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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자네 부인도 안녕하신가? " 하고 "야, 말도 마, 그 원수 아 글쎄~~" 하며 굳이 안 해도 될 자기가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야말로 누워서 침 뱉기요 꼴불견이다. 어떤 경우는 도가 지나쳐 자식들까지 싸잡아 욕하며 자기 집안 자랑인 듯 신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문다. 정말 왜 내가 이 친구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나 하며 후회스럽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 그것이 살아가는 데 편하고 집안이 평화롭다는 것과 자기의 마음 느낌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큰아들과 통화하는 것을 듣는다. 누구는 대궐 같은 집에 살고... 내 원 참..." 세시간 산행 후 바람을 피하여 차 속에서 며늘아이가 싸준 샌드위치를 먹는데 시장기도 한몫을 했지만 정말 맛이 있었다. 각자 두 쪽씩 먹는데 집사람 먹는 속도가 나보다도 항상 빠르다. 그날따라 더 빠르게 먹는데 그 이유야 배고파서 일 것이다.
"더 드세요."
작성일 : 2006.03.15 |
* 이글은 전직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친구 김승웅이 추천하여
2006년 3월21일자 미주 한국일보 서울포럼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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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試驗 監督官
해방되고 각기 상반된 정부가 남북에 수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는 앞날의 자신의 진로에 고민을 한다.
청년 韓 씨는 주말 외출 나온 친척되는 육사 생도 채명신을
만난 후 육사에 지원한다.
입학시험 시간. 깐깐하게 생긴 대위가 시험관으로 국어, 역사
수학 시험을 치르는 동안 시험관의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
숨도 크게 쉬지를 못 한다. 골몰히 생각하기 위하여 천장도
멍하니 앞도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영어시험 시간. 어찌 된 노릇인지 시험관은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치곤 작은 자신의 체구를 모두 가린다. 수험생들은 속으로
"안 속아! 신문지에 작은 구멍 뚫어 놓고 살피는 것 다 안다."
꼼작도 못 하고 시험지에만 매달려 있는데 이번엔 시험관이
의자를 칠판 쪽으로 돌려놓고 신문을 읽는다. 작은 구멍이 있어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라 쓸 적 옆 사람 것을 보기도 한다. 뒷사람,
앞사람, 옆에옆사람 것까지 보아도 시험관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읽었어도 벌써 다 읽은 신문에만 정신이 빠져 있다.
어떤 수험생은 걸어 다니면서 영어 답안지를 썼다고 한다.
그 반 수험생들은 모두 육사 7기생으로 입학들 했단다.
12년이 지냈나? 그 시험관은 색안경 Ray-Ban을 끼고 미국 수도에
나타난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국가 부흥을 위한 경제원조를 부탁하나 거절 당한다.
독일로 진로를 바꾼다.
아마 초강대국 수도에 색안경 끼고 공식적으로 모습 들어낸
국가원수급은 이분이 처음일 것이다. 체구는 작지만
나에겐 큰 거인으로 남아 있다.
*주; 韓正一대령은 내가 군복무시 수행병으로 2년 반을 모셨다
3사단 18연대(백골연대) 연대장.
국방대학원
127 학훈단장.
38사단 부사단장.
부사단장 시절 뇌졸증으로 쓸어저 반신불수로 8년간 고생타 운명하심.
물론 상사이지만 형제처럼 서로 보살피며 지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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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밥이 없잖아?
바깥 날씨는 꾸물꾸물 내 마음과 비슷하다.
마음은 그런데 몸은 정상인지 정오가 가까우니 시장기가 돈다.
끓어 놓고 간 꼬리곰탕은 있겠다, 밥 말아 김치와 먹으면 되겠다 싶어 밥통을 여니
밥이 없다. 엊저녁 때 다 먹고 아침은 waffle로 때우기에 밥하는 것을 잊었나 보다.
마누라가 있었으면 아마도 챙겼을 거다. 아마도란 말은 쓴 것은 요즘 둘 다 그렇다.
밥을 따로 하기가 싫기에 이럴 때 먹는 것이 라면이다.
가끔 출출하면 먹는데 그럴 때마다 "라면이 얼마나 나쁜 음식인데~" 잔소리를 듣는다.
"잡수실려면 처음 끓인 물을 버리고 다시 다른 물로 끓이면 나쁜 기름기가 없어져요."
옆에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잔소리가 들리기에 일단 끓인 물은 버리고 곰탕 국물에
봉지 건더기, 김치를 조금 넣고 첨가된 수프가루는 화학물질이 있을 것 같아 없이 끓이고
냄비 뚜껑 꼭지를 왼손으로 잡고 뚜껑에 덜어서 후후대면서 먹는데 싱겁다.
수프를 넣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소금은 넣기 싫어 다 먹고 한 조각 남은 장조림을 아껴서
조금씩 먹으니 세입에 다 없어진다. 다음 부턴 장조림 간장으로 먹으니 제맛이다.
이때 아우가 전화를 했다.
"형님~ 아주머님 안 계신 데 어찌 지내세요?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지, 내가 올라가던지
형님이 내려오시던지 점심이나 같이 하시지요?"
왠쪽 부터 막내 4남 병익('48년생) 3남 경삼(병길.'42년생), 장남 병흠('35년생), 2남 병택("39년생)
4형제가 부부동반으로 함께한 2월 10~25일 2016년 크루즈여행.
우리 兄弟 友愛 자랑 할 만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친구들이 하는 말," 어찌 너희 형제들 재산 싸움 없이 잘 넘어가냐?"
무슨 말인가 이해를 못했다.
"미국에 살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요즘 법으로 형제가 똑 같이 나눠 갖는다. 너희도 그랬냐?"
"아니 형님이 하자는대로 모두 따라서 했다. 누구도 불평 없이."
이젠 친구가 이해를 못 한다.
1970년대 한국은행 여직원이 당시 제일 많이 유통되는 천원짜리 지폐를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조사한 결과 10만개의 박테리아가 검출 되었단다.
얼마나 많은 더러운 물질이 함께 있으며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증오, 불평, 욕심, 등등이
있을 것이다.
이 더러운 지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소유를 거친다.
형제는 우리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더러운 박테리아는 물론 어떤 증오, 불평, 욕심이 없는 한 핏줄인지라 얼마나 귀중한 존재들인가?
2019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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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꼼탕 끓여 놓고 갔다.
2019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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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禎敏
첫째 아들을 帝王切開術 (Caesarean section)로 낳았기에 다음 아이도 그리해야 하므로 같은
의사가 맡기로 했다.
자연분만이 아니라 어머님이 좋은 날로 택일을 점쟁이를 통해서 정해 주시어 7월 30일 시간을 맞추어 태어났다.
또 아들이라는 말에 양가 어머님들이 좋아하신다.
난 꼭 凱旋將軍 같은 기분이다.
作名所를 찾으니 돌림자인 성할熹자로는 좋게 타고 난 運命을 쫓 갈 수 없다며 禎敏이라 지었다.
즉 四柱八字가 좋다는 것이다. 擇日해준 점쟁이 공돈을 먹은 것 아닌 모양이다. 미신? 을 믿는 꼴이 됐다.
자라면서 형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시간 관념이 투철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며 판단력이 뛰어났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에 한국 여자아이와 공부로 경쟁의식을 느꼈는지 아픈 날 쉬게 하니
오늘 안가면 소연이가 날 따라 마실지 모른다면 등교를 한다.
자기 반에서 자기가 3S란다. 1.Smartest, 2. Sweetest, 3. Shortest.
즉 제일 똑똑하고, 제일 친절하며, 제일 작다.
형이 다니던 Gifted Class에 들어가길 원했으나 IQ가 형만 못 한 모양이다.
중고 시절에는 키가 작지만, 항상 키 큰 친구들 중심에서 리더 노릇을 했다.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이지만 아들 친구들은 근 30년간 변함없이 똘똘 뭉쳐 사회에서도
자기가 다니는 좋은 직장에 자리가 나면 친구를 추천하여 데리고 온다.
UC Berkeley에서 환경공학을 배우며 방학 때는 Sony회사에서 개발하는 Game을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며
문제점을 적어 나면 된다. 즐기고 용돈 벌고, 친구들은 공장, 식품점 등에서 용돈을 벌어 전자 게임하며
돈을 쓰는데, 이 녀석 summer job을 부러워들 했다.
대학 기숙 생활 할 때 사귀던 여학생이 LA 의대로 진학하는 바람에 헤어져 가끔가다 주말이면
내려가곤했는데 하루는 전화를 받고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침대에 누워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있다. 우는 것 같기에 옆에 나란히 눕고 "왜 무슨 사고가 났냐?"
그저 울고만 있다. "헤어지자고 해. 의과 공부가 너무 힘들고 언제 끝이 나는지 몰라 나를 잡아 둘 수 없다고."
"이해한다. 충분히... 너도, 그리고 그 애도. 너도 그 애 놓아 주어라. 의대 공부 쉽지 않아."
몇 달 후 한 여자와 집으로 들어 오는데 늘씬한 키에 인상이 좋은 동양 여자가
날 보는 순간 " Hi~ Mr. Hong." 아주 반갑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한다.
UC Berkeley를 같이 다녔지만 모르는 사이였고 같은 동네라 친구끼리 농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부모님 따라 대만에서 왔다.
집안이 가난하여 고등학생때 부터 중국 식품점, 은행에서 일하며 학비 벌어 공부를 했다.
첫째 며느리 아이는 중국계 월남이고 소위 말하는 보트피플이라 가난하기가 더 했다.
가난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됨이 제일인 것이다.
두 며늘이 모두 공부 잘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럼 됐다.
X-Mas 가까이 작은아들이 주머니에서 작은 박스에 둔 제법 큰 다이야몬드 반지를 보이며
"아빠~ 나 SZU한데 청혼 할겁니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미소로 먼저 대답을 한다.
달포가 지난 바렌타인 데이 사흘 전에 아들이 "우리 내일 마이애미 갑시다."
"회사는 어떻게 하고 또 집에는 무어라 말하고갑니까?"
"걱정하지 말고 갑시다. 비행기, 호텔 모두 예약 해두었으니..."
녀석이 몰래 Szu회사 지배인,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놓고 비밀리에 모든 것을 진행 시켜 놓고
바렌타인 날에 청혼을 멋있게 했다.
딸, 아들 낳고 정말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인 우리도 행복하다.
아들이 결혼 전부터 혼자 살 때 Szu와 사귀면서 주말이면 우릴 불러서 저녁 대접을 한다.
음식점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하니 대견하다.
실상은 Szu가 부모님을 그렇게 위하는 것이라 하여 쑥스럽지만 자기가 요리하며 모신 거란다.
2017년 새해를 Maui 에서 맞이 하자면 12월 28일부터 2017년 1월 5일까지 지냈다.
초하루 날 Lahaina 식당에서 아들이 드링크를 시킨다. 맛있어 보여 내 것도
주문했는데 알콜 성분이 들어 있다. 한 모금을 마셨는데 안면이 붉게 변한다. 독한 모양이다.
조금 마시고 이런 날 보고 며늘아기가 대신 자기가 마셔보겠다며 들고서 찍은 사진이다.
시아버지와 며눌아기의 친밀한 관계를 엿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주말이면 토요일 혹은 일요일 꼭 우리 모시고 식사를 한다.
밥을 먹는다기보다 가족 간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을 맛보는 순간이다.
2019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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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도 물에 빠저 죽나요?
김도현. 2018년 10월
문리대 정원 마로니에
1963년 여름인가?
무덥기가 기승을 부린 날 저녁 김도현(문공부 차관 역임)이 전화를 했다.
"정남이가 신발이 다 헤져서 신을 수가 없다. 헌 구두 있으면 가지고
문리대 정원으로 나와라."
마침 얼마 신지 않은 아버님 구두가 있는데 요즘 신질 않으셔서 가지고 나갔다.
당시 여름 방학 때라 고향에 내려 갈 차비가 없는 학생들은 학교 교실에서 자곤 했다.
이들을 칫솔부대라 했는데 훗날 모두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문리대 정원에 새로이 연못을 만들었는데 금붕어도 놀고 분수가 있어 운치도
있고 여름엔 보기만 해도 더위를 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그날 밤도 하도 더워서 김도현이, 김정남(김영삼 시절 청와대 문화공보수석, 영화 1987년 바바리 코드 인물)과
이 연못에서 벌거벗고 금붕어들과 놀았다.
이 친구들은 자주 하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한 친구는 낮에 더워서 연못으로 미역감으러 가니 주위 각기 다른 벤치에 남녀 두 쌍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옷을 벗고 들어가서 보니 그들 모두 도망가고 없어젔더란다.
아무도 없고 이왕 시작한 것 비누칠도 하고 시원한 기분으로 돌아왔는데 다음 날도 더워서
또 연못으로 가니 수위 아저씨가 죽은 금붕어를 한 마리씩 건져 올리며
"어떤 자식이 비누로 미역 감아서 이렇게 죽었다."며 자기를 힐끔 쳐다보는데
혹시 자기가 그런 것 아나 싶어 겁이 나서 분위기를 바꾸고자 농으로 한마디 던졌다.
"어메~ 물고기도 물에 빠저 죽는가 보네? "
이 아저씨 하도 기가 막혀 웃더란다.
이 친구는 최고의 신사를 연상케 하는 외무부 대사가 되었다.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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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손님.
아침에 눈을 뜨니 방안이 침침한 것이 흐린 날씨인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날은 더 누워 있고 싶은데 할 일도 없건만 집사람 일어나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여보 밤에 비가 왔네요." 맑은 목소리가 내 눈을 밖을 보게 만든다.
뒷마당의 오리부나무 밑까지 젓을 것을 보니 제법 내린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다.
캘리포니아 몇 년째 가뭄이 계속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첫 인사가 "비가 와야겠죠?"이다.
손님이라고 해서 사람만이란 법은 없다.
경우에 따라서 동물, 비, 햇빛, 바람 등 자연이 될 수도 있다.
자연적인 것들이 너무 많이 오거나 안 오면 재해로 이어진다.
지금 캘리포니아는 너무 가물어 마당의 잔디에 물 주는 것도 제한하고 샤워할 때도
어떻게 하면 물을 적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 방송을 한다.
지금 이곳에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장대비도 아니고 가랑비도 아닌 것이 마치
어릴 적 어머님이 귀엽다고 내 머리를 쓰담 어 주시는 그렇게 부드럽게 대지를
어루만져 주고 있다.
며칠 전 읽은 글 중에 벰자민 프랭클린이 한 말 중에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난다.(Fish and visitor smell after 3 days)"고 했다.
지금 캘리포니아 찾아온 손님 "비"는 냄새는 고사하고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제발 많이 내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더욱이 밖에 나가지 않고 TV에서 방영되는 슈퍼볼 보기에 알맞은 날씨이다.
미국 사람들이 일 년 중 제일 즐기는 날이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독립기념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남자들은 100%, 일부 여성,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미식축구 최종 결승전 슈퍼볼이 있는 날이 최고로
즐기는 날이다.
야구 결승전 월드 시리즈는 7전 4승이라 오늘 지면 내일이 있지만, 축구는 한 게임으로 끝이
나기에 흥분하기에 충분하다.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 보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Raindrops falling on my head를 듣는다.
Feb.2n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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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물림-.
친구 아들 영철이가 중학생 때 어느 날 부모에게 묻기를
"엄마 아빠 결혼하신 것이 12월이고 제가 다음 해 5월에 태어 났잖아요?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하고 다른데 왜 전 10개월이 아니고 5개월 만에 나왔죠?"
"여보 ~ 당신이 대답 좀 해주세요." 하며 난처한 질문을 남편에게 돌린다.
아들보다 두 살 어린 딸도 옆에 있고 하니 될 수 있는 돼로 목소리를 점잖게 깔고
"네가 더 크면 알게 된다." 간단한 대답에 아들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는 듯 모르는 듯
빙그레 웃으며 엄마, 아빠 얼굴을 살핀다.
10여 년이 지난 후 이 녀석이 강가 간다며 청첩장을 보내왔다.
결혼식장은 생각 외로 축하객이 별로 없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만 초대했단다.
보통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면 제일 먼저 얼굴을 보게 되는데 다른 곳이 눈에 들어온다.
식이 끝나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식탁을 돌면서 인사를 한다.
앞으로 잘 살라며 축하를 해주고 이미 신부의 배를 보고 모두 알아차렸기에
"영철이 너 사고 쳤구나!" 하니 이 녀석 아빠를 보고
"아빠~ 아빠하고 나 사고 친 거야?"
아빠 하는 말이 "사곤 아빠가 친 것이고 넌 그냥 대물림 한 거야."
Jan. 19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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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 할 Kauai 섬에서의 산행.
하와이 하면 아름다운 해변이 떠 오른다.
우리 역시 산행할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Kauai 섬을 찾았다가
너무나도 멋진곳을 산행을 하여 삼일간을 힘들지만 잊지 못 할
멋진 산행을 하였다.
태평양의 grand canyon이라는 Waimea Canyon.
그곳 중심에 Waipo'o falls가 있다.
왕복 3.8마일. 등산화를 안 신고 걸어서 힘들었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만사 제치고 다시 찾을 곳이다.
이곳은 일찍 가야 무지개를 볼 수 있다기에 9시전에 도착했다.
4,000피트 높은 곳이라 아무리 하와이라고 하지만 바람, 비, 안개가 많아
두꺼운 옷은 필히 준비를 해야 한다.
정상에 가까운 4,000' Kalalau 전망대에서 무지개가 감싼 Honofu valley는 장관이다.
배 타고 도는 Na Pali Coast Tour(5~6시간 소요)는 Port Allen에서 이곳까지 온다.
왠쪽 무지개가 끝나는 산봉우리까지 가는 등산은 다음 몫이다.
Waipo'o 폭포가는 등산로는 조금 내려가니 길 양쪽이 야생 생강꽃이 만발하고 향이 반긴다.
생강은 꽃 종류가 다양하다. 붉은것, 노랑, 흰것, 조개 모양,햇불 모양 등...
Banana Poka라는 꽃인데 열매가 열리고 열매 속에 엄청난 씨앗이 뛰어나와
온 하와이를 덮일 기세로 펴진다고 한다.
꽃길을 걸어 너무나 좋아하는 집사람.
함께 걷는 나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벗꽃처럼 보인다.
1/3쯤 걸었나? 사륜차 길은 좁고 나무 뿌리가 비, 바람, 사람들에 의하여 흙에서
쫓겨난 상태라 한 눈을 팔면 넘어지기 싶상이다.
계곡이 바로 눈앞이다.
눈길을 확 잡는 야생화.
오로지 폭포 상단에만 서식하고 있었다.
꽃이름을 알기 위하여 하와이 꽃이름 책도 사고 전문가 한테 물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삼단 Waipo'o 폭포 상단에서.
어여쁜 무지개를 만들던 햇님은 물 속에 잠시 쉬고 있다.
요즘 비가 많이 오질 않아서 수량이 적다.
이단 폭포를 밑으로 바라보며...
삼단 폭포는 높이가 70메타 정도 된다. 하지만 위에서 볼 수가 없구나.
헬리콥터에서 본 waipo'o falls. 인터넷 발췌
가운데 붉고 넓은 봉우리가 쓰러진 나무에서 사진을 찍은 곳이고 뒷편 계곡이 폭포 상단이다.
폭포는 검은 줄기로 보일 뿐이다.
오후 5시경에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계곡을 배경으로.
Dec. 11th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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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돌이 3세.
내가 결혼한 후 우리 부부가 얻은 별명은 내가 꾀돌이,
집사람은 꾀순이 그리고 자연히 우리 아들은 꾀식이 완(One)
꾀식이 투(Two)로... 이 두 아들 모두 부모의 명성에 뒤질세라
튀는 말, 기발한 아이디어에는 "저 집안은 모두 웃겨~"
부모님, 형제들이 웃으며 하시는 말을 듣곤 했다.
Jan.1st 2008
양가 부모님 모두들 돌아가시여 어리광부릴(?) 기회가 없어지고
이제 어느 정도 철(?)도 들었고 자식들(꾀식이) 장성하여 그 꾀부림을
행하고 들을 기회가 없어진 듯 했다.
꾀식이 one에게 딸이 둘 있다. 첫째가 세 살 칠 개월, 둘째가 며칠 있으면
두 살이 되는데 어제 내가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연필을 큰 녀석이 가지고 유심히 살핀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것 보다 연필 싱이 꿁어 부려질 염려가
없어 보이고 진하게 쓸 수가 있어서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것이 두 개 있는데 오늘 아침에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내게 온다.
"할아버지 어느 것을 원하세요? 이거 아니면 이거?"
둘 다 내 것인데... 요놈 봐라... 잠시 생각하다가
"요것." 하니
"그럼 이건 내것이다!"
꾀돌이 1세가 3세한테 판정패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진화한다.
Dec.28th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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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와 함께 그린 그림
그림을 그리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나?
며칠간 쳐다보며 이런저런 풍경들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막상
이 큰 화폭을 어찌 채우나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겨울방학을
맞이한 손녀를 며칠 동안 돌보기로 했다.
"와~ 너무 크다. 이렇게 큰 켄버스 처음이다." 하며 웃는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내 옆에서 아니면 자기 집에서 혼자서 유화(Oil Painting)를
직접 그린 그림이 20점은 되기에 충분히 그럴 만 하다.
원하는 색상을 마음껏 화폭에 붓 가는 데로 옮기라 했다.
할아버지도 흥겹게 그냥 막 칠했다.
"도대체 무엇으로 보이느냐?"
"나무 숲 같아요~ 바람이 부는 숲요." 바람 부는 숲을 직접 보았을리 없는데? 놀랍다.
"그럼 밑부분은 물가? 위, 옆은 하늘?"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 We Did It. Team work"
29th Dec.2011에 7살이 되었다.
Oil on Canvas. Size ;30 " X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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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요세미티
사계절 철에 따라 특색있는 Yosemite를 당신의 요세미티라고 Yoursemite라고
어느 작가는 표현을했다.
그리고 자~ 가자~~~ Mysemite로 내 것이라 생각되는 곳.
그렇다. 이곳 요세미티는 항상 나를 어머님의 품처럼
포근히 감싸기도 하고 세상을 한 손안에 움켜쥐고, 자~ 나를 보라 하며
높디높은 바위에 올라서 浩然之氣를 배우게 하는 곳이다.
특히 5, 6월은 장엄한 폭포와 강물은 계곡을
심포니 홀로 착각할 정도로 멋진 향곡을 듣게끔 한다.
말년 청각 장애자였던 베토벤은 아마 떨어지는 폭포수와 몸살 치며
흐르는 강물만 보고서도 그 음을 멋진 자연 교향곡을 작곡했으리라.
이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雨衣를 꼭 입어야 한다.
카메라는 비닐봉지로 싸고 앞에 구멍을 내고
찍을 때만 잠시 렌스를 밖으로 내 놓고 찍어야 한다.
무지개 끝자락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했다.
뛰고 또 뛰었으나 끝을 못 찾았단다.
어떤 시각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동그라케 반경2메타짜리
무지개도 볼 수가 있어 이런 신비감을 맛 보기 위하여
매년 물에 빠진 무엇?이 되고자 이곳을 찾는다.
Upper Yosemite Fall, Lower Yosemite Fall을 연결해서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이곳 Sentinel Dome 정상 뿐이다.
김관길,서정완부부 5월 15~16일 캠핑하며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
비교적 등반 하기 쉬운 곳이라 가족단위로 많이들 온다.
오르는 길은 눈으로 ...
옆 돌길로 오를 수 있으나 반 이상이 눈을 밟으며 겨울의 맛을 즐긴다.
여기저기 큰 돌들이 있고 주위에 소나무들도 자란다.
Half Dome은 해발 8,836 feet. sentinel Dome은 해발 8,122 feet
그런데 Half Dome이 낮게 보인다.
확실히 그 뜻을 이해 할 수가 없다.
Stellar Views라니???
하여간 Sentinael Dome 위 서면 실제 보다도 1,000 feet 높게 있는 느낌이란다.
Ranger가 물을 길어다 주웠지만 살리질 못했단다.
지금은 원래 서 있던 방향에서 반대로 쓰러저 있는 상태.
이 나무는 죽어서도 모델값을 톡톡히 한다.
가운데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 제일 큰 하나로 된 바위 덩어리 El Capitan
작은 노력으로 많은 경치를 볼 수 있는곳이 바로 이곳 Sentinel Dome이다.
만약 같이 갔다면 특별한 주의해야 하고
고소 공포증이 있는 분들도 조심해야 할 곳이다. 한마디로 심약자 사절.
大肝女
삼면이 몇백 미터 낭떠러지타
요세미티 폭포를 내려다 본다.
.
고인 물에 비친 요세미티 폭포.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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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Gate Bridge를 걸어서 왕복하기.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Wisconsin주 Madison 에서 서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Middleton이란 아주 작은 도시이다.
그럼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어디일까?
생각하면 누구나가 제일 먼저 San Francisco 아닐까?
하며 동시에 Golden Gate Bridge가 연상이 될 것이다.
San Francisco 와 Marin County를 잇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이 다리는
2007년 New York의 Verranzano-Narrows Bridge가
개통되기까지 가장 긴 Suspension 다리였다.
6개월 먼저 개통 되고 장장 8 miles(13.3km)의 Bay Bridge보다도 유명 한것은
그 아름다움 때문일것이다.
5월 10일 날씨도 화창한 어머니 날에 집사람과 걸어서 갔다 오기로 했다.
1933년 착공 하여 4년 후인 1937년 5월 28일 개통식을
했는데
그때 200,000명이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하단의 벽돌 건물은 Port Point.
Civil War 당시 1861년도 건설한 군사기지로 미서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건물이며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다리 건설 때 Golden Gate 건설본부로 사용했고
1970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리가 휘어 보이는 것은 그림자 때문이다.
아니 다리 위에서 U Turn 하는 미친놈도 있나? 있는 모양이다.
옆의 철조망이 Suicide Net(자살 방지용 철망.6M 높이) 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자살 하기 좋아하는 곳이란다.
2005년까지 1,200명이 이곳에서 자살했다고 추정한다.
2006년에 70명 정도가 투신했는데 발견한 시신은 34명.
목격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가 없고
가끔 가다가 파킹장에서 랜트한 빈 차, 자전거가 주인을 기다린다.
만약 투신 한다면 다리에서 사람의 몸은 86마일 속도로 4초간 떨어져
충격에 죽는 경우가 많고 살았어도 47도F(8도C)의 찬물에 죽게 되어 있다.
허나 1979년 어떤 젊은 녀석이 뛰어내렸는데 물속에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수영하여 밖으로 나와 자동차 몰고 병원으로 갔단다.
Tower의 높이는 756 Feet로 Washington Monument 보다 191 Feet나 더 높다.
유람선, 요트들 그리고 악명 높던 죄인들의 종착역 Alcatraz Island가 보인다.
San Francisco에서 1.5 마일 떨어진 해발 4M의 12에이커의 돌덩어리 섬이다.
1853년 등대가 세워졌고 Civil War(1861-1865)동안 군감옥으로 사용하다가
1933년부터는 미연방 교도소로 1963년까지 1576명이 거쳐 갔다.
3X1.5M의 450개의 독방에 많을 적에는 250명이 수감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을 특급 호텔로 개조할 예정이란다.
죄수들이 있던 방이 아니라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들을...
이곳에서의 sunset은 일품이란다.
다리의 길이는 2 miles(2.7km) 폭은 27.5 M(19Ft)
물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7M(어떤 곳 기록은 75M 조류관계?)
Tower의 높이는 227M(740Ft)
색상은 International Orange . 선박들이 멀리서 잘 볼 수 있는 컬라.
중간 지점에 와 간다.
다리 동쪽 통로는 사람들이 걷고 서쪽은 자전거가 다니게끔 되어 있는데
가끔 인도로 자전거가 다녀서 눈살이 찌푸리게 한다.
자동차 소음이 매우 시끄럽고 바람이 항상 불기에 Heavy duty 옷을 입는것이 좋다.
Dec. 1st 1951 풍속 69마일, Dec. 23 1982 70마일, Dec.3 '83 풍속 75마일
강풍 때문에 3차례 다리를 통행을 금지한 적이 있다.
한 달 전 우리 집 앞의 산마테오 다리에서 풍속 59마일의 바람에
빈 콘테이너가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10시간 이상 통행이 금지된 적도 있다.
관광객들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오른쪽 섬이 750에이커의 Angel Island.
20세기 초 아시아로 부터 들어 오는 이민자들을 일단 이곳 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입국 시켰다.
당시 그곳 수용소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수용소 마룻바닥에 칼로 중국인들이 애환의 시를 판 것이 그대로 있다.
그런대 섬 이름은 Angel이란다.
한국분(5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포로수용소로 사용했고 2차대전 당시 만약에 대비하여 건설한 대공포 기지가 있다.
멀리 상항 시내가 들어 온다.
세번째로 언제나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어머니 날이 아니라 주일이라기에 요세미티로 캠핑도 다녀 왔다.
주차는 메타기가 있는곳에서 조금 아래로 있는 무료 주차장에...
소요시간이 3시간 정도 되기 때문에...
2009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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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다.
나이가 27~28세가 된 친구들이 제대 후 직장도 잡고 다음 차례는 결혼이라 선을 보기에 바쁘다.
난 참사랑이라 미모, 재산, 건강, 학별을 무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서 인가? 자연히 조건을 보게 된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어린 시절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왠지 좋았다. 인간의 본능인지라.
중,고시절엔 그저 이름도 모르고 가끔 볼 수 있는 여자을 또 볼 수 있을 없을까?
사춘기의 그런 마음으로 지내면 막연한 사랑을 그리워 했다.
제일 먼저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여인은 조금 알고 지내다 편지로만 연락할 수 있는 프라톤식 사랑이되었고
두번째는 나에게 그녀가 원하는 조건 즉 유학을 함께 갈 수 있는 생각에서, 나 역시 그녀가 좋았다.
한번도 손을 잡아 보질 못했지만 문리대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Couple로 지냈다.
군대문제로 UC Berkeley 대학원에 이미 합격 되었지만
유학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안 다음부턴 그녀의 마음이 식어간다.
너 바로 이거야? 사랑은 이차적이고 미국 유학이란 조건이 우선인 것을 認知하고 入隊를 했다.
그 후 사귄 여인은 난 결혼을 전제로 할 수 없는 처지이나 제대하고 직업을 가질 때가 기다릴 수
있다는 그 녀의 나이도 있고 언제까지 붙들어 둘 수가 없어 만남을 自制했다.
그럴지음 만나 여인은 영원히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사랑을 했고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으나 아버지가 중학 때 돌아가 안계시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반대를 하신다.
결혼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하고 하지 그녀의 아버지하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식의 사랑은 무시 당한다. 내가 부모님을 이낄 수 없다. 특히 우리 집안에선.
슬픈 사랑으로 끝이 났지만 그녀는 내 마음 깊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약속을 한다.
앞으로 내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겠다면 아무 조건 따지지 않고 허락하겠노라.
세월이 흐른 후 두 아들은 너무 쉽게 사랑하는 여인과 축복 속에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에 부모인 우리 역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식에 대한 아무런 걱정 하나 없이.
앞줄 웬쪽 두번째가 洪相珉단장, 바로 뒤에 나가 앉아 있다. 1969년?
졸업 후 군입대가 일년간 연기 되는 바람에 시간 나는대로 등산을 다니다가 고교친구의 소개로
大韓山岳聯盟 소속 太白山岳會를 따라 다닌다. 회장은 洪相珉단장님이신데 와세다대학 나오시고 일본 매일신문
서울지점에서 왜정 때 근무하신 언론계 출신이시나 당시 60세로 무직 상태였다.
나를 쫒아서 친구들이 많이 등산을 해서 홍단장님이 젊은 우리 모두를 잘 알고 계섰다.
친구분들의 부탁으로 신랑감을 찾고 있던 중 조건이 좋은 우리들 중에서 친구분 女息들과 연을 맺어 주는
역활을 몇번 하셨다. 나와 함께 등산을 여러번 하신 모회사 사장 여식과 역시 나와 친한 대학친구와 선을
보는 자리를 마련 했다. 선 보러 가는 날 이 친구가 나와 같이 가잔다. "선은 네가 보는데 왜 내가 가냐?"
"여자 아버지를 네가 잘 알고 특히 중매를 드시는 홍단장을 나 보다 네가 잘아니깐."
같이 그 자리에 본의 아니지만 친구를 위해서 나갔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그 두 사람만 따로 나가게 하고 헤여젔다. 그 친구 첫 데이트를 하고 집까지
바래다 주웠는데 집이 대궐 같더란다. 이 친구의 마음을 더 꼭 잡은 모양이다.
몸이 달아 며칠 후 다시 만났는데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여인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고 한다.
즉 딱지를 맞은 것이다.
이유는 부모님이 안계시다고. 부모님 계시고 안 계시는 것이 큰 문제인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고 맞선을 본 입장이라 간단히 끝을 냈다.
만나기 전에 이런 사실을 들었을 것인데???
얼마 후 등산 가는 날 홍단장님이 "Mr. 홍 앞으로 친구 선 보러 나갈 때 절대로 같이 가지마."
"그 집에서 자넬 더 좋아해. 말도 잘 하고 무엇 보다도 솔직 정직하다고. 직원을 많이 대해봐서 보면 안다고."
그럴 수 밖에 나는 중매인, 여자의 아버지를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말도 그 친구 보다 많이 했을거다.
그 친구 보다 날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언질을 받았으나 친구가 선 본 여인을 내가 만날 할 수는 없다.
그 후 그 집 사위는 결혼하자마자 뉴욕지점장으로 발령 냈다고 한다.
친구는 후에 모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이번엔 나를 남대문시장 시경 앞에 있는 백화점 주인 딸을 중매하신다.
양가부모가 모두 모여 선을 보았는데 학벌 좋고 여자 어머니가 날 너무나 잘 본 모양이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지만 몸이 약해 보였다.
대한극장 앞 고급 아파트 건물주라 결혼과 함께 입주 할 수도 있다고 홍단장을 통해 꼬신다.
당시 직업을 못구한 무직자인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같아 내가 싫다고 했다.
그 후 아버님 제자 교수들이, 다른 知人 통해서 몇번 선을 보았지만 우리 집 형편에 맞추웠기에
모두 좋은 조건을 가지고들 있었지만 인연을 따로 있나 보다.
가정, 학벌, 미모, 건강들 했지만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위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고 결혼을 하기에 조바심을 가지고 결혼식을 다니며 축하해 주었다.
아주 작은 화공약품 수입상 회계담당 하시는 분의 女息이 괜찮을 같아 소개를 하고 싶다고 홍단장이 말한다.
"직접 만나 보셨나요?"
"아니, 안 봐도 알아, 아버지 와이사쓰 항상 깨끗하게 다려 있는 것으로 봐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랐으니 보나마나야."
어떤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가? 하는 것이 신부감을 고르는 척도라고 말씀하신다.
그 동안 만나 본 여자 집안의 꽃 처럼 자라 버릇이 없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에 우리 집에 들어 와서
시집살이 하기 힘들 것 같아 아에 처음부터 만나질 않았다.
그런데 화목한 집안에서 엄마의 알들한 살림을 보고 자란 여인이라 생각하고 만나 보기로 했다.
더욱이 며느리감으론 진명출신이 賢母良妻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거기다 梨大 家政과 출신 아닌가?
그렇게 해서 1970년 10월21일 2시에 외환은행 옆 三玉다방에서 만났다.
첫 인상이 다른 여자와 다른게 닦아 온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미 학력, 아버지 직업은 알고 있었지만
생김새는 사진도 못 보았는데 웃는 모습이 좋았고 수집은 것 같으면서 말도 제법한다.
같이 걷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일식집으로 갔다.
와사비가 들어 있는 생선초밥을 선 보는 여자 마다 첫날 사주었는데 모두 맷다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이 여잔 맛 있다면 맛 있게 먹고 있지 않는가?
며칠 후 아침 7시경 전화로 "오늘 등산 가는데 같이 갈까요.? "
기다렸는지 "네, 몇시에 어디로 나가면 되나요?"
자하문 박 세금정에서 만나 북한산을 오른다.
전화 받고 엄마와 동네시장에 산 알롯달롯한 등산용 바지를 입고 제대로 된 등산화는 없는지 운동화다.
같이 등산 다니던 같은 또래의 여자들이 반갑게 맞으며 친구가 되여 준다.
사실 그 여자들도 짐착으로 나를 좋아 했는데 이리 행동하는 것을 보니 고마웠다.
이렇게 두번째 데이트를 했고 이를 계기로 자주 만나며 서로를 알아 갔다.
친구들의 모임에 함께 가고 어머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도 좋아하셔 일단 안심을 하고 하루가 멀다고 만났다.
하루는 전화로 회사 공장에서 가까운 신설동 "돌"다방에서 7시에 만나기로 했다.
회사 일로 그 시간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지금 신설동 사거리에 있는데 "돌다방"이 없어요?"
"있을덴데... .... .... 맞아요. 석다방이 있을 수 없죠. "石다방"입니다."
몇개월 후인 1971년 3월 부모님이 다닐려 내려가 계신 기장대로 같이 같다.
어머님과 같이 밭일도 도울 때 어머님이 이것저것 궁금하신것을 물어보시며 귀여워하신다.
봄이라 작약밭에 꽃이 만발하여 여러 송이를 꺽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오후 5시경 서울행 뻐스를 타고 청량리에서 내리고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걸었다.
성동역 앞에서 소위 말하는 프로포즈를 했다.
"솔직히 나 지금 순영씨를 죽도록 사랑한다고는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약속은 할 수 있다.
앞으론 누구 보다도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겁니다." 작약꽃다발을 건넸다.
그저 미소로만 답을 한다.
"네"라는 답을 기달릴 필요도 없다.
1971년 4월 약혼식 날. 덕수궁에서.
1971년 9월 29일 YMCA.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첫 만난 날부터 좋아한것 같다고.
좋아 했다가 아니라 한 것 같다고 여자의 자존심을 지킨다.
내 친구 중에 유산을 많이 받아 굉장한 부자가 있었는데 홍단장님이 나에게 소개 시키기 전에
선 볼것을 제의 했으나 장남이라서 만나 보지도 않았단다.
시집살이가 싫어서, 그런데 난 3남이라 일단 만났다는 것이다.
왠걸 나와 결혼하고 시집살이를 5년간 했다.
순영이를 시집살이에서 벗어내기 위해서 미국이민을 오게 된다.
결혼하고 30여년이 흐른 후 고교동창들과 북한산 등산을 갔는데 오른 길은 다르지만
정능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같기에 강산이 변하기를 세번이지만 하산길은 기억에 남아
"이 등산로 기억 나?"
"무슨 길인데?"
"우리 두번째 데이트이고 첫 산행했던 길이야~~~"
"그때 내가 본것은 주위의 산이 아니고 당신 얼굴만 보았지 산엔 관심이 없었어요."
이런 재치 있고 모잘지 않고 순진한 여인과 일생을 함께 한다는것은 복 받은 인생이다.
옛날에 프로포즈다운 것을 못 받았으니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하란다.
2018년 10월 하롱 베이 船上에서 무릎 끓고서 정식으로 프로포스 했다.
남은 여생 우리 사랑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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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느강 유람선에서
파리에 현대식 고층 건물은 별로 없다.
2백년 된 집들이 아직도 즐비하다.
세느강 유람선착에 어울리지 않는 알류미움으로 만든 공룡 몰골.
유람선이 출발하고 곧 땅거미가 내리며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온다.
세느강변의 아벡크족
백조도 무리지어 산책 나오고...
파리의 노틀담대성당은 1220년 착고을 시작하여 1245년에 보이는 두탑이 완성되고 1345년 성단이 완성되었다.
노틀담 사원도 지나고...
노틀담사원이라면 파리의 노틀담을 떠올리지만 대주교가 있는 성당을 그리 부른다.
베니스, 피란체,밀라노에 있는 성당도 노틀담이라 부른다. .
노틀담사원은 세느강 가운데 있는 시테섬에 자리 잡고 있다.
유람선은 시테섬을 돌아 다시 거슬려 올라간다.
세느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렉산더 3세 다리.
1999년 부터 20,000개의 전구가 탑의 조명을 밝힌다.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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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cade 국립공원
미서북쪽 워싱톤주에 있는 Cascade 국립공원을 처음으로 찾았다.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 20번 하이웨이는 관광객 보다 일반인의 통행이 많아서인지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는 곳이 없다.
카나다와 국경을 같이하기에 6월말이고 해발이 높아 선선한 날씨라 생각했는데
완전 이상 기온이라 100도가 넘을 때도 있다.
더위를 무릅쓰고 Diablo Lake을 보기 위해 오른 Thunder Knob Trail (왕복 3.6마일)정상에서
Skagit River는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기에 초록색을 띄우고 옛날엔 목재 수송을 담당했다.
Salmon이 많이 올라온다.
Dogwood.
십이선녀탕? 같은 Gorge Creek Falls.
Ross Lake.
보석 비취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비취색에는 넋을 잃은 여인.
Diablo Lake Overlook. 벼란간 소나기가 쏫아졌다.
40년만에 맞아 본 소나기였다.
Porcupine Creek.
폭포는 항상 나의 관심을 끈다.
Washinton Pass (1669 M)
Early Winter Spires(2380 M)
산을 넘어 Winthorp이란 도시에 오니 103도.
너무 더운지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150년된 건물과 잘 어울린다. 만약 차들이 없다면 고스트타운 같았으리라.
깃발 달린 식당에서 버펄로버거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다닐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니자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June 28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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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쉽게 천불 벌었다.
따스했던 주말의 기온과는 다르게 어제부터
아침 공기는 습기가 있고 쌀쌀하다.
자동차 시동을 다른 때 보다 일분 정도 더 있어야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시동을 걸었다.
잠시 후
엔진 있는 앞쪽에서 뜨르르 하는 소리가 난다.
자동차에 대한 상식이 없는 나로써는 걱정이 앞선다.
지난번 집사람 차를 바꿔 주면서 여분으로 갖고
있는 찬데 주행거리가 십만 마일이 넘었다.
"어디에가서 고치나? 한 5백 불은 들겠는걸..."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어어~" 하며 "야~ 이거 천 불이상 들겠는데..."
걱정이 태산 같고 언제 시간을 내야 하나 하며 맥 빠진 눈으로
차 앞을 멍 하니 바라며 "어디 가지고 가나? 딜러는 터문 없이 비싸고..."
맞은편에서 기름값 폭등으로 시세가 형편이 없는 SUV가 한대 오고
그 뒤로 2차대전 때 독일 병정의 검정 헬멧 같은 것을 머리에 쓴 뚱뚱한 녀석이
입술을 주욱 내밀고 영 어울리지 않게 오토바이를 몰고 온다.
녀석 춥지도 않나? 소매도 없는 티 사쓰만 입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녀석이 가까히 올 수록
내 차 엔진 소리는 더 커진다.
뚜뚜르 하는 轟音을 내면서 지나간다.
그 녀석이 멀리 갈 록 내 차 엔진 소리는 작아진다.
그 녀석과 뜨르르 하는 오토바이 소리는 사라지고
내 차 시끄러운 엔진 소리도 사라졌다.
2008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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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해냈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두 다리가 醫師라는데 열심히 걷자.
저기가 Half dome, North Dome, Glacier Point.
"남편 따라 죽을 각오로 임했다 ."는 두 사람.
그 곳은 험하여 등산길도 없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위 경관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 탓인지 별로 느끼지를
못하고 이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기에
바쁘다.
Snow Creek.
어름짱 처럼 차고 Trout이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고 많다.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계곡을 5~6미타 길이의 돌길이 끝도 없이
Zig Zag로 이어진다.
앞으로 평지를 1.5마일 더 걸어야만 한다.
진안의 마이산이 떠오른다.
부르지만 지금은 모랫바닥을 그대로 들어낸 상태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인지 어디가 호수냐? 며 묻는다.
결국 우린 해냈다 하며 힘든 것 모두 잊고 힘차게 High five를...
Half Dome은 멋진 모습을 보여 준다
마치 우리들의 멋진 노년의 모습과도 같다며 自畵自讚을 해 본다.
2010년 9월 10일.
김도현.
송철원의 "아~ 문리대..."을 읽을 때 마다 떠오르는 인물들은
김도현, 김중태, 현승일이다.
그중에서도 김도현은 나와 같은 서울사대부고를 나왔고
고교 시절 키가 작아서 나와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으나 말수가 적고
항상 웃는 얌전한 샌님으로 보였는데 항상 월간지 사상계를 끼고 다녀
대학 입시을 위한 영수학 참고서를 보던 친구들과 다른 면을 보였다.
그가 쓴 학력을 보면 국민학교, 중학교는 월사금을 못 내서
졸업장이 없고 대학은 퇴학 당하여 고교 졸업장이 자기가 가진
유일한 졸업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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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대학입시 준비 중이라 모두가 英數참고서을
끼고 다닐 때
어느
날 김도현을 보니 思想界을
보고 있다.
그런데도
공부를 잘해 모의고사 시험을 보면 Top
그룹에
속했다.
자기가
원하던 서울대 정치과에 1961년
입학하고
소신을
피다 6.3사태
때 제적당하고
2007년
복학 신청을 하고
2011년
졸업 50년
만에 서울대 졸업장을 받았다.
문리대를
1961년에
합께 입학을 하여
남다른
친구인지라 감회가 다르다.
특히
그 친구에게 졸업장이란 다른 사람과는 그 뜻하는 바가 다르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월사금이 없어서 제대로 다니질 못하여
졸업장은고사하고
졸업식장에 참석치도 못하였으니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까?
검정고시를
거처 사대부고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딴 고교졸업장이 유일했었다.
201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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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 돌아보게 됐냐?"
“어디야 ?” 했더니 “서울인데 오늘 11시 올림픽공원에 나와.
내가 줄게 있어, 사상계 창간호를 집 정리하다 찾았는데 줄려고 해.”
글방에서 글과 그림은 자주 봐 낯설지 않은데 목소리는 몇 십년만인데도,
이상한 것은 금방 알겠더라고,
그도 첨 안 일이다. 책을 받고, 마침 일을 하던 중이라 점심도 함께 못하고
내가 친구들과 함께 모였던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돌아와 바쁜 일 대충마치고 그가 준 책을 몇 장 펴보았다.
오래 전 글이지만 재미있었다. 그 중하나. 金光洲선생의 소설
‘不孝之書’, - 어떤 남편이 쓴- 이라고 부제가 달려있었다.
옛날 감방에서 情俠志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과연, 그냥 그 자리에서 읽히었다. 금방 이 소설을 펼친 것은,
얼마 전 출판과 미술평론을 하는 후배 손철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서다.
작가 金薰이 우리 선조가 쓴 端宗復位와 死六臣覆爵을 청하는 上疏文을,
그 논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전개했는지 보고 싶어 하니
찾아달라는 청을 받고 김훈의 얘기를 들었다.
김훈은 김광주의 아들이다.
엄마가 하루는 나를 불러, 아버지가 시방 어느 술집에 계시니
가서 “집에도 좀 와 보시라고 해라” 해서 거길 갔더니,
좌우의 가인들과 함께 주흥이 도도하여 도저히 틈을 엿볼 수 없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서, “아버지 집에도 좀 와보소!”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야 이눔아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보란 말이냐”고
일갈해서 대책 없이 돌아오고 말았는데,
그 뒤 자기도 돈이 좀 생겨 아버지처럼 마셔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더란다. 소설부제에 ‘어떤 남편이 쓴’이라고 달아놓았으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이 글방은 워낙 박람강기의 문사들이 모이는 곳이라
잠간 몇 자 내가 아는 한 고치면, 사상계의 전신 ‘思想’은 1592년
피난수도 부산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白樂濬선생이
문교부에 ‘국민사상지도원’이란 기구를 두고 기획과장에 광복군중위
김구 임정주석비서로 환국한 장준하선생을 앉혔는데,
장 선생은 ‘국민사상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잡지 ‘思想’을 창간했다.
제4호를 내고 폐간된 것을 장 선생이 ‘思想界’라고 吳基錫선생이 쓴 서체에 ‘界’자를 붙여서
부산에서 1953년 4월 창간호를 냈다.
그 뒤 서울의 지가를 올린 일은 아는 바. 1975년 8-9합병호에
당시 신민당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렸던 김지하의 ‘五賊’을 전재하여 폐간되었다.
. 2011년 대학에 재입학했는데, 물어보니 1학점미달이라 해서
체육을 신청하려 했더니 체육은 워낙 인기가 있고
나는 자판 찍는 손가락이 느려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전공과목을 신청하고 첫 강의에 출석해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더니 수업 뒤 교수가 “김 선배 다시 오지마세요”해서
안 나갔다.
하루는 조교가 전화로 “왜 출석 안하나요?”해서 다시 갔더니,
교수가 “김 선배 오지 말라 했잖아요” 했다. 얼마 뒤 조교가 전화로
1주일 이내에 논문제목을 제출하고 1개월 뒤 논문을 내란다.
우리 다닐 때는 정치학과에 졸업논문제도가 없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논문을 내면 통과시킬 수도 않을 수도
없어서라고 했다. 친구들 말이 “네 논문은 읽을지도 몰라”라고 겁을 주어서
끙끙거리며 꽤 긴 논문을 써서 냈다.
며칠 뒤 조교에 전화로 “몇 글자 고치면 안 될까요” 라고 했더니,
“뭐 읽지도 않으니 그만 두세요”란 대답이었다.
졸업식에는 이번에도 안 갔는데 학사학위장이 왔다. 짓궂은 친구가
신문에 제보를 해서 ‘50년만의 졸업’이란 기사가 났다.
50년도 더 전에 홍병길 네 삼선교집에 밤늦게 친구가 없어도 문 두드리고 들어가 자고
아침밥까지 먹었다.
부실한 내 과거 탓에 앞길에 할 일이 쌓였는데 늦가을 해가 지고 있다.
가는 가을이 제발 우정만은 함께 데려가지 말았으면 한다.
늘 고마웠던 경삼에게 무슨 선물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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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손녀한테 한 수 배우다.
가슴이 답답하면 풀어야지!
2달간 장거리 여행을 안 다녔더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단둘이 사는 집안에 한사람이 짜증이 나면 다른 한 사람도 좋을 리가 없다.
"그래 가슴이 답답하면 풀어야지~" 하며 다음 날 아침 일어나는대로
" 갑시다, 요세미티로..."
"정말요? 당신 피곤한데???"
이거 정말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가?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받아드리고
이것저것 간식거리 챙기고 떠났다.
과수원 단지에 있는 단골 과일가게로 들어가니 싱싱한 과일들이 가득하다.
여자 아니랄까 봐 과일을 사는데도 왠 이유가 그리도 많은지...
"호두는 사람 뇌를 닮아서 치매 예방에에 좋고, 감은 내가 무척 좋아하고,사과는 작년에
동부 여행시 시누이와 함께 간 과수원 것과 같은 pink-lady라서 맛 있는 것이고,
석류는 무엇에 좋고, 오렌지는 싸서 좋고..." 과일 마다 두 바스켓씩,
오렌지는 큰 자루 두 개 차 안이 가득하니 답답한 가슴은 뚫린 모양이다.
Bridalveil 폭포 앞에서 가슴을 활짝 열어 보인다.
실 다래 아니 어머니의 가르마 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Upper Yosemite Fall를
레인보가 감싸고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보라 폭이 바뀔 때 마다 Rainbow도 color가 변한다.
설경을 예상하고 갔는데 눈도 낙엽도 없이 설렁했는데
폭포의 무지개, 해프돔 위에 뜬 낮에 나온 달을 보는 순간 "역시 요세미티!" 라 했다.
한국에서 살던 집 대청마루에 浩然之氣란 큰 현판이 걸려 있었기에 그 뜻은 알고 있은지 오래된다.
드넓게 펄처진 경치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기를 주는 모양이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요세미티의 氣를 받는 모습이 萬歲와 같다.
답답하다던 가슴을 사랑으로 채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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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홍경삼 선생님은
분명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전강옥
김승웅 방장님,
안녕하셔요. 전 강옥입니다. 벚꽃이 아주 흐드러지게 피어서
요즘 봄기운에 기분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지난 수요일 제가 글 한편을 보내 드렸는데
아직 글이 올라오지 않아 혹시 못 받으셨나 해서 다시 보내 드립니다.
아니면 글은 받으셨는데 혹, 두 어르신께 누가 되는 언급이 있어서
글을 안올리셨나 싶기도 합니다.
두 분께서 오랜 동안 친구로 지내오셨는데
제가 감히 이런 부분에 대해서 너무 경솔하게 언급한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제가 그림만 보면 그쪽이 전공이라
자꾸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글을 올린 것인데
잘못된 부분이 있나 걱정이 됩니다.
혹시 제가 모르고 말씀드린 부분이 있으면 용서하시고
그 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시정해서 올리겠습니다.
방장님, 그러면 봄기운 많이 받으시고
편안한 밤 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전강옥 올림.
<조각가/조형예술학 박사(파리 소르본느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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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코의 콧구멍 이야기"(畵馬點孔)
홍경삼 선생님 작 “말코 김승웅”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토록 살갑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은
친구를 가진 아마추어 화가가 더 행복 할까?’
아니면 ‘내 얼굴을 그려주고 싶어 하는 화가를 친구로 둔 분이
더 행복 할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교론은 결국 50대 50의 무승부로 끝을 맺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게 해야 독자에게 여운을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며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생길지도 모를 문제를 피해 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홍 경삼 선생님께서 좀 더 행복 하시지 않을 까 싶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신과 감히 비교될 만큼 창작의 무한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홍경삼(외교`61)作 <말코 김승웅>
이성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과학자와 달리 작가는 직감으로 순식간에
사물과 자연과 인생의 진리를 꽤 뚫어 봅니다. 이 직관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집에서 여자와 손만 잡고 자장면 먹다 돌아 온 남편을
아무런 물증도 없이 일순간에 통째로 알아내고 마는 아내들의
무서운 동물적 본능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이 초상화에는 화가의 직감이 카메라의 포커스처럼 사로잡은 주인공의
인격과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직감조차도 파악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으니, 그것이야 말로 ‘이끼의 연륜’과도 같이
긴 세월을 우정으로 쌓아온 ‘친구의 시간’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격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진리도 꽤 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가진 화가조차
그림으로 표현 해 낼 수 없는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는 이 초상화는
참으로 고귀한 우정의 산물입니다.
호기롭기도 하지만 그 주인공의 내면은 저토록 순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맑고 고운 성정의 소유자입니다.
저 표정이야 말로 절대 가식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내면세계 그대로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한사람의 내면을 이렇게 붙잡아 낼 수 있는
화가라면 가히 일식을 갖추었다 할 것입니다.
손은 얼굴 못지않게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인체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풍부하게 전달 할 수 있는 것이 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손짓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감정을 다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댕은 손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 걸작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단 몇 개의 붓질로 표현된 주인공의 손가락에는 지성과
섬세함과 “욕심 없음”이 느껴집니다. 지금 막 피우고 계신 담배 한 개비로
자족하는 선비의 인품이 드러나 있습니다.
“드리워진 낚시 바늘, 미끼는 고기 낚는 것에 있지 않고”라는 구절을
상기 시키는, 겨울 강의 강태공 같은 초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서는 또한 완력에 가까운 힘과 패기도 느껴집니다.
양립 할 수 없는 지성과 야성이 이 손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 한 장에서 “말코 김 승웅” 방장님의 인품과 격식과 지성을
모두 간파해 낼 수 있으니 그림은 이런 때 단연 문학과 다른 위력을 발산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는데 장문의 글을 통해서
구구절절 한 사람에 대해서 논하는 것보다 한 개의 이미지로 주인공의 모든 것을
전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 예술의 탁월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 그림은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화면에 나타난 주인공의 인품만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또 한사람의 인품이 느껴지도록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인품의 소유자는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주인공의 순수한 내면을 가식 없이 저 만큼 표현 해 낼 수 있는 인품을 지닌
화가라면 그 분 역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 “말코 김 승웅”입니다.
홍경삼 선생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신 분 일 것입니다.
반 고호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작가는 자신에 집착하는 반면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는 자신을 떠나 세상과 주변을 사랑으로
바라 볼 줄 아는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위에 열거한 장점 외에도 이 그림은 두 분의 우정이 단연 돋보여서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질투를 일으키게 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백미는 단연 콧구멍입니다.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 그려 놓은 용의 얼굴에 눈을 그려 넣자
드디어 그 용이 살아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으로서
이 그림에서는 용의 눈동자가 “말코의 콧구멍” (표현 용서하십시오)으로
비견될 수 있습니다. 다 그린 방장님의 얼굴 위에
잔뜩 물감을 먹인 붓으로 시원스레 꾹 찔러서
통쾌하게 왼쪽 콧구멍을 그려 넣었더니 드디어 이사님이 생기가 돌며
숨을 쉬기 시작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토록 중요한 콧구멍을 욕심껏 두 개를 그리지 않고
살짝 옆얼굴을 그려서 콧구멍이 하나만 보이게 하였다는 화가의 의도는
참으로 탁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양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듯이
아무리 생명을 불어 넣는 일획이라 할지라도 두 개보단 한 개로 집약해서
표현 한 것이야 말로 작가적 기질을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예술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이것저것 갔다 붙여 남산시장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 빼고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깊은 본질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은 작품입니다.
서양 미술의 2대 테마 중 하나는 “이상화”입니다.
이 세상을 뛰어 넘어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미를 이상화 시키려 했던 것이
서양 미술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말코 김 승웅”은 방장님의
인격이 훌륭하게 이상적으로 표현된 걸작입니다.
어떤 화가도 이 보다 더 “말코 김 승웅” 방장님을 이상적으로
잘 표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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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도 가고 싶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찾았다.
명작의 보고 루브르는 1190년 필립 2세의 의하여 군사 요새로 건축되었고 궁전으로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된다.
37만점의 고대 유물, 중세기, 현대화 등이 3개의 건물에 소장 되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많이 본 작품들이 있으나 그 내용은 가이드의 설명, 돌아와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 아~ 왜 진작 공부을 하고 가지 않았나~" 자책을 했다.
알고 감상을 했다면 느낌은 열 배 이상 느꼈으리라.
쿠르카레(네모난 안뜰) 리슐리외관 앞에서. 이정자 (61.미대)내외분과 집사람.
일찍가서 우리 일행이 몇 번째 입장을 했다.
많은 예술품을 수집하고 이 궁전에 살다가 베르사유궁으로 왕궁을 옮긴 루이 14세 동상.
나폴레옹을 위한 두 개의 개선문 중 하나인 카이젤 개선문이 멀리 보인다.
고대 유적실.
Venus de Milo. 101BC.
Greece 멜도스섬에서 1820년 농부의 괭이 끝자락에 의해서 발견되고 마침 그곳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선박에 팔리고 1821년 터키주재 대사가 당시 왕이던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에게
뇌물로 받쳐지지만, 예술품에 흥미가 없었던지 1822년 루브르에 기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헬레니즘 양식의 특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고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죽어 가는 노예" 1513-1516 년제작. 미켈란젤로(1475-1516년)
대리석 크기 229cm.
전시장의 천장을 모두 찬란한 예술품으로... 부럽다.
Nike of Samothrace(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리케). 190-220BC로 추정.
아테네 인근 섬 사모트라케에서 1863년 150편의 붙어진 조각으로 발견된 것을
15년 동안 맞추어 하반신만 완성 했고 오른쪽 날개가 없어 왠쪽 날개를 참조하여
만들어 복원을 했다.
높이는 3m이고 두 날개가 역동적으로 힘이 넘쳐 흐르고 여인의 의상이 바람에 휘날리며
몸에 둘러싸인 표현은 대리석 조각이라기보다 그림 같다.
배머리에 우뚝 선 자세는 승리는 확신한다.
그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키 위해서인지 모나리자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설치하여 올라가며 올려다보게 했다.
왠쪽 날개만 아무 생각 없이 찍었는데 모조가 아닌 진짜 날개를 찍은 것이다.
스포츠용품 회사 로고 나이키는 이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유명 화가들이 이름이...미켈란젤로, 다빈치 등등
"The wedding at Cana" Paolo Veronese작.
모나리자 와 마주 보고 있는 이 그림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폴레옹에 의해서 멸망하던 날 (1888년)
비니스(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에서 약탈하여 가지온 것이다.
크기가 10 X6.7 m로 대작이라 보관상의 문제로 루브르궁으로 보내진다.
가나은 갈레리아 지방의 도시 이름이고 예수가 성모 마리아(중앙에 위치함)를 대동하고
결혼식 참석했는데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말을 마리아로부터 들은 예수가 물통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따르라 하니 붉은 적포도주가 나오는 기적을 그린 그림인데 등장인물이 터번을 슨 아랍계 사람도 보이고
오토만제국의 왕, 영국의 메리 여왕도 있다.
결혼식장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왠쪽 편에 자리 잡고 있다.
악사 세 사람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이였다. 르레샹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그림, 음악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모나리자 앞은 항상 인기가 많지만...
모나리자 전시실이 이렇게 한가한 것 처음이라 한다. 우리에게 다행한 일.
가나의 결혼식 그림이 얼마나 큰가를 가름할 수 있다.
"Coronation of Emperor Napoleon I" 1807. Jacques L. David(1748-1825) size 9 x 6m
David는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예술가이다.
1789 혁명정부 미술집정관으로 발을 들어 놓고 후에 나폴레옹 전속화가가 되었다.
정상적인 왕권의 계승이 아니고 평민 출신인 나폴레옹이 1804년 절대적인 지지로 황제로 12월 2일 노틀담성당에서
등극하면서 피우스 7세가 씌워 줄려는 왕관을 빼앗듯이 받아 직접 씀으로써 자신이 교황 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자기보다 8살 많은 왕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씨워 주는 장면을 다비스가 3년간 그린 작품이다.
교황은 마지못해서 축복한다는 뜻으로 손짓을 하고 있다.
일년간 구상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200명을 직접 만나 스케치하고 입었던 의상을 가져와 살펴 가면서 3년간
정성을 드린 작품이다. 원래 나폴레옹 어머니와 조세핀 사이가 나빠 참석지 않은 어머니, 누이동생을 그리라
주문해서 조세핀 뒤에 누이동생들이 그리고 위 중앙에 어머니가 앉아 있다.
당시 조세핀은 40세가 넘었는데도 20대처럼 젊다.
나폴레옹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영국대사는 그림에 없다.
나폴레옹이 몰락 후 그도 벨기에로 망명하여 똑같은 그림을 1822년을 그렸는데 한곳을 다르게 그렸다.
누이동생(혹자는 조세핀 딸이라 함) 두 번째 여인의 의상이 분홍색이다.
다비드가 좋아한 여자라서 부각 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그림은 Versailles 궁에 걸려 있다. 그땐 몰라서 유심히 보질 않았다.
어머니가 중앙에, 위 뒷줄 두번째 대관식을 스케치하는 다비드가 보인다.
완성된 이그림을 한참 보던 나폴레옹이 다비드에게
" 이 그림은 더 이상의 그림이 아니다. 내가 이 속으로 걸어 들어 가는구나."
"The Grand Odalisque." 1814. Jean Ingres.(1780-1867) size: 35 X 64 inch.
Odalisque는 Turkey 황제를 시중드는 여자 노예를 말한다.
앵그르는 다비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미술의 선구자라고 한다.
나폴레옹 여동생 Caroline Murat이 주문했으나 그녀에게 안가고 프로이센의 고르제백작이 1819에 구입한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된 감을 느꼈다.
꼭 말이 누워 있는 것 같이 궁둥이는 크고 말의 허리 같이 길다.
사실 이 그림을 샤롱에 전시되었을 때 척추뼈가 3개가 있는 여인, 고개 돌린 자세가
불균형 잡히고 지나치게 긴 허리를 가젔다는 혹평을 들었단다.
소품으로 등장하는 공작 깃털의 부채는 사실적에 집착하면서 왜 인체 구조는 그렇게 그렸나?
허나 이는 앵그르의 관능미를 나타내는 수법이라고, 추상화를 많이 접한 현대의 예술가들은
독특한 화풍이고 명작이라 칭송한다.
"Jeanne d'arc" 1854. J.Ingres.
잔다크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앵그르 자신이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Eugene Delacroix.
7월 혁명의 광분한 민중을 이끄는 여신을 그린 것이다.
1830년 7월 27일 부터 3일간 일어난 7월 혁명을 7월 28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신이 든 삼색기 자유, 평등, 박애을 상징하고 한 손엔 총을 들고 옆에 쌍권총을 든 소년,
뒤에 모자 쓰고 총 든 젊은이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자신이다.
혁명 후 샤르드10세 왕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루이필립이 왕좌에 오르고 이 그림을
구입하지만 너무 선동적이라 화가에게 돌려준다.
1874년까지 화가가 소장하고 있다가 루브르가 구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풍은 안정적인 삼각구도을 유지하고 여신은 여성의 품위가 없다고 비판을 받는다.
여신이란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정부군에 의해서 남편이 살해당해 분노한 세탁소의 여인이란 말도 있다.
불타는 시가지 뒷쪽으로 노들담의 쌍기둥 탑이 보인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아래 그림을 그린 제리코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를 이어 간다.
"The Raft of the Medusa" 1819 Theodore Gericault(1791-1824)
제리코는 落馬사고로 33세에 요절하여 단 3점의 그림을 남겼다.
삶 속에서의 인간의 고통, 환희, 죽음, 자살 등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즉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대하는 태도로 표현한다.
신고전주의와 결별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사회를 고발하지만, 당시는 화가의 그림이 곧 사회고발로 이어진 모양이다.
이 그림의 진상은 1819년 세네갈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4백 명을 싣고 항해하던 해군함 메튜사호가
난파되고 선장을 비롯한 귀족, 고급장교는 구명보트에 타고 149명의 선원들은 급조된 뗏목에 의지하고
선장이 탄 구명보트가 끌고 가다가 줄을 끊고 선장의 배는 달아 난다.
13일간의 악천후, 굶주림, 폭동, 기아, 탈수, 광기 배고품에 동료의 시신을 먹는 카니발리즘등 끔찍한 환경 속에
머리 지평선에 나타난 돛대를 보고 기뻐하며 구조의 손신호를 보내는 모습, 아들의 시신을 앞에 안고
넋이 나간 사람(후에 책으로 고발한 외과의사), 시신을 자른 피 묻은 도끼, 너부런지 시체들 등등
왕실의 인맥으로 무자격자의 선장이 부른 인재로 이 그림을 본 국민들은 분노한다.
책과 그림으로 나오기까지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였다.
패기 있는 27세의 젊은 화가 제리코는 메튜사 선박의 목수를 고용하여 뗏목을 만들고 생존자 15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몇 명은 모텔로 기용하고 병원 시체 안치실에서 시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등
정열을 기울려 작품을 완성 살롱에 전시를 한다.
작품 보다는 정치적인 성향에서 비판, 찬사가 이어지고 비판에 시달리던 작가는 우울증에 걸린다.
하지만 이 그림은 낭만주의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자리를 잡는다.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 감상할 때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루이 14세가 수집한 조각품.
나폴레옹이 수집한 작품이 5천점?에 이른다.
Oct.8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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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 Lisa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미소는 뭇남성을 사로 잡기에 노래로도 나왔다는 것 까지는 중학생 때 알았다.
그녀의 눈섭이 없다는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안 않고 박물관에 있기에 값을 책정할 수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 2015년 보험금액이 $782 million(1조원) 책정된 것도 알았다.
레오나드 다빈치가 1503년 피랜치 시절 그곳의 상인의 부탁으로 그의 부인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519년 프랑스에서 죽을 때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 소유로 남아 있다.
이 그림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11년 도난 사건이었다.
루브르박물관에서 액자수리공으로일하던 이태리인 빈센초 페루자(Vincenzo Peruggia)가 전시장에 걸린것을
대낮에 떼어 숨겨두었다. 액자수리공이라 아무도 의심치 않았고 도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는 피카소도 있었다.
피카소의 친구인 시인이 평소 루브르박물관은 "불에 타 없어저야 한다."는 말 때문이다.
페루차는 알젠티나의 사시꾼 꼬임에 빠저 그림을 훔쳤고 그림이 도난 당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자
사기꾼은 자기가 의도한데로 가짜 그림 5점을 없어진 그림이라며 미국 부호들에게 팔아 넘긴다.
2년 후 그림을 방벽에 숨겨 두웠던 도둑은 피랜치의 우피치박물관에 비밀리 접촉하여 모나리자를 팔려고 하다가
박물관측이 경찰과 협조하여 체포하고 그림을 되찾았다.
페루차는 "이 그림은 원래 이태리 것이라 가져왔고 좀 잘 살아 볼 욕심도 있었다."
그는 2년 구형을 받았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6개월 복역을 했고 44세 때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태리는 이 그림을 2년 간 전국순회전시회를 열렀고 프랑스로 다시 귀속 시킨다.
그림이 도착하는 기차역엔 국왕을 비롯 귀족들이 대거 환영식을 가졌다.
모나리자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있는 53cmX 76cm의 작은 그림은 방탄 유리로 가려저 있고 항상 인파가 많은 곳이데
오늘 단축 마라톤대회가 있어 도로가 통제되는 바람에 보통 때 1/3, 편하게 오랫 동안 감상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사진 찍기에 바쁘다.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상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관람객을 위해서 자리를 피해 주워야 할것 같다.
1515년 프랑소아1세국왕은 이태리 원정 때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그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것을 알고
피랜체의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교류를 갖게 한다.
이때 미켈란젤로, 라파엘등은 후원자가 있지만 다빈치는 후원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프랑스 궁의 궁정화가로
데리고 온다.
파리 근교 어머니가 사용하던 앙부아즈궁 아래 클루저댁을 하사하고 궁과 이저댁 사이를 지하 tunnel을
만들고 시민의 눈을 피하여 나이 차이가 많기에 몽페레(아버지?)라 부르며 각별히 지낸다.
그이 아들 앙리2세는 모나리자 그림을 목욕탕 벽에 걸어 두웠기에 습기가 차고 마르기를 번복하는 바람에
그림이 많이 상해서 균열이 많이 생겼다. 가까히 봐야만 보이나 일반 관람자는 식별을 못한다.
그림의 구도는 당시 주를 이른 피라밑구도이지만 얼굴에 비하여 손이 큰편이지만 부드럽게 보인다.
돈 많은 상인의 부인인데 반지, 목거리를 착용치 않았고 눈섭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 여인들은
넓은 이마를 선호해서 눈썹을 가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그림 그릴 때 가늘게 그린 흔적이 있다는
주장에 의하면 그렸는데 원체 가늘고 연하게 그려 눈썹의 색상이 발한 것 같다고 한다.
뒷배경은 공기원근법을 사용하였고 초상화 인물이 배경 그림 보다 높이 그린것도 특이하다.
배경 속의 산세는 동양화 같이 보이고 S자형의 계곡, 시냇물, 알프스의 호수?,구름다리도 보인다.
당시 그림 속의 여인의 눈이 정면을 보게 그리지를 않았다. 이브,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 보나 모나리자의 눈은 그림을 보는 사람과 마주하는 신비한 면이 있다.
입은 정면에서 보면 일자이지만 옆에서 보면 왠쪽 입술은 조그 올라가 미소를 짓는 표정이다.
그 미소는 곧 사라지고, 되 살아나고, 입술은 세가지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눈과 입술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는 과정이 스푸마토(sfumato)기법을 사용했다.
sfumato는 sfumare(연기처럼 사라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색상과 색상 사이에 선 혹은 색의 구분이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기법으로 다빈치가 당대 최고로 이기법을 사용했단다.
1-2mm 정도를 엄지 손가락(혹자는 가는 붓)에 물감을 가볍게 터치 살짝 그리기를 30여번을 하여
보는 방향에 따라 미소 짓는 입술을 탄생 시킨 것이다.
모나리자 그림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다빈치의 엄지 지문이 몇군데 남아 있단다.
우리도 젊은 아이들 처럼 인증삿..
Oct. 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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