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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시고, 유지하시고, 발전시키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신구약의 신학적 중심주제
구약성경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방대한 책이다. 우선 분량 면에서 방대하다. 구약은 한 권의 책이지만 39권의 독립된 책들을 포함하기에 작은 도서관에 비교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약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방대하다. 구약의 각 책들이나 책의 묶음들(예를 들어, 모세오경이나 시편의 글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저자들이 나름대로의 특별한 관심과 주제를 가지고 쓴 글들이다. 그렇다보니 구약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의 관심과 주제를 표현해내는 문학양식도 이야기(내러티브), 율법, 노래나 시, 잠언, 예언 등으로 세분화된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 속에 전체를 하나로 묶는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 전체를 하나로 묶는 통일성, 이것은 구약이 한 분 하나님의 뜻을 펼쳐 보여주며 책의 궁극적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펼쳐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 만일 이 하나님의 뜻이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전체 성경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지니는 것일까? 한 두 개의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학적 내용들이 어우러져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드러나도록 되어있는가? 독일의 저명한 구약 학자 폰라드(G. von Rad)는 여기에 반대한다. 그는 구약이 여러 시기에 다양한 상황을 배경으로 생겨난 “신앙고백”(Credo)의 확장 내지 “현실화”(Vergegenwärtigung)의 산물이므로 구약에서 전체를 묶는 “중심”(Mitte)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최선의 방식은 구약이 전하는 “케리그마”(선포)를 “재진술”(Nacherzähung)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와는 다르게 미국의 저명한 구약 학자 차일즈(B. S. Childs)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옛 신앙공동체(구약 이스라엘)와 상호관계 속에서 최종적인 형태를 얻게 된 것이 현재의 구약성경이므로, 구약신학의 과제란 현재형태의 구약성경에 각인된 “정경적 의도”(canonical intention)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차일즈에게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대체로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구약신학을 구성하기보다 구약의 각 책들이나 책의 묶음들이 담고 있는 풍부한 신학적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일에 치중한다.
그러나 구약의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심 주제를 고수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침멀리(W. Zimmerli)에 따르면, 구약의 중심에는 모든 변화를 가로질러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관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동일성”(die Selbigkeit des Gottes)에 대한 믿음이 있다.
카이저(W. C. Kaiser Jr.)는 구약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다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약속-계획”(the Promise-Plan of God)이 구약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와는 달리 프로이쓰(H. D. Preuß)는 “세상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여호와의 역사행위”를 구약의 중심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하우스(P. R. House)가 잘 말하였듯이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내세우는 일은 다른 모든 주제가 부차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동일성”, 그분의 “약속”, “이스라엘의 선택” 등이 구약의 중요주제인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구약의 모든 주제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인지는 의문이다.
다른 한편, 하젤(G. Hasel)은 구약의 중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핀 다음 “하나님”이 구약의 “역동적, 통합적 중심”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중심”이란 구약의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조직하는 원리”(organizing principle)가 아니다. 하젤이 염두에 둔 것은 구약의 다양한 주제들을 통합하는 “신학적 중심”(theological center)으로서의 하나님이다. 하젤과 유사하게 하우스(P. R. House)는 “중심”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한분 하나님의 존재와 예배”가 구약의 “주요 초점”(a main focal point)이라고 제안한다. 하젤이나 하우스의 견해는 사실상 구약에서 어떤 특정 주제를 신학적 중심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옳은가?
구약은 분명히 창조에서 종말로 나아가는 뚜렷한 방향성을 갖는다. 육일간의 창조가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완성되는 시간 구조가 이런 방향성을 지시한다. 메릴(E. H. Merrill)의 말을 빌리자면, 구약은 역사 속에서 펼쳐지고 종말에 가서 완성될 하나님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역사적, 신학적 방향성이야말로 구약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을 포착해야만 구약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
메릴은 “인간 대리자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구약의 모든 신학적 내용들을 하나로 묵는 중심 주제라고 주장한다. 사실 메릴의 견해는 이미 19세기 신학자 슐츠(H. Schultz)에게도 나타나며, 특히 구약신학 분야에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 아이크롯(W. Eichrodt)과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아이크롯은 “언약”에 초점을 두고 구약의 황단면(cross-section)을 살핀 결과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신구약성경을 하나로 묶는다고 말한다.
아이크롯과 마찬가지로 미국 남침례 신학교의 두 교수 젠트리(T. J. Gentry)와 벨럼(S. J. Wellum) 역시 “언약을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Kingdom through Covenant)가 성경신학의 중심 주제라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왈트케(B. K. Waltke) 또한 “거룩하고,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왕권의 침투라는 개념이 구약의 모든 부분을 가장 잘 수용한다”는데 동의한다.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화란 아펠도른 신학대학의 페일스(H.G.L. Peels) 교수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전히 구약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개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시고, 유지하시고, 발전시키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신구약을 아우르는 신학적 중심주제이다.
구약 신앙의 근간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이며 구약의 중심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건설이다
지난 번 글에서 밝혔듯이 구약의 신학적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데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한 표현인 “여호와의 나라”가 나오지만 역대상(28:5)과 역대하(13:8)에 각각 한 번씩 사용된 정도다. 물론 역대기에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주권을 뜻하는 단어 “마믈라카”( ממלכה )도 두 번 사용된다(대상 29:11; 대하 13:8). 다니엘서는 형편이 조금 낫다. 이곳에 여섯 차례(4:3; 34; 6:26; 7:14, 27) 반복되는 “그의 나라”(아람어로 מלכותה )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다니엘 2:44의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아람어로מלכו) 또한 마찬가지다. 시편에도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가리키는 명사가 나온다. “믈루카”( מלוכה), “말쿳”מלכות ), “멤샬라”( ממשלה ), “고이”(גוי) 등이 그것이다(시 22:29[28]; 45:6; 145:11, 12, 13; 106:5). 선지서에서는 오바댜 1:21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명사 “믈루카”(מלוכה)가 한번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용례들은 구약의 방대한 분량에 비추어볼 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구약에는 “왕”을 뜻하는 명사 “멜렉”(מלך)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된 경우가 42회나 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 구약과 비교할 때 여전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이런 관찰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의 신학적 중심으로 보는 것이 무모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슬리-머리(G. R. Beasley-Murray)가 옳게 말하였듯이 구약은 “나라”라는 추상적 개념 대신 역사 속에서 실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적 행위를 소개함으로써 하나님이 우주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드러내신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신 적이 있다(창 12:2 참조). “민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이”(גוי)는 사실상 “지리적, 인종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 요소들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 단위”로서 “나라”를 의미한다. 창세기 저자가 단지 “민족”이나 “백성”을 가리키고자 했다면 오히려 “암”(עם)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후에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에게서 “왕들”이 태어날 것(창 17:6)과 유다의 후손 가운데 “통치자”(מהקק, commander)가 나올 것(창 49:10)을 예고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왕이 통치할 “큰 나라”를 약속하셨으며, 이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우선 다윗에게서 성취된다. 사무엘서는 다윗 시대에 어떻게 큰 나라가 세워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다윗 언약을 소개하는 사무엘하 7장은 다윗 왕국이 어떻게 세워질 수 있었으며 그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요소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1인칭(“나”)을 35회나 사용하시며 다윗을 통해 이뤄졌고 앞으로 이뤄질 모든 일이 하나님 자신의 뜻에 따른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신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밝혔듯이, “양치는 목동이던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워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8절).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드시고, 그로 하여금 모든 대적들의 손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리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9-11절). 그리고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어 주실 분도,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11-16절). 이런 의미에서 다윗을 통해 세워졌고, 또한 장차 세워질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약”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이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 그것이다(출 24:4-8 참조). 그런데 이 언약관계는 대개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문구로 표현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 26:12; 렘 7:23; 11:4; 30:22). 이와 유사한 표현이 출애굽기 19:5-6에 나타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문구는 언약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시라는 개념을 잘 표현한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택하신 백성을 자신의 뜻에 따라 통치하시는 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1931년 코로섹(V. Korosec)의 연구에 힘입어 출애굽기, 신명기, 여호수아가 소개하는 언약의 형식이 기원전 2000년 후반기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suzerainty treaty)과 유사하다는 점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코로섹을 따르는 멘덴홀(G. E. Mendenhall), 클라인(M. G. Kline), 킷천(K. A. Kitchen) 등은 히타이트 제국의 대군주가 주변의 소군주들에게 일방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조약체결의 관습이 있었으며, 성경의 저자들은 이것을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다. 클라인과 킷천은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의 형식과 구약(특히 오경)에 나오는 언약형식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성경기록의 고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수용하는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이와 함께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은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이 보여주는 대군주와 소군주 사이의 관계이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만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 유비를 제공해준다. 언약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절대적 충성을 바쳐야 하는 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는 하늘의 대왕이시다. 이 언약관계가 구약신앙의 근간을 이룬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건설이 구약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생각은 구약의 가르침에 부합되며 그것과 잘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 이스라엘은 그를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
구약신앙을 특징짓는 언약(covenant)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약관계를 규정하는 조항들이다. 이 조항은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기능을 한다.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의 경우는 히타이트 대왕에 대한 소군주의 의무와 책임이 강조된다. 형식상 이와 비슷한 구약의 언약, 특히 시내산 언약과 그것의 갱신 내지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모압 언약(신명기)과 세겜 언약(여호수아 24) 역시 하늘의 대왕이신 여호와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다. 출애굽기의 십계명(20:1-17)과 “언약의 책”(20:22-23:33), 더 나아가 신명기의 율법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의 규정들은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통치수단임과 동시에 여호와께서 율법으로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준다. 법률체계를 가진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듯 구약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림 받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여기서 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The Code of Hammurabi)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강력한 통치자 함무라비(Hammurabi, 1792-1750 B.C.)와 관련된다. 그것은 모두 282개의 법조항을 포함하는 비교적 큰 법전이다. 함무라비의 통치가 얼마나 이 법전에 충실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대체로 이 법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함무라비 법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내용은 법전의 도입부(prologue)와 종결부(epilogue)이다. 다음은 그 중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도입부: “마르둑(Marduk, 바빌론의 주신)이 나(함무라비)에게 사명을 주시어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이 땅을 다스리도록 하셨을 때, 나는 이 땅의 언어로 법과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백성의 안녕을 증진시켰다.”
종결부: “나(함무라비)는 나의 보배로운 말을 내 기념비에 기록하였고, 정의의 왕(king of justice)인 나의 조각상 앞에 세워 이 땅의 법을 집행하며, 이 땅의 규례를 규정하며, 억압받는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도록 하였다.”
위의 내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함무라비는 비록 마르둑 신의 사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법과 정의를 확립하고 법을 기록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선전한다. 한마디로 함무라비는 자기가 직접 만든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통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율법은 이것과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모세라는 중요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는 그 지도자적 탁월성에 있어서 함무라비를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모자라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모세의 역할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개자”(intermediary) 혹은 “중보자”(mediator)의 역할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법률을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직접 율법을 베푸신 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다. 아이크로트(W. Eichrodt)가 잘 설명한 것처럼, “전체 율법을 하나님과 관련지우는 힘”이 바로 구약 율법의 특징이다. 출애굽기 32:16이나 34:28은 하나님께서 친히 “열 가지 말씀”(ʻaśĕrĕt hăddebārîm) 곧 십계명을 돌 판에 쓰셨다고 알려준다. 그 외에도 출애굽기의 소위 “언약의 책”(20:22-23:33)이나 레위기의 제사법(1-10장)과 정결법(11-15장) 및 대속죄일에 관한 법(16장)과 성결법전(Holiness Code, 17-27장), 그리고 신명기의 수많은 율법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주신 것이다(신 1:3 참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을 왕으로 모신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구약에서 왕의 중요한 역할은 재판이다(잠 29:14; 사 33:22 참조). 왕은 올바른 재판을 통해 시비를 가리고 죄인에게 벌을 주며 무죄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치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일이 잘 이뤄질 때 나라에 평화가 임한다. 따라서 “재판”은 “통치”(regieren)나 “지배”(herrschen)와 같다. 구약에서 “재판”의 의미를 가진 말은 주로 “샤팟”(šāfăṭ)이나 “딘”(dîn)과 관련된다. 슐츠(R. Schultz)의 분석에 의하면, 동사 “샤팟”이 구약에서 202회 사용되며 이 가운데 대략 40 퍼센트가 하나님을 주어로 갖는다. 또한 이 단어가 분사 “쇼펫”(šôfēṭ)으로서 “재판관”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9회이며(창 18:25; 삿 11:27; 시 7:11; 50:6; 75:7; 94:2; 욥 9:15; 23:7; 사 33:22), 명사형 “셰펫”(šĕfĕṭ,)과 “셔폿”(šefôṭ)은 각각 16회(출 6:6; 7:4; 12:12; 민 33:4; 대상 24:24; 겔 5:10, 15; 11:9; 14:21; 16:41; 25:11; 28:22, 26; 30:14, 19; 잠 19:29)와 2회(대하 20:9; 겔 23:10) 사용되어 하나님의 “판결행위”(act of judgment)를 나타낸다.
의미상으로 “샤팟”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는 “딘”(dîn)의 용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정확히 재판에서 권위 있고 구속력 있는 판결을 표현한다.” 리드케(G. Liedke)는 여호와의 판결을 표현하는 동사로 사용된 19구절을 소개한다: 창15:14; 30:6; 신 32:36; 삼상 2:10; 24:16; 시 7:9; 9:5, 9; 50:4; 54:3; 68:6; 76:9; 96:10; 110:6(?); 135:14; 140:13; 욥 19:29; 36:17; 사 3:13.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까지 판결하시는 분으로 언급된다. “딘”에서 나온 명사 “다얀”(dăyyān)은 궁핍한 자 및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시는 “신적 재판관”(divine judge)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24:15; 시 68:5).
결국 “샤팟”이나 “딘”의 다양한 용례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보여주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의롭게 심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하고 거룩하고 의로우며 그 통치는 온 세상 만물과 만인에 미친다
지난번 글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며, 왕의 직능에 속하는 “재판”이 하나님께 돌려진다는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통치자”로 소개하는 구약의 내용을 더 살펴보려고 한다. 구약에서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대략 다음 세 가지다: “말락”(mālâk), “마샬”(māšâl), “라다”(rādâh). 물론 이 단어들은 인간 왕들의 통치행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 또는 “여호와”가 이 동사들의 주어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말락”의 경우 출 15:17-18; 삼상 8:7; 시 47:8[9]; 93:1; 96:10; 97:1; 99:1; 146:10; 사 24:23; 52:7; 겔 20:33; 미 4:7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여호와”는 온 세상 백성과 나라와 세계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시온에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다. 이 왕의 통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제약받지 않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통치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 47:8[9])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미 4:7)
시편 93:1이나 96:10에 나오는 표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YHWH mālāk)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모빙켈(S. Mowinckel)을 따르는 소위 “신화-제의 학파”(“Myth and Ritual” school)와 “웁살라 학파”(Uppsala school)는 이 표현을 “여호와가 왕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해가 바뀌는 시점에 신년 축제(바빌론에서는 “아키투” 축제)가 있었고, 이때 혼돈의 세력을 정복한 신의 재등극을 알리는 선언이 있었다는 가설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바빌론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신년에 여호와가 다시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기리는 축제가 거행되었으며, 이때 “여호와가 왕이 되셨다”는 선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확실한 가설에 근거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구약학자 소긴(J. A. Soggin)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신년축제의 경우 그 구성요소들조차 분명하지 않으며 어감에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서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구약 시편에서 사용된 구문구조(주어+완료형 동사)는 히브리어 문법에서 주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아도나이 말락”(YHWH mālāk)은 “환호 또는 선언 공식”(acclamation or proclamation formula)으로서 “다른 신이 아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되 영원부터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비록 세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고 통치자들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나라들과 왕들을 일으키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최고의 주권자시다(단 2:21 참조). 기원전 8세기 말은 고대 근동의 초강대국 앗수르가 최전성기에 있을 때였다. 이때 앗수르 왕 산헤립(Sennacherib, 재위 705-681 BC)은 자신이 온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절대자인 양 행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도전하였다. 그는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왕하 18:35; 사 36:20)고 하며 도를 넘는 교만을 보였다. 그 결과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18만 5천의 부하들을 잃고 아들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었다(왕하 19:35-37; 사 37:38). 천하를 호령하던 산헤립도 결국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권세는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것이었을 뿐이다(왕하 19:25; 롬 13:1 참조). 세상에서 성취되는 일은 결국 모든 것을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하늘 대왕의 뜻이다.
“말락”과 마찬가지로 “마샬” 또한 하나님의 제왕적 통치를 표현한다. 물론 “마샬”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시 8:7), 비정치적 의미에서 인간 사이의 주종관계(창 3:16; 37:8), 자신을 다스리는 극기(창 4:7; 시 19:15[14]), 정치적 의미에서 인간 왕의 다스림(삼하 23:3; 왕상 4:21[5:1])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삿 8:23; 시 22:28[29]; 59:13[14]; 66:7; 89:9[10]; 103:19, 22; 사 40:10; 63:19에서 “마샬”은 하나님의 제왕적 통치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최고의 왕이시며, 특별히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소멸하시는 심판자시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상급”과 “보응”을 포함하며, 온 세상 만물도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다.
“진노하심으로 …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 알게 하소서”(시 59:13) “여호와께서 …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 “보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 40:10)
“라다”의 경우 직접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바 동물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표현하며(창 1:26, 28),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왕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메시아 왕의 다스리는 역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시 72:8; 110:2). 하지만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된 역할이나 메시아 왕의 역할은 모두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이기에 청지기(steward)나 부왕/대리 통치자(viceroy)의 역할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다”로 표현된 인간 또는 메시아 왕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한다. 넬(P. J. Nel)은 “라다”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동사는 “힘에 의한 지배행위를 강조한다. 따라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마샬(mšl)의 의미와 겹친다.”
온 세계와 만민을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제왕적 위치와 권세는 “보좌”를 의미하는 단어 “키세”(kîssē’)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표현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보좌”에 좌정하여 계시는 하늘의 대왕으로 묘사된다: 왕상 22:19; 대하 18:18; 시 9:4[5], 7[8]; 11:4; 45:6[7]; 47:8[9]; 89:14[15]; 93:2; 97:2; 103:19; 사 6:1; 66:1; 렘 3:17; 애 5:19; 겔 1:26; 10:1; 43:7; 단 7:9.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시는 왕이다. 통치의 시작과 종결로 특징지어지는 인간 왕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하다. 부정하고 속되며 불의한 일로 가득한 세상 왕들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하고 의롭다. 땅의 한 지역에 제한된 인간 왕의 보좌와 달리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 그분의 통치는 온 세상 만물과 만인에 미친다. 하나님은 특별히 자기 백성들 가운데 보좌를 두신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 47:8)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렘 3:17)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http://repress.kr/24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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