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쁘다! - 아임
할머니는 씻기기 쉽도록 내가 짧은 머리인 걸 좋아하셨고 그 손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바리깡이 필요할 만큼 바짝 깎은 머리였다. 어린 시절 사진에서 나와 오빠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나도 활동하기 편한데다 할머니까지 좋아해주시는 짧은 머리에 만족했다. 그렇지만 내가 방울 끈과 리본 핀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2단, 3단으로 묶고 온 여자애들을 보고나서,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고 그 짧은 머리에 정수리가 땡길 만큼 묶어 사과머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긴 머리에만 할 수 있는 땋은 머리에 대한 투정이 심한 날엔 엄마는 내가 ‘보이쉬’한 거라고 했다. ‘귀엽다’, ‘사랑스럽다’처럼 그것도 되게 멋진 거라고 설명하셨다. 그럼 나는 멋진 거라니 ‘보이쉬’도 좋은 건가보다 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아임은 그림 그리기나 책 읽기도 좋아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생기면 주로 뛰어다녔다. 편을 나눠 경찰과 도둑을 한다거나, 마지막 사람이 잡힐 때까지 얼음땡을 하면서 골목을 쏘다녔다. ‘보이쉬’한 짧은 머리는 활동성도 좋지만 잔소리 피하기에도 좋았다. 남자애처럼 생겼더니 남자애처럼 대우받았다. 놀다가 흙먼지를 묻혀도, 심하게 넘어지거나, 혹은 심지어 누군가를 넘어뜨려도 어른들은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처럼 군다고, 아임이는 보이쉬한 성격이어서 그런가보다 하며 오래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 여자애들을 부르는 초등학생들의 단어가 있다. 책상을 헤치고 의자를 건너가며 교실을 뛰어다녀본 여자애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조폭 마누라’다. 조폭 마누라 아임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하고 다녔다. 장난으로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릴 때까지 온 동네를 가로 지으며 뛰었다.
긴 머리를 한 건 할머니 댁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간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귀 밑 단발로 시작해서 어깨에 닿을락 하면 어색해 계속 자르다가 그걸 버텨야 긴 머리가 될 수 있다며 견뎠고 드디어 쇄골을 넘는 머리가 되었다.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가면 항상 내가 엄마 머리 손질이 끝나길 기다렸는데, 긴 머리로 파마를 한 날엔 처음으로 엄마가 나를 한참 기다렸다. 한동안은 파마약 냄새가 베개에서도 나고, 옷에서도 나고, 바람에서도 났다. 냄새가 독하다고 투덜거리면 엄마는 “예뻐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했다. 정말로, 예뻐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긴 파마머리를 부스스하지 않게 유지하려면 안 그래도 귀찮은 빗질을 더 자주 해야 했고, 에센스도 발라야 했다. 하지만 귀찮음을 감수할 만했다. 내 머리를 본 사람마다 칭찬을 했기 때문이다. 명절에 오랜만에 본 친척들은 이제야 좀 여자애 같다고, 여성스러워졌다는 말과 함께 훨씬 예뻐졌다고 했다. 두 단어가 세트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보이쉬한 것보다 여성스러운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중학생이 되고 친구 따라 틴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산 색조 화장품이었다. 이니스프리 에코 후르츠 틴트. 오렌지 색. 4000원. 뭐가 뭔지도 잘 모른 채, 친구 따라 간 화장품 매장에서 제일 싼 걸 샀다. 틴트의 원리를 단순히 설명하자면 진한 색 액체로 입술 피부를 물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입술이 마르면 틴트 색처럼 주황빛이 도는 각질이 떨어져 나왔다. 그럼 원래 입술색이 나왔고, 그럼 나는 각질이 막 떨어진 연한 피부 위로 또 틴트를 발랐다. 입술이 찢어질 때도 많았지만 남들도 다 했고 나도 유행에 따라가고 싶었다. 연예인이나 주변 어른들도 그렇고 원래 입술보다 빨간 입술이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는 모여서 서로 바꿔 발라보기도 했다. 이 색은 너무 핑크빛이라 별로다, 이 틴트는 다홍빛이라 까만 피부랑 잘 어울린다, 다들 화장품 박사 같았다. 나도 인터넷을 찾아 요즘 인기 있는 브랜드가 뭔지 알아갔다. 친구가 에뛰드의 진주알 비비하면, 에뛰드가 에뛰드 하우스를 말하는 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점심시간, 빨리 나가야 운동장을 차지할 수 있다며 급식을 마시는 남자애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나는 이제 관심 없었다.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남은 시간동안 학교 둘레를 걷는 거면 충분했다. 뛰면 앞머리가 날렸고, 땀이 났다. 점심시간뿐만 아니라 체육 시간에도 그랬다. 준비 운동으로 어쩔 수 없이 운동장을 돌 때면 앞머리나 이마를 꼭 부여잡고 뛰었다. 왠지 앞머리로 가려놓은 얼굴을 보이는 게 민망했다. 대왕 뾰루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별 거 없는 이마인데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지들 냄새나는 건 모르고 흰 국물 흐른다며 땀이 난 화장한 애를 놀리던 남자 애들이 싫었다. 그렇지만 나도 땀이 나면 조용히 몰래 닦았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아무리 급해도 교복 주머니에 틴트를 챙겨갔고, 나중에 혹시라도 두고 올 날을 대비해 사물함에도 립스틱을 하나 넣어뒀다.
학교에서, 집에서, 온갖 어른들에게 화장은 피부에 안 좋다, 지금 말고 나중에 커서 하면 된다, 아무리 들어도 화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예뻐지니까. 아이들이 화장을 안 하도록 하고 싶다면 하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예쁘다는 말을 그만해야 한다. 예쁘면 칭찬하니, 당연히 예뻐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틴트를 여러 겹 덧발라 입술이 마르면, 그만 바르는 게 아니라 보습력 좋은 다른 립 제품을 찾았다. 비비를 바르다 얼굴에 뾰루지가 나면 그 부분엔 컨실러를 한 겹 더 발라 빨갛게 올라온 피부를 가렸다. 나도 화장한 채로 태어난 건 아니었다. 머리에 바람자국이 날 만큼 뛰는 걸 좋아했지만 사람들은 그걸 ‘보이쉬’라고 불렀다. 당하기만 할 수는 없다고 똑같이 혹은 덧붙여 장난치는 여자애는 ‘조폭’이 아니라 ‘조폭마누라’였다. 활동성은 남성의 단어였다. 여성의 단어로는 긴 파마머리, 빨간 입술 같은 게 있었다.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나? 오랜만에 치마 입고 출근한 날, 부장님은 말했다. “아임씨, 웬일이야? 오늘 여성스럽게 입고 왔네. 예쁘다~”
첫댓글 저는 ‘탈코’의 맥락에서 편안하게 글을 읽었어요. 오히려 너무 주제의식이 뚜렷하거나 ‘~해야한다’라는 글이었다면 너무 뻔하거나 불편하게 읽혔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부장님의 발언도 블랙코미디 같이 웃겨요. ‘치마=여성스러운=예쁘다’ 이 공식을 적나라하게 (말한 주체도 중년의 남성 부장으로 상상이 되는데, 저 너무 편협한가요?)보여준 것 같아서요. 잘 읽었습니다.
여자로 자라는 풍경을 정말 생생하게 묘사하셨네요 ㅎㅎ 머리 묶고 싶어서 한껏 짧은 머리를 땡겨서 묶은 사과머리 너무 귀여워요 ㅎㅎ
아임님이 설명하신대로, 여자로 자라도 마냥 여성스럽기만 한다거나 남자는 꼭 남자답게 자라는 건 아닌것같아요. 서로 섞이는게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풍경이죠. ㅎ 여담인데 아이에게 핑크색 옷이나, 성별을 나타내는 꾸밈들, 또는 장난감을 쥐어주지 않으면 대체로 더 자유롭게 선택한대요. (여자애들이 파란색을 선호한다거나 로봇을 집는다거나.. 뭐 그런거요)
어찌댓든 저도 짧은 머리와 긴 생머리 ? 사이에서 마음이 수차례 왔다갔다 한것같아요 ㅎ 글은 무슨 탈코의 화신인양 썼는데 저도 운동하기전에 피부화장에 신경쓰고 틴트도 늘 들고 다녔죠. 누군가한테 피해가 되고, 저한테도 피해가 돌아온다는 걸 경험하기전까지는요.
꾸미면 또 꾸미는대로 노력을 알아줬으면 하는건 당연한것같아요 ㅎㅎ
아임님 보면서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얼굴이 긴 편이고 머릿결이 좋지 않아 아직 시도 못했는데 나중에 숏컷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어요.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성에 따른 고정관념 같은 걸 조심하는 문화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머리가 긴 오빠들도 있고 스포츠 머리로 자른 언니도 있어요. 첫째와 또래 친구도 머리가 커트이었구요. 코로나로 미용실을 못 가서 지금은 머리가 길었지만요. 이런 모습보면 주변 문화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동안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 걸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확인하게 돼요. 아직 초등학교라 그럴 수 있지만 이런 문화를 잘 지켜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학생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직업이다 보니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울 때가 많은데요. 절대 외모에 대해서는 평가를 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학생들이 저한테 예쁘다 날씬하다고 해도 남의 외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다 실례라고 하긴 하는데... 보여지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저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아서) 청소년들은 더욱이 관심이 많다보니 메시지 전달이 어렵네요.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탈코 안 한 사람을 욕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모임 사진을 보니까 전부 숏컷에 검정 또는 회색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게 참 기괴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보다 긴 게 더 편해요. 숏컷은 미용실에 자주 가야 하는데 기르면 그냥 묶을 수도 있고 그래서요. 화장도 1년에 한두 번 하는데, 화장하면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봐서 그게 또 참 재밌거든요. 그래서 화장하고 머리를 기르는 게 여성성과 꼭 관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아임! 제가 그날 오프라인 수업을 못가는 바람에 얼굴을 못뵈서 너무 아쉬웠답니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저의 추억을 떠올려주기도 하는 글이라 번쩍 손을 들었는데 너무 중언부언 했던 것 같아서 잠자리에서 이불을 한참 찼답니다. ^^ 머리 길이에 대한 결정권이 없던 시절, 부득이 짧은 머리를 해야했던 것도 너무 공감이 갔고요,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미용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도 너무 와닿았습니다. 자유롭게 지내며 외모에 대한 강박이 없던 단순할 수 있는 시절을 지나 다양한 관계들이 누적되면서 미용에 대한 다양한 감정이 쌓이는 게 너무 잘 묘사가 된 것 같아요. 글의 후반에서 '조폭 마누라', '보이쉬' 하다는 부분이 글의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아요. 짧은 머리, 외향성 등을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제시한 부분에서 눈이 뜨였다고 할까요. 그런 부분에서 현재 아임의 이야기가 조금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