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부터 그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서두른 건, 가급적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쓸 데 없이 주변 이웃들과 마주치는 일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새벽에 일을 한 뒤 틈을 둘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출근 등을 하느라 복도를 오갈 테니까.(그 때를 피하기 위해서)
물론 그러다 보니 오늘은 '자화상 드로잉'도 하게 되지 않았다.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선 큰 캔버스에 다시 한 번 젯소 밑칠을 해 둔 뒤,
아직도 그게 남아 이제는 30호 짜리 다섯 개를 꺼내 베란다에 세워두고 그 일을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흐려 햇볕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면서 보니 오늘도 미세먼지가 '나쁨'인지,
바깥 세상이 뿌옇기만 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벽에 캔버스 쌓아두던 곳이 다시 훵해졌다.
캔버스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요즘 며칠 사이에 그걸 들어냈다 정리하기를 벌써 몇 번 째인지......
그렇잖아도 나이 들어가면서 힘도 없는데, 한 번씩 그 일을 할 때마다 여간 힘에 부치는 게 아닌데......
그렇게 겨우 준비했던 젯소를 다 사용하게 되었는데, 주로 작은 것 위주로 밑칠을 했지만 최소한 그것들은 젯소 밑칠 만큼은 부족함이 없게 된 꼴이었다.
내 노력의 흔적이 겨우 캔버스 밑칠로 일단락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을 거기서 끝낼 수는 없었고,
기왕에 복도 가득 펼쳐놓은 것이니, 이 틈을 이용해서 적어도 어제 화방에서 가져왔던 20호 캔버스들의 본격적인 유화 밑칠(초벌)은 해두는 게 좋을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펼져놓고 일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니, 남들의 시선을 받을 때 한꺼번에 받아 무마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나는 이웃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
일단 젯소 칠을 했던 도구들을 씻고 붓도 빨고(다음에 또 사용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데, 이런 일이 정말 하기 싫고 귀찮기만 하다.),
이제는 유화물감을 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양이 좀 많아, 복도에 나란히 세워둔 20호 캔버스를 다 칠한 뒤,
10호 두 개와, 만약을 위해 30 50 60호 캔버스 하나씩도 방 안에서 유화 초벌을 해두었다.
그런데 이 작업은 젯소처럼 몇 시간 만에 마르는 게 아닌, 적어도 사흘 정도는 그대로 놔둬야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변수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 일을 하느라 오전이 다 갔고(이미 점심 시간이 넘었고),
복도며 방안에 '시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서 냄새가 빠지게 창을 열어놓았는데, 하필이면 오늘 돌풍이 불어(바람이 어찌나 센지) 방 안에서 일을 하다 보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네 개의 캔버스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뭐든 쉬운 게 없구나! 하고 그것들을 세워놓으면서는 한숨까지 나왔다.
그나저나 난, 일복은 터진 사람이다. 이렇게 죽도록 일은 해도, 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어제도 일을 했지만, 오늘은 더 배가 고팠다.
게다가 나는 일에 빠져, 오늘은 찬밥을 먹는 날인 줄 알고 있었는데(어제 밥을 한 것으로 착각),
점심을 챙겨 먹으려 보니, 새로 밥을 하는 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밥을 먹기는커녕 우선 쌀을 물에 담가놓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더구나 고구마 작은 거 하나에 우유 한 잔을 마신 걸로 아침을 때웠기 때문에(다른 날도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오전 내내 육체적으로도 한 일이 많다 보니 보통 배가 고픈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겨우 점심을 해 먹고,
몸도 피곤해서 낮잠까지 자고 일어났더니 3시가 다 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창을 열어 휘발성인 '시너' 냄새를 뺀 건 좋은데, 이제는 유화 마르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일정 부분의 작업준비를 해놓으니, 마음 한 구석은 뿌듯함이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