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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호남신대 교수 시절 2000년경, 여름 워싱턴 DC 소재 한 흑인교회에서 설교하던 모습
겨우 15년 만에 돌아오는 모국이었다. 그러나 고심 끝에 미국으로 완전히 둥지를 옮기기로 작정하고 삶을 시작한 터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기에, 나와 가족들에게는 정말 일생일대의 결정이자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민 후 나는 단 한 번도 모국 방문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LA에서 사역자 생활을 시작했던 동양선교교회에서 성탄절 행사 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교회에서는 교사와 사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모임 끝에 경품행사를 마련했었다. 그때 나는 무심코 바구니 속의 한 번호를 집어 들었고, 내 번호는 바로 모국을 방문할 수 있는 비행기표가 경품이었다. 생전 처음 경품이란 것에 당첨돼 얼떨떨했다. 당시 큰 방에 모여있었던 수백 명의 교사들과 사역자들은 나의 당첨을 환호했고, 얼떨결에 나도 손을 번쩍 들어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표는 단 한 장이었고 그 표만으로는 가족들이 모두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그 표를 당시 모국에 꼭 가야만 했던 어떤 교사에게 주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모국에 가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특별한 목적도 없이 단지 여행을 위한 시간과 돈을 사용할 수는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내가 광주행을 결정지었고, 정들었던 롱아일랜드를 뒤로하고 아이들과 함께 하염없이 운전하여 뉴욕에서 LA로의 장도에 올랐다. 당장 한국에는 가족들이 살 집이 없었기에 식구들을 LA의 처가댁에 데려다주고 나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가 1997년 초쯤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LA에는 처형들의 사랑 많은 자녀들, 즉 조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우리 딸 수진이와 예진이를 위해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함께 놀아주었다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다. 배려심이 가득했던 그들 덕분에 아빠 없이 보내야 했던 어린 두 딸에 대한 염려가 조금은 가벼워졌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중년이 된 조카들 은주, 은영, 제인, 엔지, 앨리스가 때마다 돌아가면서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고 사랑을 흠뻑 주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때를 떠올리면 마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고 돌보셨구나 싶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찬송이 흘러나오게 된다.
◇ 노치준 목사 부부와 함께 1999년경, 광주다일교회에서 지도목사로 함께 하던 시절
광주 양림동 108번지에 위치한 호남신학대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형제처럼 지냈던 황영훈 교수와 리치먼드 PSCE에서 알고 지냈던 오덕호 교수가 이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동선 교수, 홍지훈 교수, 강성열 교수,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긴밀한 관계를 연결하고 있는 노영상 교수가 먼 타국에서 돌아온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행복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김충환 교수는 나와 같이 교수 생활을 시작했던 입사 동기 교수였는데, 그의 순수한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황승룡 총장은 넉넉한 마음으로 나에게 가르침과 설교의 은사를 갖고 있다고 칭찬해 주며 격려해준 분이었다. 차종순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섬겼던 작은 교회에 나를 자주 불러서 설교 사역도 이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는 내가 미국에서 살다 와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라며 살뜰히 보살펴주었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부인이 몰고 다니던 보라색 현대 액센트를 사용하라며 선뜻 내주셨던 일이다. 그 예쁜 차 덕분에 나는 호남과 영남 지역의 각 도시를 누비며 설교와 세미나를 마음껏 인도할 수 있었다. 모두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통틀어 기독교교육학 박사학위를 갖고 교수 사역을 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한일장신에는 이영호 박사가 목회학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지도하였으며, 호남신대에는 임영금 교수가 기독교교육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조직신학자로서 기독교교육을 지도하셨다고 했다.
조금 후에는 나중에 토론토대학교의 낙스칼리지에서 가르치다 은퇴하신 송남순 교수가 한일장신에서 지도하였다. 그는 내가 졸업한 PSCE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한 선배였다. 그 후 장신대와 실천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박원호 교수가 송교수 후에 박사학위를 한 나의 직속 선배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광주에 둥지를 튼 이후, 나를 찾는 곳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던 시절이었으나 나는 광주에 도착하던 첫날부터 두 과목의 강의를 했고, 그 주말부터 매주 4년 동안 한 주도 빼먹지 않고 광주, 순천, 여수, 구례, 목포, 익산, 전주, 심지어는 부산, 대구, 포항을 누비며 교회와 신학교 특강과 설교를 했었다.
호남신대는 나로 하여금 호남, 영남, 서울로 다니며 강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특히 총회교육부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나를 호남 대표주자로 세워 특강을 하도록 장려하고 추천해주었다. 그때 서울의 여러 교회와 사역자들을 만나 교제하고 설교와 강의를 번갈아 가며 했던 것들이 나를 전국에서 활동하도록 격려하며 견인하고 있었다. 광나루 장신대의 고용수 교수와 같은 선배들을 만나 대화하게 된 계기도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 호남신대 뒷동산 양림동 순교자들의 비 앞에서
호남신대는 당시 미국 하워드 대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황영훈 교수와 노영상 교수가 앞서고 나는 광주와 워싱턴 DC를 오가며 과목을 지도하였다. 당시 하워드 대학교에는 멜번 박사라는 선하고 신실한 교수가 나서서 하워드대학의 과정을 대표하고 있었고, 어느덧 내가 전면에 나서 목회학 박사과정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광주를 비롯한 호남의 여러 교회에서 시무하였던 담임목사들이 목회학박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사귀었던 김유수 목사, 박재용 목사, 주계용 목사, 이동균 목사와 같은 이들과는 요즘도 가끔 만나면 옛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교제하고 있는 귀한 인연이 되었다. 주님의 도움심으로 신력과 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날 때면 당시 광주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던 노치준 교수(훗날 광주다일교회, 양림교회 시무)를 만나 포도원교회에서 교제하고 같이 예배를 드렸었다. 민혜숙 사모(훗날 장신대에서 신대원을 하고 목사가 됨)는 그의 아내로서 연세대와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문학가요 소설가였는데, 풍부한 문학적 감성으로 대화를 함께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었다.
노치준은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를 다니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재로 훗날 부르심을 받아 17년 동안이나 재직했던 광주대 교수직을 뒤로 하고 호남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여 전도사가 되었고, 광주다일교회를 개척하여 풍암동에 살면서 나를 지도목사로 초청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보다는 몇 살 아래였으나 이미 목사가 되었다는 명분으로 예배 후 축도를 담당하였고, 가끔 단에서 설교도 하며 성도들과 같이 즐거운 교제를 했던 추억이 있다.
호주와 미국에서 건너와 선교하며 자신을 다 주었던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호남신대에서 누렸던 4년 동안의 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유진 벨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의 삶과 죽음을 말해주는 양림동 선지동산에서 교수로서의 첫걸음을 했다는 것은 부족한 나에게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지를 가르쳐 준 산 교훈이 되었다. 그들은 죽었으나 살아 있는 믿음의 삶을 보여 주었고, 나는 그 순교동산 밑에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어디서도 배우지 못할 십자가의 삶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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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