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이란 다음 침공은 쿠바라고 한다. 왜 그러는 걸까. 쿠바는 미국에게 트럼프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약소 국가라는 것이 잘못일까.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잘못일까. 쿠바의 경우 미국의 경제 봉쇄에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고, 다른 약소국들에 원조도 하며 선량하게 살고 있다고 알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은 왜 그러는걸까. 약육강식의 자연의 질서를 사는 것일 뿐인가. 자본주의나 제국주의라는 인간이 만든 질서를 사는 것일 뿐인가.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잘못일까. 대통령이 문제가 아니라 군국주의, 군산복합체, 전쟁주식회사라고 불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잘못일까. 남의 나라에 대해서, 남의 나라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남 일 같지 않아서, 나의 해방과 무관한 것 같지 않아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겠다.
무한 이윤 증식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멈추는 길은 각국의 국가권력, 정치권력, 사법권력, 언론 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 내 주변의 일상권력의 성격을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바꾸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엘리펀트
보여주는 것으로 말하고 싶어하는/말해야 하는 것, 혹은 문제적인 현실을 말하고 싶어하는/말해야 하는 것이 영화가 하고 싶은/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2003년 연출작 <엘리펀트 Elephant>는 문제적인 현실을 냉랭하게 '보여줌'으로써 문제적인 현실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려던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는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두 명의 학생에 의해 발생한 학교 내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틀린 설명일 수도 있다. 적어도 영화가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 총기난사라는 사건, 아니 일상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저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총기 난사라는 사건을 중심에 두고 여러 영화 장치들을 통해 그 사건의 발생과 원인, 결과 등을 밝혀 보여주는 것이 여느 영화들의 연출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반대다. 노란 단풍나무와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과 베토벤의 ‘월광’이 흐르는 평온한 풍경을 배경으로 학생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카메라는 비추고 또 비춘다. 같은 시간을 다른 시선으로. 그 일상 중에는 총기 난사라는 사건/일상도 있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여느 영화들처럼 그 사건의 충격적인 잔인함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그 잔인함이 뜻하지 않게 영화 속 재미를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면, 잔인함을 다루는 수 많은 영화들 중의 하나로 기억되었을 수도 있다. 총기 난사 사건은 곧 잊혔을 수도 있다.
영화니까, 나의 현실은 아니니까 위안 삼으며 잔인하지 않은 현실로 돌아오면 그 뿐일 테니까. 하지만, 감독은 총기난사를 특별한 장치 없이 냉랭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의 잔인함이 일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모습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무섭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현실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제 어떻하나. 총기난사사건이 잔인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된 건가.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까. 아니면, 그 아이들이 동성애자이며, 폭력적인 게임을 하며, 나치에 대한 비디오를 보는 소수 문제적인 아이들이 저지른 일 일뿐이니까, 선생님들에게 쓰레기취급을 당하는 문제아들이니까, 함께 했던 동료마저 총으로 쏘는 잔인한 아이이니까, 그 아이들의 문제적인 행동만을 문제 삼아서 바꾸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아이들을 만들어 놓은 교육을, 그런 교육을 하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자고 외쳐야 할 것인가.
감독은 나의 이런 생각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 잔인한 현실 앞에서 원인을 생각하며 해결책을 생각하는 나에게 감독은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 시간에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현실을 한두 가지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고. 영화 속 아이들의 동일한 시간의 행동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총기 난사를 한 그 아이들의 몇 가지 행동으로 그 사건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해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현실을 보여줬으니, 그 다음은 알아서 하라고?
물론, 우리는 아무도 ‘코끼리’와 같은 거대한 현실의 전체를 알 수 없으며 그 어떤 것이 가장 본질적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으며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전에 방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며, 전체를 알아가는 것, 그 중에서도 좀 더 본질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지만 대다수가 바라지 않는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총에 맞고 싶지 않다면 냉랭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해결이 소수의 아이들을 바꾸는 것이든, 총기 구입을 규제하는 것이든, 그 아이들을 만들어 놓은 사회구조를 뒤집는 것이든, 그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한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겠다.
ㅣ그랜토리노
화해, 협력, 상생.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이고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사회에서든 누구나 늘 바랐고 바라는 것 같지만 인류사에서 실재가 되었던 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 끊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 싸움, 전쟁까지.
누구나 바라지만 쉽지 않은 건 왜일까? 누구나 바라는 것 처럼 보이지만 진심은 아니라서? 아니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네가 먼저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에? 결국 화해, 협력, 상생은 '누가 먼저'의 문제일까?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불필요한 일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 아니,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는 '누가 먼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인 월트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라고 해야겠다. 노감독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을 따라 깊은 생각에 빠졌다고 해야겠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살아남은 대가로 훈장을 타기도 한 월트. 전쟁 참전도, 살인도 본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듯. 그로 인해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어 보이는 노인. 삶에 대한 분명한 소신과 원칙이라는 고집이 있어 보이는 노인.
비록 차고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매끈하게 잘 유지된 그랜 토리노 자동차를 떠올리게 하는 노인, 그 자동차를 탐냈던 많은 이들, 아들마저도 제쳐두고 이웃인 테오에게 물려주는 모습까지. 그는 참 건실해 보이는 노인이다.
그런 그가 베트남계 흐몽족의 갈등에 개입하게 된다. 옆집에 사는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는 슈와 테오 남매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동네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자신이 젊은 시절 참여했던 한국전쟁과 같이 타의에 의한 싸움 개입이 아니라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을 이웃으로서 혹은 동네 어른으로서 자의로 방어에 나서게 된 것이다.
화해, 협력, 상생의 문제가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미 득을 점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이 먼저 자신의 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해, 협력, 상생을 말하는 기득권자들에게서 자신을 먼저 포기하는 모습보다 화해는 제스처에 불과하고 뒤로 자기 것 챙기기 바쁜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이어질지 모르는, 모두가 희생될 수도 있는 싸움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모두를 살리는 월트의 모습을 보면서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상대적으로 득을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진정으로 화해, 협력, 상생을 바란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먼저 당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ㅣ존중을 말하는 것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천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부터가 그렇다.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낮추고 다름을 수용하거나 때론 나를 포기하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해봐야 어쩌다 갑자기 위선자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존중을 말하는 것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말하지 않아도 나부터 먼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존중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존중을 말하는 것은 말이라도 하고 말을 함으로써 실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중은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천할 때 생명력을 가지는 가치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흔한 것이 되었지만 다름이 틀림으로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도 흔히 겪는 일이다. 존중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각자 다른 모두를 보호해줄 사회의 약속인 법제도를 만들고 지키는 일은 존중의 기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제도가 높은 데 계신 기득 권력은 존중하면서 낮은 데 있는 국민들은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서, 차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차별하는 국가에서 존중을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기득 권력의 불법과 차별이 당연한 일상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일상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은 일상적 삶은 중요할 것이다. 일상적인 삶을 법제도로 규제하는 것은 높은 데 계신 기득 권력이지만 그 분들이 저지르는 불법과 차별보다 일상에서 직접 부딪히는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차별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옆에 있어서 더 잘 알기에 편하고 친숙해서 ‘존중’하지 않게 되는 일도 많다. 친밀하고 당연하고 지속적이고 견고한 것이 일상이기에 당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 일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 일상적인 차별이기도 할 것이다.
해서, ‘나’부터 존중을 실천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서로 요구하며 차별이 아니라 존중이 당연한 일상이 되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삶을 소중한 일상을 지켜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중을 지켜내는 것이, 우리의 평온한 삶과 일상을 규제하며 파괴하려 드는 높은 데 계신 기득 권력의 불법과 차별로부터 우리의 존중을 지켜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평온한 공동체로 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