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윤백남(尹白南)과 이경손(李慶孫) 감독
안태근(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윤백남(尹白南)은 시나리오작가 겸 감독, 제작자이며 연극인, 소설가, 방송인이다. 그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던 그는 분명 천재성을 갖고 있는 이다. 그는 본명이 윤교중으로 1888년생이며 1954년 9월 29일 별세하였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초창기 한국영화를 태동시킨 장본인이다. 당시는 호를 이름 대신으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일제 조중훈을 조일제로, 석영 안석주를 안석영으로 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도 윤백남으로 불리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은 1919년의 <대도전(大盜傳)>으로 윤백남의 소설이다. 고려 말 공민왕 시기, 신돈의 오만한 정치 참여에 주인공 무룡이 부모의 원수를 갚고 무리를 규합하여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에서 <수호지>를 연재 후 쓰인 것으로 수호지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는 후에 <회천기>(1932), <흑두건>(1932)같은 소설도 집필하였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는 만주 국경지대에서 있었던 활극을 영화화 한 김도산 감독의 1923년작 <국경>인데 이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영 하루 만에 종영하게 되었고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도 없어 공식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1923년 4월 9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용으로 만들어 상영한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전 2권, 1021피트)가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된다. 홍보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의뢰하여 만들게 한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신문물 도입기였다. 어린 나이인 11세에 경성학당에 입학한 그는 16세에 졸업을 했던 영재다. 특히 어학에 천재로 문필가로서의 소질도 보였다. 그후 그는 인천항에서 모험에 가까운 일본 밀항을 시도하여 고쿠라로 가서 고학생이 된다. 그는 현립 반조우중학 3학년에 보결로 입학하였다. 무일푼에 밀항으로 일본에 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동경에 자리 잡은 것이다.
윤백남은 와세다 실업중학 본과 3학년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하였고 졸업한다. 이후 국비생 50명 중에 한 명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정치학과 학생이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정치과목 수강에 제한을 두자 도쿄관립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하여 면학에 주력한다. 결국 전문학사를 따기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좌절하지 않았던 그이다.
그즈음 그는 신(체)소설 <불여귀>, <쌍옥루>, <단장록> 등을 읽고 연극운동을 꿈꾼다. 그리고 이인직을 만나는데 그는 훗날 <치악산>, <설중매>, <은세계> 등의 신소설을 쓴 소설가이다.
윤백남은 귀국 후 유학생활 중 알던 이의 추천으로 수형조합에 부이사 직급으로 근무한다. 그곳은 조선척식주식회사의 전신이었다. 그는 일 년 간 근무하고 퇴사하여 대일신보사 기자로 입사한다. 이곳에서 조일제와 더불어 극단 문수성을 창단하기 전까지 일한다.
그는 문수성에서 연극을 하던 중 안종화의 소개로 (주)조선키네마로 가서 <운영전>을 각본, 감독한다. 안평대군의 애첩인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을 그린 내용으로 여주인공으로 김우연을 캐스팅하였다. 그러나 외모도 영화적이지 않았고 윤 감독과의 스캔들이 벌어져 어수선해지며 영화는 큰 적자를 본다.
이후 그는 서울로 와서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등을 중심으로 백남프로덕션을 만들어 <심청전>을 제작한다. 그러나 결국 낭패를 보고 그는 수출을 상담한다며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연락두절이 되었는데 그는 귀국해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결국 영화계를 떠나 시골로 낙향한 셈이다. 백남프로덕션은 해산되고 그들 멤버는 고려키네마사로 가서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에 참여한다.
그는 이후 한국 최초로 개국한 경성방송국의 조선어방송과장으로 근무한다. 그의 활동은 가히 전천후라고 할 수 있다.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의 학장을 지내고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이 되었다. 이렇듯 한국사회 개화기에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그는 한국영화사 초창기의 중요 인물로 기록된다.
이경손(李慶孫) 감독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조감독을 거쳐 감독이 된 이경손 감독은 나운규 초기영화의 감독을 맡았었다. 나운규에게는 스승이지만 그의 영화인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1904년생으로 나운규보다는 두 살 어리고 흣날 영화 동지가 된 정기탁 보다는 한 살이 많다.
그는 개성이 고향으로 연극배우로 활동 중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해 배우 겸 조감독으로 활동하였는데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가 이 회사에 입사하여 <운영전>이란 영화에서 가마꾼으로 단역출연하게 된다. 이경손은 1925년, 백남프로덕션에서 그의 데뷔작 <심청전>을 연출하며 나운규를 심봉사로 출연시켜 그의 영화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연출작을 보면 1925년 <심청전>, <개척자>, 1926년 <산채왕>, <장한몽>, <봉황의 면류관>, 1928년 <춘희>, <숙영낭자전>, 1930년 중국 상하이에서 <양자강>을 감독했다. 그의 스승은 <월하의 맹세>를 연출한 윤백남 감독이다.
그는 훗날 「신동아」잡지에 자신의 자서전을 기고한다. 그 글에는 초창기의 영화계 비화가 담겨 있다. 그가 <아리랑>으로 스타가 된 나운규의 주연 영화를 연출하기로 하고 고심 중이었는데 영화배우 정기탁이 찾아온다. 정기탁은 "지금 나운규에게 당신이 필요한 사람이오?" 따지듯 물었다. 이 한마디는 심약한 이경손에게 결정적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나와 함께 지금 평양으로 가서 멋진 영화 한 편 찍읍시다." 이경손은 그날 당장 그를 따라 나섰다.
이경손은 1926년 정기탁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봉황의 면류관>의 연출을 맡는다. 물론 정기탁 주연이었다. 영화는 명편 중의 하나로 꼽혔지만 흥행은 안되었다. 난처해진 건 정기탁도 마찬가지인데 1928년에 정기탁이 새 자본주를 끌어들여 세운 평양키네마사에서 <춘희>를 만드나 역시 흥행에 실패한다.
정기탁은 상하이로 훌쩍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이경손은 제 신세가 따분했다. 그는 한국인으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바리스터로서 안국동 인근에 한국인 최초의 다방을 개점한 것이다. 1927~1928년도의 일로 약간 의외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모던 보이로서의 한 면모이다. 하와이에서 온 여인 현 앨리스와 동업으로 '카카듀'라는 다방을 개점하자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다방은 얼마 못가서 폐업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경손 감독이 상하이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카듀'를 운영하던 중 상하이로 간 정기탁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기탁은 감독이 되어 있었다. 이경손은 처량 맞은 제 신세 같은 조국 땅을 떠나기로 한다. 배를 타고 상하이로 온 이경손은 제작 중이던 정기탁 감독의 영화에 투입되고 중국영화 초창기의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과 드레스룸 한 켠에서 낮잠을 즐겼다고 추억한다.
정기탁이 이경손을 남겨놓고 일본으로 가자 그는 전창근과 함께 <양자강>을 만든다. 그런데 영화를 촬영한 한창섭이 이 영화를 들고 귀국하고는 연락두절이 된다. 이래저래 하는 일마다 잘 안풀리는 이경손이었다.
곧이어 일본군의 상해침공이 시작되고 이경손은 피난배에 승선한다. 일단 홍콩으로 간 이경손은 태국 방콕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현지인과 결혼해 자식까지 두고 산다. 이경손은 훗날 자서전을 신동아에 투고하여 1964년 12월호에 '무성영화의 자전', 1965년 3월호에 '상해 임정시절의 자전'이 실린다.
이경손 감독은 태국에서 한 많은 한평생을 마치고 영면한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유망한 영화청년이 일제강점기라는 희망 없는 시대를 만나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운명의 수레바퀴에 밀려 살다 간 것이다. 그는 나운규 보다 먼저 이 땅에서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운규의 그늘에 가려졌고 상하이라는 낯선 곳에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카메라맨에게 사기를 당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살다간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는 1977년 4월 4일, 망명지 태국에서 영면하였다.
살다 보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의 인생기을 쓰며 떠오르는 말이다. 나는 1996년 영화역사 다큐멘터리 제작 때문에 '방콕한인회'를 통해 그의 유가족과의 연락을 취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로 이민을 가서 연락이 안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이경손 감독의 딸이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와 아버지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제강점기 불행한 영화인 이경손 감독의 쓸쓸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