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항 / 이남옥
고향 집 화장실 창문 너머로 뒤안 풍경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감잎 사이로 가을이 내려앉았다. 소상골의 뜨거운 한여름을 묵묵히 견뎌낸 감나무에도 어느새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추석은 그렇게 견뎌 낸 것들의 결실을 축하하는 축제인가 보다. 들판은 누렇게 익어 가는 벼로 가득하고, 비어 있던 집은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들로 가득하다. 올해는 유난히 집 안팎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부모님은 여섯 딸과 두 아들을 낳아 키우셨다. 여덟 남매를 먹이고 입히며 살려고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계시지 않지만, 어려움을 함께 겪고 자란 의리가 있어선지 어김없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먼저 하늘나라로 간 막내 여동생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남자친구와 함께 인사를 왔다. 떠난 동생의 빈자리는 마음 한쪽에 여전히 슬픔으로 남아 있지만, 조카가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가는 걸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싶다.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사람이 생겨나 그 뒤를 이어 간다. 우리 손주도 보탰다.
빈집에 사람이 모이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마음을 내고, 준비하고, 일해야 한다. 친정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 만년 회장과 총무다. 태어난 순서로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큰언니가 방향을 잡는 사람이라면 둘째 언니는 그 방향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두 언니 덕에 배가 흔들리지 않고 순항을 계속 하고 있다. 사실은 그동안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언니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며 애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이번 추석에 다른 각도로 바라보니 고마움이 새롭게 다가온다.
총무 역할은 크다. 대부분 돈을 관리하는 일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임의 성패는 총무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일 때마다 날짜를 맞춰야 하고 사람 수를 확인하고 먹는 음식에 신경을 써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다. 또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그 외도 어려운 점이 숱하게 많을 것이다. 희생과 봉사 정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한마디로 모임을 이끄는 자는 돈만이 아닌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생색내지도 않고 싫은 기색 없이 꾸준히 도맡아 온 것이 정말 대단하다.
친정 식구들이 연중 만나는 날은 명절 두 번, 제사 두 번, 그리고 김장 때까지 모두 다섯 번이다. 많지 않은 횟수지만 그날이 있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아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바라본다. 물론 함께하다 보면 마음이 부딪칠 때도 있다. 같은 배에서 나왔어도 성격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였으니 어찌 늘 좋기만 할까. 때로는 작은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오래도록 가족의 앞과 뒤를 지켜 주었기에 우리는 지금도 모여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그런 구심점이 있어 누군가 음식을 만들면 다른 사람은 상을 놓고, 누군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다른 사람은 마당을 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연스러운 협력이 이루어진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그곳에 집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함께 나눈 삶과 추억, 믿음이 있어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고향집의 불씨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