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겠습니다.” 오로지 이 말만이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밤새 그 소나무를 붙잡고 매달려 부르짖었다. 차츰 마음이 안정됐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올라왔다. ‘아, 나의 이 어두운 생의 순간에도 먼동이 터오기를….’
그렇게 기도하다 보니 새벽이 됐다. 북한군은 이미 다 후퇴했고 국군이 유엔군보다 앞서 평양을 점령한 상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1사단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이었다.
‘때가 왔구나. 이제 나의 계획을 저 연락병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저 녀석이 기관단총으로 나를 쏘면 죽는 거고, 아니면 사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기도하고 사병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국군한테 내려간다.” 순간, 그 사병의 눈을 잊지 못한다.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느냐는 순진한 눈빛이었다. 나 혼자 지레 겁먹고 있었던 것이다. “군의관님을 따르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5> 국군장교 “당신이 필요하오, 도와주시오”
그 자리서 ‘북한군→국군’ 신분 바뀌어… 기적 이루어 낸 힘의 원동력은 기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월남 후 국군 군의관이 돼 1953년 의정부 캐나다야전병원에서 수술하는 장면.
“그래, 고맙다. 그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내 옷을 다오.” 연락병은 내 지시를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행동했다. 땅을 파서 인민군복과 총을 묻었다. 그런데 국군이 신작로에 길게 늘어서서 북진하며 올라오는 게 아닌가. ‘아, 이제 어떡하지. 잡히면 포로가 되는 건데. 이대로 남한까지 갈 수도 없다. 맞닥뜨릴까. 피할까.’ 그 짧은 순간 수십 개의 생각이 교차했다.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결정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성적으론 피하고 싶었다. 맞닥뜨려 봐야 포로가 될 게 뻔했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이성과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사복을 입고 북한 군의관 가방을 둘러멘 상태였다. 올라오고 있는 남한 군대를 향해 움직였다.
“주님, 제 운명을 주님께 맡기고 발걸음을 뗍니다.” 어느새 나는 국군 앞에 섰다. 1사단 1연대 3대대였다. 한 장교가 내게 다가왔다. “메고 있는 것이 뭐요.” 뜻밖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 몸은 생존에 가장 적합한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이, 이거요.” 나는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다. 청진기와 밴드, 주사기 같은 간단한 의료기였다. “탈영한 북한 군의관이군.”
누군가 내뱉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러고 나서 몇 초가 흘렀다. ‘이제 곧 들이닥칠 다음 말에 내 운명이 결정되겠지.’
포로가 되거나 가방만 빼앗기고 내팽개쳐질 수 있었다. 아니면 누군가의 총부림에 길가에 나뒹구는 시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순간 한마디 말이 내게 들려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아련한 소리였다.
“당신이 필요하오.” “예?”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오. 보아하니 북한 군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이쪽에 다친 군인이 많으니 도와주시오.”
나는 그 자리에서 국군 1사단 11연대에 입대하게 됐다. 불과 5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도 없었다. 간부들끼리 논의하는 일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머릿속에서 계산했던 모든 경우의 수가 무용지물이 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럴 수도 있는 건가.’
“국군 군복으로 갈아입으시오.” 얼떨결에 군복을 갈아입고 철모를 썼다. 그렇게 나는 국군 군의관이 됐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려 보면 정말 아찔하고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 순간순간 내면에서 기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한군에 있으면서도 기도는 빼먹지 않았다. 사상을 검토하는 북한군 문화부 대대장이란 사람이 의심의 눈초리로 늘 나에게 물었다. “김선도 동지, 당신 기독교인 아니오?” 그때마다 나는 거짓말은 할 수 없고, 그저 웃음으로 무마하면서 추궁하는 질문을 어물쩍 넘기곤 했다.
인생의 기점이 어디냐는 질문 앞에 나는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5분 만에 변화시키신 하나님을 체험한 그때 그 순간이라고. 그리고 그 기적을 이루어 낸 힘의 원천은 기도라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체험은 나의 일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됐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6> 국군 군의관 돼 청천강 건너 북진… 중공군 개입
유엔군 비행기 난사…중공군 추풍낙엽, 처참한 광경에 애달프고 구슬픈 느낌
1950년 10월 6·25전쟁에 투입돼 인해전술을 펼치다 총알받이가 된 중공군. 국가기록원 제공
그때 정재홍이라는 국군 군의관 중위가 나를 많이 아끼고 보호해 줬다. 그분은 나중에 계명대 초대 학장이 됐다. 나와 마찬가지로 의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통하는 부분이 있다며 많이 챙겨줬다.
그 당시 대대 안에는 영어를 한마디라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나와는 서로 영어로 된 의학용어가 통하니 늘 나를 자기 가까이에 두었다. 그래서 단순히 보조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분 대신 내가 환자를 많이 치료했다.
그렇게 해서 국군 군의관이 되었지만 나는 다시 북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려고 계획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떠나려 했던 북쪽을 향해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청천강을 건너 영변을 지나 운산군 북진읍까지 올라갔다. 이제 또 한번, 내 인생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되고 있었다.
북진읍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1950년 10월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사단에서 사단장이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백선엽 장군이었다.
“너희들 전쟁해 봤냐. 싸움해 봤어?”
컬컬한 목소리였다. 마치 삶과 죽음의 전쟁터를 수없이 다녀와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장군의 모습에서 죽음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여유가 풍겼다. 왠지 불안해졌다. 두려움에 인색한 장군의 등장이 용기보다는 이제 곧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만 더해 주었다.
걱정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중공군과의 첫 대면은 우려했던 것보다 싱거웠다. 저 멀리 중공군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오는 모습이 군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리의 행렬이었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색칠하듯 그들은 신작로를 새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그때 ‘쌕쌕이’라고 불리는 호주 비행기가 먼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쾅!” 굉음이 날 때마다 신작로에는 중공군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유엔군 비행기도 연합해 난사를 해 대는데, 조준이고 뭐고 없이 마구잡이로 쏘아 댔다. 그럴 때마다 길가와 논밭, 개울가에는 생명들이 낙엽처럼 후드득 후드득 뭉텅이져 쌓여 갔다.
우린 싸울 일이 없었다. 이 처참한 광경에 압도돼 저 살육이 우리 군을 향하고 있지 않은 것에 그저 안도했다. 동시에 처연하고 애달프고 구슬픈 느낌에 사로잡혔다. 살아 숨 쉬던 생명들이 저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저들은 생명으로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중공군 시체는 하나의 무더기 같았다. 총알 앞에서 생명이란 그저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손끝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생명이든 물체든 돌이든 나무든 모두가 동일한 표적일 뿐이었다. ‘내 생명도, 아니 우리 생명도 저렇게 취급받을 수 있다. 저렇게 고깃덩어리같이 툭툭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중공군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쏘지 마, 쏘지 마. 항복. 항복.”
앞쪽은 옅은 흙색, 뒤쪽은 백색의 양면 군복을 걸치고 길가에 엎드려 있던 중공군들이 총을 버리고 투항하며 올라왔다. 그들의 군복은 눈이 올 때 엎드리고, 눈이 오지 않으면 드러누워 몸을 숨길 수 있는 이중 위장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중공군의 위장 전술도 절대 우위의 무기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다.
첫 싸움은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나는 승리가 반드시 기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7> 인산인해 중공군에 포위돼… 필사적으로 기도
포위망 뚫었지만 참혹한 상황에 충격… ‘생명 찾아주는 주의 종 되겠다’ 서원
1950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고 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중공군에게 포위돼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백선엽 장군이 직접 중공군 포로들을 대질하고 나섰다. 장군은 유창하게 중국말을 했다. 포로들은 짧게 답변했다. ‘패했는데도 뭘 믿고 저리 당당하지.’ 그들의 단호함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뿌앙∼” 갑자기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중공군이다. 포위됐다.” 그러나 우리 군은 어디를 향해 총을 쏴야 할지 몰랐다. 나팔 소리에 혼이 빠지고 엄습하는 공포감이 우리 군을 둘러쌌다. 그때부터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전세가 역전됐다.
정말 빗발치듯 총알이 스쳐지나갔다. 죽음과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좌우에 있던 청춘들이 피를 흘리며 하나둘 쓰러졌다. 조금 전만 해도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밥을 먹던 이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때 나는 밭고랑에 엎드려 있었다. 내 몸뚱이는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른 막대기 한 토막, 총알 한 방에 부러지고 마는 마른 막대기였다. 엎드린 상태에서 기도에 집중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기도하다 죽겠다는 심정이었다.
“하나님, 저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요. 지금까지 살려 주셨는데… 이번에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살려만 주신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수백 번은 기도했던 것 같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 기도를 수백 번도 넘게 자동적으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매복한 산악지형으로 국군과 미군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적군을 삥 둘러싸고 사방에서 나팔을 불어 혼란에 빠뜨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다행히 유엔군 탱크 부대가 나타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어줬다.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광경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1개 대대가 거의 전멸했고 1개 소대만 살아남았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뿌연 연기 속에 화약 냄새,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저기 흙과 피, 살이 범벅이 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손을 더듬어 얼굴과 팔과 다리를 만져 봤다. 멀쩡했다. 살아있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빠져나간 느낌,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뭔가가 죽어나간 느낌이 들었다. 나만 느낀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음이 삶을 압도하는 광경이 바로 이런 것인가. 죽음이 이렇게 자명한 사실이었던가. 우리 삶 어디에 이렇게 자명한 죽음이 작동하고 있었단 말인가.’
살고자 하는 본능이 죽음이라는 운명의 추격에 언젠가는 붙잡히고 마는 게 인생의 실체였다. 참혹한 전쟁의 상황은 내게 인간 현존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줬다. 죽음은 인간의 종말이다. 내가 의사가 돼 생명의 끈을 조금 더 연장시켜 준들 죽음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님, 죽음에 붙잡히고 마는 이 생명이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총알 한 방에 해체되고 마는 생명인데 왜 영원한 것을 꿈꾸게 하셨습니까. 이 생명의 부조리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당신 뜻대로 됐습니다. 저는 이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겠습니다. 죽음에 무릎 꿇고 마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 생명을 찾는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8> 휴전 후 나그네 되어 낯선 땅 남한 고성으로
대표였던 최덕신 육군 소장(가운데)이 휴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그해 경남 고성으로 내려왔다. 국가기록원 제공
살려 달라고 본능적으로 내뱉은 기도였지만 죽음에 직면한 충격은 나의 가치관과 이성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때 내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생과 사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정해진 길에서 숨 가쁘게 달려가는 생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전쟁의 한복판에서 깨달았다. 이 각성 앞에서 내가 믿던 예수 그리스도의 틀이 바뀌었다. 도그마처럼 굳어 있던 교리적 신앙의 관념이 죽어 나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내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더 이상 나의 무지의 구름 뒤에 계시는 모호한 추상이 아니다. 그분은 구체성이며 나의 현실을 때리시는 분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키시는 분이며 내 존재의 집을 새로 지으시는 분이다. 나는 내가 생각한 관념의 틀에서 스스로에게 종말을 고했다. 1951년 1월 4일 김선도, 너는 죽었다. 죽은 것이다. 내 생각의 틀에 매장됐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그리고 나도 그분과 함께 새롭게 거듭났다. 이제 펼쳐질 나의 생애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다. 이제 ‘절대 예수, 오직 예수’를 붙잡고 살 것이다. 죽을 영혼을 살리는 영혼이 돼 살아갈 것이다.”
1953년 가을이었다. 나는 엄밀히 따지면 군인이 아닌 상태에서 참전한 임시 군의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휴전 후 군에서 나와야했다. ‘하나님,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막막했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초조감도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월남했을 것이다. 분명 남한 땅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남한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낯선 땅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곳도 없는 땅.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소명을 받았으나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삶이 시작됐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장씨 성을 가진 소위가 그때 내게 다가왔다. “김선도, 혹시 경남 고성에 같이 가지 않을래. 내 고향이야.”
군에서 치료해 준 일을 계기로 친해진 그가 딱한 내 처지를 알고 손을 건넨 것이다. “그럴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엇이 다가오든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 지금부터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다. 내게 다가오는 섭리를 적극적으로 맞이하겠어. 또 뭔가 기다리고 있겠지.’
장 소위와 함께 낡은 트럭과 기차를 갈아타고 걷기도 하면서 고성으로 내려갔다. 그때 낯선 남한 땅을 처음으로 봤다. 군데군데 전쟁의 참화가 쓸고 간 폐허들이 보였다. 무너지고 초토화된 집과 건물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여전히 밭을 일구는 사람들, 냇가에서 뛰노는 아이들,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개가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었다.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내가 겪은 끔찍한 체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드디어 고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나는 3가지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뭘 해야 하나. 목사가 되고자 했으니 바로 목사가 돼야 하나, 일단 남한 의사 자격증부터 따야 하나.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일단 뭘 해야 할지 찾기 위해 교회부터 나갔다. 상리장로교회였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9> 교회 활동으로 유명인 됐지만 가족 그리움 사무쳐
‘부모·형제 찾고 의사 자격시험 보자’ 2년 간 기도에 부산으로 이끄셔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6·25전쟁이 터지면서 부모님을 비롯해 6명의 형제와 생이별을 했다. 6·25전쟁 당시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피난민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경남 고성 상리장로교회에는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내가 할 일이 확실하게 보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야학을 열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뒤라 사람들의 마음속엔 배움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흐르고 있었다.
야학을 열자 뜻을 같이하는 선생들이 참여했다. 천막을 쳐서 교실을 만들었다. 금방 틀이 갖춰져 고등공민학교 과정으로 커졌다. 이곳에서 나는 성경과 영어, 생물을 가르쳤다. 이 천막학교는 훗날 상리중학교로 발전했다.
주일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 당시 신앙만큼은 남한보다 북한이 더 선진적이었다. 6·25전쟁 때문에 북한에 있던 영적 지도자들이 내려오면서 남한의 기독교 신앙 운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고향을 잃은 이북 출신 신앙인들이 부르짖는 기도와 회개 운동은 남쪽 교회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한경직 방지일 목사님 같은 분도 신의주와 선천, 만주에서 목회하던 분들이다.
남쪽은 북한에 비해 교육문화도 많이 낙후돼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 배운 성경 이야기를 해주고 연극도 보여줬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힘이 센 삼손,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삭개오가 구원받은 이야기 등을 드라마틱하게 각색해주자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감동했다. 울고 웃고 데굴데굴 굴렀다. 자연스럽게 주일학교가 성장했다. 아이들의 부모까지 찾아오면서 교회가 부흥했다.
내가 의학도이자 군의관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욱 바빠졌다. 환자도 많이 찾아왔다. 약을 구해 치료해줬다. 주사를 놔주고 기도도 해줬다. 마을에선 유명인이 됐다. 처녀들은 카드나 목도리를 선물하면서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내겐 가족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늘 부모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쳤다.
끝없는 그리움 앞에 삶과 생명력 모든 것이 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리움은 그 외의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 측면이 있었다. 내 생각은 온통 가족을 향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모두 무사할 거야. 그렇지요, 하나님. 수없는 죽음에서 저를 건져 주셨듯이 가족 모두가 살아 있는 것 맞지요.’ 어디서든 가족이 살아 있다는 실마리를 간절히 찾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하고, 누구에게 수소문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깊어지면 별이 된다고 했던가. 정말 별을 붙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저녁이건 새벽이건 교회를 찾아가 마룻바닥에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여, 주여, 가족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발 찾게 해 주세요.”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었다. 2년을 그렇게 울며불며 기도했다.
2년의 시간이 고성에서 흘러갔다. 나는 바로 목회자가 돼야 할지, 의사가 돼야 할지 현실적으로 고민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마음속으론 의사 자격증을 따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동네에는 선천이 고향인 동창생이 중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 중요한 두 가지 정보를 줬다. “선도야. 부산에 가면 피난민 임시 수용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 의무사령부에서 의사 자격시험을 진행한다고 한다. 부산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
‘그렇다. 부산으로 가자. 가족도 찾고 의사 자격시험도 보자.’ 2년간 절규 같은 기도의 응답은 부산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 발걸음을 부산으로 이끌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0> “너희 가족 다 군산에 피난 와 있다” 꿈같은 소식
부산서 아버지 의형제에게 들어, 단숨에 군산으로… 동생과 극적 조우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가족을 찾기 위해 도착한 부산과 전북 군산은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정든 상리장로교회 교인들과 시골 학교 교사, 학생들과 아쉬운 작별을 할 시간이 됐다. 예고된 이별이었다. 주민들은 이미 내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산에 내려가겠습니다. 그곳에 피난민을 위한 임시수용소도 있다고 하니 거기 내려가서 가족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으려 해도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고 하니, 제가 갈 곳은 부산인 것 같습니다.”
차를 얻어 타고 부산 광복동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정도였다. 설령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고 해도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여기저기 음식점이 많았다. 돼지국밥집, 밀면집, 오뎅(어묵)집.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이 생각났다. 겨울 밤참으로 해 주셨던 차가운 냉면, 김치와 두부랑 잘게 썰어 내 주셨던 동치미 국물, 순대국밥….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 ‘어머니 아버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가요.’
피난민 수용소를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그때였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갑자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삼촌!” 반가움이란 이런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분을 그 많은 사람 틈에서 만나게 됐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으신 계하영씨였다. 나는 그분을 삼촌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이야. 너, 선도 아니네. 너 고저 살아 있었구나.” “예, 삼촌.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군산에 있지.” “군산이요? 군산이 어딘데요.” “전라도 군산. 고저 너희 가족들은 다 거기 피난 내려와 있으니 걱정 말라우. 부모님과 네 동생들 다 살아 있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얘기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군산으로 향했다. 의사 자격시험은 나중 일이었다. 그냥 달렸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군산이 어딘가요.” 트럭을 얻어 타고 기차도 타고 군산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주님, 저희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군산을 전혀 모릅니다. 지금부터 제 걸음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냥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군산 이곳저곳을 걸었다. 피난민 수용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가족들이 거기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바닷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이었다. 군산에 가족이 있다는 정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선양동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초가집과 초라한 건물이 들어찬 판자촌이었다. 약간 굽이진 언덕길이 보였다. 사람들이 쉬어 갈 만한 비탈길에 판자를 늘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 보였다. 홍도였다. 내 동생 김홍도! 그 언덕길에 마치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기다린 것처럼 동생이 앉아 있었다. 판자에 초콜릿, 양담배 같은 것들을 늘어놓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야, 너 홍도 아니냐.” 순간 동생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형님!” 동생과 나는 부둥켜안았다. “홍도야, 울지 마라.”
***[역경의 열매] 김선도 <11> 아홉 식구 모두 모여 눈물의 가정예배
가족의 생계 문제 책임져야 할 입장… 의정부 유엔 종군경찰병원에 취직
의정부 캐나다야전병원 근무시절 캐나다 군의관과 함께한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곧 오실 거예요.” 2층에 올라갔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그리웠던 발소리,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두 분의 발소리…. 자다가도 부모님 발소리가 들리면 깨어 달려 나가지 않았던가. 세월이 지났어도 그 발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기다릴 수 없었다. 나도 뛰어나갔고 부모님도 뛰어 들어오셨다. 그때의 부모님 얼굴은 내 가슴에 찍힌 영원한 사진이 됐다. 몇 초의 정적 속에 부모님은 나를 읽었고 나도 부모님의 마음과 기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얼마나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눈물 흘리시며 간구하셨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4남 3녀, 이렇게 아홉 식구가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눈물과 감동의 물결이었다. 어머니가 기도하셨다. “하나님, 우리 아홉 식구를 한 명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가족 모두 하나님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며 살겠습니다.”
험한 세월을 거쳐서인지 부모님 머리엔 희끗희끗한 흰서리가 내렸다. 아버지는 반공청년단 대장이어서 테러의 대상이 됐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계를 잇고 계셨다. 월남하실 때 장티푸스에 걸려 4주간 고열을 앓은 후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내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부모님은 이제 연로하셨어. 목사 되기를 서원했지만 그 문이 열릴 때까지는 주어진 생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해.’
혼자 상경했다. 일단 취직부터 하고 가족을 부를 계획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게꾼들과 고아들이 넘쳐났다. 나는 곧장 의무사령부로 향했다. “김선도라고 합니다. 해주의학전문학교 출신인데 월남해 국군 군의관을 지냈습니다.” “오호, 그래요?”
의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면접 후 곧바로 채용됐다. 그 길로 의정부 유엔 종군 경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일하게 됐다. 의정부에 있는 캐나다야전병원으로 파견됐다. 이곳에서 주로 외국인을 치료했지만 한국인 진료도 병행했다.
의정부 경찰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 의정부역 근처에 있는 천막 교회를 다녔다. 의정부 감리교회였는데 감리교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새벽기도부터 나갔다. 20대 후반쯤 되는 최요한 목사님이 뜨겁게 설교했다. 장로교회에서 느낄 수 없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참여하던 중에 최 목사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김 선생님, 우리 교회에 일꾼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예, 순종하겠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부터 시작해 성가대를 하다가 성가대장을 했다. 그다음엔 재정부장을 하고 권사 직분도 받았다. 총각이 권사라는 직분을 맡게 된 게 쑥스러웠다. 하지만 6·25전쟁 중 생명을 살려주신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목사님 제가 더 도울 일은 없습니까. 교회를 건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재정이 부족합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이상한 확신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이었다. 하지만 매우 강한 내면의 확신이 있었기에 아주 근거가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목사님, 해 보죠. 건축을 해봅시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2> 미군 교회 군목 도움 받아 1년 만에 예배당 건축
내친김에 목사님 사택까지 지어…당시 건축 도운 美 사병 훗날 목사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경기도 의정부 캐나다야전병원 근무 시절 캐나다 군의관과 함께했다.
“어떻게요. 안 그래도 온 나라가 전쟁복구로 난리인데 어디서 교회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구한다는 말입니까.” “목사님, 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한번 뛰어 보겠습니다.”
순식간에 가슴에서 치고 올라온 말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공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내 내면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부터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 광복동에서 계하영 아저씨를 만났을 때도, 군산역에 내린 내 발걸음이 선양동을 향한 것도…. 그때는 막연하게 느껴졌던 목소리가 나를 이끌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 목소리가 이끄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교회건축을 선언한 뒤 밤이고 새벽이고 교회를 찾아 기도했다. 66㎡(20평) 남짓한 천막교회 바닥에는 비닐이 깔려 있었다. 엎드릴 때마다 특유의 화학물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나님, 우리 교회 건축을 허락해 주십시오.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때 불현듯 머릿속에 캐나다 야전병원에서 만난 미군교회 군목이 떠올랐다. 이튿날 그 군목을 찾아갔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오우, 닥터 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제가 의정부에 있는 천막교회에 다니는데 건축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재정도, 자재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형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미군 부대 교회와 군목들의 힘을 빌려 봅시다. 부대에 자재가 많으니까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 군목의 도움으로 자재를 얻게 됐다. 미군용 트럭이 천막교회에 수없이 들락날락하더니 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더욱 감사한 건 그 자재들이 미군용 자재에서 덜어낸 게 아니라 본래 한국에 나눠 주기로 했던 비축용 자재였다는 점이었다. 정당하게 이뤄진 지원이었다.
그때 교회건축을 도운 미군 사병 중 한 명은 훗날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감리교 목사가 됐다. 50여년이 흘러 오클라호마에 참전용사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그를 만났다. 그 아들도 대를 이어 감리교 목사를 하고 있었다.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최요한 목사님의 설교는 점점 더 확신이 차올랐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말씀이 강단에서 쏟아졌다.
‘말씀이 현실이 되고 믿음이 성취되는 게 이런 거구나. 아무것도 없는 천막교회가 빈손으로 일을 이렇게 성취할 수 있구나.’ 최 목사님을 비롯해 천막교회 성도 40명의 마음이 똘똘 뭉치는 것을 보았다.
예배당은 불과 1년 만에 세워졌다. 그런데도 남은 자재가 차고 넘쳤다. “이젠 목사님 사택을 지읍시다.” “그럽시다.” 그러고는 사택을 2개월 만에 뚝딱 지었다.
이번에도 누군가 한마디 했다. “이번 건축의 공신이 김 권사님인데, 권사님 사택도 지읍시다.” “그럽시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순간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안 됩니다. 저는 그러면 교회 못 다닙니다. 이미 저와 우리 가족은 신설동에 살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그때 내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다윗에게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을 지어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광림교회라는 하나님의 성전 봉헌도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3> “감리교 신학에서 길을 찾겠다” 신학대 입학
함께 예배당 세운 최요한 목사 권유… 전적타락·선재적 은총 등 불꽃 토론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흰 동그라미)가 1957년 감신대 학생회 임원 신분으로 홍현설 학장(맨 앞줄 왼쪽 세 번째)과 함께했다.
예배당 봉헌예배를 드릴 때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기독교대한감리회 7대 감독인 류형기 목사님이 함께했다. 그때 내게 불타는 서원이 일어났다. “하나님, 일평생 하나님의 집을 짓는 종이 되겠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많이 짓는 종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근래 들어 예배당 건축에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 사랑과 교회 건축은 그렇게 쉽게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의 공동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 제도와 건물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교회 사랑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반세기나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교회가 부흥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과 조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 같은 성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 사조는 교회당을 짓기보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임으로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교회의 본질에 집중한 나머지 그 본질을 담을 수 있는 예배당과 교회조직을 간과했다. 그 결과 기독교 사상은 발전할 수 있었지만,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자마자 예배당부터 지었다. 집을 개조해서 교회로 만들고 천막을 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 예배당 건축은 내게 매우 의미 있는 체험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이 모호하고 추상적일지라도 일단 믿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한걸음 내디딘 만큼 비전의 정체가 선명해지고 추가로 내디딜 때마다 더더욱 분명해진다.’
나는 그때 비전을 사유하고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 출신이었던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최요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반발심이 올라왔다. “목사님, 존 웨슬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축소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마다 최 목사님은 ‘선재적 은총’이라는 낯선 개념을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재적으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회복했습니다.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 자유의지만큼 인간에게도 스스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렇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이 깨지는 것 아닙니까.”
최 목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는 시간에도 틈만 나면 토론을 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진척되지 못했다. 어느 날 최 목사님이 나를 불러놓고 이야기했다.
“김 권사님, 감리교 신학을 해 보시지요.” “저는 장로교 출신인 데다 아직 고민이 정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감리교 신학을 해 보라는 겁니다. 신학교에 가서 답을 구하면 되잖아요. 김 권사님, 목사가 되기로 서원도 하셨잖아요. 이제 그때가 온 겁니다.” 나는 1954년 4월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했다. 그때가 스물다섯 살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4> 군함 얻어 타고 가던 제주 전도 여행길에 풍랑
감신대 전도대와 전국서 노방전도… 뱃길에 닥친 위기 “살려달라” 기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1957년 감신대 재학 시절 충남 서산에서 전도대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감리교신학대에서의 신학 공부는 일종의 ‘수용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수용한 존 웨슬리 신학은 상아탑에서 고안된 사변적 신학이 아니라 전도 현장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실천적 신학이었다.
처음엔 ‘선재적 은총’이 인간 주권을 강조해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사상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웨슬리가 말하는 ‘선재적 은총’도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였다. 선재적 은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어둠 안에 한줄기 빛을 비추시는 은혜였다. 그 은혜로 죄를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기도 모임에도 가입했다. 구본흥 조기현 김후근 도정인 목사 등과 방과 후 말씀을 나누고 토론하며 밤늦게 기도했다. 구호부터 ‘웨슬리처럼 되자’였다. 당시 우리는 순수한 20대였다. 서구 신학의 다양하고 진보적인 학문은 수용하되, 우리의 경건함을 상실할 수 없다는 의지를 가진 청년들이었다.
당시 박대인 교수와 오명걸 선교사가 이끄는 감신대 전도대는 전국 각지에서 복음운동을 펼쳤다.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큰 장터를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개척교회 설립을 도왔다. 주로 나팔과 북, 아코디언을 이용한 노방전도였다.
나는 열차 안에서 아코디언을 켰고 동료들은 찬송을 불렀다. 그러면 술을 마시고 담배 피우던 사람, 계란 까먹던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그렇게 외쳐도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거나 믿겠다고 다가왔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붙잡고 축복기도를 해줬다. 전도를 나갈 때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감격이 있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만나교회를 개척한 고 김우영 목사 등과 함께한 제주 전도여행이었다. 부산에 도착하니 마침 해군 군함이 제주도로 가기 위해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전도하러 가는데, 좀 타고 갈 수 없겠습니까.” “오케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승선이 허락됐다. ‘세상에 해군 군함을 타고 제주도 전도를 가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갔을까. 해군들이 먹는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를 찍어 먹고 기분 좋게 찬양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덮더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풍랑이 어찌나 거세던지 배가 곧 뒤집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갑판 아래 침실에서 뒹굴며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머리로만 알던 풍랑과 실제 체험한 풍랑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주님만 바라보며 절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자기 확신’은 무참히 깨졌다. 거의 절반은 죽은 상태가 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전도고 영혼 구원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풍랑에서 건져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때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함장은 이런 풍랑을 경험해 봤을까. 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함장의 입을 통해 이까짓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사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을 듣고 싶었다.
몸을 일으켜 겨우 갑판 위로 올라갔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간신히 함장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5> 총각 신학생, 전농감리교회 담임으로 첫 목회
“사모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기도… 아버지 “아주 좋은 처자 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1957년 감신대 4학년 졸업여행 때 충남 공주 동학사에서 홍현설 학장과 함께했다.
함장은 치고 들어오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는 쌍안경을 목에 걸고 어둠까지 집어삼킬 듯한 파도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외쳤다.
“Straight away! Straight away!(지체하지 말고 전진하라!)” 그 소리에 수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내 영혼의 선장도 이런 분이시겠구나. 그렇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인생의 함장은 주님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찔한 상황의 무게를 도리어 제압하는 함장의 기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날 내 영혼의 함장 되시는 예수께서 나를 구원의 방주에 태우시고 사명을 향해 계속 전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첫 목회지는 서울 청계천 근처 전농감리교회였다. 전농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교인 중에는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천막 옆에는 호박과 고추, 상추를 엉성하게 심어 놓은 밭들이 있었다. 4학년 때 전도대 활동을 하다가 전농감리교회에서 전도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개척한 지 4년이 안 된 교회였는데 40명 정도가 출석했다. 담임자를 구하다가 신학교 학생인 나를 데려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리교 목회자는 개교회 청빙이 아니라 감리사의 파송에 의해 결정되던 시기였다. 서울 변두리 교회이긴 하지만 40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11년차 정회원 목사 정도는 돼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더욱이 결혼도 않은 총각 신학생 입장에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자리였다. 그래서 난색을 표했다. “제가 부임할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농감리교회의 중진들은 계속해서 요청해 왔고 지방회에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부임을 허락해 줬다.
1957년 나의 목회 인생은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처음 부닥친 문제는 결혼이었다. 총각이 담임 전도사로 온다니 몇몇 처녀가 있는 가정에서 관심을 보였다. 처녀의 어머니가 와서 빨래도 해 주고 다리미질도 해 줬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바로 잡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고 했다.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집사님, 고맙고 감사하지만 앞으로 집안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내 나름대로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목회지에서 연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회하면서 교회 안에서 연애했다는 소리는 추호도 듣기 싫었다.
하루는 혼자 심방을 다녀왔는데 목사관 안에 있던 책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리어카를 갖고 와서 완전히 쓸어간 것이었다. 한편으론 씁쓸했지만 정작 내 입에서는 뜻밖의 간청이 나왔다. “이 집에 새사람이 들어오기는 해야겠구먼. 하나님, 이제 예비해 주신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모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통로는 강원도 철원 지방의 관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새벽 5시에 한 처녀가 외투를 둘러쓰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 새벽기도에 나오는 걸 유심히 관찰하셨다고 했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활발한 게 통 큰 사모감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선도야, 다른 생각하지 마라. 아주 좋은 처자가 있으니까.”
***[역경의 열매] 김선도 <16> “내가 말한 처녀와 결혼 안 하면 내 아들 아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왼쪽)가 1958년 감리교신학대학 졸업식에서 박대선 교수와 함께했다.
새벽기도마다 참석했다는 그 처녀는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자매였다. 관인중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당분간 삼촌 집에 와 있다고 했다.
사실 전농감리교회의 두 가정에서 이미 나를 사윗감으로 정해 두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상태였다. ‘교인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면 안 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 이를 어쩌나.’
그러나 부모님은 완고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한 처녀와 결혼 안 하면 넌 내 아들이 아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 “어떻게 얼굴도 못 본 처녀와 결혼을 합니까.” “오는 20일까지 철원 관인교회로 오너라.”
상황이 이쯤 되니 마음에 내키지도 않은 선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만날 날이 다가오자 지방회에 일이 생기고 말았다. 동대문교회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책임을 저버릴 순 없고, 아버지 때문에 만남을 뒤로 미룰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급하게 전갈을 보냈다. ‘급하게 사경회에 갈 일이 있어 낮에 볼 수 없으니 밤이나 돼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을 끝내고 차를 타고 관인교회에 도착했을 땐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처녀는 없었다. ‘뭐야. 이 정도도 기다리지 못하다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돌아서려는데 책상 위에 쪽지가 보였다. ‘아, 오기는 왔구나.’ 쪽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전도사님, 결혼 문제는 인륜지대사라 했거늘, 가장 중요한 첫 만남을 궁색하게 밤에 만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낮에 정식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글이 아니라 글씨체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인의 품격이 묻어났다. 거침없되 절제된 글씨체, 무엇인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안정감. 내면에 깊은 안정감을 소유한 사람에게서나 뿜어 나올 것 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나도 모르는 설렘이 일어났다. ‘아, 이러니 부모님이 강권하셨던 것이구나.’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뭔지 모를 운명의 끈이 내 마음을 당기는 것 같았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필체의 인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해서 내 일생의 반려자 박관순을 만났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훨씬 컸다. 당시 160㎝를 넘는 처녀가 흔하지 않았는데 얼핏 봐도 170㎝ 가까이 돼 보였다. 얼굴이 하얗고 날씬했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또각또각 걸어오는 모습이 여리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그때 직감했다. 내게 걸어오는 저 여인이 내 운명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아내는 고등학교 때 성결교회에 다니면서 불같은 성령 체험을 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말투는 직설적이면서도 정확했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였지, 감정을 감추거나 말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도 갖고 있었다.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를 논할 때는 열정이 묻어났다. 그 때문에 식사 시간이 2∼3시간 걸리는 일이 많았다. 동시에 실존주의적인 고민을 많이 한 철학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부츠를 신고 종로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르네상스 음악실에 온종일 앉아 클래식을 감상하길 좋아한다고도 했다. “사모가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목사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는 줄 알았어요.” 여인의 모습에서 순수함이 느껴졌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7> 궁핍한 살림에 아내는 결혼반지 팔아 끼니 챙겨
전농감리교회 성도들 삶은 비참… 기도원 찾아 성도들 치유할 능력 구해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담임하던 전농감리교회에는 청계천 성도들이 많았다. 1960년대 비만 오면 범람하던 청계천 전경. 국민일보DB
1960년 4월 우리 부부는 홍현설 감리교신학대 학장님을 주례로 서울 아현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농감리교회의 15평 남짓한 목사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때부터 아내의 고생이 시작됐다. 아내는 그 어려운 왜정 말엽에도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귀하게 자랐다.
결혼 전부터 나는 감신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홍도와 광성고 1학년이던 국도와 같이 살고 있었다. 결혼식 축의금은 모두 동생들의 등록금으로 들어갔다. 성미는 보리쌀이 섞인 쌀 서 말이 고작이었다. 성인 네 사람이 매일 밥 먹고 도시락 2개를 싸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결국 아내는 결혼반지를 팔았다. 그리고 국수 큰 다발 2개를 사서 끼니때마다 국수를 삶았다. 그래도 궁할 때는 아내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시장에 나가 남들이 버린 배추 시래기를 주워 김치 겉절이를 만들었다. 쌀을 씻던 아내가 하수구에 떨어진 쌀 한 톨을 조심스레 줍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저렸다.
전농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은 비참했다. 장마철만 되면 청계천 물이 넘쳐 성도들이 사는 천막까지 구정물이 들어왔다. 가난한 곳에 질병도 많다고 장티푸스와 홍역, 식중독 같은 질병도 많이 발생했다. 성도들에게 나는 목사인 동시에 의사였다. 몸이 아프면 의사보다 나를 먼저 찾았다. 아프다고 하면 자다가도 달려 나갔다. 어쩌다 돼지고기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차마 먹을 수가 없어 성도들의 집부터 찾아갔다.
내가 느낀 성도들의 존재 열망은 생존이었다. 비가 들이치는 천막에서 배를 곯아 가며 오염과 질병의 재를 뒤집어쓸지라도 생존하고 싶다는 열망,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력했다.
그런 성도들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기도원을 찾았다.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도들의 상한 마음과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 위로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옵소서.”
밤새도록 바위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삼각산기도원에 담요 한 장을 들고 올라갔을 때다. 내 안의 부정적인 불순물을 토해내듯 악착같이 부르짖었다. 신기하게 부르짖을수록 가슴이 시원해졌다.
‘아, 뭔가 막힌 것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내 안 깊은 곳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흘러나와 내가 생각하고 알 수 있는 감각의 세계로 다가오시는 것 같다.’
6개월 이상 부르짖자 변화가 일어났다. 설교가 달라진 것이다. 나도 알지 못하던 강한 확신이 설교에 묻어났다. 성도들은 울며 감격해 했다. 신유의 기적을 경험했다. 1957년 40명이던 성도는 6년 만에 150명으로 불어났다.
나는 의학을 치유 목회에 적용했다. 심방 가방에는 늘 성경과 주사기, 약, 각종 치료기구가 들어 있었다. “어질어질하지 않나. 잠은 잘 자고 있나. 혹시 소화가 안 되지 않나.”
지금은 의사들이 기계로 진단하지만 당시는 손으로 만지는 촉진, 두들기는 타진, 증상을 묻는 문진 등이 주를 이뤘다. 청진기로 직접 심장 박동을 듣고 만져주고 상담했다. 그렇게 심령을 만지는 목사, 의사의 심정으로 다가섰다.
아픈 성도 중에는 진맥 후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봤다.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 성도에 대한 관심, 몸과 마음의 어루만짐이 영혼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빈민가 사역을 하던 1962년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8> “군대는 선교 어장” 권유 받고 공군 군목 지원
7대 1 경쟁 뚫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 청년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비전 품어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교회 역사관에서 공군 군목 시절 입었던 군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62년 홍현설 학장님 댁에 세배를 갔을 때였다. 나는 전농감리교회 사정과 그간의 열매를 보고하면서 청년 목회에 깊은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홍 학장님의 사모님이 이런 제안을 하셨다.
“김 목사님, 군대야말로 선교 어장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이 나라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세요. 군목 지원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국방부에 속히 알아보세요.”
그 이야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다. 풋풋한 젊음의 열정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어디겠는가. 그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곳이 어디겠는가. 군대다.’
곧바로 예배당으로 달려가 기도했다. ‘하나님, 제 중심에 불이 일듯 일어나는 청년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주님께서 주신 것이면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
전농감리교회는 당시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성동지방에서 중견 교회로 꼽힐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이곳에서 목회를 계속하면 지속적인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청년을 향한 목회 비전에 모험을 걸고 싶었다.
기도 응답을 받고 원서를 제출했다. 기왕 군목을 할 것이라면 공군 군목을 하고 싶었다. 당시 한국의 공군력은 떨어졌지만 분명 몇 년 안에 공군이 북한을 벌벌 떨게 할 군사력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명을 뽑는데 14명이 지원했다. 시험은 영어와 상식, 성경과 설교 4과목이었다. 좋은 성적으로 군목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전농감리교회에서 군목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게 된 일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하는 성도들과의 이별이 가슴 아팠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1962년 4월 1일 입대하는 날, 때늦은 눈이 내렸다. 나는 눈물로 배웅해 주는 성도들 앞에서 차마 돌아서지 못했다. 6년간 전농감리교회에서 부르짖었던 간구와 기도들, 발이 닳도록 심방하고 기도해 주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산동네를 찾아갈 때면 구멍가게의 연탄 배달을 도와가며 심방했다. 청계천 구정물이 범람할 때도 천막에 사는 성도들의 집을 찾아갔다. 성도들은 심방 때마다 구연산 소다에 사카린을 쳐서 사이다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서너 컵을 들이키다 보면 배 속에서 난리가 났다. 새벽기도 때마다 할머니 권사님이 품속에 있던 계란을 꺼내주곤 했다. 처음엔 내가 위로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내가 더 많이 위로받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끝내자 눈물바다가 됐다.
2개월간 군종장교 훈련을 받았다. 내 가슴속에는 복음 전도의 황금어장에 들어간다는 감격이 넘쳤다. 고된 훈련을 받고 파송받은 곳은 대전 공군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였다.
대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꼭 12년 만의 일이었다. 북한군 군의관 신분으로 탈출해 5분 만에 국군 군의관이 됐었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때 나는 ‘살려만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다’며 목숨을 구걸하던 가엾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 생명이 아니라 젊은 청춘들의 영혼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군목이 됐다. 거듭 감사의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아,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귀한 사명 주셨으니 생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9> 고된 훈련 장병들, 기도해주자 감동·눈물…
영창 내 사병들과 공감대도 형성, 구원 갈망하는 인간의 아름다움 발견
1960년대 군목으로 활동했던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 그는 신병들과 함께 야간구보와 산악훈련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나는 항공병학교에서 신병들과 같이 뛰었다. 야간 구보, 산악 훈련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완전무장을 하고 쫓아다녔다. 한번은 한밤중에 장교 후보생들과 구보 훈련을 했다. 유성까지 M1 소총을 들고 뛰었다. 그리고 취침 시간에 이런 기도를 해줬다.
“여러분 힘들죠. 자존심 상하죠. 힘내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마음속에 평안을 주십시오, 저들의 건강을 지켜 주십시오. 두고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십시오. 저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한 헌신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 헌신으로 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 “흐흐흑.”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그 건장한 청년들이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는 게 아닌가. 한두 명이 아니라 모두 울고 있었다.
영창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군대에서 범법행위를 저질러 영창에 있는 절망의 순간이야말로 위로와 복음의 메시지가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 12시쯤 작업복을 입고 헌병대를 찾아갔다.
“필승! 군목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헌병이 물었다. “네, 제가 오늘 하룻밤 영창에 자면서 사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려 합니다.” “예? 아, 안 됩니다. 영창은 군목님이 들어가실 데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안 될 것 뭐 있습니까, 그냥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이니까 들어가게 해 주세요.”
당황한 헌병이 헌병대 대장에게 보고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어렵게 허가가 떨어졌다. 그렇게 영창에 들어가서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온몸에 이가 올라 가렵지 않은 데가 없었다.
기상 후 영창 내 사병들과 빙 둘러 앉았다. 사병들 앞에서 내가 온몸을 긁어대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벌써부터 공감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 그들에게 성경을 나눠 줬다.
“여러분, 영창에 갇힌 여러분과 밖에 있는 장병 사이엔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모든 인간이 죄의 철조망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고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데 주변에 감동의 파장이 일어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병들은 감동받아서 울고, 어느새 몰려온 헌병과 헌병대 장교는 등 뒤에서 우리를 엄숙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인간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불완전한 인간,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의로워짐에 있는 게 아니라 부조리한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눈망울에 있지 않을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구원을 갈구하는 애타는 눈동자 말이다.
‘그래. 목회엔 파토스, 로고스, 에토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젊은 군인들이 가슴 열고 공감할 수 있도록 감동으로 다가서야 한다. 일단 마음이 열리면 논리가 빛을 발한다. 그렇게 감동의 파장을 일으키고 설득력 있는 말씀의 로고스를 집어넣으면서 인격 교육을 병행한다면 도덕적인 에토스의 길이 열릴 것이다. 거기에 비전과 역사성 미션을 갖게 한다면 주어진 사명을 적극 감당하는 군인이 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0> 명절 땐 커피·과자 들고 보초병 찾아가 격려
장군부터 사병까지 교회에 몰려… 나의 목회 활동 군 상부에 보고 돼
박정희 전 대통령(둘째 줄 외투 입은 사람)이 1967년 대전 공군교육기술단을 방문해 교육생을 격려하고 있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당시 이곳에서 군목으로 활동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명절 때면 사병들을 찾아갔다. “군무 중 이상 없음!” 새벽 2시쯤 군용 지프차량에 과자 봉지를 싣고 보초병을 찾아가면 보초병은 주번 사관이 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경례했다.
“집 생각나지요? 부모님 보고 싶지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우리 아버지 형님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생을 하면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그 감정을 그분들도 동일하게 느끼셨을 겁니다. 그 덕에 우리가 그동안 안전하게 지낸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부모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무 마칠 때까지 힘내세요.” 그렇게 과자와 커피를 건네면서 기도해 주면 장병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그렇게 만난 보초병은 어김없이 주일에 교회를 찾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 목회활동이 군 상부에 보고 됐다고 한다. 따뜻한 커피를 끓여서 보초병을 방문하는 일은 최전방과 해병대까지 번졌다.
장교 전도에도 힘썼다. 참모회의에 들어가면 5분 정도 브리핑을 하는데 이 시간을 일종의 정신 교육에 활용했다. ‘군대란 일종의 합법화된 무력 단체로 필요악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당위적인 사명 의식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어떻게 무력을 자유와 평화, 민주국가를 세우는 일에 사용할 것인지, 군대라는 시련을 어떻게 자기 계발로 승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답을 줘야 한다.’
이런 고민 끝에 강조한 게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자아실현’이었다. 당시 교육과 설교 때 가장 많이 신경 썼던 부분은 보편성과 설득력이었다. 일방적인 선포와 강요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논리와 설득력 있는, 보편성을 갖춘 정신 훈화만이 군인을 졸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5분 동안 ‘희망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신념이란 무엇인가’ ‘왜 군에 희망이 있는가’ 등의 메시지를 차트를 넘겨가며 전했다. 재미난 사실은 이걸 지휘관이 그대로 베껴서 사병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공군교육기술단장까지 받아 적어 훈시했다.
하루는 예배를 준비하는데 단장이 교회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예배 시간에 보니 단장이 아주 진지하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속으로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주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단장이 관사에서 참모들과 회식을 하다가 자기의 술과 담배, 양주들을 모두 꺼내 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 예수 믿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거 이제 필요 없게 됐다. 나는 술, 담배를 끊었으니 필요한 사람은 가져 갈 것.” 참모들이 이때부터 제 발로 교회에 나왔다.
단장은 일반 사병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교회 안내위원으로 봉사하며 예배 30분 전부터 주보를 정리하고 자리를 안내했다. “필승.” “필승.” 교회 입구에서 사병들이 큰 소리로 경례하며 관등성명을 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래도 단장은 겸손하게 일일이 악수하면서 “어서 오십시오”라며 인사했다. 장군이 따뜻하게 맞아주니 사병들은 큰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그가 바로 김동흘 장군이다.
일반 사병은 물론 참모까지 대거 교회로 몰려들자 정말 앉을 자리가 없게 됐다. 중간 통로는 물론 출입구와 문밖까지 꽉 찼다. 하는 수 없이 예배당 문을 열고 밖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병도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1> 부대 옆 작은교회 재건에 넉 달 월급 쏟아부어
나는 출근하느라 공사일은 아내가… 3남매는 3끼를 칼국수 먹으며 자라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4개월 치 군목 월급을 쏟아 부어 1966년 새로 건축한 대전 영천감리교회. 영천감리교회 제공
내가 군목으로 있던 대전 공군교육기술단 뒤엔 작은 교회가 있었다. 철조망 너머 흙벽돌 건물이었는데 십자가만 없다면 영락없는 상여막이었다. 26㎡(8평)나 될까 싶었다.
‘교회인 것 같은데 예배는 드리는지, 성도들은 있기나 한지.’ 게다가 감리교회였다. 이쯤 되니 안 갈 수 없었다. 부대에서 주일 오전예배를 드리고 달려갔다. 6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 할머니였다. 담임목사도 없었다.
‘아, 내가 와야겠구나.’ 그렇게 마음먹고는 아예 교회 부근으로 이사를 해버렸다. 머슴이 살던 헛간 옆방을 월세 500원에 얻어 들어갔다. 방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쥐 바퀴벌레 지네가 우글거렸다. 나무를 쪼개 대충 지은 재래식 변소를 썼다. 아내는 묵묵히 내 결정을 따랐다. “약한 교회를 섬기는 일이오.” “….” 그때만 해도 장남 정석과 차남 정운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막내딸 정신은 갓난아기였다. 작은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누우면 사과궤짝 넣을 공간도 없었다.
부대 예배가 끝나면 급하게 지프차를 타고 와서 영천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비전과 에너지가 넘쳤는데 영천감리교회에선 예순이 넘는 할머니 대여섯 분이 앉아 졸고 있었다. “비전을 가져라”고 외치면 할머니들이 졸다가 “비지떡” 하면서 잠을 깼다.
교회의 형편은 조금씩 좋아졌다. 문제는 예배당이었다. “이 건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결단을 하고 김동흘 장군을 불러 기공예배를 드렸다. “단장님, 교회 예배당 건축을 좀 도와주십시오. 불도저와 트럭을 좀 빌려 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죠.” 그렇게 동학사 밑에서 사병들과 함께 돌을 날랐다. 비가 오면 웅덩이에 빠진 트럭을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 끄집어냈다.
나는 매일 부대로 출근해야 하니 공사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고생은 결국 아내 몫이었다. 아내는 수두를 앓는 둘째 정운이를 업고 벽돌을 찍었다.
출근 때 “오늘 교회 기초공사하려면 물을 뿌려야 해요”라고 한마디 툭 던지면, 아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땡볕 아래 물지게를 지고가다 뒤집어쓰기라도 하면 땀인지, 눈물인지, 물인지 범벅이 된 채 주저앉아 하나님께 울면서 하소연했다고 한다.
“하나님, 얼마나 교회를 사랑해야 하나요. 얼마만큼 희생해야 하나요. 하나님, 외상은 없지요. 결코 빚진 채로 계시는 분이 아니지요.” 그렇게 실컷 눈물 콧물 다 쏟고 나면 이것도 사명이라고 순종해야 한다면서 꾸역꾸역 다시 일어나 지게를 날랐다고 한다.
문제는 돈이었다. 넉 달 치 월급을 고스란히 공사비에 쏟아부었다. 당시 가장 싼 곰표 밀가루를 사오면 아내는 그것으로 칼국수를 만들었다. 지금의 김정석 목사, 김정운 박사, 김정신 권사 3남매는 아침 점심 저녁 그 칼국수를 먹으면서 자랐다. 1주일 내내 칼국수를 먹다 보니 콧구멍에서 밀가루 냄새가 날 정도였다.
후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식사를 했는데 하필 칼국수가 나왔다. 그때 내 옆에 계시던 김수환 추기경은 칼국수에 콩가루가 들어가 맛있다면서 잘 드셨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먹던 칼국수의 역한 냄새가 올라와 구역질이 났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2> “채플린 킴,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한국 방문한 웨슬리신학대학장 제안… 美공군 “언제든 군용기 태워라” 명령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1967년 6월 김포공항을 통해 유학길에 오른다. 60년대 당시 김포공항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6개월 공사 끝에 1966년 봄 영천감리교회 예배당이 완공됐다. 26㎡(약 8평)짜리 예배당은 5배나 커졌다. 그러나 내겐 영양실조와 급성 간염이 왔다. 눈이 노랗게 변했고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정석 정운 정신 3남매도 영양실조가 왔다.
보다 못한 주인집 할머니가 아내에게 말했다. “새댁, 그러다가 애꿎은 사람 하나 잡겠어. 간에는 보신탕이 최고야.” 다급해진 아내는 막내딸 정신이를 업고 버스비 70원을 아끼기 위해 대전 목척교까지 6㎞길을 걸었다. 그리고 개머리 하나를 사서 시멘트 봉지에 담아왔다. 아내는 20촉 전구를 켜고 개머리를 면도칼로 다듬었다. 그리고 큰 솥에 넣어 밤새도록 고았다. “하나님, 우리 남편을 살려주세요. 하나님 일 하다가 이렇게 가면 안 되잖아요.” 아내 덕에 몸이 완쾌됐고 3남매도 영양실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에겐 치유신학과 영어공부의 꿈이 있었다. 2가지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유학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상황에서 유학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목원대를 설립한 찰스 스톡스(도익서) 박사와 친분관계가 있었다. 어느 날 스톡스 박사가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헤롤드 디울프 미국 웨슬리신학대 학장을 모시고 왔다. 부대와 예배당을 둘러본 디울프 학장에게 교육기술단장이 입을 열었다.
“한국 공군 군목 중 이상한 분이 있습니다.” “오우, 어떤 분인지요.” “여기 김선도 군목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하겠다며 사병과 구보를 함께하고 영창까지 들어갑니다. 훈련병이 교회에 안 오면 내무반까지 찾아갑니다. 새벽엔 지프차를 타고 초병을 찾아가 위로합니다. 주일 예배당에 800명이 몰려듭니다. 하여간 별난 분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내게 디울프 학장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채플린 킴, 혹시 당신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예, 가고 싶습니다. 미국에 가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스톡스 선교사 댁에서 인터뷰 좀 하지요.”
2개월 뒤 웨슬리신학대에서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당신이 학교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했습니다. 단 비행기표는 당신이 끊어야 합니다.’ 너무도 반가웠지만 30만원이나 하는 비행기 삯이 문제였다. 30만원이면 당시 내 월급의 4개월 치였다.
스톡스 박사와 미 군사원조기금에 알아봤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말했다. “여보, 여기서 길이 막힐 거였다면 애초 유학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사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사인이에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때부터 아내와 나는 뒷동산 공동묘지에 올라가 밤새도록 부르짖었다. 뜻하지 않던 기회는 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공군 무관을 통해 열렸다. 그는 내 사연을 전해 듣고 미국 펜타곤 공군본부에 알렸다. 공군장관은 주한 미 공군에 특별명령을 내렸다. ‘김선도 한국 공군 군목, Space Available(언제든 사용 가능). 미국 펜타곤에서 쓰는 비행기이면 무료로 탑승하게 하라.’ 이건 미국 장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한국 공군에선 난리가 났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1967년 6월 김포에서 미국행 군용비행기를 탔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3> 美 신학대서 새벽기도 시작하자 사람들 따라 나와
유학 중 다양한 교수에게 영향 받아 ‘전인적 돌봄’ 목회 모티브 형성
1969년 미국 웨슬리신학대 유학 시절 미 해군 군목과 함께한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
미국 워싱턴DC 웨슬리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디울프 교수가 스카우트한 한국인 학생이래.” “펜타곤에서 적극 지원해 주는 학생이라는군.” 학교에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높은 기대치만큼 부담도 컸다.
수업에 들어가면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밤새 예습했지만 미국 교수들의 말은 너무 빨랐다. 강의 녹음을 반복해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당시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빵 하나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고독감이 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기도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 안에 요한 웨슬리가 말을 타고 앉아 성경을 보고 있는 동상이 있었다. 나는 밤 12시만 되면 담요를 들고 그 동상을 찾았다. “하나님, 저 요한 웨슬리처럼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게 해 주십시오.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종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래에 담요를 깔고 앉아 기도할 때면 마치 웨슬리가 탄 말에서 지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웨슬리신학대학에 가면 학교 관계자가 웨슬리 동상 앞에서 “이곳이 비숍 킴이 기도하던 자리”라고 소개한다고 한다.
밤 12시 기도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오전 6시에 혼자 드리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혼자 새벽에 기도하는 것을 보고 따라 나오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 새벽기도회는 정착돼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신학교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과목은 목회 클리닉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현대인이 처한 현존 상태가 ‘아픔’이라는 것, 따라서 ‘전인적 치유’라는 주제가 목회에서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거미줄같이 얽힌 관계 안에 있으며 그 복잡한 관계 안에서는 정신적 피폐와 질병, 근본적 고독감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목회는 영성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서, 지성, 심지어는 육체까지 터치해야 한다. 따라서 의료 도구와 과학의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 수용해 현대인의 감성과 정서, 마음과 영성, 그리고 육체적 부분까지 전인적으로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웨슬리신학대학에서 접하게 된 임상목회는 이처럼 나의 목회의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시켜 줬다. 나중에 풀러신학대학에서 교회성장학을 공부할 때, 교회성장학을 치유의 신학으로 확장하고 융합하려 한 계기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아들인 김정운 교수가 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심리학 분야를 권면했던 것도 이 같은 생각에서였다.
웨슬리신학대학에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는 디울프 교수였다. 그는 감리교의 신학을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정신적 멘토였다. 그는 조직신학의 동향이나 신학을 하는 방법론을 배우고 익히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내게 설교학의 새로운 차원을 눈뜨게 해 준 사람은 에머슨 파스딕이다. 파스딕의 설교집은 나를 매료시켰다.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력, 풍부한 예화와 설득력 등 그의 설교는 신앙인에 그치지 않고 일반인까지 공감할 수 있는 스펙트럼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4> 유학 마치고 空士 군목으로 왕성하게 군선교
졸업식 때 졸업생과 대통령 위한 기도 마치자 박정희 전 대통령 눈물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강단)가 1971년 공군사관학교 제19기 졸업식에서 기도하고 있다. 왼쪽 테이블에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가 앉아 있다.
유학 시절 나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웨슬리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2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서울에 있던 공군사관학교 군목 임무가 주어졌다. 군종사병들이 새로운 군목이 왔다며 인사하러 왔다. 나 홀로 예배당을 청소하며 부임 신고를 하고 싶어 돌려보냈다. ‘내가 근무할 성전은 내 손으로 청소한다. 주님, 제가 행동으로, 생활로 부임 선서를 하겠습니다.’
우리 집은 사관생도들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사관생도들은 갈 데가 없으니 매번 우리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시래기와 소뼈를 고아서 먹였다. 생도들의 발 구린내와 된장 구린내가 섞여 기묘한 냄새가 났다.
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서클 운동을 군에 접목했다. 기독학생회처럼 모임을 조직해 영성훈련을 했다. 장교들을 모아 기독장교회(OCU)를 조직했다. 매주 토요일 졸업반 생도들에게 인류 고전으로 성경을 강의하고 속회를 열었다.
사관학교를 섬길 때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1971년 공군사관학교 제19기 졸업식 때였다. 박 대통령 내외가 참석했는데 그날 대통령을 눈앞에서 처음 봤다. 왠지 대통령이 고독하게 느껴졌다. 뒷모습이 외롭고 측은하게 보였다.
국민교육헌장이 낭독된 후 대통령의 격려사가 있기 전 나의 축도 순서가 있었다. 내가 서야 할 자리는 사회자석이었다. 그 강단은 오직 대통령만 설 수 있었다.
의전 관계자들은 사회자석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데 마땅히 중앙의 강단에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중앙 강단에 올라갔다.
“인류의 역사와 자유와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조상들이 할퀴고 찢긴 이 땅, 눈물과 피로써 지켜온 이 거룩한 땅 위에 4년간 교육을 마친 저 젊은 파일럿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하늘을 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저들이 잡은 조종간이 이 나라 역사를 움직이는 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독수리처럼 힘차게 국토 위를 날아오르는 대한의 젊은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주께서 세워주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나라의 영도자로서 어려운 역사를 끌어가며 헌신하고 있습니다. 외롭지 않게 보살펴 주시옵소서. 힘들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졸업식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졸업식 후 대통령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목사님, 오늘 좋은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의 눈물은 한 나라를 끌어안은 고독한 톱 리더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였다.
군목으로 있는 동안 나의 꿈은 외국처럼 장군 군목이 돼 군선교를 왕성하게 펼치는 것이었다. 군대를 복음의 황금어장으로 보고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감리교신학대학에서 3일간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냥 갈 순 없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강원도 철원 대한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서울 쌍림동에서 기관목사로 일한다는 안은섭 목사를 그곳에서 만났다. 교회 이름은 광림교회라 했다.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끌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5> 광림교회서 뜻밖의 초빙, 고사하다 결국 부임
성도들 국방부에 탄원, 장관이 제대 특명 비전 제시하고 전도… 침체된 교회에 활력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두 번째 줄 왼쪽 다섯 번째)가 1970년 공군사관학교 군종실장 시절 생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어느 날 안은섭 목사에게 소개받았다며 광림교회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왔다. 교회는 당시 서울 쌍림동과 광희문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두 곳의 이름을 따서 광림이라 붙였다고 했다. 단순 설교 요청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성도들이 인사위원회를 열고 나를 초빙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예전에 영천감리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일마다 설교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선교 비전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서울 대방동과 쌍림동 교회를 오가는 생활이 6개월간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짐이 하나도 없었다. 광림교회 성도들이 와서 집안 살림을 모두 교회로 옮겨놨다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결정을 못하셔서 저희가 도와드린 겁니다. 빨리 오시라고 전 성도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절대 제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전 교인들이 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국방부 장관이 탄원서를 보고 감동했는지 그만 제대 특명을 내렸다. 국방부 핑계를 댔던 나는 달리 뭐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1971년 11월 군복을 벗고 광림교회에 부임했다. 500명 좌석에 150명이 앉아 있었다. 예전 전농감리교회에서는 40명으로 시작해 150명이 됐을 때 사임했는데, 이번엔 그만큼 광림교회 성도가 모인 것이다.
성도들의 얼굴엔 그 어떤 꿈이나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교회를 유지하겠다는 정도의 타성만 남아 있다고 할까. 교회는 서울시에서 300평을 불하받은 뒤 대금을 연체해 공매로 넘어갈 처지에 있었다. 이걸 해결하겠다며 교회 앞마당 일부를 임시 상가로 개조해 월세를 받아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교회 근처엔 충현교회 경동교회 장충단교회 같은 타 교단 대형교회들이 있었다. 그 위세에 눌려 광림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봉사나 선교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리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모이는 감리교회가 정동교회였는데 출석 교인이 500명에 그쳤다.
“여의도순복음교회나 영락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왜 우리 감리교회는 성장하지 못할까.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같이 조선 땅에 상륙했는데, 왜 감리교는 떨어지는가. 똑같은 성령이신데 똑같은 예수님이신데, 왜.”
매주 수요일 저녁을 ‘전도의 밤’으로 정했다. 예배 때 사도행전을 30분 동안 강의하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다. 나도 함께 나갔다. 전도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다들 머뭇거렸다. 그래도 내가 앞장서니까 순순히 따라왔다. 시간도 30분으로 정했다.
첫날 전도에서 66명이 교회에 나와 등록하는 결실을 맺었다. 성도들은 용기백배했다.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성령의 역사가 전도의 현장에서 더 강력하다는 것을 교인들이 충분히 체험한 것이다.
비전을 제시하고 전도를 시작하자 성도들이 불어났다. 150명이던 성도는 300명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0명을 돌파했다. 예배당이 꽉 찼다. 성도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자’는 비전이 멀리 있는 추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과 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6> 연 40%씩 성장하는 강남으로 교회 이전
성도 급증하는데 주차장 없어 불편… 금식 기도 끝에 대지 매입 후 기공 예배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1978년 4월 서울 신사동 배나무 밭에서 기공예배를 드리고 교회 공사를 시작했다. 오른쪽은 임시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천막교회.
“1000명으로 가자!” 전도에 박차를 가하자 금세 800명까지 성장했다. 1975년 12월 2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총동원 주일’이란 행사를 가졌다. 예배에 1003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교회주변 쌍림동은 쇠퇴 중이었다. 아파트 붐이 일면서 다들 이사했다. 주차장이 없어서 길가에 차를 대면 주차위반 딱지를 끊기 일쑤였다.
‘교회가 꼭 여기에 있어야 하나. 아무리 좌석이 많아도 주차장이 없으면 안 된다. 1년에 40%씩 성장하고 있는 강남으로 가자.’ 그때 이미 충현교회는 강남에 터를 마련해 놓았고 충무로 성결교회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 강남 이전은 광림교회의 목회비전과 성장이론에 의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77년부터 장로들과 성장하는 교회를 탐방했다. 기도하고 설득하기를 반복해 결국 강남 이전을 확정했다. 그때부터 땅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성모병원 근처였다. 기도하는데 확신이 오지 않았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무릎을 꿇고 앉아 어제 본 땅들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 광림교회의 터전으로 인도해 주세요.” 그렇게 돌아다닌 땅이 33군데였다.
34번째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텅 빈 배나무 밭을 찾았다. 아브라함이 바라봤던 요단의 들이 이와 같았을까. 그런데 왠지 마음이 끌렸다. 불현듯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이곳입니까.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오, 주님 감사합니다.”
78년 1월 1일, 그 배나무 밭에 엎드렸다. 눈이 수북이 쌓인 들판에 차디찬 겨울바람이 살을 할퀴듯 불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을 거룩한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전을 짓기 원합니다. 제가 신을 벗겠나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20일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삼각산기도원과 한얼산기도원에서 기도하며 강단에 섰다. 물만 마시며 1주일을 지내자 된장찌개 만두 냉면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하루는 새벽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나님, 제 교만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 마음속에 교만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깨끗케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통곡을 했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평화로움이 밀려왔다. 성도들도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 덩달아 영적으로 충만해졌다. 텅 빈 들판에 교회를 짓겠다고 하니 모두 부정적이었지만 차츰 나의 비전에 동화되고 있었다.
“여러분, 저 들판에 세계에서 제일 크고 위대한 감리교회가 올라갈 것입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입니다.”
금식 기도 후 대지를 매입했다. 배나무 밭은 7필지로 소유주가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평당 19만원을, 어떤 사람은 24만원을 달라고 했다. 흥정할 시간이 없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모두 사들였다.
78년 4월 18일 저녁 6시 배나무 밭에서 기공예배를 드렸다. 한쪽에 170평의 천막을 치고 예배처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쌍림동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여러분, 다음 주일부터는 여기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한강을 건너가 예배드립니다.”
이튿날 장로들과 예배당 앞에 있던 법궤를 옮겨 왔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7> 신축 건물 규제로 위기… 새벽마다 “성전 건축” 외쳐
구청장 결재 간발 차이로 극적 허가 “전시에 고사포 방해” 종탑도 풀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강남에 예배당을 건축 중이던 1978년 4월 임시 천막교회에서 안전모를 쓴 채 설교하고 있다.
서울 쌍림동 교회 매각대금은 신사동 땅값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1976년부터 부흥회를 다니면서 받은 사례비와 적금을 보태 겨우 땅값을 마련했다.
교회가 구입한 1200평 중 550평을 팠다. 그런데 정부에서 예기치 못한 결정을 발표했다. 물가 상승 억제, 건축자재 소비 억제 등을 이유로 강남 일대의 신축 건물 규제에 들어간 것이다. 교회도 1000평 이하만 가능하다고 했다. 2400평 교회를 짓겠다던 우리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75m 종탑도 세울 수 없었다. 전시에 고사포를 쏠 때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였다.
78년 4월 천막으로 교회를 지어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파놓은 땅에 물이 차올라 연못처럼 고였다. 돈 문제는 둘째 치고 어떻게든 건축허가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2400평 예배당 건축, 4300명 좌석 배치’라는 구체적인 비전이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기도밖에 없었다. 정말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교회 천막에서 잠을 자면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드렸다. 4월의 밤이 어찌나 춥던지 이불을 두 겹 세 겹 덮어쓰고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새벽기도 후 성도들과 함께 교회 주변을 뛰었다. 마치 여리고성을 돌듯 일곱 바퀴씩 돌았다. 내가 앞장서서 “성전 건축, 성전 건축”을 외치면 성도들도 따라서 “성전 건축, 성전 건축”을 외쳤다. 그렇게 함께 외치고 나면 가슴이 후련하게 뚫리는 것 같고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기도 응답은 기적처럼 나타났다. 건축규제 시행령이 발표된 지 3일 후인 6월 29일 저녁 건축허가가 났다. 광림교회 건축허가서는 새로운 법이 아니라 기존 법에 따라 구청장이 간발의 차이로 결재한 마지막 문건이 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건축을 직접 지휘하신다는 확신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교회 종탑이었다. 기도 중에 고성용이라는 중학교 동창이 떠올랐다. 당시 국방부 합동참모부의 국장으로 있었는데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무작정 찾아갔다.
“도와주십시오.” 힘겹게 내뱉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도와줄까요.” “교회 종탑을 건축하려면 군의 허가를 얻어야 합니다.” “제가 손을 한번 써 보겠습니다.”
그분은 국방부 장관을 만나서 교회 설계도를 펼쳤다. 그리고 한강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며 고사포를 쏘는 데 지장이 될 만한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문제 하나가 해결되자 희한하게도 실타래처럼 엉킨 다른 문제들이 술술 풀렸다.
현대건설과 건축 계약을 맺고 공사에 들어갔다. 몇 달 동안 방치했던 땅에 연못처럼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물을 빼니 붕어들이 새하얗게 깔려 있었다.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고기를 잡아다 넣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잡은 붕어는 인부들과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광림교회 마크는 물고기 모양에 십자가가 꽂혀 있는 형상이다. 마크는 이때 광경을 보고 착안해 만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턱없이 모자란 건축비였다. 100만원, 1000만원 끊임없이 청구서가 날아왔다. 수억원이 필요했다. 기도 중에 떠오른 얼굴은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장로였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8> 드디어 강남 입당예배, 4000여 좌석이 꽉 차
건축비 고갈·레미콘 파동 등 딛고 세계 제일의 감리교회 비전 성취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연이은 철골 파동과 레미콘 파동을 극복하고 1979년 12월 서울 신사동 광림교회 건축을 완료했다. 당시 입당예배 모습.
당시 나는 월요일마다 최순영 장로가 경영하던 대한생명과 콘티빵에서 직장예배를 인도했다. 최 장로는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신학교와 교회 건축하는 일에 힘썼다.
최 장로 내외를 남산 밑에 있는 외교구락부로 초청해 점심을 대접했다. 힘들게 입을 열었다. “장로님, 건축비가 없습니다. 2억원을 좀 빌려 주십시오. 교회 건축하고 이자까지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빌려 주십시오.”
막상 말을 꺼냈지만 최 장로에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0평이 1600만원 할 때였다. 게다가 1차 오일쇼크로 기업의 자금 결제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 담보도 없이 내 이름 석 자만 믿고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최 장로와 헤어지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최 장로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목사님, 우선 급한 대로 1억원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정말입니까. 어떻게 하루도 안 돼 결단하셨습니까.” “저희 집사람이 간밤에 꿈을 꿨는데, 글쎄 목사님이 제3한강교에서 고기를 잡는데 수없이 물고기를 낚더랍니다. 큰 교회가 될 꿈이라며 도와주자고 하네요.” 1억원 수표를 받았다. 동그라미가 그렇게 많은 수표는 평생 처음 봤다.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빌린 2억원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쏟아부어야 할 돈은 끝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철골 파동’이 일어났다. 지하철 건설이 한창인 때였기에 나라에서도 철골이 부족해 난리가 났다. 철골 문제를 해결하니 이번에는 ‘레미콘 파동’이 일어났다. 마치 세상이 교회 건축을 막으려 작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콘크리트를 붓던 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체력도 정신도 고갈돼 있었다. 이튿날 3500만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더 이상 돈을 끌어올 데가 없었다. 넋이 나간 기분이랄까. 물끄러미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광경을 보며 이런 생각까지 했다. ‘에밀레종을 만들면서 쇳물을 녹일 때 어린애를 던져 넣었다고 하지. 내가 녹아서 이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는 금식 기도를 하면 정신이 더 맑아졌는데 이번에는 과로가 겹쳐서인지 그만 정신을 잃고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온 교인이 들고일어났다. 담임목사가 기도하다 쓰러졌다고 하니 성도들이 새로운 각오와 의지를 불태웠다. 지하 기도실에서 24시간 연속 기도회가 시작됐다.
1979년 12월 정문과 후문 공사가 완료되고 공정의 99%가 진행됐다. 전체 건축비용이 21억6000만원이 든 공사였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35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그해 12월 16일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입당 예배의 날이 밝았다. 성전을 새로 짓기로 결의하고 건축위원회가 출범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큰 공간이 과연 찰 것인가’에 있었다. 예배당을 너무 크게 짓는 것 아니냐고, 그 큰 예배당이 차겠느냐고 부정적인 말들이 난무했다.
모든 우려는 입당예배 때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가능이 실현된 것이다. 4000여 좌석이 꽉 찼다. 세계 제일의 감리교회가 되어 선교 봉사의 주역이 되자는 우리의 첫 비전이 성취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29> 아픔 간직한 대중 위한 설교에 전념
개인주의 팽배 전도 나서면 냉대… 필사적으로 나그네 위로할 메시지 고민
1980년대 초반 서울 광림교회 전경. 예배 후 성도들이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개인주의 문화 때문에 쌍림동 시절보다 전도율이 떨어졌다.
예상대로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에 엄청난 인구가 유입됐다. 사람들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수백 명의 성도가 전도를 위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도의 열매가 쌍림동보다는 못했다.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는 이미 개인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광림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제발 좀 괴롭히지 마쇼.” 문을 쾅 닫아 버리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성도는 그 문에 손이 끼기도 했다.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이 간섭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안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돌파구는 설교였다. 나가서 전도하는 방법을 병행하되 머물 교회를 찾아 유랑하는 대중의 걸음을 광림교회에 멈추게 할 설교 소재를 찾아야 했다. ‘강남을 향해 진출해 오는 사람들의 현존 상태는 무엇인가. 그들의 근본적 요구는 무엇인가.’
내가 주목한 것은 현대인들의 이동성과 정착하고 싶어 하는 안정감, 어딘가에 귀속되고 싶어 하는 소속감, 그리고 그 속에서 두려워하는 불안감이었다. 당시 내가 본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의 존재를 귀속시키고 싶어 끊임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였다. 마음속에 자기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한 아픔을 간직한 채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소망이었다. 그리고 현실적 불안을 넘을 수 있는 긍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설교 제목을 지을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윗자리는 아직 비어있다’ ‘생명의 유턴’ ‘제 십자가는 제가’. 영화 제목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듯 나 또한 사람들의 영적인 구미를 돋게 하는 제목들을 고민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설교에 시간과 열정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루를 거의 설교를 준비하는 데 썼다. 머릿속은 온통 설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한 생각을 건지기 위해 독서와 탐구가 일상이 됐고, 무언가 떠오르면 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구도를 이어 나갔다.
‘생각력’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의 지구력’이라 해야 할까. 미국 유학시절 접한 에머슨 퍼스딕 목사는 40분 설교를 위해 40시간 이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1분 설교에 1시간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 이야기가 늘 기억 속에 맴돌았다.
설교에 정성을 쏟은 만큼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나그네처럼 떠돌던 그들이 발길을 멈췄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설교를 통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망을 제시해 주는 열쇠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고독감은 멀리 떨어진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간접적 메시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더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손길이 필요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쏟으면서 손잡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인격적 관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설교와 강의 준비, 예배 인도, 교회 경영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몫은 아내인 박관순 사모에게 돌아갔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0> 아내의 따뜻한 손길에 새신자들 마음 열어
이름·전화번호·주소 등 외워 꼭 심방… 내 설교와 함께 부흥 이끈 쌍두마차
서울 광림교회가 부흥한 데는 새신자와 예배결석자 관리에 철저했던 박관순 사모의 역할이 컸다. 사진은 1985년 교회에서 개최된 트리니티 성서연구지도자 세미나 참석자들.
아내는 설교를 듣고 돌아가는 새신자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낯선 얼굴을 보면 주저 없이 다가가 전화번호를 물었다.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흘리듯이 던지고 갔다. 아내는 그 번호를 외워서 어김없이 전화했다. “여보세요. 어제 광림교회를 방문하셨죠.”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아내에게는 남모르게 감춰 둔 비법이 있었다.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외웠다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전화번호나 주소를 손바닥에 쓴 것이다. 아내는 새신자가 오면 어김없이 월요일 심방을 갔다. 며칠만 시간이 흘러도 새신자를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 광림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아니, 어제 뵀던 사모님 아니세요.” “김창인 선생님과 가정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왔죠.” 새신자는 그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자기 이름을 기억해 주고 전화번호와 주소까지 알아내 찾아왔다는 것에 감동했다.
아내는 얼굴 외우는 것에도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교회 입구에 서서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 중에 있어야 할 얼굴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구분해 냈다. 빠진 얼굴이 있으면 그 주에 바로 전화하거나 집으로 찾아갔다.
주원화 권사는 아내가 철저히 관리해 우리 교회에 정착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주 권사는 원래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런데 우연히 주일에 신사동 거리를 지나가다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광림교회로 향했다고 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편안함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나그네였다. 한번 와본 교회일 뿐 나그네의 지친 몸을 누이고 하룻밤 쉬고 가는 주막 같은 곳이었다.
그 주막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주원화라는 이름은 익명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이름을 물어 왔다. 아내였다. 그는 그게 고마웠다고 했다. 그렇게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 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하게 사모가 집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두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기도는 뜨겁고 간절했다.
그 따뜻한 손길 앞에서 주 권사의 마음이 녹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훗날 주 권사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왜 그렇게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감동이 찾아왔어요. 그동안 꽉꽉 눌러 왔던 서글픔이 쏟아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게 아내는 성도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설교로 다가갈 수 없는 삶의 자리를 찾아가 기도해 주고 상담했다. 속회로 인도하면서 새신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채워줬다.
성도에 대한 아내의 관심과 심방은 설교 메시지가 강단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했다. 설교가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물길’이었다면 아내의 심방과 관심은 흘러 들어온 물을 더 이상 흘러 나가지 않게 하는 ‘저수지’ 같았다.
신사동에 정착한 후 광림교회는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기도할 때마다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설렘과 기대감이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목회가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그릇을 채우는 폭발적인 성장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뭔가 기회가 올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께서는 비약적인 성장의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이뤄졌다. 하루는 김제량 강남구청장이 나를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1> 교회서 민방위 교육… 폭발적 성장 계기
구청서 장소 제공 요청에 허락 대신 직접 강사로 나서 젊은이들 사로잡아
1993년 서울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전투경찰단 수련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김선도 원로목사. 80년대 교회부흥은 예배당에서 진행했던 민방위 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
“광림교회를 민방위 교육 장소로 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김제량 구청장의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기획위원회를 열었다.
“예상대로 강남에 대도시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강남구청에서 민방위 교육 장소로 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건 기회입니다.”
기획위원회에서 장소사용을 결정했다. 교회를 빌려주는 대신 강남구청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저를 민방위 교육 강사로 채용해 주십시오. 특정 종교에 특혜를 줬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구청은 난색을 표했지만 서울시장에게 이력서를 보내자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대전 공군교육기술단 군목, 공군사관학교 군종실장 경력과 소령으로 제대한 이력이 컸다.
1981년부터 민방위 교육이 시작됐다. 매달 3000여명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잠을 청했다. 교회 화장실과 앞마당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였다.
“여러분의 가슴에는 100억원의 재산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데 왜 활용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가치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졸음을 겨우 참던 눈동자가 갑자기 초롱초롱해졌다.
“여러분 안에는 아직 쓰지 않고 남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태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고 일어서고자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기를 내고자 한다면 그 무한한 가능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쯤 되자 졸다가 수첩을 꺼내 메모하는 이들이 보였다. 당시는 불가능해 보였던 교회 건축을 믿음으로 성취해 낸 감동이 절정으로 달아오르던 때였다. 말씀이 제 발로 내 안에서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내 손과 발은 춤을 추듯이 파토스를 만들고 억양과 표정은 자유자재로 교육장 전체를 넘나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처한 자리에 같이 주저앉아 손을 일으키면서 설득하는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군에서 썼던 정신교육과 수많은 예화를 잔칫상처럼 진설했다.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인생관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가, 절망을 딛고 성공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강의 때마다 이런 주제들을 이어 나갔다.
이때 내가 썼던 강의 스타일은 문답법이었다. 질문을 던져 생각하게 하고, 나의 주장을 펼친 다음 검증된 예화를 제시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인생이 고달프니 제가 마지막에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꼭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육이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교회 광장에 서 있는 사람, 빙글빙글 돌면서 뭔가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승려나 신부도 있고 유명한 가수나 탤런트도 있었다. 민방위 교육은 광림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그해 민방위 교육에 왔던 젊은이 800명이 광림교회에 나왔고 가족까지 데리고 나오면서 그해 새신자 1600명이 등록했다. 그때 교육을 받았던 사람 중 장로가 2명 나왔다. 담터 사장인 장세근 장로와 CTS 회장인 감경철 장로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2> 1989년 시작한 호렙산 새벽기도회로 영적 각성
치유 목회 결실, 성도 4만명 넘어서… 양로원 세워 사할린 동포 귀국 도와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왼쪽)가 1992년 10월 강원도 춘천에 건립한 무료 양로원인 ‘사랑의 집’에 입소하는 사할린 동포와 악수하고 있다.
1980년대 민방위 교육을 교회에서 하며 폭발적인 성장이 이뤄졌다. 건축할 때 졌던 빚도 다 갚았다. 교회의 모든 시스템과 구조 자체를 조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먼저 3개 교구를 묶어 선교구라 하고 부목사를 뒀다. 각 교구는 지역별로 한 명의 심방전도사를 뒀다. 교구는 10∼12개의 지구로 구성해 평신도 지구장을 세웠다. 지구는 다시 10개의 속회로 구성하고 속장이 인도하게 했다.
‘그릇’을 만드니 ‘물’이 채워졌다. 전도 후 정착하는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절실한 것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 본래 감리교 운동은 평신도 운동이었다. 교역자 중심의 목회는 자칫 평신도들에게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 매년 새해가 되면 평신도 지도자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교회의 목회 방향성을 제시하고 임원의 책임과 사명, 속회의 활성화 방안, 현대신학 동향 등을 가르쳤다.
교회는 영감 있는 설교·음악·의식·안내라는 4가지 핵심가치를 붙들었다. 특히 영감 있는 안내를 위해 교회 입구부터 예배당 꼭대기까지 100여명의 안내위원을 배치했다. 복장과 표정, 인사하는 자세와 말투까지 교육했다.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광림교회는 성도 수가 4만명을 넘어섰다. 인간에 대한 치유라는 목회학적 관점이 교회성장이라는 선교적 방향성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삶의 안정적 토대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물질적 안정성에 상응할 만한 정신적 풍요, 영적 성숙에 이르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그 열망을 터뜨린 것이 89년 6월 시작된 호렙산 새벽기도회였다. 새벽 3시30분부터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본당 4300석은 만석이었다. “여러분, 우리가 모인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입니다. 모세가 사명을 받은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호렙산 새벽기도회를 통한 영적 각성은 기도운동으로 이어졌다.
기도의 불길을 잇고자 강원도 춘천 서면에 기도원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기도원 허가가 나지 않았다. ‘뭔가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기도원보다 복지관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응답을 받고 계획을 바꿔 무료 양로원 사업을 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자 곧바로 허가가 떨어졌다.
무료 양로원 ‘사랑의 집’을 통해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러시아의 사할린 동포 1세들이 영구 귀국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사할린 동포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2차대전 후 소련의 출국 거부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대한적십자사 법무부 보건복지부와 교회가 연합해 150명의 사할린 동포를 모셔왔다. 교회는 이분들에게 의식주 제공은 물론 사망 후 장례와 묘지문제까지 해결해줬다.
고향을 떠난 지 50여년 만인 1992년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고 좋아하던 노인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월이 흘러 무료 양로원은 치매 요양원인 ‘사랑의 집 광림노인전문요양원’으로 전환했다. 모셔왔던 무의탁 사할린 동포들이 연로해지면서 치매환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도 중시했듯 우리 교회도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3> 제21대 감독회장 돼 ‘웨슬리 전도운동’ 활성화
국내외 사랑이 필요한 곳에 열정 쏟아, 세계감리교 서울희년대회도 개최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왼쪽 일곱 번째)가 2005년 감신대 장천(杖泉)생활관 봉헌예배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장천은 김 목사의 호이다.
1994년 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남연회 감독에 선출됐고 이듬해 제21대 감독회장이 됐다. 가장 먼저 집중한 것은 웨슬리의 전도운동과 선교를 활성화하는 일이었다.
90년대 한국교회는 장로교의 칼뱅주의가 대세였다. 한국인이 가진 숙명론적 인생관과 칼뱅의 예정론이 절묘하게 상생했다. 감리교는 숙명론적인 세계관을 깨고 전도와 선교의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웨슬리 신학을 목회와 교회성장학에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가 다 있었다. 당시 감리교 신학을 보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상황신학이 대세였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감리교 신학이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상실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는 교세 약화로 나타났다.
‘사람에겐 현실적 요구가 있겠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영적 요구가 더욱 강하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웨슬리의 복음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웨슬리의 복음주의적인 선교와 이웃사랑 실천의 신앙을 한국교회에 적극 선포하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희년운동이다. 95년 8월 22일부터 세계 감리교 감독 150명을 광림세미나하우스로 초청해 감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27일부터 전국 성도 2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 체육관에서 ‘세계감리교 서울희년대회’를 개최했다.
감독회장을 지내면서 감리교의 부흥운동을 알리고자 ‘기독교 타임즈’를 만들었다. 인우학사를 다시 세우고 일영 감리교수양관도 건축했다. 종로에 있던 태화사회관을 서울 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겼다.
당시 감리교신학대 기숙사는 종합관 지하에 있었다. 얼마나 낙후됐던지 학생들이 두더지굴이라 불렀다. 후배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8억3900만원을 광림교회에서 기부해 2005년 300명이 생활할 수 있는 장천생활관을 지었다. 감신대100주년기념관 건축에도 힘을 보탰다.
세계선교에도 힘썼다. 1994년 세계 감리교 역사상 최초로 에스토니아공화국에 발틱미션센터를 지었고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짐바브웨에 세운 대학에 100만 달러를 헌금해 채플을 지었다.
2000년에는 터키에 안디옥개신교회를 세웠다. 이곳은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시작한 선교발상지이다. 그런데도 2000년 동안 기독교계에서 잊힌 장소가 된 것은 터키가 모슬렘국가여서 교회를 복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개신교회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왔던 안디옥교회를 21세기에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래서 도청 옆 구 프랑스대사관을 구입해 안디옥개신교회를 봉헌했다. 현재 터키 청년 40여명이 모이며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센터도 있다.
1999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교회를 건축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목사님 한 분이 사진을 들고 왔는데 누군가 마당에 있는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감독님, 암 환자들이 많은데 보호자들이 기도할 곳을 찾지 못해 이렇게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0억원으로 인근 부지를 매입해 한국 최초로 국립대 채플을 세웠다.
광림교회의 선교사역에는 때마다 기막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주님은 인도하시고자 하는 나라와 지역에 대한 측은함과 사랑의 열정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4> 43년 목회 마무리 앞두고 리더십 승계 문제 고심
부목사 출신 후보자 3명 모두 고사, 비난 무릅쓰고 김정석 목사 세워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2013년 7월 교회에서 열린 호렙산기도회에서 나무 십자가를 잡고 기도하고 있다.
나의 43년 목회활동은 공식적으로 2001년 4월 은퇴함으로써 마무리됐다. 리더십 승계 문제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승계란 선임 목회자의 업적이나 전통,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와 신학, 전통의 연속성이 선임자로부터 후임자에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승계 대상자는 광림교회의 생리를 잘 아는 부목사 출신 목회자였다. 교회는 국내 지교회는 물론 세계선교의 비전을 지속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후보자는 3명으로 압축됐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부탁했다. 하지만 3명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 부목사 출신들은 광림교회 사역 규모와 방향성을 알고 있었던 만큼 부담도 컸던 것 같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부담감이 너무 큽니다. 제가 잘못 맡았다가는 광림교회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퇴임일이 다가오면서 염려가 커졌다. 아무리 기도해도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선배 목사님들과 모임을 갔는데 최훈 이만신 목사님이 예상외의 충고를 했다.
“감독님, 이 문제는 광림교회 하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드님이 목회자로 잘 훈련돼 있지 않습니까. 사회의 비판적 여론이 있다 해도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날 밤잠을 잘 수 없었다. 부목사 중 후임자를 청빙하려던 생각이 흔들렸다.
나는 자녀교육만큼은 광야교육을 고수하는 사람이다. 건강한 학교에 자녀를 보내야 하며 자녀는 반드시 부모 손을 떠나 고생하면서 혼자 공부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장남 김정석 목사를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거창고등학교에 입학시킨 것도 이 같은 이유였다.
장남은 서울신대와 감신대에서 공부했다. 인천 강화에 있는 미자립교회에서 6년간 목회할 때 재정지원을 일절 하지 않았다. 미자립교회를 자립교회로 성장시킨 것은 장남이 기도하고 씨름해 낸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들은 미국 애즈베리신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도서관에 살다시피 했다.
이후 목회를 배우라고 광림교회로 불렀을 때도 김정석 목사는 4년 연속 교구 성장률과 목회실적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회 리더십의 연속선상에서 장남이 적합하다. 광림교회 생리와 목회정신, 교육, 인격적으로 제일 깊게 체화된 후보도 아들이다.’
고민이 깊어졌다. 매일 하나님 앞에 매달렸다. ‘하나님, 무엇이 광림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한 일입니까.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의 결단이 정말 자식에게 특권을 물려주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제가 비난을 무릅쓰고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까.’
거의 1년 이상 고민하다 장남에게 말했다. 그날 아들의 반응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예? 아버지, 지금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때부터 아들은 코가 석자나 빠진 사람처럼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다녔다.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3월 은퇴를 1년 앞두고 리더십 승계를 발표했다. 교회 내부에선 아무런 소동이나 이견도 없었다. 예상했지만 외부에서 부자간에 리더십이 승계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독재세습 이야기가 나왔다.
건전한 담론의 장은 펼쳐지지 않았다. 공격과 비난이 빗발쳤다. 그때 확신이 하나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교회의 선택이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아닌지 그때 밝혀질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35·끝> ‘5분의 은총’ 이후 맺어 주신 모든 열매에 감사
은퇴한 지 17년… 한국교회를 생각, 복음으로 생명 구원하기를 소망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2013년 9월 광림사회봉사관 봉헌예배에서 축도하고 있다.
은퇴한 지 17년이 지났다. 1990년대부터 이 땅에는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세속화의 물결 등 낯선 문화와 사상들이 상륙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도 이뤄졌다.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들이 공격당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와 진리들이 디지털문화의 참신함과 재미 앞에 낡은 것, 시대에 뒤처지는 것들로 밀려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세속화를 다스리지 못했다. 오히려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와 신학에 흘러들어왔다. 80년대를 시작으로 교회의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이 혼돈과 위축 현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어떻게 교회와 정신을 해체시키는 현대의 정신사조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깃발을 흔들 것인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목회자는 선지자가 아니라 기도하는 제사장이다. 세속의 논리가 교회를 흔들고 교회성장이 정체된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흔들리는 교회를 더 흔들어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흔들리는 교회의 터전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하는가.
현재 한국교회는 전도자(Evangelist)를 요청하고 있다. 이미 있는 교회를 관리하는 목회, 행정 중심의 목회, 수동적인 목회가 아니라 교회를 개척하고 확장시켜 내는 적극적인 목회자를 원하고 있다. 이제 목회자는 설교자인 동시에 전도자가 돼야 하고 전도자인 동시에 개척자가 돼야 하는 시대의 요구를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설득력과 영성을 소유한 전도자가 돼야 한다.
무엇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것인가. 무엇으로 세상에 교회가 매력을 발산할 것인가. 그 겉살은 ‘경건함’과 ‘섬김’이요 감춰진 속살은 ‘복음주의’가 돼야 한다. 세상 속에선 섬김의 화목을 이루는 동시에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구별됨이 있어야 한다. 그 묘한 이중성이 교회의 매력이 발산되는 지점이고 그곳에서 복음이 선포돼야 한다.
존 웨슬리는 회개를 ‘구원의 현관’이라 했다. 이미 구원의 현관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계속 그 죄라는 회개의 현관문 앞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거실로, 안방으로, 그리스도의 신령한 은혜의 자리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내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은 “사실(Fact)보다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눈을 갖고 삶에 직면해 나갈 것인가. 어떤 사실을 바라볼 것인가. 믿음의 새로운 태도로, 새로운 전망으로 현재의 사실을 바라보는 게 신앙이다. 만약 부정적 시각으로 사실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다.
68년 전 북한 군의관에서 불과 5분 만에 국군 의무관으로 입소하게 된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5분의 은총을 체험한 후의 내 인생은 그 은총에 대한 적극적 응답이었다. 그 5분은 영원한 5분이었다. 영원한 카이로스였다. 운명에서 사명으로의 전환이었으며 나의 보좌에서 내가 내려오고 주님이 좌정하시는 주체의 전환이었다.
그 5분을 경험하고 나는 나의 생명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또 다른 생명들, 그 생명들을 복음으로 구원하고 더욱 풍요로워지도록 살아왔다. “나의 생애와 열망과 비전의 모든 열매를 하나님께 올리나이다. 하나님,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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