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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32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대림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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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윌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축구 경기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매 게임 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끄는 최전방 공격수들보다도 멋져 보이지만, 요즘 와서는 중원에서 허리 역할을 하며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미드필더들에게도 눈길이 갑니다.
수비 때는 압박의 중심에 서고, 공격 때는 기가 막힌 킬 패스 한방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기 교회 건설을 위한 불같은 열정의 선교사요 최전방 공격수였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교회 역사의 허리 부분을 견고케 한 활화산같은 선교사, 멋진 미드필더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을 두고 칭송이 대단합니다. 그분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만 해도 여러가지입니다. ‘선교의 수호자’,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 등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을 기억할 때마다 우선 드는 느낌은 ‘경이로움’입니다. 500여년전 대양을 건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선박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극동지방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던 목숨을 건 선교여행을 수도 없이 계속하셨습니다.
1506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1537년 베네치아에서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요청으로 인도 선교사로 출발합니다. 13개월 만에 인도령 고아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545년에는 말라카로 갔고, 1546년에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 지방으로 갔습니다. 다시 말라카로 돌아온 그는 한 일본인을 만나 일본에 대한 상황을 소개받고 1549년 일본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각고의 어려움을 겪으며 2년 반 동안 일본에서 선교하던 그는 또 다른 나라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선교하다 중병에 걸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잘 알 수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잘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헌신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적인 고통이나 십자가들, 그들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고 관대하게 견뎌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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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똑똑한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한다>
1939년 8월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비밀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러시아는 폴란드의 등에 칼을 꽂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핀란드 침략 실패로 심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해진 독일과 협력하면 굳이 독일과도 싸울 필요가 없고 협력하여 얻은 소득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히틀러도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할 힘을 얻는 조약이어서 좋았고, 또 전쟁을 할 때 동쪽과 서쪽의 두 개 전선을 다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기에 스탈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계략은 러시아까지 집어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약을 맺은 2년 뒤 히틀러는 러시아를 침공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러시아 국민 중 절반은 나치 점령에 고통 받았으며, 러시아의 제조업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악마와 거래한 끔찍한 대가였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똑똑한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끝까지 그 사람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다음엔 자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면 남는 것은 이웃은 물론이요 자기멸망뿐입니다. 악마는 ‘너 자신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라.’고 속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철부지는 자신의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철부지 어린이가 부모의 유산을 먼저 챙기려 하겠습니까? 철부지는 철부지라 욕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 내용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철부지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온 당신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이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다음 내용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만이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사제와 레위인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 지라도 복음을 믿는 철부지 어린이인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쇼핑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휠체어를 탄 청년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고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청년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어머니는 아이에게 장애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흉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청년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와, 정말 멋진 모자네요."
철부지 아이들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부유하게 하거나 높이지 않습니다. 오직 똑똑한 어른들만이 그렇게 합니다. 철부지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먼저 봅니다.
자신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이웃의 행복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철부지라 부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똑똑한 악마가 될 것인지, 철부지 하느님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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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21-24 :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을 물려받은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께 모든 계시를 전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얄팍한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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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시기에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주님을 수동적으로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분의 오심은 우리에게 은총이 아니라 단죄의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강력한 정화를 통한 준비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정화는 주님과 참된 만남을 위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을 올바로 정화하지 못한다면 이런 수고에 부담을 느끼고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분과 애정이 담긴 만남에 마음을 열 때 정화의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기다림이 곧 정화입니다. 기다림은 바라는 것을 아직 얻지 못하였음을 뜻하므로 이따금 노력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위로를 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면 이내 불평하고 맙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정화할 수 없고 주님께서만 정화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오시기를 열렬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느 모로 우리를 정화하시려고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괴로워하는 종을 위하여 주님의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을 취하시고 그분 친히 개입하는 방식을 결정하십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이라도 해 주시면 고통받는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정한 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개입하시기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더욱더 충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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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림 시기는 희망의 시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의 신탁은 다윗의 자손, 한 아이(“임마누엘”)의 탄생을 예언하였던 이사야서 7장, 9장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의와 폭력의 정권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종살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라 죽은 그루터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언자가 꽃잎과 열매 맺힌 나무로 나타내는 풍요로운 미래의 희망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바로 그때 예언이 따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말라 죽은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아납니다. 아직 작은 새싹이지만, 주님의 영이 주는 생명력은 왕성하며 지혜와 용맹으로 충만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일곱 영은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고, 힘없는 이들과 가련한 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일치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도와줍니다.
힘없는 이들을 위한 사랑은 온 공동체의 정의와 민족들 사이에서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민족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일구어 내는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은 영광스러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한 사랑을 나타내는 겸손하고 단순하며 전적으로 다른 이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 모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놓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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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철부지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잘 되었을 때,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로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잘나고 유능해서 모든 일이 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감사기도를 바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성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입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감사기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루카 18,11) 교만한 사람은 교만 때문에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혀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경우에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 자체도 죄가 됩니다.) 알아보지 못하니까 실천하지도 않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을 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교만에서 여러 가지 죄들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잘 되었을 때,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믿고서,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감사기도가 진짜 감사기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총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가 얻은 것들을 하느님께 바치거나, 또는 이웃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말씀은, 교만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감추셔서 그들이 못 보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들 자신들이 그 뜻을 안 보려고 해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구원받는다고 착각하지만, 그 착각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실행하는 것을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한 사람들만을 편애하시는 것은 아닌데, 겸손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온전히 받게 됩니다. (사랑 실천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이기심 때문에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데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만이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하고 참된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요한 6,68)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앞장서 걸어가신 ‘구원의 길’은, 겸손과 사랑의 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과 사랑 없는 이기심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려면, 스스로 자기를 낮춰야 하고, 이기심을 버려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을 예수님께서 아무렇게나 당신 마음대로 뽑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 또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게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과 이기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습니다.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안 듣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심판대에 섰을 때에 “들은 적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소리들, 즉 구원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끄는 소리들이 우리를 속여서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유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듣기 좋은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도 예수님에게서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이 말씀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는데, 너희는 지금 메시아를 만나서 함께 살고 있으니 복된 사람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메시아를 만나서 함께 사는 그 복(행복)을 끝까지 잘 누릴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라는 훈계도 들어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가 누리던 행복을 스스로 버린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행복도 시작되었습니다. 그 행복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고, 그리고 영원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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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의 미사를 하다보면 아이들의 세대별 특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일단 초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엄청 크게 부릅니다.
주의는 매우 산만하고 그래서 다소 시끄럽기도 하지만 반주에 맞춰 크게 노래를 부르고 사제가 입,퇴장을 할 때에 혹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에는 손을 뻗어 하이 파이브를 해달라고 난리입니다. 저는 초등부 강론을 인형극으로 하는데, 이 인형극의 주인공은 야고보입니다. 강론대에 서서, “얘들아 그럼 오늘도 야고보를 불러볼까?” 물어보면 아이들은 목청이 찢어져라 야고보의 이름을 외칩니다. 반면 중고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매우 조용하고 주의력도 있는 것 같은데 반주가 나와도 크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제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찾기 힘듭니다.
인형극을 할 엄두는 내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춰서 강론을 하려 애쓰지만 반응이 없어서 퍽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는, 초등부 아이들 못지않게 중고등부 아이들 역시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차차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 뛸 뜻이 기쁜 것도 사실입니다. 농담을 하며 이리저리 건드려보면, 참다참다 “옛다” 하는 식으로 웃어보이곤 하는데 그 미소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을 비교해 보면 이 나이대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초등부 아이들은 본인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부모님과 같은 어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면 중고등부 학생들, 특히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주관이 뚜렷하며 자신이 독립적으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어른들보다 자신과 친구들을 더욱 믿는 편이고 결국 이 아이들의 중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표현이 제게는 매우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는 표현은 쉽게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결함을 갖고 실수도 하지만, 성실히 예수님을 따르며 철부지처럼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제자들이 실로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결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자기 스스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끄심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자신이 주축이 되어 욕심대로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작고 어린 존재이며 철부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버지이며 스승이신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우리는 서서히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우리의 몸에도 매우 자연히 체득되어 있습니다. 성인들 역시 흔히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들보다는 겸손한 사람, 자신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좋아하고 선호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려 애쓰게 되고, 남들 앞에서 더 나아보이고자 스스로를 학대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사람의 지혜와 슬기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자기를 내세우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어른들의 가르침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따릅니다. 이렇게 어린이와 같이 주님을 겸손되이 따를 때 더 큰 지혜와 슬기를 우리는 습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고백하며,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실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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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
가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앞에서 위대함과 무색함의 두 측면을 보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어리석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은 자기 논리와 주장이 확실하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가는 지식층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의 벽을 무안하게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동막골 사람들이 안에 평화와 친교가 있었고 나눔이 있었고 용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단순한 삶이 분노와 적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내고 그 상처를 치유시키면서 새로운 인간, 사랑하는 인간,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고 그들 안에 참된 평화와 화해를 찾아 주는 것은 힘도 아니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단순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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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기도,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짜여져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뻐하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이유를 복음서의 앞선 부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말하는 "바로 그때"(21절)란 예수님으로부터 둘씩 짝지어 파견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 각자의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를 드리던 때였다.(루카 10,1-20)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악마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였던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있었다.(17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보다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19절)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곳에 있다. 예수님의 기쁨은 우선 당신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곧 예수께서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심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오늘 독서가 선포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주님을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이사 11,1-5)
이사야는 장차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메시아의 통치는 곧 하느님 성령의 일곱 가지 정신에 기초를 두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느님 성령의 일곱 가지 정신은 우리가 "성령칠은"이라고 부르는 선물이다:
① 슬기(sapientia/wisdom),
② 통달(intellectus/understanding),
③ 의견(prudentia/counsel),
④ 굳셈(fortitudo/power),
⑤ 지식(scientia/knowledge),
⑥ 효경(respectus/respect),
⑦ 두려움(timor/fear)
이사야는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께서는 정의와 성실로써, 자비와 평화로써 만물이 서로 화해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의 세상을 세우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만물이 화해하는 조화와 질서의 새로운 세상은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이 머리에서 짜내 만든 지혜나 책에서 얻어낸 똑똑함이 아닌, 그래서 안하무인이요 오만하며 근시안적이요 자만함이 아닌,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 슬기와 효경 같은 하느님의 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시와 세상구원적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예수는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분이며, 이미 오셨고, 또 오실 분이시다. 우리도 오늘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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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감추어진 것>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감추어진 것>
내려옴으로써 올라감
물러섬으로써 나아감
비움으로써 채움
나눔으로써 얻음
줌으로써 가짐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
버림받음으로써 받아들여짐
침묵으로써 외침
아픔으로써 나음
모름으로써 앎
약함으로써 강함
짐으로써 이김
섬김으로써 다스림
사라짐으로써 있음
찰나의 죽음으로써 영원히 삶
아무 것도 아님으로써 모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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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나의 아버지는….>
어느 글을 읽다가, 이런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소위 미혼모 상태에서 자신을 낳았기에 많은 사람의 비난을 들었고, 그 사람도 학교에서 외톨이가 되어 늘 혼자였습니다.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볼 때면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저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지?’라는 조롱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열두 살 때, 그 마을에 새로운 신부님이 오시자, 사람들은 그 신부님의 말씀이 뛰어나다고 하여, 그 소년도 그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신부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흠뻑 빠져들었으나, 교회에 갈 때도 사람들을 의식하여 늦게 몰래 들어갔다가 말씀만 듣고 슬며시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그 소년이 미사에 참례하고 조금 늦게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넌 누구니? 네 아버님이 어느 분이시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신부님이셨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잠깐만, 네 얼굴을 보니 너를 닮은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
저도 고운님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 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잠깐만, 고운님들의 얼굴을 보니 고운님들을 닮은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습니다. 고운님들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요?” 이렇게 하느님은 고운님들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 즐거워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또한, 아버지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아들이신 당신에게만 있음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로 부르며 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주시게 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행복은 바로 “마카리오스”입니다. 즉 ‘복’ ‘행복’ ‘행복하여라.’ 즉, ‘그 행복은 하느님이 누리는 기쁨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축복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구약에 이사야서 4장 5-6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실 심판 때에 매 순간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이들에게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외칩니다.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연기와 광채를 만들어 주시리라.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두레박은 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잠깐만요, 고운님들의 얼굴을 보니 고운님들을 닮은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습니다. 고운님들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요?”
이렇게 하느님은 고운님들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은혜는 은혜를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아멘.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운님들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하시겠습니까? 오늘 일어나서 아침 거울을 볼 때, 내 모습이 밝았습니까? 따뜻했습니까? 아니면 내 모습에서 찬 바람이 불거나, 내 눈 속에 미움이 박혀있지는 않았습니까? 옛말에 ‘일소일소일로일로(一笑一少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웃으면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늙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당신이 웃을 때, 당신이 미소 지을 때, 당신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즉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잠깐만요, 고운님들의 얼굴을 보니 고운님들을 닮은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습니다. 고운님들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요?”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를 믿고, 고운님들이 매 순간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고, 감사하면서 감사할 일이 생기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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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4)
♧♧ 시편 65편 2절….
"하느님, 시온에서 당신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당신께 서원이 채워집니다."
* 시온에서 당신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성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땅합니다.’ 라는 말은 ‘기다리다.’ ‘잠잠하다.’ ‘침묵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소에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레위 인들이 어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와 하느님께 찬양드릴 수 있기를 기다리듯,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께 찬양 드리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당신께 서원이 채워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다윗이 이전에 하느님께 서원했던 감사 제사를 이제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 시편 65편 3절….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 당신께 당신께로 모든 사람이 모여 오니..."
*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 당신께...
다윗이 자신의 체험적 신앙에 입각해 토로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하느님께 회개 기도할 때, 또는 숱한 대적들에게 위협당하는 때에 하느님께 부르짖어 응답받았던 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간구하는 기도를 소홀히 여기시지 않고 소중히 들으시는 분임을 이처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당신께로 모든 사람이 모여 오니...
어떤 이는 ‘모든 사람...’을 엄격하게 ‘이스라엘 모든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65편 전체의 분위기로 볼 때(6절, 9절) 이는 보다 더 보편적인 뜻으로 육체의 혈통이나 종족, 신분의 구별 없이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선택하신 세상 만민중의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시편 22편 28, 86편 9절. 이사야서 66장 23절. 예레미야서 16장 19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신약 시대에 세상 만민 중에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와 기도와 제사(예배)로 친교를 나누게 됨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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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만년필을 사용하는 저를 보고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요즘에 불편함이 많이 있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것도 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 현재까지 컴퓨터를 가까이하는 저를 잘 아시는 분은 컴퓨터에 직접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제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에 직접 입력하지 않습니다. 노트에 글을 쓰는데, 그것도 불편함이 많은 만년필로 씁니다. 사실 컴퓨터에 직접 글을 쓰면 시간 절약을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의 타이핑 속도는 학창시절에 1분에 800타 이상을 쳤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컴퓨터에 직접 글을 입력하는 것이 훨씬 더 빠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절약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이에 글을 적을 때는 속도가 빠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천천히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하면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에 직접 입력하면 빨리 생각하다 보니 대충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책에서 “하느님은 잔꾀를 쓰는 사람보다 바보같이 미련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힘들고 어려운 길도 피하지 않는 모습에서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신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빨리빨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더 깊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이와 만년필을 선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쁨에 넘치고 감격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바친 찬미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발견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즉, 철부지 같은 제자들이 많은 사람을 도운 일과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깨닫게 되었음에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하지 못한 일들이 철부지와 같이 부족한 제자들 안에서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쫓는 우리입니다. 세상은 많은 부와 명예를 간직하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혜는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 푹 머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함을 간직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이러한 사람 곁에서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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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혜보다 주님의 지혜를....}
아스피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스피린은 진통제인 동시에 혈소판의 응집을 억제하는 작용을 해서 심혈관 질환 발병률을 낮추는데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요.
그래서 이 약이 발명된 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오늘날까지 매년 4만 톤 넘게 소비됩니다. 그렇다면 이 약을 발명한 사람은 엄청난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누가 발명한 지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 약을 발명한 사람은 독일의 펠릭스 호프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칭찬보다 비난을 받으면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발명한 ‘헤로인’이라는 약 때문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머릿속에 떠올린 마약이 맞습니다. 호프만은 기침약으로 ‘헤로인’을 발명했지만, 중독성과 함께 많은 이들이 큰 피해를 볼 것을 알지 못했지요. 인간의 지혜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지혜를 늘 바라보고 그 지혜를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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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교구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주는 장점입니다. 각종 공문을 확인할 수 있고, 교구장님의 사목 방침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직자 사진첩을 검색하면 교구 사제들의 현재 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소속은 ‘가톨릭 평화신문 미주 지사’로 돼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경력 사항이 있었습니다. 검색하니, 28년 동안 제가 있었던 장소와 제가 맡았던 사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홈페이지가 있다면 우리 모두의 삶의 순간과 행동을 검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행과 우리의 희생을 검색할 수 있을 겁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함께 했던 따뜻한 이웃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보면 감사할 일, 고마운 일, 행복한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도 검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가 내미는 손을 외면했던 순간, 남의 성공을 축하하기보다는 시기했던 순간,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고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순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위안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는 고백성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은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고백성사를 보면 하느님 나라 홈페이지에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은 삭제될 겁니다. 이것이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선행과 희생은 기억되고, 우리의 허물과 잘못은 지워지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사자가 함께 춤추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 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즐거워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공부를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자주 읽고,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 세상은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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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성령의 은총, 성령의 사람-
단 하나 청하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성령의 은총 선물 하나일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참 행복한 삶입니다. 성령의 은총있어 비로소 영성생활입니다. 인생 허무虛無와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내적 삶의 황폐화도 성령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이 열릴 때 다음과 같은 감사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어제 수도형제가 수도원 봉사자들의 하루 피정을 지도하며 찍어 보내 준 사진도 참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웃는 모습이 꽃들이 활짝 핀 꽃밭 같았고,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자발적 봉사의 착한 마음들 또한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심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한 자매들 역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성 하비에르 프란치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더불어 예수회 7명의 설립자중 하나로 만46세로 선종할 때까지 참으로 치열한 불꽃같은 파란만장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말그대로 성령의 은총따라 선교사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그 옛날에 인도, 말레이시아, 뉴기니, 필리핀, 일본 등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개종시킨 교우수만 해도 1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여 그는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립니다. 성인의 일본에 대한 소감도 시사하는 바 큽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옆에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침내 중국 선교 여정에 올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 두고 열병에 걸려 산첸섬에서 선종하니 참으로 순교와 같은 감동적인 죽음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 믿는 이들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성령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는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내용들로 가득한지요.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의 꿈같은 비전을 보여줍니다. 바로 성탄 밤미사시 전체를 노래로 하는 독서(이사11,1-10)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모습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 하리라.---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바로 여기 여섯 가지 영에 자비의 영 하나가 추가되어 성령 칠은입니다. 똑같은 성령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위에 내리니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아 성령의 은총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메시아를 중심한 평화의 왕국의 비전은 얼마나 마음 설레게 하는지요! 혁명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신학교 시절 철학교수 정달용 신부님의 미사 강론 때 설명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성서가 아니곤 이런 평화의 비전을 세상 어느 책에서 어디서 읽을 수 있겠는지요. 성령의 영감이 아니곤 결코 쓸 수 없는 불후의 환상적인 시입니다. 이사야를 참으로 좋아하셨던 예수님도 분명 이 아름다운 평화의 비전에 매혹되셨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불후의 시인이자 신비가요 성령의 은총 충만한 성령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총으로 실현된 꿈같은 평화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이사야의 비전을 그대로 계승한 성령의 은총 충만했던 성령의 사람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똑같은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완전히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된 주님의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현재’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여기서 하늘 나라 신비를 깨닫는 철부지들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히 받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과 일치 하므로 우리 또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다음 말씀 역시 당대의 제자들은 물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성령의 은총으로 마음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볼 수 있고, 마음의 귀가 열려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인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주님과 나, 그리고 이웃을 깨달아 알아감으로 자유로워지는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날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참조)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참으로 오늘날 우리가 바쳐야 할 절박한 기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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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철부지 때문에 기뻐하신 예수님>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척 하다가 제 눈을 가려버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대비되는 철부지들 때문에 기뻐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철부지는 부족한 아이를 말합니다. 그 부족함과 불완전 때문에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철부지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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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밝고 경쾌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퍼집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
이 말씀에 머무르는데 예수님의 기쁨이 전해지는지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에 흥이 일어납니다. 문맥으로 보면, 파견하셨던 일흔두 제자가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기뻐하며 성과를 아뢰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아직 많이 미숙하고 부족한 제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철부지"(루카 10,21)라 표현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는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가 철부지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쁨에 차 성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일치를 이루는 이때는 신적 희열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신비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채 그분의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 메시아가 아닌, 근본마저 모호한 떠돌이 가난뱅이 설교가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하는 은총을 받았으니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노래합니다.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듯이, 새로운 다윗이라 할 수 있는 메시아를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사11,1)의 이미지로 연결짓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 위에는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라는 주님의 영이 머무릅니다.(이사 11,2 참조) 그리고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이사 11,3)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가 이룰 정의와 공정, 신의와 평화의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따사롭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대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온기가 돌고 마음이 활짝 펴질 정도지요. 누구도 누구를 해치거나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억압도 폭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천적이라 일컫는 존재들이 함께 뛰놀고 장난치고 뒹굴며 창조의 본성인 사랑을 회복합니다. 그날에는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주님을 알면 평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툼, 경쟁, 폭력, 억압에 무능해집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이는 별볼일없는 존재로 뒤쳐질 수도 있겠네요. 세상은 "철부지"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까요.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된 세상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성공 논리가 아닌 십자가 논리가 주도하는 나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가느라 앞다투어 사랑하고 희생하는 나라, 그래서 약육강식의 위계가 자취를 감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초라한 마굿간, 구유 안에 누운 한 아기에게서 봅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견합니다. 이렇듯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한"(루카 10,24)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존재 속 가장 약한 부분에 오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철부지들이 가슴 쭉 펴고 활짝 웃으며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때가 메시아의 시대이고 구원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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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아이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
죄를 회개하고 사악함을 버리고 세례를 받아 정결해지고 나면,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듯 우리는 영원한 빛으로 돌아갑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며 제 눈을 가린,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념쳐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서 아는 것 많고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작은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신드리아의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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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사랑이란 존재에 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사랑은 <너>가 <있음(being)>이기에
<나>가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너>가 없으면 <無, nothing>이기에
<나>도 <없음, nothing>이 되는 것이고
<너>가 아니면 <너>도 <나>도 없음이 됩니다.
참사랑은 다른 것으로 대치(代置)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절대자인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만이 <있음>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은총으로 사는 자만이 <참사랑의 있음>이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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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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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알아보는 눈>
"너희가 보는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것을 얻으셨다는
예수님은 마음이 즐거우십니다.
이 즐거움이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하십니다.
질그릇인 나에에 빛을 주셔서
보물인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나는 무엇을 알아보는가?
무엇이 내 눈에 띄나?
명품백을 알아보고 들고 다니고 싶어
카드를 긁고 후폭풍을 감당 못하는 사람,
비슷한 짝퉁으로라도 들고 위안을 삼으려는
심리를 알기에 수많은 모조품이 나옵니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는
명품이라는 글씨들이 과연 그럴까? 의문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를 알아보고
그 향기를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어집니다.
어느 명품도 수명이 다하면 볼품없지만
내 안에 있는 보물인 예수님은 쓸수록
닳지는 않고 더욱 빛나는 신비로운 존재!
"당신에게서 나는 향기가 잠자는 나를 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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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어떤 선택이든
끝내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가장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가장 선하신
일들입니다.
매순간
가장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철부지들처럼
언제나 선한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즐거움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철부지같은
우리들이 있습니다.
철부지의 영혼은
모든 것이 기쁨이고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선하신 뜻 안에서는
좋은 일과 기쁜 일
아픈 일과 힘든 일도
있습니다.
이 모든 여정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오히려 부족한
철부지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부족함이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맞아들임의 빛나는
자리입니다.
##############
(2)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철부지들의
행복입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기쁘게 사는
철부지들이
아름답습니다.
모자람은 결코
흉이 되지 않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모자람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오히려
사랑으로 신비로
채워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철부지는 이렇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철부지를 통해
희망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철부지처럼
기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모자람을
받아들이시고
모자람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시는
선하신 뜻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의
모자람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철부지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랑은
우리의 모자람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라는
즐거움입니다.
누구에게나
철부지의 요소는
있기 때문입니다.
모자람 또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모자람을 통해
아버지의 힘을 믿는
기쁨의 철부지되시길
기도드립니다.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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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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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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