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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1725~1797) 탄신 300주년 서당서원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서거 220주기 한국최고의 실학자
이진언(李聄彦)[1906~1964]->1905~1964 탄신 120주년 아나키스트시인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1445~1494) 탄신 580주년
1565 ○蘫溪書院。 德溪 與盧玉溪,姜介庵。翼 講論<延平答問>,<朱子年譜>。460주년
2027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1725~1797) 서거 230주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탄신 290주년
유언일의 생졸명기요청
녹봉(鹿峰) 유언일(劉彦一, 居昌人) 1725년12월29일생 1797년2월5일졸 향년 73세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1725~1797) 녹봉서당유허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하비길 71-37 下肥 비도교 좌회전
정조 | 20 | 1796 | 병진 | 嘉慶 | 1 | 60 | 안의 현감을 그만두고 軍職을 받아 상경하다. ○ 兪彥鎬를 곡하다. ○ 桂山洞에 벽돌로 초당을 짓고 ‘叢桂書塾’이라 이름짓다. ○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懿陵 令이 되다. |
정조 | 21 | 1797 | 정사 | 嘉慶 | 2 | 61 | 沔川 郡守가 되다. 하직하러 입시했을 때 상의 명으로 〈書李邦翼事〉를 지어 올리다. ○ 湖西의 선비인 姜幼安, 羅烈, 柳訸 등을 초청하여 교유하다. |
녹봉문집 鹿峯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약조선후기 학자 유언일(劉彦一)의 시·서(書)·설·제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
서지적 사항
3권 2책. 필사본. 지은이가 생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내용
권1에 시 88수, 권2·3에 설 1편, 변(辨) 1편, 잡저·서(書) 각 3편, 상량문 1편, 비문 3편, 소·장 각 1편, 기 2편, 유사 1편, 제문 10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비(扉)」·「송(松)」·「우(雨)」·「산(山)」·「도화(桃花)」 등 서정성이 짙은 것이 많다. 스승인 신수이(愼守彝)를 비롯해 송명흠(宋明欽) 등의 시에 대한 차운시(次韻詩)를 포함하여 장편의 「차삼동오백언운(次三洞五百言韻)」과 6수의 「봉황고상자인산귀시작(奉黃皐喪自仁山歸時作)」, 또한 우홍점(禹洪漸) 등을 대상으로 지은 만시(挽詩) 등 다양한 형식의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설의 「미발지전무기질지성설(未發之前無氣質之性說)」·「하락이기설변(河洛理氣說辨)」 등과 잡저 중 구두(句讀)가 찍혀 있는 「중용혹문초(中庸或問抄)」 등은 전심으로 연마한 성리학의 깊은 이치가 표출된 글들이다.
「병몽록(病夢錄)」은 1751년(영조 27) 나이 50세가 넘어 신체가 쇠약해져 투병 생활을 할 때 젊은 시절의 포부를 회상하면서 꿈속에 본 동자의 입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서술한 것이며, 「자장(自狀)」에는 10세 무렵부터 정의감이 넘치고 청족(淸族)이 지배하는 중국을 구출하기 위해 북벌계획을 꿈꾸고 있었음이 기술되어 있다.
「시폐문답(時弊問答)」은 고금의 정치에 대한 득실을 논하고 아울러 태평성대를 갈망하는 노학자의 마음을 깊이 있게 묘사한 것이다. 소의 「구언응제소(求言應製疏)」는 나이 72세 때 천재지변으로 인해 조정에서 초야의 학자들에게 구언하며 지은 것으로서, 만주족인 청나라의 세력이 끝나고 한족이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될 조짐이라며 군대를 양성해 북벌계획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누락된 부분이 있어 전모를 살피기 곤란한 조광규(趙光逵)에게 보낸 편지와 저자의 5대조인 유덕개(劉德蓋)와 거제현령(巨濟縣令) 정지영(鄭芝榮) 등을 대상으로 쓴 비문을 비롯해 기강의 퇴락을 걱정하는 마음을 기술하고 질서확립에 뜻을 같이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된 「황고신선생오부자정서(黃皐愼先生五父子呈書)」와 「종사회천기(從師懷川記)」, 우홍점을 대상으로 쓴 유사, 스승과 이성복(李聖復) 등을 대상으로 지은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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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峯先生文集 녹봉선생문집
원서명鹿峯先生文集 현대어서명녹봉선생문집 청구기호奎12017-v.1-2 편저자(한자)劉彦一(朝鮮) 著 편저자(한글)유언일(조선) 저 판본사항筆寫本 간행지[刊地未詳] 간행연도19세기 초 간행자[刊者未詳] 책권수3卷 2冊 광곽四周雙邊, 半葉匡郭:24×15.1cm, 有界, 10行 21字 판심上下花紋魚尾 책크기33.5×21.3cm 표지,판심,권두서명表題:鹿峯先生集, 卷首題:鹿峯先生文集 자료소개劉彦ㅡ(生沒年 미상)의 詩文集 사부분류集部 別集類 一般 M/F번호M/F80-103-234-C
卷1:詩 86首(五言絶句 13수, 五言四韻 9首, 五言長篇 1首, 七言絶句 23首, 七言 四韻 40首), 卷2:說 2편(未發之前無氣質之性說:人性이 發하기 이전에는 순수하여 氣質의 性이 없다는 논설, 河洛理氣辨說:河圖, 洛書와 理氣에 관해 변론한 내용), 錄 1편(病夢錄), 기타 1편(中庸或問抄), 卷3:時弊問答 1편(上古 이후의 治亂을 논한 후 秦漢 이래 異端이 爭起하고 백성은 田土를 받지 못해 亂世상태에 있는데 조선의 경우 더욱 심하다고 지적하고, 卿大夫로부터 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부형된 자로서 자제를 교육할 때는 詩賦나 짓는 법이나 가르치고 있고 이른바 士流도 孔子시대의 士와는 다르게 되었으며 民産은 없어졌고 부자의 田土兼倂은 극심해졌다고 개탄한 내용), 書 2편(上趙明府光達, 答李武山鳳興書),上樑文 1편(黃巖書院講堂重修上樑文), 碑陰文 3편(五世祖正字公碑陰文, 巨濟縣令鄭公芝榮碑陰文, 烈女權姓㫌閭碑陰), 呈書 1편(黃皐愼先生五父子呈書), 疏 1편(求言應製疏:봄철의 무지개에 대해 淸나라 운수가 끝나고 중국이 흥하게 될 조짐이라고 풀이하면서 北征의 義旗를 곧게 세워 天變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 自狀 1편, 記 2편(從師懷川記, 鄕射堂詠梧館記), 遺事 1편(四有軒遺事), 祭文 11편(祭四有文, 祭黃皐先生文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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渼陰 渼湖
金元行 | 1702 | 1772 | 安東 | 伯春 | 渼湖, 雲樓 | 文敬 |
1769년(영조45) 김원행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원장이었을 때 이른바 ‘화양서원묘정비 사건’이 발생하였다. 묘정비는 호론 학자인 윤봉구(尹鳳九)가 작성했는데 그는 호론의 성리설과 송시열의 의리 정신을 정합적으로 서술하였고, 김원행은 이에 대해 묘정비는 의리설을 위주로 작성하고 성리설은 후대의 평가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호론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김원행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론과 낙론은 매우 복잡한 갈등 양상을 빚는다. 심지어 김원행이 홍봉한을 돕는다거나, 여색을 탐한다는 비방까지 나왔다. 김원행은 청류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으나 가열된 비방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김원행은 1772년(영조48) 70세로 사망하였고, 선영이 있는 경기도 양주 석실에 묻혔다. 1805년(순조5)에 조정은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1857년(철종8)에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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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峯書齋記 녹봉서재기
원서명鹿峯書齋記 현대어서명녹봉서재기 청구기호奎12027 편저자(한자)劉彦一(朝鮮) 著 편저자(한글)유언일(조선) 저 판본사항筆寫本 간행지[刊地未詳] 간행연도[刊年未詳] 간행자[刊者未詳] 책권수1冊(8張) 책크기31×21.6cm 자료소개劉彦一(1725-1797)이 제자들을 가르친 智雨山鹿峯書齋의 창건, 중수 등에 관한 글을 모아놓은 책 사부분류史部 地理類 古蹟 鄕校·書院·祠宇 M/F번호M/F79-103-143-Q
鹿峯書齋記(黃皐 野老記), 重修記, 重修上樑文(崔演重 撰), 鹿峯書堂序(權儁 撰), 廟室上樑文(盧光斗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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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峯先生遺事實錄 녹봉선생유사실록
원서명鹿峯先生遺事實錄 현대어서명녹봉선생유사실록 청구기호奎12026 편저자(한자)[編者未詳] 편저자(한글)[편자미상] 판본사항筆寫本 간행지[刊地未詳] 간행연도[19世紀 初(純祖 年間:1800-1834)] 간행자[刊者未詳] 책권수1冊(22張) 책크기33.6×21.3cm 자료소개劉彦一(1725-1797)의 遺事 사부분류史部 傳記類 別傳 一般 M/F번호M/F79-103-151-C
居昌劉氏世系, 鹿峯先生遺事實錄, 鹿峯書堂碑文(愼性恒 撰), 奉安時祝文(鄭夔弼 撰), 常享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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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인조17숭정12
1699,숙종25
1759,영조35
1819,순조19
1879,고종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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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峯書堂碑文(愼性恒 撰), 奉安時祝文(鄭夔弼 撰)
居昌郡誌 [郡誌] 薦職
鄭夔弼
號野翁草溪人이니縣監軾子性行淳至하고究經篤學하니道伯이以行誼로薦에特除縣監
嶠南誌卷之二十七 英陽郡 官案(李朝)
李宣岳朴崇阜洪處道鄭錫僑許䎁李纂趙儀漢金潚韓世箕朴樞李宜相洪 重範李虔朴弼文柳鳳齡黃泰河姜聖復姜 樸趙重昌鄭墀朴民秀崔昌愈沈鋿李顯箕朴好源宋儒式金漢吉李命勳李禾李彦藎韓後述鄭光周洪樂舜沈公藝宋致淵李命 圭金明鎭李承瑗宋煥箕李龜雲朴道翔徐潞修朴休源朴弘壽南建九曺錫倫李建胄申瀷金載孟李裕慶閔致秉宋欽大尹範五 朴彝鉉李能秀李鼎民朴齊顔權曦李玹洪升淵金華國金箕晳李基恢李俊英李勉大李圭復徐有畬
鄭夔弼
洪義升成赫壽成駿祥李相佑尹弼求李福愚徐中輔金商鉉李種 信李秉奎李僖林炳翼安潤明吳榮錫王濟千申永休洪亮變劉興烈李龍善李日贊張志洪丁憙燮李元熙鄭夏鉉李範喆金台應 金思重姜甲秀尹弼五金鳳鎭孫海震權重翼韓禧錫李鍾洙柳時煥權重煥朴濟輪明麟華金潤聲
승정원일기 2409책 (탈초본 119책) 헌종 8년 12월 25일 기해 47/67 기사 1842년 道光(淸/宣宗) 22년
金蘭淳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鄭夔弼爲孝陵參奉,
승정원일기 2473책 (탈초본 121책) 헌종 14년 5월 13일 을유 15/27 기사 1848년 道光(淸/宣宗) 28년
鄭夔弼에게 관직을 제수함
○ 吏批, 再政。 以鄭夔弼爲掌樂主簿。
승정원일기 2504책 (탈초본 122책) 철종 1년 4월 18일 경진 19/21 기사 1850년 道光(淸/宣宗) 30년
○ 吏曹啓目粘連, 觀此慶尙左道暗行御史金世鎬書啓, 則醴泉前郡守李漍段,.....
英陽縣監鄭夔弼段, 民納還耗之替當, 黃腸供億之添助者, 或以査徵剩穀移施, 或以雜技贖錢取用, 而稱以自官捐廩, 跡實涉於沽衒, 畢竟塞責補弊, 事終歸於苟且是白遣, 虛結加斂, 實係痼瘼, 査陳還充, 宜思良策是如爲白有臥乎所, 上項三邑守令, 竝只罷黜爲白乎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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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彦一
宋心明
『동유기(東遊記)』는 병와(病窩) 송심명(宋心明 ; 1788~1850)이 무술년(1838,헌4) 3월 9일부터 4월 16일까지 우서(虞瑞)와 더불어 영남지방을 여행하며 그 지역의 풍경과 선유들의 유적을 답사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필자는 여행하는 동안 주로 지우들의 집에 유숙하며 담소도 나누고 시로 화답한 내용들도 기록하였으며, 송정서원이나 곽재우장군의 사당 및 정한강, 허미수 등을 모신 서원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선유들의 유풍이 잘 전해지고 있는지도 살피며, 마산, 김해 등의 해안가에서는 지우들의 집에 몇 일간 머무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읊고 회포를 풀기도하며, 연자루 등 누정에서는 연혁을 소개하고 상산등지에서는 임란때에 병사들을 훈련시킨 산성을 둘러보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유산기(遊山記)』는 송심명(宋心明)이 정미년(1847,헌종13) 4월 9일부터 5월 1일까지 박정기(朴楨箕), 김문옥(金文玉), 윤치현(尹穉縣) 등 지우들과 영남지역을 여행하고 기록한 것이다. 주로 벽한정(碧寒亭), 함벽루(涵碧樓), 호연정(浩然亭) 등 선유들의 누정과 서원을 방문하여 누정의 주인과 지우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소문을 듣고 거문고를 들고 찾아온 지우와 수작하며 시를 읊고 노래하기도하고 해가 저물도록 회포를 풀며 친지의 집에 숙박하기도하고, 서원에서 머루를 때에는 후손들이 보신탕을 대접하기도 했다. 요수정, 심진동, 용추암, 장수사, 녹봉서원 등을 두루 유람하며 산수와 수석, 자연경관에 대해서도 보고 느낀 대로 기술하였다.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1705년(숙종 31)~1768년(영조 44) 회가(晦可) 은진(恩津) 문원(文元)
櫟泉先生文集卷之十九 / 附錄 / 年譜
甲申先生六十歲。
十月。遊伽倻山。遂至月城。
自俗離。轉向伽倻。遍尋孤雲遺蹟。遊安義三洞。謁星川書院。將遊智異山。至龍游潭日暮。宿君子寺。讀荒山碑。見劉都督題名。至南原。聞外姑黃氏訃。徑往任實衙中哭之。
十二月。命削逸。
後數日。又命免爲庶人。放歸田里。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60 9월, 金元行과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 12월, 지난번 상소로 인해 당론을 했다는 이유로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다.
櫟泉先生文集卷之三 / 詩 / 劉子精 彦一 追至智異山後。爲誦其送友詩。求和。戲作禪語以答之。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 1725-1797, 황고 신수이 문인)
最怕沙蒸飯。難防壁隙風。禪家語亦切。好作密察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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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군서(君敍) 취한당(就閒堂) 거창(居昌)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1 7월 15일, 安義 上川村에서 태어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10 劉坦道에게 수학하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24 花川書堂을 짓고 강학하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29 北面 黃山村으로 이거하다.
영조 13 1737 정사 乾隆 2 50 3월, 관찰사 閔應洙의 천거를 받다. ○ 9월, 寒泉의 李縡를 찾아가 강학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65 여름, 頭流山을 유람하다.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77 가을, 宋明欽과 龜淵書院에서 강학하고 探勝臺 등지를 유람하다.
영조 43 1767 정해 乾隆 32 80 가을, 아들 愼認明이 검열이 되어 推恩으로 僉知中樞府事가 되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81 9월, 慈仁 縣監으로 부임하는 신인명을 따라가다. ○ 10월 8일, 졸하다.
영조 45 1769 기축 乾隆 34 - 3월, 黃山洞에 장사 지내다.
순조 8 1808 무진 嘉慶 13 - 安義 龜淵書院에 배향되다.
영조 32년(1756,丙子) 송시열 송준길 문묘종사
黃臯集卷之二 / 絶句 七言 / 丙子八月一日。尤春兩先生從享文廟時題位板。因參釋菜禮。感而有吟。二首
聖賢於衆非親戚。底事尊崇歲薦禋。爲其明道能扶世。若報其恩萬世恩。
慕賢心是慕其道。慕道心無豈慕賢。若使吾人輕道學。慕賢之說㹅虛諞。
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군서(君敍) 취한당(就閒堂) 거창(居昌)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1 7월 15일, 安義 上川村에서 태어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10 劉坦道에게 수학하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24 花川書堂을 짓고 강학하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29 北面 黃山村으로 이거하다.
영조 13 1737 정사 乾隆 2 50 3월, 관찰사 閔應洙의 천거를 받다. ○ 9월, 寒泉의 李縡를 찾아가 강학하다.
영조 18 1742 임술 乾隆 7 55 안의 현감 趙榮祏과 尋眞洞, 長水寺 등지를 유람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65 여름, 頭流山을 유람하다.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77 가을, 宋明欽과 龜淵書院에서 강학하고 探勝臺 등지를 유람하다.
영조 43 1767 정해 乾隆 32 80 가을, 아들 愼認明이 검열이 되어 推恩으로 僉知中樞府事가 되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81 9월, 慈仁 縣監으로 부임하는 신인명을 따라가다. ○ 10월 8일, 졸하다.
영조 45 1769 기축 乾隆 34 - 3월, 黃山洞에 장사 지내다.
순조 8 1808 무진 嘉慶 13 - 安義 龜淵書院에 배향되다.
黃臯集卷之一 / 絶句 五言 / 奉別城主趙公 榮祏 瓜歸 二首
化洽百里內。興高一盃中。一盃笑相別。百里遺愛融。
花林春腳歸。風草斂芳菲。三洞煙霞夢。倘過舊巖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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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臯集卷之一 / 律詩 五言 / 次城主趙公然字韻 二首
象外成佳會。玆遊豈偶然。尊卑同樂處。景物倍增鮮。要識人心一。休言世界千。淸談塵慮遠。怳若對眞仙。
明公非俗吏。百里化陶然。襟佩承文學。疲癃樂惠鮮。政閒興廢百。心靜應機千。三洞煙霞境。六年作卧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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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臯集卷之一 / 絶句 七言 / 述懷呈城主趙公 二首
𠌫翁當日莅天嶺。敬獻諸公德器成。也識文章乃餘事。何如實地作先程。
天賦旣同學亦同。達窮雖異此心同。措諸事處人多貳。識不同歟氣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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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臯集卷之二 / 律詩 七言 / 次城主趙公慶老宴韻 二首○代人作
南精昨夜耀華筵。勝事今朝入頌篇。鈴閣耋艾含哺地。康衢煙月詠歌天。古儀正合壽星節。晠禮將稱壬戌年。洪福旣同明府樂。遐齡願獻玉階前。
壽域乾坤闢勝筵。鶴軒煙月詠佳篇。盛儀秩秩升三老。沛澤洋洋降二天。皷腹歌謠聞昔世。涵恩蹈舞卽今年。蠧翁遺化欣重覩。盛事花林埒後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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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臯集卷之二 / 絶句 七言 / 奉別城主趙公 榮袥○竝序
昔後漢劉寵。甞守會稽。郡大治。被徵。有五六老叟自山谷間出。賚百錢送之曰。明府下車以來。狗不夜吠。民不見吏。今聞當見棄去。故自扶奉送。至今讀史者。傳以爲千古美事。安知弊縣之民。乃得見於今日。而未知寵亦如我明府之能敬奉上恤臨下。政簡而治成。刑省而吏戢。賦役均糶糴時。學校興官宇修。七事擧而百廢興。百里之內。小大之民。咸得樂其職安其業。六載如一日者耶。民等亦山谷中老氓也。自扶奉送之誠。亦不下於會稽之老叟。而貧無以賚送。且於我明府。抑何以錢爲。聊奉一盃松醪。以謝公醺馨之澤。繼之以詩曰。
歸去來兮綽綽裕。行裝蕭灑故山涯。閒來應訪陶菴老。爲報窮廬苦憶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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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년(숙종 12)~1761년(영조 37) 종보(宗甫) 석계산인(石溪山人) 함안(咸安)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53 11월, 安陰 縣監이 되다.
1739
1740
1741
1742
황고.영조 18 1742 임술 乾隆 7 55 안의 현감 趙榮祏과 尋眞洞, 長水寺 등지를 유람하다.
1743 이임
黃臯集卷之二 / 絶句 七言 / 君子亭 二首
亭名何以稱君子。知有君子名此亭。須願諸君顧名義。居斯愼勿負斯名。
斯無君子奚取斯。欝彼蒼官特愛奇。屹立淸溪白石上。灑風高振歲寒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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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봉(鹿峰) 유언일(劉彦一, 居昌人)은 1725년12월29일에 출생하여 1797년2월5일에 졸하시니 73세이다.
劉彦一乙巳(1725,영조1~1797,정조21)
박지원(朴趾源) 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정조 15 1791 신해 乾隆 56 55 한성부 판관이 되다. ○ 安義 縣監에 제수되다.
정조 20 1796 병진 嘉慶 1 60 안의 현감을 그만두고 軍職을 받아 상경하다.
安義鄕案
劉彦一乙巳(1725,영조1~1797,정조21)生居昌人瀯溪懽后安義
劉彦一의 鹿峯書齋
丙戌(1766,영조42)春 鹿峯書齋 今者智洞居士劉君字子精。好學篤行之士也。
신수이(愼守彝) 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군서(君敍) 취한당(就閒堂) 거창(居昌)
黃臯集卷之五 / 記 / 鹿峯書齋記
古者庠塾之敎尙矣。後學之能繼者。罕有其人。今者智洞居士劉君字子精。好學篤行之士也。得乎內而推於外。思欲成己而成人。於是學徒坌集。難容窩室。丙戌(1766,영조42)春。成君字汝彩(석곡성팽년후손)爲之倡議。齊聲蕫力。搆成書齋於鹿峯之下心潭之上。地界幽閑。景致明濶。諸子樂得肄業之廣居。長師喜有莊修之安舍。夏詩冬書。絃誦洋洋。朝益暮習。課業孶孶。將見文敎之休明。佇期菁莪之蔚興。於今之世而見古之道。豈不猗歟。一日子精也來余。請名齋書扁。又請誌其顚末。顧余耄薾精力。安堪酬應。而旣美其事。又嘉其意。忘拙強力以副其請。因以語諸生曰。諸君得師依歸。築舍勤業。慰賀曷量。而第惟文藝末也。德行本也。徒尙文藝而不務德行。則恐或有才勝之患也。古今悖道之人。夫孰不能文而然哉。願須諸君熟讀聖賢之書。務得聖賢之心。博文約禮。反身體行。以孝悌爲本。忠信爲主。以培其根。以達其支。則在家而爲孝悌之善士。立朝而爲忠貞之良弼。然則豈止爲一洞一鄕之幸也。抑爲國家之大幸也。顧不偉歟。詩曰濟濟多士。文王以寧。此之謂也。幸望諸君勿以耄言而泛忽。念哉敬哉。勉其爲君子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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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臯集卷之二 / 絶句 七言 / 贈劉子精 彥一○二首
諸子一無此學心。嘉君獨有向斯心。若止有心行不篤。恐如此老抱悲心。
此老初年亦有心。到今白首紛如心。流光易失學無盡。須惜寸陰遂此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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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흠(宋明欽) 1705년(숙종 31)~1768년(영조 44)
櫟泉先生文集卷之三 / 詩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60 9월, 金元行과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 12월, 지난번 상소로 인해 당론을 했다는 이유로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다.
甲申先生六十歲。
十月。遊伽倻山。遂至月城。
自俗離。轉向伽倻。遍尋孤雲遺蹟。遊安義三洞。謁星川書院。將遊智異山。至龍游潭日暮。宿君子寺。讀荒山碑。見劉都督題名。至南原。聞外姑黃氏訃。徑往任實衙中哭之。
劉子精 彦一 追至智異山後。爲誦其送友詩。求和。戲作禪語以答之。
最怕沙蒸飯。難防壁隙風。禪家語亦切。好作密察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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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邑誌 / 壇廟
鹿峰祠 在鹿峰下鹿峰劉彦一講學之所其後門生推其德欽其義行酌獻禮有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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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誌 / 倉庫
鹿峯書堂 在安義鹿峯下,鹿峯劉彦一講學之所,其後門生,推其德,欽其義,行酌獻禮 (花林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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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達弘(하달홍) 1809~1877
月村先生文集卷之六 / 尋眞洞記
三洞中尋眞一洞最爲深邃距縣十五里自花林東 南行數里旋折而北行十里至
鹿峯書院群山擁後 有樹環焉處士
劉彦一嘗隱居讀書於其中鄕人俎豆之渡水北行五里至
鄭氏尋源亭亭下有石潭瀅 澈可鑑日暖波淸有魚數十方牣躍自得又北行十 里至風流巖最爲奇麗其略石如鋪玉水如練帶鏗 然其鳴淙淙切切有若琴瑟迭奏笙簧交作巖以是 得名歟自是以往山益深水益淸石益瘦曲曲皆爲 奇翫過長水寺抵龍湫瀑如一注銀河自天倒落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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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猿三瀑相上下而雄壯過之兩岸石壁側立千尺 危峭不可入上有大石平鋪㵎水徐行曲折可作流 觴曲水纔過數步擊搏相濺便作瀑布響震山谷孟 子所云是豈水之性哉其勢使然至此益驗三洞素 稱山水鄕得賢者爲之主其名益彰如搜勝之葛川 某里之桐溪月城之同春皆是已惟此龍湫一瀑屬 之佛像地亦有遇不遇而然歟勞而無用神固不宜 如是則彼所謂造物者吾固不信雖然吾輩今日之 樂不是偶然入洞旬有五日日氣宣朗且同行六七 幷無外惱相侵凡三洞中一水一石苟有可翫則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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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遺漏非造物默佑而能之乎又北行二十里至隱 身菴三洞之勝於是始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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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일의 사위 萍村 朴之淳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五 / 墓碣 / 萍村朴公墓碣
朴之淳 1749 1810 朴之孝 密陽 百源 萍村
朴生以晦自安義四百里而至駕洛之舘請見。未言先涕而曰先大父有實行實德實學。而未得大君子一言。闕然無阡岡之銘。不肖有罪。願垂嘉惠。以賁顯刻。余感其誠意。謹受行狀而銘之曰。公六歲而孤。旣長遊於鄭立齋宗魯之門。聞切問近思之敎。自是竆居靜養。自修之實。施於家鄕。性篤於孝。事母竭力。及遭故以禮終制。追服父喪。凡廬墓六年。毁瘠不忍見。此不翅孔子所稱加於人者也。鄕人名其洞曰朴孝洞。公諱之淳字百源。系出密陽。始祖諱彦孚。高麗左僕射密城君。季世有諱永均。版圖判書。我太宗朝贈領議政追封凝川君謚文憲。曾孫允利左通禮。外歷沃溝縣令。號養心亭。五世而至諱明榑。吏曹參判贈判書號知足堂。師事寒岡鄭先生。又遊於趙月川張旅軒兩先生之門。與眉叟許先生爲道義交。龍洲趙先生撰墓碣銘。此可以見淵源之正學問之篤。是爲公六世祖。曾祖諱泰敏。祖諱台鉉。俱隱德不仕。後以孝俱贈敎官 考諱海朝號桂庵。以學術稱早卒。妣慶州金氏。通德郞柱國之女。右贊成從直之后。公生于英宗己巳。卒于正宗庚午。享年六十二。葬安義海平村後壬坐原。配居昌劉氏。
鹿峯彦一女。瀯溪懽後。生丁卯(1747,영조25)卒己亥(1779,정조3)。葬板屹洞亥坐原。後配安東權氏。祥彥女。忠貞公吉昌府院君石塘悏六代孫。承旨審中玄孫。生己卯卒戊辰。葬咸陽楮田艮坐原。三男潤茂,潤權,潤平。女壻崔惟弘愼必得,鄭燦。潤茂二男以震,以晦。女壻盧仁壽。潤平男以濬。女壻全喜壽,韓世忠,尹秉純。以震二男憲箕,永箕。女壻鄭東胤。以晦男纘箕。以濬二男炳箕,斗箕。有遺稿若干篇。如家規閨鑑書室儀諸條。皆下學之工。而其與柳江臯尋春,黃白下磻老往復書。尤驗踐履之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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凝窩先生文集卷之二十一 / 行狀 / 萍村朴公行狀
公諱之淳字百源。初諱之孝。密陽人。上世祖諱彥孚。仕高麗官左僕射密城府院君。連世赫舃。至諱永均贈領議政謚文憲公。其後代有名碩。至知足堂諱明槫。卒官春官亞卿贈大冢宰。以道德名節。爲世名臣。卽公六世祖也。五世祖諱爾點蔭補奉直郞。高祖諱厚基。曾祖諱泰敏。祖諱台鉉。考諱海朝。有實德實行。世以孝見稱於鄕里。公幼服習家訓。從事儒學。蚤歲謁立齋鄭先生。與同門諸賢。相講劘天人性命陰陽理氣。無不質問。遺稿載柳江臯,黃白下往復書。可攷也。立齋鄭先生手書切問近思四字以勖之。是以竆居養靜。以自修之實。施於家鄕。依倣乎內則列女傳則有閨鑒序。模擬乎白鹿洞規則有書室儀。眷眷乎周鄕三物則有宗契立約。囂囂乎舜典五品則有示兒諸詩。秉大義於春秋則有皇明曲。覷大原於昭曠則有大易吟。其發於咳唾者。皆可以裨世敎。其視滔滔者蠱心絺繪。沒身膠漆。不其高矣乎。性尤篤於孝。侍病而嘗糞。屬纊而斫指。廬墓終三年。有虎來護。山火及塋。天雨自下。此亦可以驗誠僞矣。服旣闋。仍舊廬又欲追服父三年。村人止之而不聽。遂火其廬。公伏塚下。三日哭不絶音。村人反搆茇舍以遺之。前後凡六年。毁瘠不忍見。此禮之所不必許。而情之所不忍抑。至今稱其洞曰朴孝洞云。
於乎。余生也後。未及識公而耳之則熟。日其孫以晦。持鄕道狀一通及遺稿一卷。謁余以狀德之文。其言肫肫。又若不容僞者。余受而卒業。不覺斂衽曰公之孝。雖求之三綱行實。鮮有其倫。然公學問人也。不可但以一節名。遂不辭而採摭其著於稿而登於狀者。俾後人有所攷焉。公生於英廟己巳。卒於正宗庚午。墓在安義海坪村後壬坐原。前配居昌劉氏。
鹿峯彥一女。早沒無嗣。後配安東權氏。忠貞公石塘先生諱悏六代孫。有女士行。承順夫意。齊㓗祭奠。親執殫誠。豈非有是夫有是婦耶。於乎韙矣。公有子三人。長潤茂。世其孝。別有碣。次潤權,潤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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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懽 1337 1409 居昌 國老 瀯溪, 永思亭
松沙先生文集續卷之二 / 神道碑銘 / 密直都憲瀯溪先生劉公神道碑銘 幷序
時當商周之際。能不事二姓。竟守罔僕之義者。瀯溪先生劉公其一也。公諱懽字國老。都僉議贊成事堅規。勳封居陁君。今居昌。子孫貫焉。世顯達。高祖贊司醞同正。贈密直事。曾祖昇判典理上護軍。祖海進賢館大提學。考洽縣令。妣杞溪兪氏父郞將臣伯。公生忠肅王丁丑。幼聰穎。甫能語。解文字。良知孝敬。得異味。必獻父母。旣長有大志。不拘小節。委禽于李達巖門。因受學。專心爲己。孜孜講劘。達巖常目送之曰。吾道南平居。無疾遽聲色。外物不以經心。簞瓢常空。晏如也。案上常置小學。性命玄奧。靡不探究。里巷之語。鄭衛之音。不經於耳。異端之書。非禮之色。不接於目。前後喪。毁甚而禮亦無闕。口不近旨。廬墓終制。達巖公許以王佐才具。勸使赴擧。一擧得第。歷典監察,密直,都憲。恭愍政衰。直言極諫。多所救正。衛正闢異爲己任。麗社屋。遯入減陰之申溪。卜築隱居。顔用永思。以詩見志曰好在瀯溪叟。偸閒臥小亭。銘曰樂天知命。復焉何求。蓋永矢其薖軸於此。而不受別世塵染。永思舊君以終厥世。國朝屢被召命而不赴。以永樂己丑二月十日。考終于申溪第。享年七十三。葬安義東里月峴壬坐。卽永思亭之南也。士林建院于金溪。幷享文質,達巖,蠖溪諸賢。夫人江陽李氏父參判元達卽達巖。祖芮卽文質。生長法家。德配君子。卒後公七朔。墓祔右。一男覃縣監。縣人去思立祠。生員鄭齊安壻也。孫二。恒典牲署令。懷副司正。三女適縣監盧季禎,上護軍李甫元,士人李續今。曾玄以降。多有偉人。若剛靖公貴孫之淸儉好施。黼黻王庭。其弟通政永孫。進士光孫。亦皆克家。參奉瓘,參奉琡,通德玩之文行俱隆。皋唳聞天。金吾友參,正字德蓋之與物無競。承述世風。義士名蓋之丁酉赴亂。夫婦同殉。敎授後甲之誠孝天植。超然名利。籬灘有道,
鹿峯彥一之孝學俱隆。師表來百。足徵公遺澤久而不斬也。將竪石于神道。後孫東煥,鎭曄,炳龍。幷轡過余。致其宗議而徵爲銘。申命者鄕儒趙鍾述,林苾煕,愼宗三。極老極病。不敢犯手於人家先蹟。而公高風偉節。颯爽照人。况今世風汙淪。爲國家親臣世臣者。販君賣國。罔有不至。及今而石。使先生義節昭於世。則於世敎非少補也。不辭而諾。銘曰。
道本忠孝。行著詩銘。百世曠感。籩豆是馨。享祀之祝辭足徵。綱常撐亘乎宇宙。志節昭森乎星月。伯仲圃冶。腸肚鐵石。前人之公評斯確。萬古綱常。一部春秋。滿月臺屹。首陽山休。後人之歌詠可求。月峴之阡。是公四尺。永思有亭。是公偃息。上亭下墓。高景來百。曠感之深。庸銘其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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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沙先生文集續卷之二 / 神道碑銘 / 密直都憲瀯溪先生劉公神道碑銘 幷序
參奉瓘,參奉琡,通德玩之文行俱隆。皋唳聞天。
金吾友參,
正字德蓋之與物無競。承述世風。
義士名蓋之丁酉赴亂。夫婦同殉。
敎授後甲之誠孝天植。超然名利。
籬灘有道,
鹿峯彥一之孝學俱隆。師表來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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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祖正字公碑陰文<鹿峯先生文集>
<蘭谷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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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地圖書 下(한국사료총서 제20집) > 補遺篇 (慶尙道) > 安義縣邑誌 > 人物
劉有道義士名蓋孫十三歲父沒不離几筵不食菜果奉母竭誠母没泣血三年事聞 命復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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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二 / 文 / 劉君趙氏雙墓碣銘 幷序
公姓劉。諱瓘。字瓘之。系出居昌。遠祖諱堅規。仕高麗。仕至都簽議贊成事。自是連世冠冕。七世孫諱懽。爲監察。娶參判李元達女于減陰。仍家焉。子覃。爲龍宮縣監。於公爲曾祖。子恒。爲典牲署令。於公爲祖。子貴孫。補忠順衛。卽公之考也。娶讓寧大君子長平正訢之女。生二子六女。公其第二也。公幼而穎悟。壯能學文。累捷解額。竟不遂志。嘉靖壬寅正月二十日。終于減陰之第。享年五十有九。是年冬。葬于黃山壬坐丙向之原。是先人之兆也。配趙氏。系出漢陽。五世祖諱涓。爲本朝右議政。封漢平府院君。孫之商。爲鐵山郡守。寔爲曾祖。子珣。少登第。未閱月而夭。寔爲祖。子永孫。爲咸陽郡守。娶判府事廣陽君李世佐之女。生夫人。夫人年纔及笄。歸劉氏。事舅姑治閨門。咸得婦道。■■■■■■■■■卒于第。享年七十四。是年春。葬于公之左爲雙墓。男有三。皆爲忠順衛。曰友閔。娶通訓宋驊之女。無後。曰友顏。娶士人郭宙之女。無後。曰友參。娶主簿李連孫之女。生四男四女。男長德蓋。功蓋。方以文行顯儕輩。女適忠順衛柳世漢。餘皆幼。女有四。皆歸士人。曰愼規,具聃壽,吳雲,成懽也。愼與成。皆早寡無後。具生一子。曰洽。吳生二子。曰德潤,德演。葬畢。其孤痛其生無以顯當世。死無以圖不朽。敢請予銘于石背。以示子孫云。銘曰。家世毓德。源遠流長。有志有才。公胡不揚。天其有待。後應其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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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의(名醫) 유이태(劉爾泰)
조선 후기 명의(名醫)⋅어의(御醫).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원(伯源)이고, 호는 신연당(新淵堂)⋅인서(麟西)⋅원학산인(猿鶴山人) 등이다.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劉名盖)의 현손이고,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효자 유유도(劉有道)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유윤기(劉潤祺)이고, 어머니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李義立)의 손녀 강양 이씨이다.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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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沙先生文集續卷之二 / 神道碑銘 / 密直都憲瀯溪先生劉公神道碑銘 幷序
若剛靖公貴孫之淸儉好施。黼黻王庭。其弟
通政永孫。
進士光孫。亦皆克家。
參奉瓘,
參奉琡,
通德玩之文行俱隆。皋唳聞天。
金吾友參,
正字德蓋之與物無競。承述世風。
義士名蓋之丁酉赴亂。夫婦同殉。
敎授後甲之誠孝天植。超然名利。
籬灘有道,리탄유도
鹿峯彥一之孝學俱隆。師表來百。
足徵公遺澤久而不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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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有道 義士名蓋孫十三歲遭父喪不離几筵不食菜果奉母竭誠母沒泣血三年命旌復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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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함양 안의향교(安義鄕校) 간행 안의향안(安義鄕案)
同知林汝楗幹哉
全時叙景三
僉知劉有道子晦
劉坦道甲子(1624,인조2/1684,숙종10)子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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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군서(君敍) 취한당(就閒堂) 거창(居昌)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1 7월 15일, 安義 上川村에서 태어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10 劉坦道에게 수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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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明欽 1705 1768 恩津 晦可 櫟泉 文元
녹봉(鹿峰) 유언일(劉彦一, 居昌人)은 1725년12월29일에 출생하여 1797년2월5일에 졸하시니 73세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정조 15 1791 신해 乾隆 56 55 한성부 판관이 되다. ○ 安義 縣監에 제수되다.
정조 20 1796 병진 嘉慶 1 60 안의 현감을 그만두고 軍職을 받아 상경하다.
安義鄕案
劉彦一乙巳(1725,영조1~1797,정조21)生居昌人瀯溪懽后安義
녹봉문집 鹿峯文集 유언일(劉彦一,1725~1797)
녹봉(鹿峰) 유언일(劉彦一, 居昌人) 1725년12월29일생 1797년2월5일졸 향년 73세
劉彦一의 鹿峯書齋
신수이(愼守彝) 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1705년(숙종 31)~1768년(영조 44) 회가(晦可) 은진(恩津) 문원(文元)
黃臯集卷之五 / 記 / 鹿峯書齋記
丙戌(1766,영조42)春 鹿峯書齋 今者智洞居士劉君字子精。好學篤行之士也。
1976년 함양 안의향교(安義鄕校) 간행 안의향안(安義鄕案)
愼性恒字若天庚午(1750,영조26)生居昌人樂水權后渭川黃山 *公乃吾王考黃皐先生高弟也<녹봉서당비>
林碩馨字遠卿辛未生恩津人道溪英后北上葛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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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봉연선생표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60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갑신추 여이경인양여강대역천행 망월암 차경인운>오언절구
<차역천송선생 방동춘선생유허운>오언율시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77 가을, 宋明欽과 龜淵書院에서 강학하고 探勝臺 등지를 유람하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64 竹林書院의 유생이 山長으로 청했으나 사양하다. ○ 4월, 瓶泉에서 「同春先生文集」을 수정하고, 興巖으로 가서 「同春先生文集」 刊役을 지휘하다. ○ 5월, 同春舊堂에서 여러 아우, 조카들과 講學하다. ○ 7월 13일, 塗谷에서 졸하다. ○ 8월, 復官의 명이 내리다. ○ 9월, 錦山 川內里에 장사 지내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81 9월, 慈仁 縣監으로 부임하는 신인명을 따라가다. ○ 10월 8일, 졸하다.
<만황고신선생>
<輓崔處士南斗>
崔南斗 1720 1777 慶州 士仰 茅廬
<輓老溪愼友義明>
居昌郡誌(거창군지) 李承典(未詳 ~ 未詳)
居昌郡誌 [郡誌] 學行 ...愼義明 字集初號老溪니黃皐守彝子오英宗乙巳(1725,영조1)生이라性質華美하고...
崇禎後三丁酉(1657,효종8/1717숙종43/1777,정조1)六月上浣鄕士人丹陽禹師欽撰居昌愼義明書文化柳鼎和篆
신인명(愼認明) 1723 거창(居昌 택초(宅初) 신수이(愼守彝)
愼認明
黃皐守尋子字擇初景宗癸卯(1723,경종3)生初諱仁字英宗改賜認字하시고命擧頭熟視曰眞長者也라延退에同僚皆賀曰上이親賜名有長者之褒하니大是巽數也라始 學語에穎悟絶人하야五歲에盡誦小學하고乙酉登第晩遊宋櫟泉明欽하니櫟泉致賀書於黃皐曰三郞才高德富에今果大捷하니此實國家之福이 라豈但爲德門之慶耶今聞此報에殆於不寐라하다丁亥翰林注書歷典籍兵郞戊子出宰慈仁하고丁酉正言庚子持平嘗曰絶口於人不之善하고樂 稱乎人之德行이면人英不歸仁이라內而啓沃과外而澤民을鄕黨稱厚德長者라正宗誕辰에以侍從臣으로不參宴하니上贈詩曰許卿曾醉此筵杯 今日今辰每歲回라可但湖南人少一只應東閣對寒梅라有遺稿數卷이라領相鄭存謙撰墓表하고判書李光正篆三溪金洛鉉書號老岡子孫居黃山
老崗愼公墓表
계묘(1723,경종3)삼월생공
신축(1781,정조5)오월이십사일졸 향년오십구
신인명(愼仁明)
[문과] 영조(英祖) 41년(176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52)
개명(改名) 신인명(愼認明)【補】(주1)
자(字) 택초(宅初)
생년 갑진(甲辰) 1724년 (경종 4)
합격연령 42세
본인본관 거창(居昌)
거주지 안음(安陰)【補】(주2)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52명 [甲3・乙7・丙42]
전력 통덕랑(通德郞)
문과시제 부(賦):차년차과어희기회추억석년임전흥회(此年此科於戲幾回追憶昔年臨殿興懷)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수이(愼守彛)
[조부(祖父)]
성명 : 신부(愼桴)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경호(愼景昈)
[외조부(外祖父)]
성명 : 조한명(曹漢鳴)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박성운(朴聖運)
본관 : 미상(未詳)
*“仁以認改賜” 두주
신성진(愼性眞) 1752 거창(居昌) 정보(精甫) 신인명(愼認明)
病夢錄 신미,1751,영조27
時弊問答 병신,1776,정조 즉위년
五世祖正字公碑陰文 1787
巨濟縣令鄭公芝榮碑陰文 1797
烈女權姓㫌閭碑陰 1772
求言應製疏 1797
自狀 1784
從師懷川記 1761~1764
1762
1763
四有軒遺事 1764
祭四有(禹洪漸)文 1763
祭族叔以中(劉以中)文 1778
祭櫟泉先生文 1769
祭黃皐先生文 1769
祭老山愼公道明文 1794
祭老溪愼友義明文 1790
李聖復
녹봉선생문집 제3권 逸文
祭郭友可績君元文
녹봉선생문집 제3권
荅李武山鳳興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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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수인물역사연표 [咸陽郡守人物歷史年表] buhopark 추천 0 조회 204 02.01.27 15:06 댓글 0 居昌郡誌 [郡誌] 碑閣 旌閭 孝子黃岡愼性眞閭 在渭川面黃山搜勝臺東하다愼性眞은黃皐守弊孫英宗壬申生이오號黃岡이니善養親하야及其親病에問醫侍湯하고血指和進에感動傍人이라哲宗戊午에命旌하니判書金學性撰旌閭記하고門人參判廬光斗書 신성진(愼性眞) 문과방목 [문과]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06/33) 생년 임신(壬申) 1752년 (영조 28) 합격연령 26세 본인본관 거창(居昌) 거주지 안의(安義)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통덕랑(通德郞) 문과시험답안 논(論):인인능악인(仁人能惡人) [부(父)] 성명 : 신인명(愼認明) [조부(祖父)] 성명 : 신수이(愼守彛)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부(愼桴)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성운(朴聖運)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 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 9월 22일 辛卯 1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진전과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행하고 상전을 시행하고 관직을 가자하다 ○辛卯/詣眞殿, 行酌獻禮, 贊禮李肇源加正憲, 禮房承旨尹尙圭加嘉善, 執禮朴宗琦, 大祝洪遇燮ㆍ李憲琦ㆍ曺鳳振幷加通政, 仍施華寧殿酌獻禮獻官以下賞典, 旋因京兆六十一歲人抄啓別單, 命靑城尉 沈能建, 知事李晩秀, 判敦寧, 李彦植, 令郞官存問。 曾經先朝侍從宣傳官人, 幷加資, 楊州牧使金孝建加資憲, 吏曹參判林漢浩加嘉義, 淮陽府使尹益烈, 副護軍洪羲運, 慶州府尹申溆加嘉善, 副司直愼性眞加通政, 武臣之嘉善者八人, 通政者四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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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녹봉선생문집鹿峯先生文集>
劉彦ㅡ(1725-1797)의 詩文集. 19세기 초, 3卷 2冊, 筆寫本, 33.5×21.3cm,
表題 : 鹿峯先生集, 卷首題 : 鹿峯先生文集, 刊地未詳, 刊者未詳.
劉彦ㅡ(1725-1797)의 시문집이나 序文과 跋文이 없고 刊行여부도 미상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본서에 수록된 <五世祖正字公碑陰文>을 통해 正字 德盖(1537~1580)의 5대손, 都事 友參의 아들, 본관은 居昌임을 알 수 있을 뿐 이미 시 등을 통해 宋明欽( 1705~1768)한테 수업했음을 엿볼 수 있다. {권1}:詩 86首(五言絶句 13수, 五言四韻 9 首, 五言長篇 1首, 七言絶句 23首, 七言四韻 40首). {권2}:說 2편(未發之前無氣質之性說, 河洛理氣辨說). 錄 1편(病夢錄), 기타 1편(中庸或問抄). 說 2편 중 <未發之前無氣質之性說>은 人性이 發하기 이전에는 순수하여 氣質의 性이 없다는 논설이며 <河洛理氣辨說>은 河圖, 洛書와 理氣에 관해 변론한 내용이다. 卷{3}:時弊問答 1편, 書 2편(上趙明府光逵, 答李武山鳳興書), 上樑文 1편(黃巖書院講堂重修上樑文), 碑陰文 3 편(五世祖正字公碑陰文, 巨濟縣令鄭公芝榮碑陰文, 烈女權姓㫌閭碑陰), 呈書 1편(黃皐愼先生五父子呈書), 疏 1편(求言應製疏), 自狀 1편, 記 2편(從師懷川記, 鄕射堂詠梧館記), 遺事 1편(四有軒遺事), 祭文 11편(祭四有文, 祭黃皐先生文 등). <時弊問答>은 上古 이후의 治亂을 논한 후 秦漢 이래 異端이 爭起하고 백성은 田土를 받지 못해 난세 상태에 있는데 조선의 경우 더욱 심하다고 지적하고, 卿大夫로부터 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부형된 자로서 자제를 교육할 때는 詩賦나 짓는 법이나 가르치고 있고 이른바 士流도 孔子시대의 士와는 다르게 되었으며 民産은 없어졌고 부자의 田土兼倂은 극심해졌다고 개탄한 내용이다. <求言應製疏>는 봄철의 무지개에 대해 淸나라 운수가 끝나고 중국이 흥하게 될 조짐이라고 풀이하면서 北征의 義旗를 곧게 세워 天變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내용은 詩, 碑陰文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說, 書 등은 理氣를 논설한 것으로서 성리학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것이며 時弊問答 등은 당시의 士와 民産 형편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녹봉선생문집 차례에 대한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권>
五言絶句: 扉, 松, 盟, 雨, 山, 桃花, 次禹新泉師欽寄寓鹿峯書韻(二首), 次蘇處士凝天韻, 喚仙菴次釋子韻, 甲申秋與李景仁梁汝康待櫟泉行望月菴次景仁韻(1764), 又次太極韻, 書堂次朴聖儉士約韻
五言四韻: 次禹新泉撤寓後吟寄, 次黃皐愼先生韻(三首), 喚仙菴和釋子韻, 喚仙菴次盧玉溪神興寺所次張南軒方廣寺韻, 次櫟泉宋先生訪同春先生遺墟韻, 次邊山齋大中韻, 次櫟泉韻
五言長篇: 次三洞五百言韻
七言絶句: 次禹新泉迷魂韻, 鹿峯書堂次禹新泉韻, 禹新泉撤寓前一日用天字韻吟示之, 次四從弟文汝遊湖西韻, 贈四從弟文汝, 桐花吟, 古意, 次黃皐愼先生韻(二首), 山中會話, 次盧山亭珏韻, 次邊山齋大中韻(五首), 書堂次朴士約韻, 奉黃皐喪自仁山歸時作(六首)
七言四韻: 次禹新泉謝地主來訪韻, 次禹新泉咀懷韻, 次禹新泉容字韻(二首), 次禹新泉年字韻, 次禹新泉官敎韻, 次四從弟文汝遊長水寺韻, 次全友光璧留別詩(二首), 次盧山亭珏韻(二首), 次或人韻, 遊長水寺, 寓中次杜子美韻, 偶吟, 戱贈釋子, 次黃皐先生韻, 山中會話, 次御製韻, 次禹新泉除夕韻, 次禹新泉韻(二首), 次李聖益韻(三首), 偶吟, 次火爐韻
<2권>
未發之前無氣質之性
人性이 發하기 이전에는 순수하여 氣質의 性이 없다는 논설을 한 글이다. 근년에 未發之前에 氣質之性이 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사람이 있어서 유언일은 그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가령 氣質之性에 善惡이 있으며 氣質中之性에는 惡이 없다면 未發前에는 氣質之性이 어느 곳에 있으며 氣質中之性은 어느 곳에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 유언일은 在中이란 未乘氣한 것으로 純善之性이며 乘氣하여 氣揜되지 않으면 역시 純善之性이며, 乘氣하여 기에 가리어지면 氣質之性이 되니 善惡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氣가 性을 저장하는 그릇이라면 未發之前에 氣質之性이라는데 性은 그렇다면 어느 곳에 의지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 유언일은 未發存性之時에 氣는 비록 性을 저장하고 있지만 本然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本然之性이라고 말하고 旣發揜氣之時에 性은 비록 乘氣하고 있어 氣質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마땅히 氣質之性이라고 하며, 有善有惡의 本意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河洛理氣辯說
河圖, 洛書와 理氣에 관해 변론한 내용이다. 어떤 이가 유언일에게 天道와 人道를 알고 싶기는 하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묻자, 유언일은 道體의 終始는 《中庸》에 갖추어져 있고, 工夫의 순서는 《大學》이 상세하고 本原의 潔淨․精微는 《周易》만 한 게 없다고 하면서 겸손을 보이나, 결국 客의 물음에 하나 하나 답한다. 太極․陰陽은 무엇인지, 天形․地形은 어떤지, 日月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日月․雷電霹靂․雲雨․霜露․雪․雹․霰․風․霧․虹은 무엇인지, 天漢․鬼神은 무엇인지,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이유는 무엇인지, 河圖․洛書는 무엇인지에 대해 각각 설명하고 있다.
病夢錄
1751. 병이 들어 꾼 꿈 내용이다. 꿈에 형색이 기이한 더벅머리 아이를 보고 그에게 자기 신세한탄을 하는데, 아이는 天君이 유언일의 心志를 고되게 하고 몸을 약하게 해서 병상에 드러눕게 만들어 부귀영리에 뜻을 두지 말고 安貧守分하도록 한 것이라고 충고한다. 아이는 유언일에게 병이 걸린 것은 마치 物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재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바른 것으로 돌아가는 조짐이라는 말도 하고, 신체는 짧은 것이 늘어날 수 없지만 心志는 어리석은 것이 지혜로운 것으로 변할 수 있으니 마음을 잘 닦으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사람의 수명에는 壽夭가 있고 도를 깨치는데는 早晩이 있는 것이니 학문이 늦는 것과 수명이 짧은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中庸或問抄
《中庸或問》을 초록한 글이다. 學者에게는 成心이 있을 수 없으며, 성심이 이미 있다면 도로 나아갈 수 없고 성심이 없어야 의심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작게 의심하면 작게 나아가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나아가니 의심이란 그 까닭에 안심하지 않는 것이고 그 원인에 안심하지 않으니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심은 반드시 물을 수 있으며 질문은 반드시 살필 수 있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3권>
時弊問答
1776. 정조 즉위년(1776)에 유언일이 客과 함께 時弊에 대해서 문답한 글이다. 그는 上古 이후의 治亂을 논한 후 秦漢 이래 異端이 爭起하고 백성은 田土를 받지 못해 난세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조선의 경우 더욱 심하다고 지적하고, 卿大夫로부터 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부형된 자로서 자제를 교육할 때는 詩賦를 짓는 법이나 가르치고 있고 이른바 士流도 孔子시대의 士와는 다르게 되었으며 民産은 없어졌고 부자의 田土兼倂은 극심해졌다고 개탄한다.
上趙明府光達書 趙光達에게 보낸 편지이다. 孔子의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賢者過之”에 대해서 朱子가 “현자의 行함이 과하면 도는 알기에 부족한 게 된다. 이것은 도가 不明한 소이이다”고 풀이한 내용을 통해서 임금의 지나친 현명함을 꾸짖는다. 또 그는 《大學》에서 “현인을 보면 거만할 수 없다”고 했고 《中庸》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는 구절이 있으니 聖知의 재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賢臣을 얻은 연후에 다스림에 도달할 수 있으니, 지금 임금은 가르칠 신하만 좋아하고 함께 다스릴 현인을 구하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黃巖書院講堂重修上樑文
黃巖書院 강당을 중수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강당이 비바람에 훼손되고 재력이 고갈되어 강당을 수리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太守가 右文함이 심원하여 새로이 보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五世祖正字公碑陰文
1787. 유언일의 五世祖인 劉德盖(1537~1580)의 碑陰文이다. 그는 1567년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1573년에 문과에 합격했다. 문집이 많았으나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은 告墓文 몇 편과 詩 몇 편뿐이다. 남아 있는 글로 보건대 효우가 있었고 이룬 사업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巨濟縣令鄭公芝榮碑陰文
1797. 鄭芝榮의 墓碑陰文. 정지영은 入溪사람으로 고려조 光儒侯의 후손이다. 어려서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巨濟縣令에 이르렀다. 정지영의 7세손인 道濟․道欽이 유언일에게 찾아와 글을 부탁하여 적었다고 한다.
烈女權姓㫌閭碑陰
1772. 열녀 권씨의 정려비 음문. 남편이 호랑이한테 잡혀가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랑이를 손으로 쳐서 죽여 남편을 구했던 권씨에 대한 글이다.
黃皐愼先生五父子呈書
유언일이 살던 縣에 돌아가신 童蒙敎官 黃皐 愼先生이 있었는데, 그는 樂水先生의 5대손으로 陶菴 李滓(1678~1746)의 高弟이고 櫟泉 宋明欽과는 학문적인 교류가 있는 인물로 聖學을 마음을 다해 닦았다. 그에게는 德明․道明․認明․義明의 四男이 있었는데 아버지 뜻을 잘 이었다. 이들 형제지간에 長幼의 순서가 있고 出處의 차이가 있어, 그것을 자세하게 유언일은 적고 있다. 德明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서 그 학문이 精審하고 식견이 高明하였다. 道明은 어려서 양자로 들어가 그곳에서 효도를 다하면서 본가에 소홀함이 없었다. 認明은 通訓大夫司諫院正言으로 용모가 뛰어났고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글자를 들으면 통했고 사물을 보면 이름을 붙이는 것이 옛날 신동 같았다. 登科 이후에는 한결같이 충효를 다했다. 義明은 성질이 和美하고 어려서 치장에는 관심이 없고 孝愛에 진심을 다했다. 認明과 義明은 송명흠․渼陰 두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미음은 이들 형제를 보면서 “安義에 愼兄弟가 있으니 학문을 배울 만한데 어찌 내 문하에 왔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유언일은 이들 부자의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미 죽은 부자에게는 追獎之典을, 살아있는 형제에게는 벼슬에 발탁되는 은혜를 베풀기를 임금에게 청하고 있다.
求言應製疏
1797. 그의 나이 72세에 올린 상소이다. 그는 봄철의 무지개에 대해 淸나라 운수가 끝나고 중국이 흥하게 될 조짐이라고 풀이하면서 청의 침입을 받아 치욕을 겪은 이후 와신상담하는 충성과 士風이 날로 일어나니, 北征의 義旗를 곧게 세워 天變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自狀
1784. 간단하게 적은 자신의 行狀이다. 그의 나이 10여세에 오랑캐 왕이 중원을 차지했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 속에 大明을 수복하려고 北征에 뜻을 두었는데, 지나치게 독서를 하여 병을 얻었고, 그 병이 낫지 않았으니, 때는 이미 20세를 지나고 있었고, 이때 세상 물정을 살펴보니 登科하더라도 北伐이 흐지부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從師懷川記
宋明欽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실을 적은 글이다. 1761년 여름에 송명흠이 星川院에 도착하자, 유언일은 그곳으로 간다. 宋景祖가 송명흠에게 유언일이 학문에 뜻을 두어 선생 문하에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고 사는 곳이 너무 멀어서 지금에야 오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南塘 韓元震(1682~1751)과 屛溪 尹鳳九(1681~1767)의 우열에 대해서 사람들이 묻자 송명흠은 선배의 우열을 알 수는 없지만, 한원진은 천하의 모든 책을 읽어 천하의 이치를 알고, 윤봉구는 지키는 것이 精約하다고 평한다. 이 자리에 黃皐선생도 있어서 性理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고, 저녁에는 太極圖에 대한 강론도 있었다. 이곳에 3일 머물다 돌아왔다. 다음해 1762년 10월에는 말을 빌려서 懷川에 갔다. 유언일이 스승의 예를 올리려 하였으나 선생은 한사코 거절하고 朋友로 대하자고 한다. 그는 太極圖에 대해 배움을 청했다. 1763년에는 말을 빌리지 못해 걸어서 沃川에 도착하여 눈비를 만나 滄洲書院에 묵고 다음날 고생하며 櫟洞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문생으로 있는 沙溪 金長生의 후손을 만났다. 송명흠에게서 朞三百註와 璇璣玉衡註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1764년 9월에는 송명흠이 猿鶴洞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鄕射堂詠梧館記
유언일의 친구 權鍉가 鄕射堂에 詠梧館이라 이름을 짓고 記를 써 줄 것을 부탁해서 쓴 글이다.
四有軒遺事
1764. 禹洪漸에 대해 쓴 遺事이다. 우홍점은 1686년 9월 27일에 태어났다. 그의 큰어머니 李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후사가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7세에 학문을 시작했는데 弱冠의 나이에 子集經傳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성정은 우아하고 넓어서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고 말하지 않음이 절도가 있고 喜怒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종일 앉아서 고금의 사람들의 좋은 말만 했으며 다른 이들의 좋은 것을 듣는 것을 즐겨하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형제가 다섯명이 있었는데 모두 한 곳에서 강론했다고 한다. 첫째와 둘째가 먼저 죽자 그는 매우 슬퍼했고 誠敬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항상 子弟들에게 부모를 섬김에는 효성을 근본으로 하고, 宗族을 대할 때는 화목하게 하고 선생을 대할 때는 誠敬을 다하고 사람들 대할 때는 忠信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763년에 졸하였으니 78세였다.
祭四有文
1763. 丹陽 禹洪漸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祭族叔以中文
1778. 9촌 叔夫 劉以中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유이중은 평생동안 氣節이 맑고 높았고, 言議가 깨끗하고 시원하고, 孝友가 있었다고 한다.
祭櫟泉先生文
宋明欽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祭黃皐先生文
1769. 黃皐선생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祭戚兄愼處士德明文
愼德明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신덕명(愼德明) 자 복초(復初) 생년/몰년 乙酉,1705,숙31 ~己丑,1769,영조45? / 신덕명(愼德明,1705~ 1769) |
祭持平愼公認明文
1781. 愼認明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祭老山愼公道明文
1794. 愼道明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愼道明字擴初癸巳(1713,숙종39)生居昌人樂水權后渭川黃山 |
祭老溪愼友義明文
1790. 愼義明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祭月洞李友聖復文
李聖復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居昌郡誌(거창군지) 李承典(未詳 ~ 未詳) 居昌郡誌 [郡誌] 學行 ...李聖復 字基仁이오號月洞이니河濱人二憂堂瓊后라書宗庚子生이니... 李聖復 字基仁이오號月洞이니河濱人二憂堂瓊后라書宗庚子(1720,숙종46)生이니稟柱聰敏하야潛心於太極圖說大學章句하야得其精하고師事金渼湖宋櫟泉하야 文章學行爲世所推라以櫟泉之命으로作草堂三間於同春遺墟月星하고春秋請會하야爲多士矜式之所 安義邑誌(안의읍지) 安義邑- 安義邑誌 [誌] 人物 ...李聖復 河濱人二憂堂瓊后字基仁號月洞肅廟庚子生稟性聰敏潛心於... 李聖復 河濱人二憂堂瓊后字基仁號月洞肅廟庚子生稟性聰敏潛心於太極圖說大學章句深究微奧師事金渼湖宋櫟泉文章學行爲當世師表有遺稿 |
祭柳友仁老宅壽文
柳宅壽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答李武山鳳興書
李鳳興에게 답한 편지이다. 性은 心에서 생기고, 心은 性에서 생긴다는 이봉흥의 편지에 대해, 性은 理이고 心은 氣라고 性과 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대원 해제)
<녹봉선생유사실록鹿峯先生遺事實錄>
劉彦一(1725-1797)의 遺事. 19世紀 初(純祖 年間:1800-1834). 1冊(22張). 筆寫本. 33.6×21.3cm. 刊地未詳, 刊者未詳.
조선후기의 학자인 劉彦一의 행적과 그에 대한 관련 기록을 수록하고 있는 자료이다. 유언일은 호가 鹿峯‚ 자가 子精‚ 본관은 居昌으로 동지중추부사 劉以亮의 아들이다. 이 자료는 1책 22張의 필사본으로 편자가 미상이며‚ 편찬시기도 분명치 않으나 자료 속에 실려 있는 <鹿峯書堂碑文>이 1819年(純祖 19)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편찬시기는 1819년 이후일 것이다. 卷首에는 世系가 실려 있고‚ 이어 <鹿峯先生遺事實錄>‚ <鹿峯書堂碑文>‚ <奉安時祝文>‚ <常享祝文>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녹봉선생유사실록>의 말미에는 撰者未詳의 발문이 붙어있다. 발문에 따르면 유언일이 생전에 자신의 言行과 講學에 대한 친지와 문인들의 기록을 스스로 거둬 불살라 버림으로써 유언일에 대한 기록이 별반 남지 않게 되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겨 유언일 사후 2년 뒤인 1799年(正祖 23) 鹿峯書齋에서 酌獻禮를 행한 다음‚ 子弟들의 記聞과 문인들의 逸錄을 모아 <녹봉선생유사실록>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녹봉선생유사실록>은 60여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언일의 일생을 시간적 틀로 하면서 그 속에 성품‚ 효성‚ 학문‚ 성리학적 견해‚ 교우 관계 등 유언일의 행적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유언일은 1726年(英祖 2)에 安義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기상이 탁월하고 언사가 정직하였으며‚ 贖良을 원하는 노비가 있으면 즉시 허락하는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애를 쓴 어머니가 득병하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구완하였고‚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주자가례에 의해 장례를 치르고 3년 侍墓를 하였으며‚ 후일 이 때 시묘하던 자리에 鹿峯書堂을 지어 기거하였다. 또 그는 부친의 병환에 대비하여 항상 약을 준비하였고‚ 직접 고기 잡고 나물 캐어 부친을 공궤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성은 학문의 도는 단지 孝悌와 義理일 뿐이라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7세부터 백부인 劉以平에게 수학하였는데 10여세 때에 明이 淸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듣고는 明을 회복할 뜻을 품고 發憤忘食하며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는 20세 무렵 명나라의 회복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데 이러한 그의 의지는 간략히 소개된‚ 正祖에게 올린 應製上疏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또 黃皐 愼守彛(1688-1768)과 櫟泉 宋明欽(1705-1768)에게 수학하였는데 일찍 士習의 頹敗를 목격하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心學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유언일은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정립하였는데 <녹봉선생유사실록>에는 人物性同異‚ 明德‚ 氣質之性‚ 四七理氣之辨‚ 無極而太極 등에 대한 그의 견해가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기본적으로 人物性同論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四七理氣之辨에 있어서는 율곡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李聖復‚ 愼認明‚ 愼義明‚ 崔南斗‚ 金壽民 등과 道義之交를 맺었으며‚ 수령으로 부임한 趙光逵‚ 朴趾源과도 교유하였는데 박지원과의 교유는 박지원이 安義縣監으로 부임한 1792년경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 유언일은 1797年(正祖 21) 문생들을 경계하고‚ 아들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한 다음 세상을 떠났다.
<鹿峯書堂碑文>은 愼守彛의 손자인 愼性恒이 찬하였는데 녹봉서당의 내력‚ 비문을 짓게 된 연유 등을 소개한 다음‚ 유언일의 학문‚ 성품 등을 들어가며 칭송하고 있으며‚ 鄭夔弼이 지은 <奉安時祝文> 역시 유언일에 대한 칭송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鹿峯先生遺事實錄≫은 유언일이라는 조선후기 학자의 학문 세계와 인간적 면모의 일단을 알게 해 주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승복 해제)
崔南斗2 | 1720 | 1777 | 慶州 | 士仰 | 茅廬 |
<녹봉서재기鹿峯書齋記>
劉彦一(1725-1797)이 제자들을 가르친 智雨山鹿峯書齋의 창건, 중수 등에 관한 글을 모아놓은 책. 1冊(8張). 筆寫本. 31×21.6cm. 刊地未詳, 刊者未詳.
조선중기의 학자 劉彦一(1725-1797)이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智雨山 鹿峯書齋의 창건 및 중수에 관한 글 다섯 편을 모아놓은 책으로‚ 1冊 8張의 筆寫本이다. 序文이나 跋文이 없어 유언일이 직접 편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表題는 ‘鹿峯集’으로 되어 있다. 유언일은 字가 子精이고 號는 鹿峯이며‚ 愼守彛의 門人으로 전시에 거듭 낙방한 뒤 경학의 탐구에 전심하였다.≪鹿峯文集≫과≪鹿峯先生遺事實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녹봉서재기>는 1766년에 黃皐愼이 썼고‚ <重修上樑文>은 1779년에 崔演重이‚ <鹿峯書堂序>는 1770년에 權儁이‚ <廟室上樑文>은 1783년에 盧光斗가 撰했다. <重修記>에는 저자와 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상의 글들을 통해 녹봉서재의 내력에 대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유언일은 학행이 높은 선비로서 이름이 나서 많은 제자들이 그 문하에서 배웠는데‚ 靑邱 鹿洞에 새로운 서당을 짓자 황고신이 ‘鹿峯書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이경하 해제)
永陽崔氏 進士崔演重自星州來子孫居西上靈覺<安義邑誌 姓氏>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 된 녹봉선생문집, 녹봉서재기, 녹봉선생유사실록에 대한 해제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해제 집필자와 연락이 안되어 해제자의 이름만 밝힌 것이 송구하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생각해 소개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해제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합니다.