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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용/아나운서: 지난 4월 2일 새벽, 바로 2022 카타르 월드컵 (FIFA World Cup Qatar 2022) 본선 조 추첨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그때 모든 분들이 다 긴장 했었습니다. 바로 E조, E조에 이미 독일과 스페인이 들어가 있었어요. 무적함대와 전차군단, 세번째 국가를 뽑는데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 일본, 모로코 세 나라였습니다. 결과가 나왔는데 일본이야~ 일본 대표팀의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이런 표정을~ 이걸 무슨 표정이라고 하죠?
허준/방송인: 넋이 나간 표정~
이광용: 나라를 잃은 표정, 대한민국은 E조가 아니라 H조에 속해서 월드컵을 치르게 됐습니다. 오늘 역사저널 그날 월드컵 얘기 축구 중계를 제대로 보려고 축구중계의 정답 한준희 해설위원을 모셨습니다.
한준희/축구해설위원: (머리 숙여 인사) 반갑습니다,
이광용: H조, 대한민국 조편성 잘 된 겁니까, 한준희 위원?
한준희: 결코! 결단코! 도저히! 불평해서는 안 되는 조다. 어려운 조이기는 하지만 조금 전 일본의 사례에도 보셨다시피 도저히 이건 불평해서는 안 된다. (Group H-포르투갈 (8위), 가나 (60위), 우루과이 (13위), 대한민국 (29위)), 여기서는 통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광용: 사실 포르투갈과 만난다는 게 중계하는데 흥미거리가 많은 나라잖아요.
한준희: 그렇죠, 포르투갈 하면 일단 2002 한일 월드컵의 기억이 떠올려지죠,,
이광용: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 전에서) 조별 리그 3차전~ 사상 최초 16강 진출~
한준희: 여기 현재 대한민국 대표팀의 수장이 포르투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벤투와 조국의 대결이 펼쳐지는 그런 스토리도 있고 손흥민 선수가 예전에는 호날두를 롤 모델로 삼았던 적도 있었어요. 왜냐면 그 선수와 플레이 스타일과 장점이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등번호도 같고) 지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이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전에서 호날두 선수 앞에서 뭔가를 보여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이광용: 2022 카타르 월드컵 스포츠는!
일동: KBS!
이광용: 월드컵은?
일동: 이광용!
한준희: 이광용이 월드컵 갈지 못 갈지는 그때 가봐야 알지요.
일동: 웃음~
한준희: 너무 속단하지 마세요!
이광용: 그런데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역사저널 그날을 시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월드컵을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여러분께 소개 드리고 싶은데요. 그런 측면에서 가장 들여다 볼만한 조는 바로 B조 입니다. 이 B조에 어떤 나라가 들어가 있느냐? 잉글랜드와 미국 그리고 이란 나머지 한 국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한준희: 월드컵 조 추첨에서 결정이 안 된 채로 조 추첨을 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인데 사연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가 속해 있던 파트가 경기를 치르지 못 했어요. 그 바람에 우크라이나와 스코틀랜드가 한국 시각으로 6월 2일 새벽에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되겠고 여기서 이긴 팀이 이미 올라와 있는 웨일스와 마지막 최초 플레이 오프를 치러서 여기서 최종 승자가 바로 B조의 남은 자리로 들어올 텐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거죠. 만약에 B조 남은 자리에 스코틀랜드 혹은 웨일스가 들어온다면 잉글랜드 대 웨일스, 혹은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 전인데 영국 내전이 축구에서 펼쳐지는 결과가 됩니다.
이광용: 이게 역사적인 일인데요. 웨일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월드컵 본선에서 영국을 구성하는 국가가 직접적으로 만난 첫 사례가 됩니다. 영국의 공식 명칭이 뭔지 아십니까?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그러니까 영국이란 나라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이 네 나라의 연합국가예요.
이시원: 원래 한 국가에 한 팀이 나오는게 맞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거기는 네 팀이 나오는 건가요?
한준희: 무려 1863년에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결성이 되었구요. 41년 후 FIFA (국제축구연맹)가 1904년에 결성이 되었어요. 한참 동생이죠. 그러니까 형님 대접을 안해드릴 수가 없고 종가 쪽에서 뭐 피파 라는 게 생겼어?~ 우리 그거 안해 우리가 축구 더 잘 하는데 우리가 왜 너네하고 하냐 만약에 그렇게 되면 피파라는 단체 자체가 권위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영국에 한해서는 국가는 하나지만 4개의 축구협회와 4개의 팀을 인정해 주는 거죠.
이시원: 그러면은 이 4개의 팀들이 서로 감정적인 싸움은 어떤 가요, 사이가 좋은 편안가요? 아니면 서로 싫어 하나요?
한준희: 매우 안 좋죠.
이광용: 스코틀랜드 대 잉글랜드가 붙으면 한일전 이상이에요.
최원정: 영국 국기도 저거 4개를 합쳐 놓은 거잖아요!
이광용: 맞아요, 맞습니다. 웨일스는 국기가 만들어지기 전인 1536년에 잉글랜드와 합병이 됐어요.그래서 따로 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국기를 3단 합체 시키면 지금의 영국 국기 유니온 잭이 됩니다.
한준희: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애~ 합쳐서 딱 되었어요.
이광용: 영국을 구성하는 나라들이 감정적으로 안 좋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 가슴에 붉은 양귀비 등장), 이게 (붉은 양귀비) 뭔가요?
한준희: 손흥민 선수 가슴에 있는 것이 양귀비 꽃입니다. 영어로 Poppy 라고 하는 양귀비 꽃인데 이 양귀비 꽃을 왜 선수들이 다느냐면 우리 현충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Remembrance Day 라고 해서 11월 11일이 이 사람들에게는 현충일입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날), 전몰 장병들 순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날인데 오늘 주제와 관련돼서 말씀드릴 대목은 저렇게 모든 감독 스태프 선수들이 양귀비 꽃을 부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귀비 꽃 달기를 거부한 선수가 있습니다.
이광용: 한 선수가 양귀비 꽃을 안 달았습니다.
한준희: 옆에 동료들도 달고 있는데 이 선수가 누구냐 하면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출생했고 국가대표는 북아일랜드가 아니라 아일랜드 국가 대표를 하고 있는 제임스 맥클레인 이라는 선수예요. 이 선수가 양귀비 꽃 다는 것을 홀로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급진적인 잉글랜드 팬들에게는 살해 협박도 당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선수가 왜 양귀비 꽃을 부착하지 않느냐? 그것은 지금부터 설명드릴 상당히 비극적인 안타까운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광용: 맥클레인 선수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사람들은 양귀비 꽃 안다는 나한테 예의가 없다고만 하지 내가 왜 양귀비 꽃을 달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늘 역사저널 그날에서 여러분들이 만나보실 이 사건, 그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신다면 아마 맥클레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일동: (박수) 감사합니다. (한준희와 이광용 퇴장)
최원정/KBS 아나운서: 362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시작은 이광용 아나운서와 한준희 해설위원이 해서 이거 스포츠 뉴스 아냐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아닙니다.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 기획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특별히 북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해볼텐데요. 오늘 오래간만에 김동환 소장님 나오셨어요. 소장님이 아일랜드와 인연이 있으시데요.
김동환/대안금융 경제연구소 소장: 제가 1999년도에 한 일년 가까이 아일랜드의 수도죠, 더블린에 금융회사에서 근무를 했어요. 당시 북아일랜드는 못 가봤어요. 가기가 어려운 동네였고,
최태성: 왜요?
김동환: 좀 위험하다는 인식이~
최원정: 20세기 격동의 시기를 북아일랜드에서 생생하게~
김동환: 1999년 12월 30일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해설: 지난(202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런던 데리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십자가를 앞세운 시민들은 50년전 그날로 걸어들어갔다.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에 대한 영국정부의 차별과 폭정에 저항하기 위해 런던 데리 시민들은 시위에 나선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시민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가 쏟아졌고 마침내 영국은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그리고 얼마 뒤 도심에 울려 퍼진 총성, 영국군이 시민을 향해 실탄을 발사한 것이다.
이시원: (시위진압 동영상) 전쟁이 일어난 것 같애요.
해설: 영국군의 총에 북아일랜드 시민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피의 일요일, 30년에 걸친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지금 피의 일요일 사건을 봤는데 우리가 1905년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 있잖아요.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사건/1905.1.22-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유혈사태), 여기 북아일랜드도 피의 일요일이에요?
이시원: 아까 그 선수가 양귀비 꽃을 가슴에 달지 않은 이유, 그 사건이 지금 이 피의 일요일 사건하고 같은 사건인 거죠?
최태성: 맞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런던 데리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사실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다 보니까 런던 데리란 이름이 불리워졌고 북아일랜드인들에게는 그냥 데리 라고 불리워집니다. (김동환씨를 향해) 아실 것 같은데요 혹시 록밴드 U2?
김동환: 당연히 알죠, 아일랜드 있을 때도 펍에서 굉장히 많이 U2의 노래 (U2-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록밴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 그중에서도 아마 Sunday Bloody Sunday (U2 ‘Sunday Bloody Sunday’-<피의 일요일> 사건을 배경으로 한 곡), 그 노래가 사실 피의 일요일~
허준: 우리 사실 학교 때 한참 밴드 유행할 때 기타 좀 치는 친구들은 다 U2의 노래를~ 2019년 U2가 첫 내한 했을 때 인기가 엄청났었죠.
최원정: (이시원씨를 향해) U2 세대 아니죠?
이시원: 저는 아니에요.
최원정: U2에 열광했어요. 노래~
최태성: 방금, 한 번 불러주세요.
최원정: U2에 열광했어요,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최태성: (U2의 찐팬 인정), 노래는 행복해 보이지만 U2의 노래 제목으로 알려진 피의 일요일 사건은 아일랜드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영상을 보니까 뭔가 오버랩 되지 않아요?
허준: 5.18이요!
최태성: 5.18과 오버랩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가 영국이 지금까지 우리를 압박하고 핍박하고 이러니까 이제는 그만 좀 해라 라고 시위를 나온 거예요. 그때 여성과 어린이들도 약 15000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어요. 여기에 영국 공수부대가 투입이 되었고 총격이 발포되어서 14명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거죠.
허준: 영국 공수부대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탄생하기도 했지만 히틀러가 가장 싫어하는 특수부대이기도 하고 (영국 공수부대-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맹활약 나치 독일군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 정말 유명하거든요. 근데 영국 공수부대는 역사적인 이 순간을 지우고 싶을 거예요. 대충만 들어봐도 과잉진압 같은데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이걸로 인해 데리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거죠.
김대륜/대구경북 과학기술원 기초학부 교수: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은 영국군이 들어왔을 때 영국군이 중립적으로 질서를 바로 잡아 줄 것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자기들에게 발포를 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고~
이시원: 저기 보면 (사진에) 어린 아이도 섞여 있어요.
김대륜: 그 14명 중에 7명이 10대였거든요. 어린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니까 더욱 큰 분노를 느낄 수 박에 없죠. 그래서 실제로 영국 정부가 조사를 해가지고 발표를 하는데 (위드게리 보고서(Widgery Report)-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영국 검찰총장이 발표한 보고서), 이게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거죠.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영국군이 한 행동은 불법 시위를 진압한 것에 불과하고~ 발포는 시위대 측에서 먼저 했기 때문에 응사를 한 것이다. 영국군의 행동은 정당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태성: 우리는 폭도를 진압한 거라는 얘기잖아요.
김대륜: 심지어 진압을 지휘했던 지휘관에게 기사 호칭을 내립니다.
일동: 아이구~
이시원: 살인을 했는데 처벌을 안받은 거잖아요. 이게 말이 되나요?
최원정: 북아일랜드 출신 선수 입장에서는 영국군을 기리는 그 양귀비 꽃을 달 수가 없죠. 그런데 처음부터 북아일랜드에서 시위가 왜 일어난 걸까요?
김대륜: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가톨릭교도들이 시위에 참여를 했던 거구요. 거기에는 역사가 깊은 차별과 핍박의 역사가 있습니다. 1970년초 까지도 가톨릭교도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영국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아요. 이를테면 고용에서도 차별을 받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 조선업인데 조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개선교도입니다. 가톨릭교도는 여기서 거의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아이들도 차별을 받습니다. 그래서 거의 공립학교에는 아이들이 가지를 못하고 가톨릭 교회가 세운 교회학교에 가야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전에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했던 것처럼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분리하는 이런 정책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죠.
최태성: 일제 강점기야?
이시원: 말이 안 돼고 상식적이지 않아요.
허준: 아이들이 갈 수 있는 학교가 근처가 아니라 저 먼데를 가야 되잖아요. 개신교 지역을 지나가야 되는 거예요. 근데 어디 가톨릭 애들이 여기를 지나가면 풍선에다 오줌과 돌을 넣어서 아이들에게 던지는 그 영상이 있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랬어요.
김대륜: 가톨릭은 어찌 보면 2등시민 비슷하게 취급을 받았어요. 1945년 이후부터 공공 임대주택을 많이 지었는데 그 공공 임대주택에도 가톨릭교도들은 거의 못들어가요. 그리고 지방선거에서도 차별을 받습니다.
최원정: 투표를 어떻게 차별해요?
김대륜: 지방선거는 독특하게도 지방에서 투표할 수 있는 투표권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느냐면 집을 소유하고 있는 여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개신교도 같은 경우는 집이 여러 채 있으면 투표를 여러 군데서 할 수 있습니다.
허준: 말도 안돼 가난한 사람은 투표권도 없어~
김대륜: 집이 없는 가톨릭 교도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죠.
이시원: 1인 1투표제는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게 지금 1970년대 유럽 이야기 맞아요?
최태성: 게다가 당시 비상권한법이란 게 있는데 (영국 비상권한법(Special Powers Act) (1922~1972)-영장 없는 수색, 기소-재판 없는 투옥 집회나 출판의 금지 등을 규정), 비상권한법 내용을 들으시면 이게 또 인권유린인 거예요. 어떤 거냐면 가톨릭교도들을 영장 없이 수색이 가능하고요, 재판없이 투옥이 가능해요.
최원정: 계엄령이네, 계엄령!
최태성: 유신조치 때 긴급조치 나왔죠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 딱 요 모습과 비슷하잖아요. 심지어는 시위를 할 때 그 앞을 지나가잖아요. 시위와 직접 관련이 없어 그런데도 그냥 너 시위대 맞지 하고 잡아가는 거예요 (시위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하는 일도 발생), 그냥 잡아가요 잡아간 다음에 조사해 보니까 시위와 관련이 없어요. 그러면 풀어줘야 될 것 아녜요. 풀어주지도 않어~
이시원: 차별이 요즘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네요. 이건 가톨릭교도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거구~
최원정: 우리는 이념 때문이었는데 여기는 지금 왜 그런 거예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김대륜: 역사가 굉장히 깊죠.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아일랜드를 문명화한다는 취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거기다가 이주를 시켰어요. 이주한 사람들은 개신교도들로 그 땅을 차지하고 지배층이 되면서 토착민들을 체계적으로 차별을 하기 시작합니다. 공직에 나갈 수 없다거나 군인이 될 수 없다거나 투표권이 없다거나 이런 여러가지 차별들을 하게 되는데 당시 북아일랜드는 개신교도가 66%가 넘고 가톨릭교도는 33%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소수죠. 그러다 보니까 더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동환: 더블린에 살 때 기억이 나는데요, 더블린 시내를 지나가다 보면 굉장히 큰 건물인데 창문이 없는 건물들이 있어요. 있었던 흔적은 있는데 창문이 없는 거예요. 제가 그때 물어봤죠 저건 뭐냐 그랬더니 식민시대 때 영국의 수탈과정에서 세금을 제대로 안 내면 일조권을 박탈한 거죠.
이시원: 세금을 못 내면 햇빛도 볼 자격이 없다는 뜻?
김동환: 북아일랜드는 가톨릭과 신교도가 섞여 살다 보니까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와 더불어서 굉장히 크게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고 봐야죠.
최원정: 아주 불안한 공존이네요.
김동환: 내가 영국에서도 일을 했고 더블린에서도 했는데 영국에서는 사람 사귀는 힘들었고 물론 좋은 사람도 있는데 사귀는 게 오래 걸렸는데 아일랜드에서는 굉장히 쉬었어요. 대한민국과 아일랜드는 역사를 공유한다는 면이 있고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처음 만나면 그냥 친해져요.
최원정: MBTI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E계열 들이고 영국 사람들은 I인거 같애요.
이시원: 거리를 두고 쉽게 친해지고 근데 계속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북아일랜드에 있는 가톨릭교도들은 진짜 억울 할 수 밖에 없어요.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영국인들 들어와서 땅 뺏고 거기다가 착취하고 독립할 기회도 뺏어 버리고 그리고 나서는 차별하고 시위했다고 잡아가고 이거 정말 억울할 일 아닌가요? 지금 제가 말하면서도 억울한데~
김대륜: 근데 가톨릭교도들은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나이가 들면 연애를 하고 연애를 하다 보면 관계가 깊어지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결혼을 일찍 해요. 결혼을 일찍 하고 가톨릭이니까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굉장히 많아요. 10명씩 되는 집들이 수두룩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 아이들이 전부 자라서 일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이시원: 계속 가난이 대물림이 되네요.
김대륜: 가난이 지속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죠.
최태성: 어쨋거나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으면서 이제 부터는 전쟁이에요. (30년간 지속된 유혈 테러), 30년간 유혈테러가 시작되는데 그 유혈테러의 중심에는 한 조직이 있었어요.
이시원: IRA?
최태성: 그렇죠, 이 IRA를 중심으로 해서 도심 곳곳에 유혈테러가 전개 되는데 특히 1979년에 유혈테러 사건은 영국인들한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시외숙부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영국여왕의 친척들하고 요트를 타고 있었는데 여기서 폭탄테러가 일어나면서 백작 포함 가족 7명이 사망하여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Lord Louis Mountbatten Captain of HNS Kelly, Admiral of the Fleet, Viceroy of India, Hero of Burma, Murdered by the IRA.
김대륜: 바로 그 점을 노린 거죠. 원래 IRA가 활동을 할 때는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교도들을 괴롭혔던 개신교도 자경집단이 있어요. (가톨릭교도에 맞선 개신교자경단), 개신교 자경단들로부터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이 사람들과 맞서서 싸우는 이러한 역할이 IRA의 역할이었는데 열심히 싸우고 테러를 일으키고 하더라도 영국에서는 주목을 못 받았어요. 이게 영국의 문제로 인식이 안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IRA가 전략을 바꾸게 됩니다. 북아일랜드가 아니라 이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본토를 쳐버리는 것이죠. 제국의 심장부를 겨누고 거기서 뭔가 큰 사건을 일으켜서 관심을 환기하는 거죠.
최태성: 이 IRA의 힘을 정착시켰던 계기, 그게 오늘 이야기한 피의 일요일, 분노가 쌓아 오르다가 거기서 죽은 유족들이 가입을 한다든지 10대 소년들이 가입을 한다든지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이시원: 들끓는 피가 유입이 되는~
김대륜: 그러니까 IRA에 가입하는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요. 거의 한 집안에 한 명은 있을 정도로요. 그러니까 아주 젊은 나이에 보통 10대 후반에 IRA에 가입을 하게 돼죠.
최원정: 북아일랜드 하면 테러~, 그 인식이 아주 강하잖아요. 소장님, 혹시 거기 계실 때 테러를 접해 본 적이 있어요?
김동환: 주변에 테러로 희생되었던 지인들을 만나기는 했어요. 북쪽으로는 벨파스트로는 안 갔어요. 남쪽에 있는 아일랜드 사람들도 방문이 꺼려지고 저는 이방인이니까 조심하게 되었죠.
최원정: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의 투쟁은 테러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해설: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는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거릿 대처/영국 총리-정치적인 살인, 폭파, 폭력이란 건 없습니다. 그건 모두 불법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투옥된 IRA 출신들은 자신들을 정치범으로 대우해 달라며 감방에서 속옷을 벗고 모포만 걸쳤다. 이어진 불결투쟁, 수감자들은 감방에서 나가기를 거부하며 본인들의 배설물을 벽에 바르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고 IRA 수감자와 협상할 의사가 없음을 거듭 밝혔다.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영국 정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또 다른 투쟁에 나선 IRA 수감자들). 이에 27살의 청년 바비 샌즈는 최후의 저항을 결심한다. 그가 택한 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이었다.
일동: 진짜 끔찍하네요.
해설: (바비 샌즈의 단식투쟁 동영상), 1981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단식투쟁은 무려 66일간 이어졌다. 1981년 5월 5일 새벽,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이후 9명의 수감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이시원: 제가 인상 깊게 봤던 영화거든요. 배우들이 열연을 해서 살가죽이 뼈에 붙는다는 말이 뭔지 알 정도로 열연을 했어요. 그걸 보고 제가 1주일간 제대로 밥을 못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 사건이 도대체 뭐길래 왜 그렇게 독립을 해야 되는지 그때 잠깐 찾아봤던 기억이 있네요. 도대체 무언데 저렇게 저 정도까지 사람이 괴롭게 죽어야 되나 그랬었거든요.
김동환: 근데 더블린 시내의 큰 거리에서 단식투쟁을 기념하고자 하는 조형물들을 많이 본 것 같애요. 아일랜드 지방 곳곳에 가면 거의 빠짐없이 단식투쟁을 기념하고자 하는 조각상을 많이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런 단식투쟁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흔적이 기억이 나고~
김대륜: 단식투쟁을 벌이게 된 계기는 영국 정부가 이른바 테러범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IRA 출신들이 범죄자가 아니고 우리를 정치범으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죠.
최태성: 맞아요, 그래서 맨 처음부터 단식투쟁이 시작되었던 게 아니고 맨 처음에는 담요투쟁이라고 해 가지고 왜 우리를 죄수 취급하느냐 우리는 죄수복 못 입는다. 담요를 입고 시작되었던 모습도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안 들어주니까 감방을 나가지 않는 거예요. 그 안에 있으면서 몸을 씻지 않고, 불결투쟁이라고 해 가지고 자신의 배설물을 벽에 뿌리고 쏟고 이런 식으로 시위를 한 거죠.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온 건데 영국 정부가 꿈쩍을 안 하니까 결국은 맨 마지막 방법 단식투쟁으로 간 거죠. 맨 처음에 단식투쟁을 이끌었던 IRA 활동가 바비 샌즈가 나오고 있는데 (사진) 단식투쟁에도 당시 마가렛 대처 총리는 꿈쩍도 안 해요.
허준: 그래서 철의 여인이라고 부른 거예요?
김대륜: 근데 단식투쟁을 하면 이 사람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어떻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니까 이때 영국 정부가 굉장히 끔찍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하면 강제로 취식을 하게 만듭니다. 그게 굉장히 충격적이고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되어 있어요. 굉장히 격렬하게 저항을 하게 돼죠.
최원정: 단식투쟁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 했을 것 같애요. 여론이 확 바뀌었을 것 같애요.
김대륜: 그래서 단식투쟁을 처음 시작했던 바비 샌즈는 감옥에서 단식투쟁하고 있는 사이에 선거에 나가게 됩니다. (영국 하원의원) 선거에 나가서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의회 의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 일들을 비롯해서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민족주의 운동이 공감을 얻는데 굉장히 크게 기여를 한 변곡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원정: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거릿 대처가 IRA 급진파 테러의 타깃이 되고 있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1984년 10월 12일 새벽 2시 54분, 영국 런던 근교의 휴양도시 브라이튼에 있는 한 호텔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진),
허준: 마사일 맞은 거야?
이광용: 호텔 방에서 폭발음이 들렸구요. 호텔 중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습니다.
최태성: 포탄 맞은 거? 미사일?
이광용: 여기서 중요한 점, 당시 이 호텔에서 행사가 있었는데요. 영국의 집권당인 보수당의 연례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보수당의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에 묵고 있었어요. 살해 이유는 북아일랜드 단식투쟁 당시 대처 총리가 대화를 거부하고 수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수로 이 테러를 감행했구요. 이 테러를 통해서 5명이 사망했고 3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시원: 마거릿 대처는 무사했나요?
이광용: 궁금하시죠, 폭탄이 설치된 곳은 이 호텔 629호였습니다. 폭발 당시에 호텔이 무너져 내렸죠. 이 폭발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처 총리는 다음날 자신이 연설할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깨어 있었어요 (폭발 직후 아수라장이 된 대처 총리의 방), 대처를 수행하던 비서 2명은 이 폭발로 사망했습니다.
이시원: 진짜 겨우 살았다.
이광용: 다음날 IRA가 이런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오늘 운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딱 한 번만 운이 좋으면 됩니다. 하지만 대처 당신은 항상 운이 좋아야 될 것입니다. Today we were unlucky, but remember we have only to be lucky once, you will have to be lucky always,
최태성: 소름이 돋네요.
최원정: 라임이 맞아서 멋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겨 들으면 굉장히 무서운 말이네요.
이시원: 맞는 말인 게 테러할 때 딱 한 번만 운이 좋으면 성공하지만 그 사람은 계속 운이 좋아야 하지요.
이광용: 웬만한 사람이면 섬찟하고 벌벌 떨고 그럴 거예요. 하지만 대처가 누굽니까? 대처를 뭐라고 부르죠?
최태성: 철의 여인!
이광용: 철의 여인 이라고 부릅니다. 마거릿 대처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예정된 당일 행사 다 했어요. 그리고 그 회의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테러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이렇게 힘주어 연설했습니다. 폭발 사건 직후에 마거릿 대처가 보여준 이 비범한 모습에 당시 영국 사람들은 큰 인상을 받게 됩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는 거죠. 마거릿 대처라는 정치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어떤 순간이 아니었을까.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분쟁, 이 분쟁으로 인해서 35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2000명 이상은 민간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발생한 부상자도 5만 명이 넘습니다. 이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도 알 수 없게 된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희생은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합니다.
해설: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조지 미첼/북아일랜드 평화협상 참여의원: 영국, 아일랜드 두 정부와 북아일랜드 정당들이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해설: 30년 분쟁이 막을 내렸다. 찬성 71.2%로 통과됐습니다. (The Northern Ireland Referendum ’98), 북아일랜드 국민들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평화를 선택했다. 벨파스트 협정이 맺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토니 블레어/영국 총리: 마침내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북아일랜드 주민들을 위한 새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해설: 협상을 성공시킨 북아일랜드의 두 정당 대표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전 세계가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축하하였다.
빌 클린턴/미국 대통령: 저는 여러분이 만들어내고 있는 평화를 믿습니다.
해설: 식민 통치와 분단, 그리고 오랜 분쟁을 겪은 북아일랜드, 힘들게 일궈낸 그들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을까.
이시원: 어떻게 보면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 때만은 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서 옳은 일을 한 것 같애요.
최태성: 맞습니다. 1990년대는 북아일랜드의 분쟁을 끝내고자 모든 정치 세력들이 만든 대타협의 모습인데 이걸 벨파스트 협정이라고 한다 (벨파스트 협정(성 금요일 협정)/1998년-아일랜드-영국-북아일랜드 8개 정당이 참여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평화의 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시원: 빌 클린턴이 아일랜드 ①편에서 아일랜드 출신이라고 배웠잖아요. 이런 거 보면은 아일랜드인들이 자기의 뿌리, 출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또 외국 나가서도 끝까지 뭔가 아일랜드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 경향이 있는 거 같애요.
김동환: 실제로 제가 거기 있을 때도 보면은 빌 클린턴이 굉장히 인기가 있었어요. 펍에 가면은 유명한 가수들 사진도 걸려 있지만 빌 클린턴의 잘 생긴 사진이~
김대륜: 북아일랜드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냐 하면 신 페인(Sinn Fein)을 어떻게 할 거냐. 협상 테이블로 받아 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예요. (신 페인-IRA의 정치 조직으로 시작된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이를테면 신 페인의 지도자들이 미국으로 가려고 여러 번 시도해요. 왜냐하면 미국에 신페인을 지지하는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서 모금도 하고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아일랜드 상황을 설명을 하고 도움을 얻으려고 하는데 문제는 비자가 안 나와요. 비자가 안 나오니까 갈 수가 없는 거죠. 입국을 계속해서 거절 당합니다. 빌 클린턴 때 와 가지고 신페인을 받아 주기 시작해요. (비자 발급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협상을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조치였습니다-빌 클린턴/前미국 대통령), 그 이전에는 뭐라고 얘기 했느냐면 너희는 IRA와 직접적인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IRA가 무기를 내려 놓지 않는 한 너희들은 협상 테이블에 올 수가 없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이제 협상 테이블에 먼저 부른 거죠. 그리고 나서 IRA가 무기를 내려놓는 문제를 이야기 하기 시작해요. 협상이 될 만한 국면에 온 것이죠.
해설: 2005.9.27 무장해제를 마친 IRA 지도부는 앞으로는 정치투쟁으로 노선을 바꿀 것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제리 아담즈/IRA정치조직 신페인 당수: IRA의 용기있는 결정은 우리가 가야할 올바른 길입니다.
김대륜: IRA의 리더였던 제리 아담스가 이제 테러가 아니라 정치 조직화하기 시작해요. 이제 영국 정부와 협상을 하기 시작하는 어떻게 보면 머리가 좋은 전략을 선택한 거죠.
허준: 그러면 분위기도 돌아섰고 거취를 달리하기 위해서 투표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김대륜: 벨파스트 협정 혹은 성금요일 협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개신교도와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가톨릭교도가 국민투표를 통해서 아일랜드와 합병을 원하게 된다 라면 그것도 받아들이겠다. 아니면 그대로 영국의 일부로 남길 원한다면 그러면 그것도 받아 들이겠다. 다만 끼어들지 않는다 이렇게 원칙을 세운거구~
최태성: 매듭을 풀기 시작했던 그 힘은 사과였던 것 같애요.
최원정: 진정한 사과가 있었어요?
최태성: 네, 토니 블레어 총리가 벨파스트 협정 1년전인 1997년에 취임을 하였는데 취임하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여기 북아일랜드였습니다. 이곳에 와 가지고 우리가 앞에서 배웠던 그 내용~, 영국에 의해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엄청난 기근 속에서 200만 명이 죽거나 이민을 떠나야 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사과합니다. 이건 정말 큰 것 아닙니까. 2010년도에는 오늘 주제였던 피의 일요일 사건, 이것도 영국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를 합니다. 진심 어린 이 사과를 통해서 모든 매듭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던 거예요.
최원정: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 사과하는 모습 볼까요?
데이비드 캐머런/영국 총리(2010.6.15): 오늘 북아일랜드부 장관이 새빌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1972년 1월 30일에 일어난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보고서의 결론은 읽기에도 충격적이고 말로 옮기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부당하고 또 부당한 행위였습니다.
광장에서 발표를 듣는 북아일랜드 주민들: 38년 만에 이뤄진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에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열열히 환호하고 지지하였다.
캐머런: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여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북아일랜드 주민들: 일제히 두 손을 번쩍 들고 박수와 환호!
사과를 접한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심경은 어땠을까?------캐머런 총리의 사과에 박수로 화답한 북아일랜드 시민들-----
최원정: 피해자들이 박수를 치잖아요. 그러면 가해자의 사과는 성공했다고 봐야 되는 거죠?
이시원: 유가족의 恨이 얼만큼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제3자가 본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뉘우친 것 같애요.
김대륜: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잘못했다 라고 얼마나 단순해요. We were sorry, I am sorry 미안하다 이거 한 마디인데 이것 한 마디를 안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계속 역사가 뒤엉키고 계속해서 갈등이 지속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최원정: 벨파스트 협정으로 30년 만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최근에 또 북아일랜드에서 굉장히 기류가 심상치 않아요.
허준: 왜 또~!
최태성: 이제, 그만 갑시다.
최원정: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오늘 특별한 분이 이 사실을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누굴까요?
------------윤수영/아나운서: 안녕하십니까?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윤수영입니다. 오늘은 브렉시트 후폭풍을 맞고 있는 영국 북아일랜드의 현지 소식을 준비했습니다. 작년 4월, 영국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모습인데요. 시위대가 버스를 막아서더니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버스는 전소되고 말았는데요. 이런 성난 군중들의 폭력 시위는 도시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경찰 차량에도 화염병을 던져서 주민 수십 명이 다치기도 했죠. 이번 폭력사태를 주도한 건 북아일랜드의 친영국계 신교도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친아일랜드계 주민들을 찾아가서 폭력을 행사하였는데요. 지난 2020년 12월 31일 밤 11시, 영국이 유럽연합 (EU)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다시 불거진 겁니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영국과 유럽연합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유럽연합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나라인 북아일랜드와 영국 본토 사이에 장벽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물론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이지만 아일랜드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특수성을 고려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친영국계 신교도들은 영국과의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데이비드 맥내리/친영국계 주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화가 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은 유럽의 계략이고, 저의 영국정신을 뺏어가고 있습니다.
윤수영: 지난 1998년 벨파스트 평화협정 이후 북아일랜드에는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 영국의 브렉시트로 북아일랜드의 뿌리낖은 갈등이 재점화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블렉시트와 북아일랜드 문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차고 재미있는 국제시사 프로그램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을 아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지금 윤수영이었습니다.
허준: 이걸 우리 때문에 만든 거예요?
최원정: 윤수영 아나운서가 북아일랜드에서 요즘 테러가 발생하고 있는데 자세하게 소상하게 알려 주었어요.
최태성: 블렉시트란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블렉시트의 뜻? 무엇과 무엇의 합성어입니까?
이시원: Britain과 Exit 의 합성어!
최태성: 맞습니다. Britain은 영국이잖아요. Exit는 탈퇴를 의미하는건데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한다 에서 나온건데 블렉세트에 의해서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버리니까 거기 남아 있는 북아일랜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이제 까지는 어떻게 보면 IRA가 굥격하는 주체였는데 이제는 바뀐 거예요. 그 공격 주체가 영국계 개신교도들이 공격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시원: 나 영국이랑 떨어지기 싫어~ 나도 데려가~ 이런 느낌~
김동환: 그 당시에 북아일랜드 문제 때문에 지연이 된 거거든요. 사실 북아일랜드는 영국이잖아요. 그런데 블렉시트란 건 영국이란 나라가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온 거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아일랜드란 섬에 있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이 생겨요. 거기에 가보시면 그냥 한 마을이에요. 그냥 왔다 갔다 하는 Welcome to Northern Ireland 그러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그렇게 힘들게 투쟁을 해왔던 게 어쩌면 저것 때문에 다시 장벽이 세워질 수 있거든요. 골치 아픈거예요. 반대로 북아일랜드(EU잔류)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에서 뭘 수입할 시는 통관과 검열이 필요해요. EU 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북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사람들은 엄청 손해 봅니다. 저기에 살고 있는 영국계 개신교도들이 시위를 하고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최태성: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는 영국계 시민들은 영국이 우릴 버린 거야.
허준: 여기 생긴 모양은 차 타고 가는데 그냥 획~ 지나가는 느낌이에요.
김대륜: 문제는 뭐냐면 아일랜드 경제와 북아일랜드 경제가 거의 통합되어 있거든요. 만약에 거기에 경계선이 생기고 사람이나 물자가 이동하지 못하게 되면 북아일랜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이시원: 쓸데 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경계선 위에 집이 지어져 있나요?
최원정: 이게 언제 정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갈등을 지켜 봐야 되는 거에요?
최태성; 난 정리가 된 줄 알았는데~
김대륜: 북아일랜드에 있는 친영국계 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영국이 우리를 버렸고 아일랜드로 팔아넘기는 거구나. 우리가 EU를 떠나고 싶은데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구나 해서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영국이란 나라가 지금 대단히 복잡해요. 왜냐면 북아일랜드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워낙 블렉시트를 반대 했는데 현재 분리-독립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문제가 남아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계속해서 이게 문제가 될 것입니다.
김동환: 지난 5월 5일 북아일랜드에 총선이 있었죠. 신페인당이 다수당이 되었거든요. 공약사항 중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합병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5년 안에 국민투표에 부쳐서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찬성하는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더 많다면 아일랜드로 통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허준: 북아일랜드에는 영국계 개신교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 상황이 아까와 딱 반대로 돌아가잖아요. 우리는 싫다 라고 또 테러를 하면 어떻게 해요?
이시원: 그 전까지 IRA가 있었듯이 북아일랜드에 영국계도 새로운 단체를 만들 수 있잖아요.
최원정: 지금 혼란이 그 상황이잖아요.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는 최근의 뉴스를 확인하였습니다. 머리가 더 복잡해 지네~ 식민-전쟁-테러로 점철된 아일랜드의 역사를 3주간 봤는데 굉장히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더 큰 숙제가 있다는 게~
이시원; 유라시아의 양 끝에 있는 아일랜드와 대한민국, 이렇게 많이 닮아 있는 역사가 있었다니 3주간 배우면서 깜짝 깜짝 놀랐어요.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냐가 우리한테도 참고가 될 것 같고 양쪽 끝에서 매듭을 잘 짓고 미래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허준: 많은 분들이 여행을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가장 친해지기 쉬운 민족을 발견했습니다.
최원정: 아까 아일랜드라고~
허준: 아일랜드로 가자~ 달려가면서 얘기를 하다가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었다 저~저~ 영국 사람들이 말야 하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야~ 애들아 이리와 봐~ 여기 멋진 외국 친구를 만났어~
김대륜: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쉽게 실타래가 풀릴 것 같지 않은데 일단 한 발을 뗀 셈이거든요. 한 발을 떼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보상이나 어떤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 협상을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되고 그리고 과거와 솔직하게 대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되고 진심 어린 사과로 일단 시작을 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생긴다 라고 할 수가 있구요. 이것은 남북관계나 한일관계나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아일랜드와 영국의 사례를 들여다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원정: 다음 시간에는 세계문화유산 아시아 편으로 인사를 드릴텐데 첫번은 일본 교토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2회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 기획 ③ 식민지 & 분단, 북아일랜드의 눈물에서 정리).
① 2022년 4월 2일 새벽, 2022 카타르 월드컵 (FIFA World Cup Qatar 2022) 본선 조 추첨 결과가 공개됐다. 바로 E조에 독일과 스페인이 들어가 있었다. 세번째 국가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모로코 세 나라였다. 결과는 일본, 대한민국은 H조에 속해서 월드컵을 치르게 됐다. Group H-포르투갈 (8위), 가나 (60위), 우루과이 (13위), 대한민국 (29위), 포르투갈은 2002 한일 월드컵 조별 리그 3차전, 한국이 포르투갈전에서 이겨 16강 진출, 한국팀에는 손흥민이 포르투갈팀에는 호날두가 있다. 두 선수의 활약에 기대. 영국이란 나라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네 나라의 연합국가다. 원래 한 국가에 한 팀이 나오는게 맞는 데 영국에서는 네 팀이 나온다. 영국은 무려 1863년에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결성되었다. FIFA(국제축구연맹)는 41년 후 1904년에 결성되었다. 영국은 축구 종가에 해당, 피파는 영국에 한해서 4개의 축구협회와 4개의 팀을 인정해 주고 있다. 웨일스와 잉글랜드는 1536년에 합병,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국기를 3단 합체시키면 유니온 잭이 된다.
②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에 대한 영국정부의 차별과 폭정에 저항하기 위해 런던 데리 시민들은 시위에 나선다. 영국정부는 시민들을 폭도로 간주하고 강경 진압,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가 쏟아졌고 영국은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얼마 뒤 도심에 울려 퍼진 총성, 영국군이 시민을 향해 실탄을 발사한 것이다.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영국이 오랫동안 우리를 핍박하니까 이제는 그만 좀 해라. 그런데 영국군의 총에 북아일랜드 시민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14명 중에 7명이 10대였다. 어린 아이들이 죽었으니 더욱 분노를 느꼈다. 피의 일요일, 30년에 걸친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시위를 한 사람들은 영국군이 중립적으로 질서를 바로 잡아 줄 것으로 기대했다. 과잉진압이었다. 영국정부 조사도 거짓으로 더욱 분노케 했다. 영국군이 한 행동은 불법 시위를 진압한 것에 불과하고 발포는 시위대가 먼저 했다고. 심지어 진압을 지휘했던 지휘관은 기사 호칭을 받았다.
③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가톨릭교도들의 시위에는 깊은 역사적 차별과 핍박이 있다. 1970년초 까지도 가톨릭교도들은 여러 면에서 영국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고용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북아일랜드에서 조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개선교도다. 가톨릭교도는 여기서 거의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공립학교에는 아이들이 거의 가지를 못하고 가톨릭 교회가 세운 교회학교에 가야 한다. 예전에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했던 것처럼,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분리하는 정책이 시작이 되었다. 가톨릭교도 아이들이 개신교 지역을 지나가는데 풍선에다 오줌과 돌을 넣어서 아이들에게 던지곤 했다. 충격! 가톨릭은 2등시민 취급을 받았다. 1945년 이후부터 공공 임대주택도 가톨릭교도들은 거의 못들어갔다. 지방선거에서도. 집이 없는 가톨릭 교도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집이 여러 채 있는 개신교도는 투표를 여러 군데서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비상권한법이란 게 있었다. 가톨릭교도들을 영장 없이 수색이 가능하다, 재판없이 투옥이 가능하다. 유신조치 때 긴급조치였다. 심지어 시위를 할 때 직접 관련이 없어도 그냥 잡아갔다. 시위와 관련이 없으면 풀어줘야 되는데 풀어주지도 않았다. 가톨릭교도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였다.
④ 16세기 크롬웰 시대에 가톨릭 아일랜드를 문명화한다는 취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이주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고 지배층이 되면서 토착민들을 체계적으로 차별하였다. 공직에 나갈 수 없다거나 군인이 될 수 없다거나 투표권이 없다거나 여러가지 차별들을 하는데 당시 북아일랜드에는 개신교도가 66%가 넘고 가톨릭교도는 33% 밖에 안 되었다. 가톨릭은 소수라 더 핍박을 받았다. 식민시대 때 세금을 제대로 안 내면 일조권을 박탈당하여 창문을 봉해 버렸다. 북아일랜드에 있는 가톨릭교도들은 진짜 억울 할 수 밖에 없다.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영국인들 들어와서 땅 뺏고 착취하고 독립할 기회도 뺏어가 버렸다. 가톨릭교도들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 아이가 굉장히 많다. 10명씩 되는 집들이 수두룩하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일자리를 못 잡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고 계속 가난이 대물림 되는 사회적 구조였다. 결국은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으면서 30년간 유혈테러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그 테러의 중심에는 IRA라는 조직이 있었다.
⑤ IRA는 도심 곳곳에서 유혈테러를 전개했다, 특히 1979년에 유혈테러 사건은 영국인들한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시외숙부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영국여왕의 친척들하고 요트를 타고 있었는데 여기서 폭탄테러가 일어나면서 백작 포함 가족 7명이 사망하였다. 북아일랜드 개신교 자경집단이 가톨릭교도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IRA는 자경단들로부터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자경집단과 맞서서 싸우는 역할을 열심히 하고 테러를 일으키더라도 영국에서는 주목을 못 받았다. 영국의 문제로 인식이 안 되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IRA가 전략을 바꾸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본토를 치는 것이다. 제국의 심장부를 때려서 큰 사건을 일으켜서 관심을 환기하는 거였다. 이 IRA의 힘을 장착시켰던 계기는 피의 일요일에서 죽은 유족들이 가입을 한다든지 10대 소년들이 가입을 한다든지 IRA에 가입하는 숫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젊은 나이에 보통 10대 후반에 IRA에 가입을 하게 됐다.
⑥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는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할 수 없다. 투옥된 IRA 출신들은 정치범으로 대우해 달라며 감방에서 속옷을 벗고 모포만 걸쳤다. 이어진 불결투쟁, 수감자들은 감방에서 나가기를 거부하며 본인들의 배설물을 벽에 바르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고 IRA 수감자와 협상할 의사가 없음을 거듭 밝혔다.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영국 정부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에 27살의 청년 바비 샌즈는 최후의 저항을 결심한다. 그가 택한 건 단식투쟁이었다. 1981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단식투쟁은 66일간 이어졌다. 1981년 5월 5일 새벽,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이후 9명의 수감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⑦ 처음부터 단식투쟁이 아니었고 담요투쟁으로 우리를 죄수 취급하지 마라, 죄수복 못 입는다. 담요를 걸쳤다. 안 들어주니까 감방 안에서 몸을 씻지도 않고, 불결투쟁으로 자신의 배설물을 벽에 뿌리고 쏟는 시위를 하였다. 극한상황까지 온 건데 영국 정부가 꿈쩍을 안 하니까 맨 마지막 방법 단식투쟁이었다. IRA 활동가 바비 샌즈의 단식투쟁에도 마가렛 대처는 꿈쩍도 안 했다. 근데 단식투쟁에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니까 영국 정부가 강제로 취식을 하게 하였다. 충격적이고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다. 바비 샌즈는 감옥에서 선거에 나가서 영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인기를 끌었다.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민족주의 운동이 공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거릿 대처가 IRA 급진파 테러의 타깃이 되고 있었다.
⑧ 1984년 10월 12일 새벽 2시 54분, 영국 런던 근교의 휴양도시 브라이튼의 한 호텔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영국의 집권당인 보수당의 연례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보수당의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에 묵고 있었다. 테러 이유는 단식투쟁에도 대처가 대화를 거부하여 수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 호텔테러로 5명이 사망했고 31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탄이 설치된 곳은 이 호텔 629호였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대처 총리는 다음날 자신이 연설할 원고를 작성하려고 깨어 있었다, 대처를 수행하던 비서 2명은 이 폭발로 사망했다. 대처는 겨우 살았다. 다음날 IRA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오늘 운이 나빴다. 우리는 딱 한 번만 운이 좋으면 된다. 하지만 대처 당신은 항상 운이 좋아야 될 것이다. 대처를 철의 여인 이라고 부른다. 대처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예정된 당일 행사 다 했다. 그리고 그 회의 자리에서 얘기했다. “테러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힘주어 연설했다. 폭발 사건 직후에 대처가 보여준 이 비범한 모습에 당시 영국 사람들은 큰 인상을 받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분쟁으로 35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2000명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부상자도 5만 명이 넘는다. 이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도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희생은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⑨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영국, 아일랜드 두 정부와 북아일랜드 정당들이 합의에 도달했다. 북아일랜드는 국민투표로 벨파스트 협정을 찬성 71.2%로 통과시켰다. 30년 분쟁이 막을 내렸다. 북아일랜드 국민들은 평화를 선택했다. 전 세계가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축하하였다. 식민 통치와 분단, 오랜 분쟁을 겪은 북아일랜드, 힘들게 일궈낸 그들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을까.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신 페인(Sinn Fein)을 어떻게 할 거냐. 협상 테이블로 받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신 페인은 IRA의 정치 조직으로 시작된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신 페인의 지도자들이 미국으로 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미국에 신페인을 지지하는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거기서 모금도 하고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아일랜드 상황을 설명을 하고 도움을 얻고 싶은데 비자가 안 나왔다. 갈 수가 없다. 계속해서 거절 당했다. 빌 클린턴 때 신페인을 받아 주었다. 협상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 IRA가 무기를 내려 놓지 않는 신페인은 협상 테이블에 올 수가 없다. 2005.9.27 IRA 지도부는 무장해제를 하고 정치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⑩ 벨파스트 협정의 중요한 원칙은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국민투표를 통해서 아일랜드와 합병을 원하게 된다 라면 그것도 받아들이겠다. 아니면 그대로 영국의 일부로 남길 원한다면 그것도 받아 들이겠다. 다만 끼어들지 않는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벨파스트 협정 1년전인 1997년에 취임을 하였는데 취임하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북아일랜드였다. 영국에 의해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엄청난 기근 속에서 200만 명이 죽거나 이민을 떠나야 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이건 큰 것이다. 2010년도에는 오늘 주제였던 피의 일요일 사건, 이것도 영국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를 하였다.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서 모든 매듭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매듭을 풀기 시작했던 그 힘은 사과였다.
⑪ 데이비드 캐머런/영국 총리(2010.6.15): 오늘 북아일랜드부 장관이 새빌 보고서를 제출했다. 1972년 1월 30일에 일어난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읽기에도 충격적이고 말로 옮기기도 힘들 정도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부당하고 또 부당한 행위였다.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여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광장에서 발표를 듣는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38년 만에 이뤄진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에 열열히 환호하고 지지하였다.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일제히 두 손을 번쩍 들고 박수와 환호!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잘못했다 아주 단순하다. We were sorry, I am sorry 미안하다 이 한 마디인데 이 한 마디를 안 하니까 계속 역사가 뒤엉키고 갈등이 지속되었다.
⑫ 벨파스트 협정으로 30년 만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최근에 북아일랜드에서 기류가 심상치 않다. 작년 4월, 영국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시위대가 버스를 막아서더니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질렀다. 버스는 전소되고 말았다. 성난 군중들의 폭력 시위는 도시 곳곳에서 일어났다. 경찰 차량에도 화염병을 던져서 주민 수십 명이 다쳤다. 북아일랜드의 친영국계 신교도 청년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친아일랜드계 주민들을 찾아가서 폭력을 행사하였다. 지난 2020년 12월 31일 밤 11시, 영국이 유럽연합 (EU)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영국과 유럽연합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유럽연합에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같은 나라인 북아일랜드와 영국 본토 사이에 장벽이 생긴다. 물론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이지만 아일랜드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특수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아일랜드의 친영국계 신교도들은 영국과의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⑬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버리니까 북아일랜드는 어떻게 되는 거야. 북아일랜드는 영국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이 생긴다. 한 마을이고 그냥 왔다 갔다 하며 살아왔는데 장벽이 세워질 수 있다. 골치 아프다. 반대로 북아일랜드(EU잔류)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에서 뭘 수입할 시는 통관과 검열이 필요하다. EU 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북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사람들은 엄청 손해다. 영국계 개신교도들이 시위를 하고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아일랜드 경제와 북아일랜드 경제가 거의 통합되어 있다. 만약에 거기에 경계선이 생기고 사람이나 물자가 이동하지 못하게 되면 북아일랜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북아일랜드 친영국계 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영국이 우리를 버렸고 아일랜드로 팔아넘겼다. 우리가 EU를 떠나고 싶은데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영국이란 나라가 지금 대단히 복잡하다. 북아일랜드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블렉시트를 반대)는 현재 분리-독립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
⑭ 지난(2022년) 5월 5일 북아일랜드에 총선이 있었다. 신페인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공약사항 중에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합병 찬반 국민투표를 5년 안에 물어보겠다. 찬성하는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더 많다면 아일랜드로 통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유라시아의 양 끝에 있는 아일랜드와 대한민국, 많이 닮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느냐가 우리한테도 참고가 될 것 같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를 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실타래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데 일단 한 발을 뗀 셈이다.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의 협상 태도와 과거를 솔직하게 대면하는 자세와 진심 어린 사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나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아일랜드와 영국의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