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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자
말씀/마태복음 18:1-35
요절/마태복음 18:4, 찬송가/278장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합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가 합니다. 또 그런 자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자의 능력이요, 또 교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교회나 또 그 안에 있는 신자가 건강하게 제대로 설 수도 있고, 아니면 소자를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의 문제를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장,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1-14)
‘그때에’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성전세를 납부하신 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지만, 갈등을 피하기 위해 신기한 방법으로 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중적인 모습이요, 또 이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 속한 신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도 이중적인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을 분명히 해야겠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이것이 제대로 된 질문일까요? 질문다운 질문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예를 들어 최고급 뷔페에 초대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서 잘 먹으려면 무엇을 주문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이것은 뷔페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질문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천국을 이 땅에서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수고를 많이 하면 천국에서 큰 집에서 살고, 겨우 믿음만 지키고 살면 5평짜리 원룸에서 산다는 천국간증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세상에서 큰 자가 되면 더 큰 권세를 누리고, 더 폼 나게 사는 것과 같이 천국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도 그런 생각 가운데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이런 생각가운데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하고 경쟁하고 비교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그대로 천국에서 적용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교회 안에서 그런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보인 여기서의 어린 아이는 스스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절대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하는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말씀하십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 하는데,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그것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로 의지하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즉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뭔가 할 수 있어, 예를 들어 마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 같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타이틀이 제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역시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신의 부족함,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크다 작다. 나의 서열이 어디쯤일까 관심을 가질까요? 어린 아이가 내가 서열이 몇 번째야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것은 전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결국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천국의 은혜와 감동과 기쁨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천국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서의 어린 아이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말합니다. 인풋은 많은데 아웃풋은 별로 없습니다. 사업성만을 따진다면 이런 어린 아이는 수익이 나지 않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내가 마음이 높고 수익을 따지고, 큰 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생각만 가득하면 이런 사람에게는 관심도 갖지 않고 영접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합니다. 내 스타일이나 내 감정이나 내 계산으로는 힘들지만 예수님이 어린 아이같은 나를 영접하신 것을 생각하고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크냐 하는 갈등을 하는 곳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맷돌은 두 돌 틈에 곡식을 넣어 가는 것인데, 그 중에서 연자맷돌은 커서 소나 말이 돌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이 큰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게 하는 것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 화기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는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태도에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자신을 잘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실족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잘 돕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피고 도움을 줘야 하기 때문에 이를 피곤해 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8,9절에 보면, 손이나 발이 또 눈이 범죄하게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같은 말씀이 있던 산상수훈에서는 개인의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이런 것들로 어린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손이나 발로 상대를 때리는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예를 들어 손가락질로 개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무시하면 어린 사람이 상처를 받고 실족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는 것은 함부로 말하는 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말, 상처 주는 말, 잘못을 하고도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말 때문에, 어린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또 교회 공동체에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돈에 관련된 것과 성적인 문제입니다. 선배들이 다단계로 어린 후배들을 유혹해서 힘들게 하거나, 또 성적 농담이나 추행으로 상처를 주게 되면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눈이 범죄하게 하면 뽑아 버리라고 하실 정도로 나의 범죄로 어린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짓는 것만큼, 다른 사람을 나 때문에 실족시키는 것도 똑같은 범죄로 다루십니다. 그리고 이를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한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어떤 모임이 되어야 하는가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센 사람, 모난 사람만이 살아남거나 또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내 신앙으로 나만 은혜 받고 나만 천국가면 된다고 여기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자기 이익과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부족하고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위로와 힘을 얻고, 서로 마음을 나누고, 깃들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족한 사람이라도, 어린 아이와 같이 손이 많이 가고, 유리그릇 같이 깨지기 쉬운 사람이라도 잘 품고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건강하고 올바른 모습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요?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작은 자는 작기 때문에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서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했습니다.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는 가를 다 하나님께 천사들이 알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 작은 자의 스폰서입니다. 그러니 작다고 무시했다가는 하나님께 혼나지만 잘 대해주면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그만큼 작은 자라도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12-14절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 어린 양 한 마리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99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한 마리 양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찾으면 길을 잃지 않지 아니한 99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찾았으니 기뻐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사실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상황에서 나 같으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겠습니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100마리 중의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아직 99마리가 남이 있습니다. 이 99마리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단순 비교해도 1마리 보다 99마리가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99마리를 산에 두고 갔다가는 어떤 피해를 볼지 알 수 없습니다. 옆집에 좀 맡기거나, 아니면 울타리에 가두어 두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산에 99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99마리의 남은 양을 잘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괜히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고자 하다가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99마리 양 때문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상식이고 세상의 방식입니다. 또 이것이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정입니다. 즉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소수는 희생되어야 합니다. 기업이 그렇게 운영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경제의 원리요,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나 합리적인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99마리를 두고 그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듯이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구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적진에서 실종된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여럿 병사가 희생됩니다. 전쟁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미국정신을 그린 영화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합리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 시대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투자에 대한 효율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다보면 결코 이런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따지고 계산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다른 방식, 다른 계산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제자들과 같이 누가 크냐 하는 자기 영향력을 중심으로 결정한다면 결코 이런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다르십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것을 계산하는 합리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으로 누가 크냐 하는 갈등을 하기보다 나를 천국에 이르게 한 그 은혜를 기억하고 소자 하나를 영접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15-20)
예수님은 보다 실제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메-성경은 ‘함께 믿는 동료가 너에게 상처를 주거든’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죄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고 상처를 받은 상황입니다. 이러면 나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되갚고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질이 없는 사람인줄 알아?” “왜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냐고.”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먼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메-성경은 ‘가서 그에게 말하여 둘 사이에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 단톡방에 올려서, “아무개 정말 문제가 많아요.” “그 친구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 같아요. 버럭 소리 지를 때면, 분노 조절 장애자 같아요.” 하며 뒷담화 까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그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 그러니 네가 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들으면 친구를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싸우면서 친구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듣지 않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오히려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 말이 단지 내 주장이 아니라, 너의 잘못이라는 것을 증인을 통해 분명하게 함으로서 상대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나 말고, 다른 제 3자가 들어도, 너에게 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니? 라고 하면서 상대방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면 끝나는데, 그래도 안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반발하고 역정을 냅니다. 그러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혼자 가고, 다음에는 두 세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고, 세 번째는 교회까지 가서 그에게 권면합니다. 그런데도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 번씩이나 권면해도 안 받아들이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표현을 잘못 오해하면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공동체에서 내어 쫓으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메-성경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다시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돕는 것입니다. 그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내어 쫓고자 하기보다 그 죄를 다시 지적하며 회개하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을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서 돕는 것보다는 그냥 교회에서 썩은 것을 잘라내듯이 잘라 내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방치하거나 적당히 그냥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 사람을 도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회개하도록 끝까지 돕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도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십니다. 앞에서 베드로에게 주신 이 말씀은 말씀과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죄의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죄를 회개하고 교회가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그 형제의 죄에 대해서 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죄에 매이게 됩니다. 그만큼 범죄한 한 사람을 교회가 포기하지 않고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일반적인 기도에 대한 약속으로 많이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범죄 한 한 사람을 돕는다는 측면에서 이 약속은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끝까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런 사람을 돕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말로 해서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 있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죄인의 특징은 교만이요, 핑계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 끝없이 자기 합리화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말싸움해서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한 사람을 도우려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그 사람 마음을 두드려야 합니다. 뒤집어 놔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홀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두 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범한 한 형제,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일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장,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21-35)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결국 용서하라는 것임을 눈치 채고 재빨리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죄를 범한 형제를 세 번은 용서하라 가르쳤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도 한 두 번, 많으면 세 번까지는 용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7번을 제시합니다. 베드로는 이 정도면 당연히 예수님께 칭찬 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은 죄지은 형제를 다루는 문제에 관한 결정판입니다. 그렇다고 7*70=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용서하다보면 결국 다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해서 무제한적인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주고 적당히 넘어가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앞의 말씀대로 죄를 지적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돕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무한 용서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드십니다. 한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16년치의 월급입니다. 하루 10만원으로 일당을 계산해도 1달란트는 6억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6조입니다. 더구나 당시 빚을 지면 자기만 아니라, 아내와 자식까지도 다 노예시장에 팔아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큰 빚을 진 이 사람이 울면서 사정합니다. “내게 참으소서, 내가 갚으리이다.”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큰 빚을 도저히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이 사람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죽었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천만원입니다. 작은 돈은 아니지만 갚고자 하면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그 사람이 빚을 안 갚는다고 감옥에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동료들이 이를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이를 듣고서는 이 사람을 불러서 야단을 칩니다. 32, 33절을 읽겠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는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일 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지은 죄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절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우리는 이 죄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내 식구전체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내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 내게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을 보고서 분노합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나는 6조라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천만원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나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마음이 넓어서거나, 또 상대가 잘못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용서받은 은혜 받은 자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빌기 때문에 그래 봐주자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을 했고, 그래서 그가 나에게 와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미안 합니다. 이런 말 한마디 하고 갑니다. 아니 기분 나빠서 용서할 수 없어. 나에게 잘못을 하고서, 미안하다 말 한마디로 퉁 치려고 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하며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내가 먼저 내가 받은 은혜 속에서 끝내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것은 그의 문제지, 나의 문제는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용서받은 그 은혜 속에서 사람들을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격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살아온 삶의 스타일도 다르고, 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인격적 편차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내 안에 기본적으로 나 같은 자를 용서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때론 내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도 내가 감당하고 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나를 용서하여 주신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고 내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용서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여, 은혜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