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충무공 해를 품다-
수필가 임병식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빼놓고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고을이다. 전라좌수영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오로지 병란을 이겨낼 계책을 수립하고 모든 것을 대비했던 것이다. 앞서 조선통신사로 파견한 황윤길과 김성일은 조정에 돌아와 서로 다른 보고를 했지만 일본의 동태는 심상치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이미 왜구가 여수 손죽도까지 침입하여 이대원 장군이 나아가 싸웠으나 전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적의 동태를 두고 왈가왈부가 많았다. 대비를 위해 이순신장군을 전라좌수사에 낙점했으나 반대가 극심했다. 당시 장군은 하급직인 정읍현감으로 있었는데 전라좌수사 직급은 정 3품직으로 7계급이나 건너 뛴 자리였다. 그렇지만 선조임금은 반대상소를 억누르고 서류상 진도군수를 거쳐 사도첨사에 보직 했다가 기어이 전라좌수사에 앉혔다.
그때가 1591년 (음)2월 13일. 장군은 기대에 부응하여 부임하자마자 5관5포를 점검하고 병장기 제작에 나섰다. 판옥선을 건조하는 한편, 지자포와 천자포를 제작하고 화살도 충분히 확보했다.
무엇보다도 돌격함인 거북선 건조를 창안하여 그 제작을 나대용장군에게 맡겼다. 이것은 나중에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왜적은 원래 전법이 접근전을 벌린 다음 배에 기어올라 칼을 휘두르는 것을 주로 하는데 거북선은 배위에 철갑이 씌우고 쇠못을 박아 접근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군은 병력충원과 훈련에 집중했다. 장군 스스로도 활 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틈틈이 훈련상황을 점검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한지 1년 2개월 후인 1592년 (음) 4월 13일이었다. 선발대로 소서행장이 부산포로 6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날은 비장의 함선인 거북선이 건조되어 화포실험을 마친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만큼 장군은 일 년 여에 걸쳐 철두철미하게 전쟁에 대비했다. 장군은 옥포해전을 치른 후 5월 29일, 마침내 사천전투에 거북선(돌격장 이언량)을 출동시켰다. 이날 전투는 격렬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으나 장군도 어깨에 적탄에 맞았다.
장군을 이야기 하면서 모친에 대한 효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은 모친(변씨부인)을 여수 웅천의 정대수가에 모셔놓고 늘 안부를 살폈다. 워낙에 고령인 점도 있었지만 효심이 남달랐다.
장군은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했으나 모함을 받았다. 이유는 공적을 부풀렸다는 것과, 간자 요시라의 말이 가토기요마사가 부산에 오게 되므로 이때를 노려서 치면 좋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장군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선조는 어명을 어겼다며 파직을 시킴과 동시에 장군을 한양으로 압송했다.
1597년 2월 26일. 이때는 전쟁이 소강상태에서 휴전이 한참 논의되던 때였다. 장군은 고신을 받아 죽음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나선 이가 정경달(丁景達) 선산군수였다. 그는 장군의 보급참모로써 적극적으로 도와 전투를 안정적으로 치르게 한 사람이다. 그는 빈틈없이 장군을 보필했다.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둔전을 일구고 적기에 씨앗을 파종해 넉넉하게 군량미를 확보했다. 행정 처리에 있어서도 솜씨를 발휘하여 장군을 안도케 했다.
그런 그가 목숨을 걸고 위기에 처한 장군을 구명하기 위해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그의 말은 논리 정연했다. 그의 말을 선조가 경청했다.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장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하여 죄를 돌릴 수 있습니까. 왕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직언을 했다. 그러면서,
“이순신을 죽이면 종묘사직이 망합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선조는 다소 노여움을 누그러뜨렸다. 그때에 정탁대감이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경달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이공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할 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요.”했다.
그 말을 들은 정탁대감은 사정을 파악한 후 마음을 바꿔먹었다. 목욕재계 하고나서 죽음을 각오하고 신구차(伸救箚) 써 올렸다. 그로 인해 장군은 살아났고 그것은 실로 정경달과 정탁대감이 목숨걸고 구명한 결과였다.
차제에 말을 하는 것이지만 장군의 업적과 진정한 참모역할을 생각할 때 전장에서의 업적은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을 빼고는 언급할 수 없다. 그는 바다와 관련하여 남다른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고, 임란시 이미 나이가 60을 넘었으나 그는 장군의 곁을 굳건히 지켰다.
그는 지략은 물론, 포구의 지형지세, 바다 속의 사정, 만조와 간조시기, 수시로 바뀌는 해류의 방향을 정확히 읽어내는 바다의 신이었다. 현대로 말하면 실로 머릿속에 GPS 장치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군은 그를 아꼈다. 장군은 평소에 늘 “조선의 한쪽인 호남이 지탱된 것은 모두 어영담 덕분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감사를 받고 파직을 당했을 때 장군의 심정이 잘 드러난 기록이 있다.
“ 어영담은 남해의 변장(邊將)으로 물길의 형세를 알지 못한 곳이 없고, 기개와 전술이 남달리 뛰어납니다. 중부장으로서 함께 작전을 모의하고 전투에는 죽음을 무릎 쓰고 앞장섰습니다. 비록 잘못이 있다하여도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장수 한사람을 잃은 것은 적을 막아내는데 방해가 되며 그 보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바꾸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간청하여 조방장으로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런 그를 늘 못마땅하게 여긴 경상우수사 원균은 어영담을 이렇게 놀렸다고 한다.
“어영담은 이순신의 넷째아들이다.”
얼마나 보필을 잘하고 전투마다 개가를 올렸으면 배 아파서 그리 놀렸을 것인가. 그때마다 어영담은 허허하고 웃고 말았다는데 농 치고는 지나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 곁에는 훌륭한 여러 참모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장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역에 살면서 누가 물으면 이야기 해 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도 작용한 것이지만, 친구인 남영식선생의 영향도 적지 않다. 지역에서 30여 년간 함께 지내면서 오직 이순신장군에 빠져 사는 그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자료를 넘겨받아 읽은 덕이 큰 것이다.
그런 남영식 선생이 책을 내겠다고 찾아와서 추천사를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 전에 연암선생이 아정 이덕무선생의 자제가 부친의 책 서문을 부탁하자 “나 말로 그를 더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쓰지 않고 누가 쓰겠는가” 말이 생각나서 흔쾌히 승낙했다.사실이 그러하기도 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남영식 선생은 이순신장군의 유적지라면 반드시 찾아가 답사를 하고, 새로운 내용이 보이면 문의하고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 왔다. 그것을 잘 알기에 이번에 펴내는 기행문은 새로운 시각에서 포착한 내용이 많아 읽을거리가 풍성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만큼 학자가 아닌 사람이 쓴 글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일독 하기를 권한다.(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